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8:11 바리새인의 의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정죄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기독교인들이 바리새인들을 정죄하는데, 이는 아마도 그때 당시에는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의인이었고, 오늘날은 기독교인이 바리새인보다 의인인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이 누구를 정죄하는 것은 언제나 정죄하는 자가 정죄 받는 자보다 의인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정죄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며, 그리고 정죄하는 자는 구원이 필요 없다고 여겨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미 구원받은 자는 사랑하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결코 다른 누구를 정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코자 함이다”라고 하시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죄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죄를 안 지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에게는 구원은 아무 효력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원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사랑하게 했다면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당연히 구원받은 자들이 많아져야 하고, 구원받은 자들이 많아졌으면, 마땅히 사랑하는 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일날만 되면 교회 문이 미어터지는데도 세상은 왜 이다지도 사랑이 없으며 썩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면, 이것은 바로 교회가 불신자를 전도해서 끌어다 놓고 “배나 더 지옥 자식 되게”(마23:15) 해서가 아닐까요?
성경의 사랑이란? 교회에 들어와서 나 좋다고 내 고집을 내세우고 내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 남의 유익(영혼을 구원케 함)을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나 예수 믿어, 나 잘됐다고 하면서, 남도 억지로 그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려고 한다면 빨리 우리 교회에 나와야 된다. 라는 등식은 기독교인의 고집이고 아집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정죄 받고 있는 세리를 바리새인 되게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교인 만드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세리를 정죄하는 일 밖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예수님의 구원이 아닌 기독교의 구원일 뿐입니다. “배나 더 지옥 자식 되게 하는......”
세리로써 죄인 의식이나 남아 있으면 구원의 여망이나 바라볼 텐데, 구원 다 받고 이제 어엿한 의인까지 되어, 세리나 정죄하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배나 더 지옥 자식 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니느웨 회개”를 한 다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
교회 안에 거짓 의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바리새인(종교지도자)들을 모조리 다 세리로 되돌리는 운동입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이삭줍기에 라도 하지 않을까요?
슬프게도 요사이 교회 강단의 목사의 멧시지를 인터넷을 통해 들어보면, 세리를 향한 회개의 소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저 무엇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소리만 드높습니다.
감사란? 구원받은 자가 말로 다 할 수 없어서 외치는 ‘신음소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왜 그 신음의 소리가 안 나오고, 감사에 보답은 헌금을 내는 것이라는 말만 가득 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에 감사하나이다’라는 신음의 소리뿐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그분 앞에서 이런 탄식과 신음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인 우리가 종교인이 되어서 가진 가면과 외식을 벗어버리고, 죄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죄인 본연의 삶을 살면서 구원의 참 필요성을 찾아보는 것이 지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지금의 교회는 성경과 전혀 다른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데, 은퇴하신 이재철 목사님은 교회 안에 설교를 들어보니 왜 이리도 이단이 많은지 모르겠다.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심각한 문제는 천하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구원을 받고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입으로, 이론으로,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거져 주신 선물로서 달라진 나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당시의 세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이건 바리새인이건 날 때부터 유대교인이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일 년에 한 차례씩은 누구든지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율법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이 세리는 지금 참 구원의 주를 못 만나서 그냥 죄인으로 남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이 참 구원을 못 받았으면 그냥 죄인이지 죄인 아닌 체한다고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바리새인은 교회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것이 구원이고, 의인 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는 세뇌를 시켜서일 뿐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무엇이라고 외칩니까? 기도하라고, 감사하라고, 토색, 불의, 간음하지 말라고, 금식하라고, 십일조 드려야 한다고 본문의 바리새인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너나 할 것 없이 바리새인 적 의인뿐인데 어디서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믿음을 찾겠느냐?는 것입니다.
설령 바리새인이 구원받은 상태에서 토색, 불의, 간음치 아니하고,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면, 그것은 바리새인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하게 된 것뿐입니다.
다만 무익한 종이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것도, 그리고 떠들어 댈 것도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해놓고는 하늘의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들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화 있을진져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네가 책망과 멸망을 받을지어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떤 우리입니까? 세상 사람에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종교인, 또한 교회 직을 가지고 사는 바리새인이 아닌지요?
우리가 원래 죄인이 아니었는지요? 그런 원래 죄인에서 교회로 들어와 교인 된 것이 의인 된 것이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던 자신임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교회에 목사 장로 지도자가 되었다고 외식 적인 거짓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한다면, 우리도 “화 있을 진져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교회 목사 장로 집사들이여...)네가 책망과 멸망을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교회 안으로 초청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그런 우리로 세리와 죄인들에게 구원하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교인 된 것으로, 종교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으로, 이웃을 정죄하며 사는 것이 아닌,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구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리새인의 모습을 내려놓읍시다. 종교인이 되어 정죄하는 자에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고픈 사랑하는 자로 바꿔지는 은혜가 주어지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