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도 금성총동문회 이사회 회의록 1쪽.
[회의록 사진 2]
▲ 2026년도 금성총동문회 이사회 회의록 2쪽.
송년회에는 두어 번 참석했어도 그동안 금성총동문회 모임에는 거의 발길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제가 어제 삼성역 근처 중식당 '동강'에서 열린 총동문회 이사회에 참석했죠.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종신회비 50만원도 송금했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묘하더라고요.
제가 금성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도 어머니가 '찬조금'이라는 이름으로 10만원을 냈거든요.
1967년의 10만원.
그리고 2026년의 50만원.
제 금성국민학교 인연에는 이렇게 두 번의 큰돈이 들어가 있는 셈이죠.
◆ 호적상 일곱 살에 국민학교 입학
저는 실제로는 1960년 9월 7일생인데 출생신고가 1년 늦어 호적에는 1961년생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학교는 실제 나이에 맞춰 여덟 살이 되던 1967년에 입학했죠.
그러니까 호적 나이만 따지면 일곱 살에 금성국민학교에 입학한 셈입니다.
당시 금성국민학교는 중화동에 있던 사립학교였어요.
청량리, 답십리, 전농동 일대는 물론이고 멀리는 퇴계원 쪽에서도 학생들이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스쿨버스도 네 대 정도가 서울 동부권을 돌며 학생들을 태워 왔죠.
사립학교라 교복도 입었고요.
한 학년에 세 반 정도, 한 반에 50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두 반으로 줄어 50명씩 편성되기도 했고요.
요즘 기준으로는 50명이 많은 숫자지만, 당시 일반 국민학교는 한 반 학생 수도 훨씬 많았습니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하는 학교도 흔했죠.
그런 시절이었으니 금성국민학교의 수업환경은 당시로서는 꽤 좋은 편이었던 셈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멀리서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했지만 저는 학교가 그리 멀지 않아 걸어서 다녔고요..
◆ "얼마면 되겠습니까?"
문제는 제가 이 학교에 어떻게 들어갔느냐는 거죠.
동창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잘 믿지를 않아요.
다른 친구들은 이른바 '뺑뺑이'를 돌려 추첨으로 입학했는데 저는 거기서 떨어졌다고 해요.
여기서 제 어머니 성격이 나옵니다.
젊었던 어머니는 추첨에서 떨어졌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아니었죠. 역시 O형.
지금 생각하면 학교 행정실이나 총무과쯤 되었을 텐데, 어머니는 곧장 학교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고 해요.
당시 그곳에는 이사장 큰아들이 과장으로 있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눈에 잘 띄던 사람이라 저도 알고 있었죠.
이사장 아들 삼형제가 오토바이를 워낙 좋아해서 학생들 눈에도 잘 띄었거든요.
그 앞에서 어머니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는 거죠.
"얼마면 되겠습니까?"
보나 마나 장면이 그려지지 않나요.
상대방도 적잖이 당황했을 겁니다.
"어머니, 고정하시고 일단 앉아서 커피 한잔하시죠."
아마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ㅎㅎ
결국 어머니는 학교에 찬조금 명목으로 10만원을 냈고 저는 금성국민학교 학생이 됐어요.
다른 친구들은 추첨으로 들어왔고, 저는 어머니가 찬조금을 내서 들어간 셈이죠.
◆ 1967년의 10만원
1967년 당시 10만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10만원과는 전혀 다른 돈이었죠.
지금 가치로 정확히 얼마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죠. 소비자물가로 보느냐, 당시 임금이나 소득으로 비교하느냐에 따라 금액이 크게 달라지니까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죠.
평범한 집에서 선뜻 꺼내놓을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제가 동창들에게 "나는 10만원 내고 금성국민학교 들어갔다"고 말하면 잘 믿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그런 큰돈을 장남 교육에 내놓았으니 어머니가 제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도 짐작할 만하죠.
아버지는 아마 옆에서 별말 못 하고 어머니 뜻에 따랐을 것 같고요. ㅎㅎ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어디선가 좋은 사립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남을 그 학교에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 남산까지 가서 미군 흑백TV를 사오던 어머니
어머니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요.
어느 날은 남산 쪽까지 가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흑백TV를 큰돈 주고 사서는 택시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셨죠.
그 시절에는 전압이 맞지 않아 '도란스'라고 부르던 변압기를 따로 달아 텔레비전을 보던 때였고요.
학교 찬조금도 10만원.
흑백TV도 10만원.
지금 돌아보면 우리 어머니도 참 대단한 여장부였어요. 마음먹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강단이 있었던 거죠.
저도 서울 살 때 동네 단골 한의원에서 금양체질, 이른바 태양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어머니에게 했더니 바로 받아치시더라고요.
"나도 태양인이야."
지금 생각하면 그 말도 참 어머니답죠. ㅎㅎ
◆ 같은 중화동 교정을 다닌 선후배들
금성국민학교는 1965년 중화동에서 개교했고, 1995년 지금의 신내동으로 학교를 옮겼어요.
그러니 어제 이사회에서 만난 후배들도 1995년 이전 졸업생이라면 기수는 달라도 저와 같은 중화동 교정을 밟고 다닌 사람들이죠.
세월이 흘러 옛 학교 자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지만, 우리 기억 속에는 같은 운동장과 같은 교실이 남아 있는 셈이죠.
▲ 삼성역 인근 중식당 '동강'에서 열린 금성총동문회 이사회.
◆ 수십 년 총동문회에 나오던 친구를 보고
저는 금성국민학교 5회입니다.
그동안 총동문회 송년회에는 두어 번 참석했지만 이사회나 별도의 총동문회 모임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5회 단체카톡방에는 태윤서가 총동문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함께 갈 사람을 찾는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도 한 번 올리고, 다시 한번 올렸어요.
서른 명 넘는 친구들이 있는 5회 카톡방에서 수십 년 동안 거의 윤서 혼자 총동문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이번에는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답했죠.
"이번에는 나도 갈게."
마침 옥정2동 일을 낮 12시에 마치니 오후 6시 삼성역 모임에는 충분히 갈 수 있었고요.
◆ 달랑 열두 명이 앉는 원탁
오후 5시 50분쯤 중식당 '동강'에 도착했어요.
조금 일찍 갔다고 생각했는데 8회 김호진 현 회장과 부회장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방은 제법 컸지만, 자리는 열두 명 정도 앉는 원탁 하나뿐이었어요.
저는 회비를 내는 줄 알고 현금이 없으니 윤서에게 미리 현금을 준비해 오라고까지 했죠.
그런데 이날은 별도의 참가 회비가 없더라고요.
괜히 돈 준비하라고 한 셈이 됐죠. ㅎㅎ
◆ 새 회장을 뽑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이날 회의의 가장 큰 안건은 차기 총동문회장 선임 문제였어요.
회의 경과를 들어보니 6회까지 회장이 이어졌고, 7회에서 회장이 나오지 못하면서 현재 8회 김호진 회장이 세 차례 연임을 해왔다고 해요.
이번에는 새로운 회장을 세우려고 했죠.
7회에서 한 동문이 맡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가 중간에 카톡을 둘러싼 일이 생기면서 당사자가 고사했다고 해요.
그렇다고 곧바로 9회, 10회, 11회, 12회로 내려가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고요.
각 기수 동창회 자체가 예전처럼 활발하지 않은 곳이 많고, 바로 13회까지 내려가자니 기수 차이가 너무 벌어지는 문제도 있었죠.
부회장이 각 기수에 일일이 전화를 돌리며 새 회장을 찾으려고 꽤 애를 썼다고 해요.
결국 공백을 만들지 않기 위해 현 8회 김호진 회장을 다시 추대했고, 이제 4년째 총동문회장을 맡게 된 셈이죠.
김상철 부회장도 오래 부회장을 맡아왔는데 이번에는 "이제 부회장 말고 총무나 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하더라고요.
밖에서 보면 동창회장 자리 하나 정하는 일 같지만,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는 계속 시간 내고 애써야 조직이 굴러가는 일이더라고요.
저처럼 그동안 총동문회 일에 무심했던 선배들도 있겠지만, 다시 연임하게 된 회장과 회장단이 앞으로도 잘 이끌어가겠죠.
◆ 5회 선배에게 주어진 안주 지명권
저는 이날 참석자 12명 중 4회 세영 선배를 제외하면 5회라 제법 선배 축에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안주를 먼저 고르라는 지명권까지 주더라고요.
고추잡채를 골랐어요.
이어서 유린기, 탕수육 등이 나오고 소주와 소맥이 돌았죠.
마지막에는 짜장면, 짬뽕, 잡채밥까지 나왔지만 이미 소맥과 안주로 배가 불러 저는 식사를 사양했죠.
학교 다닐 때는 서로 몇 회인지 따질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늙어서 모여 앉으니 5회라는 숫자 하나만으로 졸지에 선배 대접을 받더라고요. ㅎㅎ
▲ 회의를 마친 뒤 이야기꽃을 피우는 금성총동문회 선후배들.
◆ 연회비 5만원에서 마음이 걸렸죠
회의 도중 회비 이야기가 나왔어요.
연회비 5만원.
종신회비 50만원.
그 이야기를 듣는데 괜히 마음 한구석이 캥기더라고요.
이런 걸 자격지심이라고 하나요?
송년회에나 가끔 얼굴 내밀었지 총동문회 일에는 별 관심 없이 살아왔으니까요.
소주 한잔 마시면서 속으로 생각했죠.
"그래, 이따 집에 가는 길에 50만원 송금하자."
후배들에게도 앞으로는 총동문회에 자주 나오겠다고 했죠.
그동안 못 나온 세월까지 한꺼번에 갚을 수야 없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댓글 강환구 어머니께서 대단하신 여장부셨네 ^^
그러니 96세에 몽골 여행도 다녀오시고 대단하셔
모임에 아주 헌신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같이 많이 모여서 떠들썩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 모임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은근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
찾아보니 1967년 10만원은 지금 물가로 단순 환산하면 대략 3천만 원 안팎의 큰돈이었다고 하네요.
(당시 물가 기준 300배~350배)
그렇다고 집에 돈이 넘쳐나서 찬조금을 냈다기보다는, 어머니의 교육열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물론 70년대 초반 쯤이 어머니 인생에서는 전성기였을지도 모르죠. 지금도 가끔 "박정희 때가 제일 먹고살기 좋았다"고 회고하시니까요.
결국 장남 하나 보고 "얘한테 한번 걸어보자" 하고 크게 한 표 던진 것 아닌가 싶어요.
문제는 그 투자가 성공했느냐인데...
잘못 걸었다는 건 세월이 확실히 밝혀줬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