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의를 만든다.
수많은 가치들 속 개인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과 이에 상응하듯 늘어선 수많은 답들 속 개인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칸트의 정의론. 각기 서로 상반되는, 혹은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며 나가는, 이런 특색 있는 정의의 대한 답변은 결국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정의는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개인에서 타인으로 타인에서 사회로 퍼져 나가서 자신의 신념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이 정의를 사회에 실현시키기를 원한다. 이 과정에서 각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정의를 개인들에게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들은 강요 받는 듯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정의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다. 동시에 개인의 권리는 높아져 간다. 이제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보다는 “나는 뭘 좋아하나?” 라는 질문이 훨씬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칸트는 내가 좋은 것과 사회적은 옳은 것은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칸트는 자연스레 ‘옳음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으로 퍼져 나간다. 무언적으로 그냥 개인적으로 좋은 것보다는 보편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 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방식의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만약 한 인물이 중대한 고민으로 “내가 좋아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와 “보편적 정의는 무엇인가?”하는 질문 중 무엇을 생각할지 고르게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정의는 더 이상 개인의 취향 문제를 이기지 못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개인의 취향 문제는 정의보다 훨씬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된다. “현대 사회는 자유지상주의를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모든 정의 위에 개인의 취향이 서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역시 이 책을 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 물론 샌델의 글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검토해보고, 이 사회의 정의를 돌출해 내는데 어느정도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하고, 마침표를 찍어 결정 내리는 것은 개인이다. 즉 이 책은 그저 보편적인 정의를 설명하는 글이 아닌 여러 정의를 제시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게 하는 글이다.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앞에 괄호가 처져 있다. “(나의) 정의란 무엇인가?” 물론 무슨 책과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듣든 결국 그 이야기에 최종평을 내리고 받아드리는 정도를 정하는 것은 개인이다. 아무리 강압적으로 ‘이것이 옳아!’하고 강조하는 내용이어도 말이다. 헌데 애초에 이 책은 중립 지향적이다. 어떤 정의론의 요소에 대해 철저한 중립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전적으로 독자 개인에게 맡긴다.
내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정의도 취향의 문제다.”라는 일종의 공식이 서서히 전 지구 사회에 물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글과 예시를 들으며 자신의 입맛에 알맞은 한 가지 “정의”을 찾는다. 혹은 자신이 즐기는, 나에게 좋은 요소를 부각 시켜주고 보호할 수 있는 정의를 선택해 공공의 정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정의’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샌델 역시 “정의”을 찾는 과정을 그저 취향의 문제로만 설명하지는 않는다. 옳은 행위에 대한 확신, 확신하는 이유, 이유의 근거가 되는 원칙. 이 세요소를 계속 생각해 나가며 “정의”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근원은 ‘옳은 일’이라는 자신의 기준이다. 그리고 이 ‘옳은 일’의 앞에도 한가지 단어가 붙는다. ‘나에게(내 생각에)’ ‘나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그건 나의 생각에 한에서 그런 것이다. “내 생각” “내 취향”은 “나한테 무조건 적으로 좋은 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나?”에 따라 ‘정의’라는 키워드가 이용되기도 하며 “나의 생각은 어떠 한가?”에 따라 그것이 ‘정의’가 되기도 한다. 이 두가지 다른 질문에서 정의는 만들어지고 모두 “나의” 정의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어떤 정의를 들고 자신에게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책을 읽을 때 가끔 느낀 감정이 그러하고 현 시대에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중립을 공공의 질서로 여기는 이유가 그러하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만약 정의가 그저 공공의 진리이고, 나의 목적이 공공의 정의를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실 다른 사람이 자신이 찾은 공공의 정의에 근접하는 무언가를 말하면 기뻐하며 이야기를 깊게 나눠보는 절차를 밟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요즘 사회에 공공의 ‘옳음’의 기준 곧 정의를 함부로 입에 닮게 되면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정의라는 것이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옳음’이라는 단어는 이제 철저히 개인의 단어가 되었다. 나는 빨강이 좋고 너는 파랑이 좋은 것처럼 옳음은 그런 문제 따위로 추락되어 버렸다. 이런 부분에서 사회학적, 공공의 정의는 이미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따라야 하는,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던 ‘정의’ 뜻은. 아무리 “공공의 정의”라 불러도 이제는 그저 의견이 맞는 개인의 합에 불과하다. 여러 개인이 모였다고 해서 이것이 모두가 따라야 할 요소로 평가 받지도 않고,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며 상대방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취향 정의’는 몰상식한 것으로 판단한다.
다른 정의들과는 섞이기 싫어하는 부류의 ‘취향 정의’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교 정의일 것이다. 본인들의 정의가 여전히 다른 정의들과 불리 되어 옳으며 사회의 좋은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 믿는 종교 정의는 두가지 형태로 더럽혀 졌다. 첫번째로 철저히 이용당하는 입장으로 추락한 것이다. 요즘 미국 대선 토론과 공략들을 보면 특히 보수 진영에서 기독교적 도덕 요소들을 옹호하며 표를 얻으려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어느 나라 건 대선 시기가 되면 비슷한 결로 어느 진영에서 종교적 요인들을 옹호, 혹은 비판하여 표를 얻으려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정치인들 입장에서 철저히 도구이다.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여러 개인들이 좋아 할 만한 정의를 옹호함으로 여론을 얻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어느정도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종교 정의를 다른 여타 개인의 정의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페미니즘의 정의의 사회적 입장은 전혀 다르지 않게 되었다.
두번째로 개인적인 것으로 추락했다. 인종의 자유, 종교의 자유, 성별의 자유. 개인이 같는 대표적인 자유로 소개 되는 것들이다. 전에 종교는 사회 전반, 세계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어느정도 모든 사람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던 보편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는 더 이상 보편적인 요인이 되지 못한다. 그저 개인의 취향과 환경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하는 유동적이고 개인적인 요인이다.
이와 같은 종교의 추락이 ‘정의’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이유는 결국 종교는 보편적인 공공의 ‘정의’을 말하는 가장 큰 집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제일 강경파 적이고, 어찌 보면 강압적일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정의를 말하는 종교가 그저 개인 취향, 개인의 쾌락의 문제가 되었다. 어느 종교인들은 이점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새로운 종교의 길을 연다고 말한다. 이런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사람들이 종교를 그저 개인의 관한것으로 인지할 때 과거의 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 종교가 담고 있던 ‘정의’의 틀(보편적이고, 공공의, 사회의 정의)도 죽게 된다.
우리가 알던 정의는 죽었다. 이제 내가 만드는 정의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은 그럼에도 공공의 여러 요소들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법률은 여전히 개편되고 있다. 사회는 계속 바뀐다. 그렇다면 이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각각 개인의 정의만 있고, 그 사이의 존중만이 이어져 있다면 어느 한 주장이 부각 되어서 공공의 질서인 법으로 개정될 수는 없다. 개인이 곧 정의인 사회에서 결국 어느 것이 보편적인 정의로 내세워 지려면 결국 여러 개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너무 간단한 답이지만 그렇기에 정답이다. 보다 많은 개인들이 어떤 사실을 ‘자신의 정의’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정의가 바뀐다. 어느 특출 난 한가지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리주의만이 우뚝 설 수도 없고, 자유지상주의만이 우뚝 설 수도 없고, 종교만이 우뚝 설 수도 없다. 그저 각각 시기에 보다 많은 개인들이 편을 든 좋은 말이 바로 정의가 된다. 기준은 그저 보다 많은 개인. 그 뿐이다.
결국 ‘나의 정의’을 어떻게 ‘사회의 정의’로 바꿔 놓는 가의 문제는 내가 얼마나 타인을 설득하냐에 달려있다. 이 세상의 모든 정의는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이상하고, 괴이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