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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
(디모데후서 2장)
성경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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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금그릇과 은그릇,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가지고, 그릇 자체만 가지고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냐 천하게 쓰이는 그릇이냐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그릇과 은그릇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고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천히
쓰이는 그릇이라고 판단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판단 기준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이처럼 다른 것은 사람은 외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판단할 때에
기준은 먼저 가격이
비싸면 귀한 것이고, 가격이 싸면 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곳에서는 물건이
싸면 팔리지 않는 답니다. 그래서
가격표에 0을 하나 더 붙였더니 불티나게 팔리더라는 것입니다.
귀하고 천하다는 판단기준은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도 돈이 많으면 귀한 사람으로
취급받지만, 돈이 없으면 천한 사람으로 취급받기가 쉽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귀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평범한 자리에 있으면 귀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귀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죽어라 하고 돈을 벌고 출세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귀한 그릇이냐
천한 그릇이냐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냐
천하게 쓰시는 그릇이냐의 기준은 전혀 외형적이 아닙니다.
값이 아니고 돈이 아니고.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성별된 귀한 그릇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끗하여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고,
깨끗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그릇이 천한 그릇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같아 보여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이 쓰시면 귀한
그릇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금그릇이나 은그릇 같아
보여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천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에 욕심을 두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디모데후서 2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속죄와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의(義)를 굳세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죄악들을
버리고 마귀 권세를 담대히 물리치며,
세상을 크게 여기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
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합니다.
충성된 사람은 무엇보다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믿음이 있되, 진실한 믿음, 계속적인
믿음, 시종일관한 믿음이 있는 자를 충성된 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변덕스럽지 않고
언제나 자기 위치에 있어서
자기의 맡은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참으로 믿을 만한 자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 진리를 디모데
에게 들려 주었으니 이제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그 복음 진리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진리가 후시대에 전달되어 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른 교훈이 계승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 훈련이며
신학 교육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계승의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후대에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디모데후서 2 :3)
바울은 복음 사역자를 군인으로 비유하고 전도를 영적
전쟁으로 묘사했습니다. 마귀는 영혼들이 구원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그 일을 방해하며 전도자를 핍박합니다.
악한 자들은 빛을 미워하며
빛을 전하는 자들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며 수행해야 할 봉사입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2 :4)
군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훈련이 있으면 항상
참여해야 하고. 비상이 걸리면 항상 출동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출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군인이 몸이 피곤하다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이런 일들을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군인은 그를 부른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의 충성된 행위와
수고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은 평안히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일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물론 복음 사역자들이 자기 집을 내팽개쳐
두거나 자기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집을 돌보는 것도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주의 일이 첫째입니다.
그들은 주의 군사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 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얻지 못할 것이며"
(디모데후서 2 :5)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기하는 선수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경기에는 규칙들이
있습니다.아무리 훌륭한 선수
라도 반칙을 몇 번 하면 경기장에서 퇴장하는 벌칙을 당합니다.
경기의 규칙들은
잘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잘 지키지 않으면 승리하여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디모데후서 2 :6)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또한 논과 밭에서
수고하는 농부들에 비유하였습니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땅을 일구어 고르게 하고
그 위에 씨를 뿌리고 적당하게 물을 공급
해주고 때때로 잡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아 주어야 합니다.
마침내 잘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기까지 부지런하게 수고함과 뙤약볕에 많은
땀을 흘리지 않고는 결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농사의 수고는
어려운 일이지만,
농부가 수고했을 때 곡식을 먼저 거두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디모데후서 2 :7)
이상의 내용들은 복음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들입니다. 이 비유들은 복음의 일군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할 지를 말해줍니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첫째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해주신 규칙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부지런함과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것입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디모데후서 2 :8-
'나의 복음'이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로 받은 복음,
그래서 그가 전파해 왔고 지금도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 복음의 기본적 내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로 오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들이 들어 있습니다.
'다윗의 씨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비록 육신적으로가 아니고 오직 법적으로이지만,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야이심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씨로'라는
말은 또한 예수께서 단지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만이 아니고, 또한 참된 인성을 소유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경기하듯,행하고 농부처럼 수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복음 사역자들은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각오하며 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충성된 봉사의 결말은
주의 칭찬과 상급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디모데후서 2 :9)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매어둘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도 매어둘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탄압했던 로마제국은 몇 백년이 안되어
기독교 앞에 굴복하였습니다. 아니, 그 동안에도 진실한 성도들은
카타콤이라고 불리우는 지하 동굴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러시아와 중국과
이북이 기독교를 탄압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어둘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복음이며 아무도 그 자유의 복음을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게 얻게 하려 함이로라"
(디모데후서 2 :10)
바울은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바울은 '택하신 자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게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6 :37)
바울은 택한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았다고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이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죄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영원한 영광'을 동반하는 구원임을 뜻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디모데후서 2 :11)
'미쁘다'는 말씀은 '믿을 만하다,
신실하다'는 말씀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믿을 만하며 참된 말씀이지만 특별히 다음에
말하는 것은 믿을 만하며 참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만에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면
반드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것은 참되고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디모데후서 2 :12)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참으면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 :2-)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을 부인한다면 주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一向)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 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 :13)
우리는 불신실하고
우리의 믿음은 보잘 것
없고 우리의 마음도 약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그는 언제나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난을
잘 참고 견딘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2. 합당한 그릇.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2 :14)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합니다.
복음의 일군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자들인데,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큰 싸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약하게 하거나 파괴시킵니다.
그것은 교회로 힘을 얻게 하는 대신에 힘을
잃게 하고 힘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말다툼은
마귀가 기뻐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후서 2 :15)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설함으로써 이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은 자기 임무를 다 하는 일군입니다.
일군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자기
임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군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해설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디모데후서 2 :16)
때때로 교회 안에도 망령되고 헛된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예를 들면,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말들, 거짓되고
불결한 말들, 중요한 의미가 없는 헛된 논쟁들과 변론들이 그것입니다.
헛된 말들, 불경건하고 무의미한 변론들과
논쟁들은 피하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경건과 믿음에 유익한 말씀이지만,
헛된 말들은 점점 더 불경건과 불신앙에로 나아가게 할 뿐입니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2 :17)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암과 비슷한 병입니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 그리고 이단들은 바로 이러한 무서운 병과 같습니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조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몸을 버리게 됩니다. 교회가 이단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단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오늘날도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자들의 이름을 분명히 들어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디모데후서 2 :18)
바울은 덧붙여서
이단자들이 왜 잘못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말다툼과 같은 지엽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저들은 진리에 관해
그릇되었는데 구체적으로,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왜곡
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허물어졌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印)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 :19)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을
하는 이단들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굳게 섰습니다.
이 터 위에는 두 가지 내용의 인침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 :39)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확실하여 그들은 다 믿을 것이고
바른 믿음에 굳게 설 것이며 마침내 영광스런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인침의 내용 중 또 하나는,"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모든 참된 성도들은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디모데후서 2 :20)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습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좋은 그릇일 것입니다. 또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잘 보관해 놓은 더 좋은 그릇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빨래통이나 쓰레기통,오물통 등으로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 :21)
'이런 것'은
앞에서 말한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인 이단 사설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모든 이단 사설들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고
바른 신앙, 바른 교리를 가져야 주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귀히 쓰시는 종은 그의 바른 말씀,
순수한 말씀을 가진 종입니다. 그러한 자는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 :22)
주의 종은 또한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합니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음란의 죄는 매우 치명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정욕의 시험은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남녀 관계에서 오는 시험은 가까이 안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디모데후서 2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다투는 말다툼이나 불신앙적, 비성경적 변론들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디모데후서 2 :24)
주의 종들은 온유하고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이어야 합니다. 자녀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영혼들을 양육하는 일은 많은 고통과 눈물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
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디모데후서 2 :25)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혹시 회개함을 주셔서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돌아오게 하신다면 저들도 회개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 :26)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불순종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잠에서 깨듯이, 술취함에서
깨듯이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복음을
전해야 될 우리들은 생활에만 얽매이지 말고
고난을 각오하며 수고와 인내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규칙대로
경기하듯, 복음 사역자들은 성경 말씀의
규칙대로 눈물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사오니 우리가 가져야할
이 영원한 사랑의 성품으로 화평을 가지게 하셔서
주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는 우리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 11. 4.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