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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쇼스타코비치가 전쟁 기간 동안 작곡한 교향곡 7번,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 4악장 입니다
아래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는 독일군 북부 집단군입니다
[ 영화 '레닌그라드, 900일간의 전투' ]
이 영화는 역사상 가장 가혹한 포위전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그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히틀러가 스탈린과 비밀리에 체결한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시작한 바르바로사 작전(독소 전쟁) 당시 최북단 전장 중의 하나였습니다.
레닌그라드(현재 상트 페체르부르크)는 독일군에 의해 고립된 채 900여일 간의 고통스러운 포위(1941~1944)를 견디며 100만 명 이상의 아사자와 사상자를 내면서도 독일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던 곳입니다.
영화는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900일간의 지옥같은 봉쇄를 견뎌낸 1941년 얼어붙은 겨울을 무대로 참혹했던 레닌그라드의 상황을 영국 여기자 케이트의 눈으로 들여다 봅니다.
케이트는 엄동설한을 뚫고 탈출에 나서는 혼란의 와중에 사랑하는 연인과 떨어져 레닌그라드에 홀로 남겨진 여인입니다. 이 영화는 그녀가 헌신적인 러시아 여성 경찰의 도움 속에 두 아동과 함께 기아에 시달리며 펼치는 희생과 용기를 따라갑니다.
실상 줄거리는 그녀의 영웅적인 모습에만 치중하지는 않습니다. 포위된 이들의 가혹한 삶을 따라가며 드라마틱한 작은 사건들을 소소한 스릴러 소재를 결합하여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 총탄의 위협이 짖누르는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찐한 감동을 접할 수 있습니다.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스릴러로 풀어가는 흥미로운 소재의 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을 배경으로 애국적인 선전영화 분위기가 가득한 기존 러시아 작품들과 달리 볼 만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카 신들러와 같은 유대인을 위한 인도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여기자 케이트역에 <마이티 아프로디테>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가 열연했습니다. 그리고 <인 트리트먼트>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 가브리엘 번 등 헐리우드 명배우들이 러시아 영화에 출연한 것도 신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케이트와 니나
독일 국민배우 아민 뮬러 스탈옹이 연기하는 독일 장군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시작한 북부 집단군 사령관이었습니다. 후에 히틀러에게 불만을 품고 자신을 해임시켜달라고 건의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포위전 중도에 해임되어 종전까지 예비역으로 남아 전투에는 끝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대본을 직접 쓰고 감독한 알렉산드르 부라프스키는 상트 페체르부르크 출신으로 모스크바 대학과 러시아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작가 및 연극연출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쟁 영화는 어느 영화를 불문하고 그 영화를 만든 나라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정치적 이념이나 민족 간의 갈등을 떠나서 죽음을 앞둔 인간 군상들의 여러 모습과 함께 그래도 죽음에 굴하지 않는 인간애에 담담하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군인들 간의 정정당당한 전투가 아닌, 봉쇄를 통해 무고한 시민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독일 군부 세력에 반발해서 레닌그라드 공습 중에 자폭하는 독일군 조종사,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외국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케이트를 보호하는 여자 경찰 니나, 그리고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를 위해 스스로 죽음의 도시로 되돌아가는 케이트, 눈물나는 휴머니즘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부전선의 역사를 서사 분위기로 담아낸 알렉산드르 부라프스키 감독은 모스크바 대학과 러시아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0여 편의 영화와 3편의 미니시리즈 시나리오를 쓴 작가 출신입니다, 그는 러시아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골든 이글상과 러시아의 애미상이라 할 수 있는 TEFI 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2차 세계대전이 초기 1941년, 레닌그라드 남부전선, 소련군의 참호로 이어지는 방어진지 여기저기엔 시체들이 나부러져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애릿한 얼굴의 여자 경찰 니나는 새로 차출된 오합지졸의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 지휘를 하고 있는 중위에게 ‘돌격하라’는 본부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는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합니다.
한편 모스크바 사보이 호텔 연회장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불빛 아래서 무도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춤추는 무리들 가운데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미국 출신 종군기자인 숀(가브리엘 번 분)과 영국출신 종군 여기자인 케이트(미라 소르비노 분)도 섞여있습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는 러시아를 떠나 숀과 함께 할 미래에 대한 단 꿈에 젖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독일군에 봉쇄된 레닌그라드의 현지 실정을 취재해 보도하라는 미션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외국인 종군 기자단은 여섯 개의 팀으로 나눠져 레닌그라드 현지 취재에 나섭니다. 그러나 취재 도중 독일군 전투기들의 폭격으로 취재팀 대부분이 죽고 케이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나 혼자서 낙오되고 맙니다. 그러나 케이트는 취재도중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어 영국대사관에 통보됩니다. 한편 살아남은 숀은 케이트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군용기에 오릅니다.
* 레닌그라드 전투도 삽화
한편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은 케이트는 여자 경찰 니나에 의해 발견되어 니나의 집에 함께 거주하게 됩니다. 니나는 케이트가 죽었다고 보고된 사실을 알려주고 신분증을 잃어버린 그녀를 위해 스페인 난민임을 증명하는 위조신분증을 만들어 줍니다. 한 집에 기거하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엔 국적을 초월한 우정이 싹트고 니나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케이트를 보호합니다.
* 니나
니나의 집 2층에는 시립 발레단원인 쏘냐와 그녀의 아들인 유리, 딸 시마, 그리고 니나의 엄마 등이 함께 기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한 도시의 봉쇄가 계속되자 보급 루트를 차단당한 시 당국은 점점 시민들에 대한 식량배급을 줄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가운데 영양실조로 죽음을 기다립니다. 게다가 백주에 배급표를 탈취하는 강도들이 설치고 독일군의 포격은 날마다 계속됩니다. 도시는 거리 여기 저기 시체들이 나뒹굴기 시작하고 식량이 바닥나자 사람들이 급기야는 죽은 사람들의 인육까지 먹기 시작하는 생지옥으로 변합니다.
* 케이트와 숀
더욱이 비극적인 것은 한계상황에 이른 부모가 살아남을 자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쏘냐는 몸이 약한 자신과 아들 유리가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배급식량 가운데 유리가 먹을 것은 줄이고 시마의 것은 늘입니다.
그러던 중 빈 집에 강도들이 침입해 니나의 어머니가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쏘냐도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고 니나마저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를 건너 보급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수송대원으로 차출되자 케이트 혼자서 유리와 시마를 돌보게 됩니다.
쏘냐의 시신을 버리러 강가로 나갔던 케이트는 우연히 모스크바에서 그녀를 짝사랑했던 소련 기자를 만나게 되고, 그는 모스크바의 KGB 본부에 케이트의 생존사실을 알립니다. KGB는 케이트의 아버지가 볼세비키 혁명군에 대항해 끝까지 항전했던 백군 부사령관임을 밝혀내고 그녀가 영국의 스파이라는 판단 아래 체포에 나섭니다.
한편 수송대원으로 차출됐던 니나는 기적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당국이 그 보답으로 그녀의 가족을 시외로 소개시킬 권한을 주자 케이트와 유리, 시마를 데려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유리가 영양실조로 일어서지 못하자 케이트는 할 수 없이 시마만 데리고 니나를 따라 나섭니다.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동쪽 편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숀이 동료와 함께 자동차를 대기한 채 케이트 일행이 도착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윽고 트럭을 앞세운 수송대 일행이 도착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눈길을 살피던 숀은 사람들 가운데 케이트를 발견하고 뜨겁게 포옹합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이 지나고 숀이 자신의 차에 탈 것을 재촉하는 가운데 아무도 없는 빈 집에 혼자 남은 유리를 생각하던 케이트는 다시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는 니나의 차에 올라탑니다.
1941년부터 900일간 계속된 레닌그라드 봉쇄로 무려 10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이 굶주림과 폭격으로 숨져갔습니다. 1964년 레닌그라드를 찾은 숀에게 발레리나가 된 시마는 그 이후의 소식을 전합니다. 레닌그라드로 돌아간 니나는 1942년 독일군의 폭격으로 사망했으며, 케이트는 유리를 돌보다 1943년 영양실조로 숨졌고, 그리고 유리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 레닌그라드 포위전 : 인류 역사상 최대의 아사 ]
레닌그라드의 옛 이름은 <페테르스부르크>였습니다. 옛 러시아의 위대한 황제 표토르 대제의 이름을 딴 이 도시는 구 제정러시아의 수도였으며,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되었다는 배경을 가진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포위된 레닌그라드(왼쪽은 발틱해, 오른쪽은 라도가 호수, 북쪽은 핀란드군, 남쪽은 독일군)
1917년 10월, 바로 이곳에서 레닌의 주도아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이 도시의 이름은 혁명의 아버지 레닌의 이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서구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이 도시는 서쪽으로 발트해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큰 라도가 호수로 인해 병목처럼 가느다랗게 좁아지는 카렐리아 지협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독일군 북방 집단군 진격로
게다가 레닌그라드의 등 뒤(북쪽)는 이미 주축국에 가담한 핀란드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핀란드군이 남하하고 서쪽에서 몰려온 독일군이 병목을 막아 버린다면 쉽사리 포위,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지형적인 불리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대소전이 개막되기 직전인 1941년 6월초, 빌헬름 폰 레프 원수의 북부 집단군을 방문하여 레닌그라드를 최우선적으로 함락시킬 것을 명령한 바 있고, 폰 레프 원수는 그 계획을 7월말부터 실천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 레닌그라드(지금은 상트 페체르부르크)
공격이 개시된지 한달 여만에 노보고로드, 추도브, 므가 등이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짐에 따라 레닌그라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라고는 비행기와 라도가 호수 위를 오가는 선박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 폰 뢰프 원수, 그는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고참 원수였으나 히틀러의 명령이 맘에 안들어
중도에 퇴임을 해버렸습니다
게다가 독일공군에 의해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하늘을 통한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선택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무조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군인과 시민이 따로 없었습니다. 성인남자는 모두 총을 들고 전선에 배치되었고, 여성과 어린아이들은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작업에 동원되었습니다. 하루 최저 12시간씩 60세가 넘은 노인들까지 동원되어 근 한달에 걸쳐 참호를 건설하는 고된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 물을 깃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레닌그라드의 모든 건물은 총좌로 뒤덮히고 높은 빌딩에는 고사기관총들이 빼곡히 배치되었고, 고색창연한 공원과 석조광장에는 참호와 교통호가 빈틈없이 들어찼습니다. 즈다노프 레닌그라드 시장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두가지 밖에 없다. 레닌그라드는 우리 모두의 무덤이 되든가, 독일 파시스트의 무덤이 되든가” 즈다노프 시장 말처럼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최후의 한명까지 싸울 각오를 다지고 있었지만 정작 독일군들은 이 도시로 밀고 들어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레닌그라드 시민들과 격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포위된 15개 사단의 소련군에 대하여 29개 사단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카렐리아 지혐을 봉쇄한 후 북쪽에서 내려오는 핀란드군과 연결하여 이 도시를 말려죽이겠다는 게 폰 레프 원수의 기본적인 구상이었습니다.
9월 8일부터,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하며 레닌그라드 및 도시 교외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했습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 최고의 전략가인 게오르기 주코프가 방어 작전을 맡게 되었고 양군은 총 872일 동안 공성전을 펼쳤습니다.
“시체 안치소 자체가 가득 차 있다. 묘지로 갈 화물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화물차에 넣을 휘발유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은 사람을 묻을 힘이 없다는 것이다....” -베라 인베르, 1941년 12월 26일자 레닌그라드 일기에서...
< 무시무시한 살육자 - 굶주림과 추위 >
10월까지는 그래도 소형 수송선들이 부지런히 그 호수 위를 오가며 25천 톤의 식량을 도시 안으로 반입했습니다. 그러나 11월부터 기아의 고통이 서서히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목을 조르면서 위조된 식량배급표가 나돌고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레닌그라드를 말려 죽이라는 히틀러, 오른편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있는 폰 레프 원수
가짜 배급표를 찍다가 적발당한 인쇄소 주인이 현장에서 총살되고, 어느 노파의 막 배급받은 빵 덩어리를 자기 입속에 털어 넣던 청년이 군중들에게 타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1월 20일, 식량 배급량이 최저치로 줄어들었습니다.
* 영화에서...
육체 노동자에게는 하루 230 그램의 빵이, 사무원들과 아이들에게는 그 절반이 지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저치의 1/3에 불과한 양입니다.
온갖 희한한 재료들이 대용식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와 고양이, 까마귀와 참새, 쥐고기는 아주 고급요리에 속했습니다. 값비싼 고급 샹들리에나 그랜드 피아노가 감자 한 톨, 빵 한 덩어리와 교환되었지만 그 빵조차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사자의 숫자가 날로 늘어났습니다. 11월 한달 동안 12,000명,12월에는 53,000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그 몇 배에 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살인사건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순전히 사람의 고기를 먹기 위해 살인을 하는 식인종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도 식량배급 사정이 다소 넉넉하여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군인들이 그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습니다. 거리에서 어린이들이 사라졌습니다. 소리없이 아이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늘어가기 시작하자 부모들이 아이들을 집안에 꼭꼭 숨겨버린 것입니다.
* 영화에서...
이웃들은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고, 드물게 영양상태가 좋아 보이는 사람이 거리에 나타나면 모두가 겁을 먹고 달아났습니다. 그런 식인종들을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군인들에게 떨어졌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겨울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였습니다.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비로프의 연구원 중 1명은 식용에 쓰일 수 있었던 20만 종의 식물 종자 수집품을 지키다가 아사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외곽에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희생자의 시체가 넘쳐났습니다.
이윽고 식료가 끊어진 도시에서는 사체에서 채집한 인육을 먹는 처참한 상황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나타나 사람들은 이것을 먹었습니다. 이에 레닌그라드 경찰 안에는 이를 단속하는 '식인단속 기동타격대'가 따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 참호 속의 소련군
1941~1942년 겨울 사이 생존자들이 모든 새, 쥐, 애완동물을 먹어치운 이후에는 식인을 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레닌그라드 경찰은 식인종들을 단속하는 특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이 병력들의 단속 결과 260명의 사람들이 식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굶주릴 대로 굶주려 이성이 마비된 그들은 이미 짐승에 더 가까웠던 것입니다. 암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는 작은 고깃덩어리 하나를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스런 눈길로 뒤적여 보아야 했습니다. 연말이 되면서 여기에다 추위의 고통이 더해졌습니다. 석유와 석탄의 공급이 끊기고 수도가 얼어붙었습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화, 가방, 혁대도 모두 징발되었습니다. 이것들을 끓는 물에 넣고 오랫동안 삶으면 아교와 비슷한 젤리가 생성되는데, 그나마 이것이 시민들이 맡아볼 수 있는 육류 비슷한 냄새였습니다. 얼어붙은 시체들이 눈 속에서 꽁꽁 언 채로 마구 흩어져 뒹구는 레닌그라드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편의 지옥도-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숱하게 죽어갔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로 모든 사람들이 허약해졌습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졌습니다. 가장 약한 사람이 맨 먼저 죽고 늙은이와 아기, 그 다음에 여자와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오싹한 과정을 겪으며 죽어갔습니다. 먼저 팔다리가 약해진 다음에 몸통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혈액순환이 느려졌으며, 영양실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심장의 고동이 멈췄습니다.
사람들은 책상과 기계 앞에서 죽고, 길을 걷다가 죽고, 침대에서 죽어 나갔습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송장처럼 변했습니다. 눈은 퀭하니 생기가 없었습니다. 얼굴에서 살갗이 꽉 당겨져서 비정상적으로 갑자기 팽팽해지다가 윤기가 빠지면서 종기로 뒤덮였습니다.
사람들의 몸에서 지방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린 듯 했습니다. 가족들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려는 측은한 노력을 했지만 때때로 작은 나무 썰매를 끌고 묘지까지 갈 힘이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1살 소녀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장에는 기아로 인해 할머니, 그리고 삼촌, 그리고 엄마, 그리고 동생이 죽었다고 쓰여 있으며 마지막 장에는 "혼자 남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그녀는 영양장애로 인해 포위전 기간 중 죽었습니다. 이 일기는 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거물로 재출되었습니다. - 아래에서 나옵니다.
* 레닌그라드 시내에서 신문을 읽고있는 적군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극장과 오케스트라 연주홀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운영했습니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훗날 어디서나 '레닌그라드'로 알려지게 되는 7번 교향곡의 초고를 포탄과 폭탄 소리에 맞추어 썼습니다. 10월에 쇼스타코비치는 안전한 상황에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레닌그라드에서 쿠이브이세프로 후송되었습니다.
그 작품은 1942년 3월에 쿠이브이세프 시에서 초연되었으며 정작 레닌그라드에서는 1942년 8월에 가서야 연주되었습니다. 예행 연습을 하기 위해 음악가들은 전선에서 불러와야 했지만, 그 교향곡이 무대에 올려질 무렵에는 연주자 다수가 죽거나 부상 중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작품을 레닌그라드 시에 바쳤으며 작품은 독일의 폭력과 맞서는 소련의 도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 생명의 길, 라도가 호수
< 생명의 길, 라도가 호수 >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온기가 전혀 없는 집안에서 꼼짝도 않고 시체처럼 드러누운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빨리 기온이 더 내려가서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는 것이었습니다. 영하 15도 이하의 날씨가 열흘 이상 계속되면 얼음 두께는 30센티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우마차나 썰매는 물론, 트럭까지 호수 위를 오갈 수 있으므로 레닌그라드는 사실상 육로로 다른 도시와 연결되는 셈입니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지칭되었습니다. 이 길은 차량이 독일의 포격으로 인해 깨진 얼음에 빠져 침몰하거나 얼음에 미끄러져 매우 위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겨울철 높은 사망률 때문에 이 길은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길은 군사 및 보급품을 오고갈 수 있게 했고, 도시가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부상병 및 민간인을 후방으로 내보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11월 17일, 호수에 얼음이 얼기 시작했고, 최초의 도보수송대가 호수를 건너가 극소량의 식량을 반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퀴가 미끌어지지 않도록 체인을 감고 느릿느릿 전진하는 수송트럭의 대열은 독일 공군기들에게는 절호의 목표물이었습니다.
기총 소사가 퍼부어지고 폭탄이 떨어지면 수많은 트럭들이 갈라진 얼음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바다처럼 넓은 라도가 호수 전체의 얼음을 깨어버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기온이 점점 더 내려가자 얼음은 하룻밤이면 다시 얼어붙었던 것입니다.
*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수송차량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목숨을 건 필사적인 식량수송-그것이야말로 레닌그라드 특유의 가혹한 전쟁 수행방식이었고 레닌그라드는 거기서 승리를 거두어가고 있었습니다. 레닌그라드 시민 절반을 죽여버린 라도가 호수와 추위는 겨울이 되자 오히려 그들의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려준 생명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해 봄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형편이 나아졌지만 기아 때문에 그 후유증은 계속되었습니다.
1941-1942년 겨울에 약 1백만 명의 시민이 서서히 고통스럽게, 비극적으로 죽어 사라졌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아사였습니다.
*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
타냐 사비체바(는 레닌그라드에서 제빵사 니콜라이(1936년 사망)와 재봉사 마리야의 다섯 아이들 중 막내딸이자 가수가 꿈이었던 열한 살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가 시작되자 이 소녀는 평생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독일군의 공습 이후 작은 언니 니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타냐에게 니나의 수첩을 주었고 타냐는 거기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타냐는 그 전에도 두꺼운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었지만, 나무도 석탄도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땔감 대용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저 수첩이 유일하게 남은 일기장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녀의 일기의 일부입니다.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언니 제냐가 죽었다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할머니가 죽었다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 오빠 레카가 죽었다
1942년 4월 13일 밤 2시 삼촌 바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0일 낮 4시 삼촌 레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3일 7시 30분에 엄마가...사비체바 사람들이 죽었다.
타냐 혼자 남았다…
타냐는 1942년 8월에 139명의 아이들과 함께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시민 소개 작전을 통해 니즈니노브고로드의 크라스니 보르라는 마을로 옮겨졌지만, 포위 기간 동안의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악화된 상태에서 장결핵으로 투병하다가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습으로 사망한 줄 알았던 큰언니 니나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역시 레닌그라드 밖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 작은 오빠 미하일과 함께 레닌그라드가 해방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타냐의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이 일기를 세상에 알리며 활동했고 2013년 9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타냐의 일기를 알리고 더불어 레닌그라드 공방전 희생자 추모단체를 이끌며 활동했습니다.
[ 레닌그라드 포위전 ]
* 독소전 개시(바르바로사 작전), 북방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방 집단군 3개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는 독일군, 북쪽은 레닌그라드, 중앙은 모스크바, 남쪽은 키예프를 지나 스탈린그라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과 핀란드 동맹군이 소련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싸고 장기간 공격한 일을 말합니다. 900-Day Siege라고도 합니다. 정확하게는 1941년 9월 8일부터 44년 1월 27일까지 872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941년 6월 나치스 독일은 소련을 공격한 이래 9월 초까지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레닌그라드에 접근하였고, 핀란드 동맹군은 카렐리야 지협을 따라 남하하여 시의 북쪽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이때 레닌그라드의 주민이 총동원되어 시 주위에 대전차용 요새를 구축하는 등 방어망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11월 초까지 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소련 내륙으로 통하는 철로 및 그 밖의 보급로가 모두 끊겼습니다. 독일군의 계속되는 봉쇄공격으로 시민들은 굶주리고 헐벗었으며 병들고 적군의 포탄에 맞아 봉쇄가 풀리는 44년까지 거의 1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 포위가 풀리고...
43년 초에는 소련의 공세로 독일군 포위망이 뚫려 라도가 호수 연안을 따라 식량·연료 등이 보급되고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피난시켰으며, 44년 1월 소련의 공세로 독일군이 퇴각함으로써 포위공격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격렬한 포위공격을 이겨낸 데 대한 경의로 소련 정부는 45년 레닌그라드에 레닌훈장을 수여했고 65년 소련의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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