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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辛巳)생. 68세. 노인으로, 어르신으로 살아온 지 3년여. 남자 평균 나이를 제대로 누려 산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5년. 이런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직장,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까지 퇴역으로 물러나 이제 이름만 어르신이지 어르신 노릇도 못하고, 대접도 못 받는 사람들.
이 나라 여명기에 태어나 국민(초등)학교를 다니면서 6·25를 맞았고 교복, 군복, 예비군복, 민방위복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제복에 얽매여 살아온 사람들. 신세대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한 채 어느 날 구세대로 몰려, 한두 가지 지병(持病)을 친구해서 인생의 황혼 길을 걷는 사람들. 말로(末路)가 안겨다주는 약간의 안식에 빠져 사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 세대, 나의 현주소다.
하룻길을 가도 소도 보고, 중도 본다고 했는데 왜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오늘을 사는 이 나라 보통 노인네들의 삶의 굴레 같은 이야기를 여기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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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일 지공(地空) 65세
오전 11시가 되는 걸 보고 중앙통 반월당(半月堂) 사거리에 있는 S생명 1층 로비로 나간다. 어제 저녁, 설야(雪野)한테서 전화가 왔다.
요즘 주변에 호를 가진 친구들이 더러 있다. 하긴 우리 세대도 먹물이 튀어 밴 사람들은 모르지만 대부분 호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잉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했던가, 자작한 호를 조심스레 내비친 이도 있는데, 잘 써먹질 않아 모처럼 자기 호를 남이 불러줘도 모르는 난센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오늘 설야가 만나자는 건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같이 문양에 가서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자는 것. 나한테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니까 좋다고
해두었던 것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도 설야가 점심을 샀는데. 자꾸 얻어먹는다는 게 부담이 되기는 했으나 언젠가 ‘나는 지금도 조금씩 벌고 있으니까 요즘
젊은이들 말로 신경 끄라’고 해서 오라는 대로 나가긴 하는데, 잘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점심때쯤 100여 평이 넘는 S생명 로비는 우리 나이의 사람들로 항상 득시글거린다. 시내 중심 지하철 1, 2호선이 교차하는 위치에다가,
냉난방이 되어 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해서 우리 같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는 곳으론 딱 됐다.
기업경영이나 마케팅 기법에 보면 주변 사람들과 친화력을 쌓는 것도 투자의 한 방법이란 말이 나오는데, 아마 그런 차원에서 만들어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한테는 그런 고마울 데가 없다.
회전문을 들어서는데 맞은쪽에서 설야가 손을 번쩍 들면서 일어난다. 그런데 옆자리에 아주머니 한 분도 같이 따라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눈인사를 건넨다.
“우선 서로 인사나 하지. 구체적인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바로 지하철로 내려와서 문양 방향 지하철에 올랐다. 문양은 2호선 종착역이다. 거기에는 오래전부터 매운탕집이 많았는데 지하철이 개통되고 난
이후로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언젠가 보험 하나 들어주고 알게 된 아주머니가 있다더니 이 여자가 그 여자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한창때도 그쪽으로는 호를
찼더랬는데, 이 나이에도 여전한 걸 보면 알아줘야 할 친구다. 하여튼 재미있게 사는 친구인 것만은 분명하다.
3년 전 일이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미도다방에 들렀다. 나이가 드니 기분 좋게 들를만한 다방도 잘 없다면서 저쪽에서 거기로 나오라기에
나간 것이다. 미도다방은 대구에서 노인다방으론 이름난 곳이다.
그곳에서 우연히 나보다 여남은 살 위인 선배 한 분을 또 만났다.
“아따 이사람 오랜만이다. 자네도 이제 머리에 서리가 앉았네. 오래 몇인공?”
“선배님도 참. 저도 지공입니다.”
지공(地空)은 지하철을 공짜로 탈 나이인 65세를 일러 누군가가 만들어낸 속어다. 불혹(不惑)이니, 이순(耳順)과 같은 반열에 두고 곧잘
써먹는다.
“아,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어쨌거나 아직은 좋을 때다.”
“좋을 때라구요?”
“왜 내가 말을 잘못 했는강.”
선배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마침 옆자리에 앉았던 주인마담 정 여사가 한술 더 떠 거든다. 그녀는 이미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도
두어 번 나온 적이 있는, 거기 나드는 노인네들한테 우상이 돼 있는 여인이다.
“좋은 때구 말구요. 병아리구만요. 여기 한번 보세요. 선생보다 젊은 양반이 있는강.”
그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 연장자로 보인다.
오늘 설야를, 설야가 데리고 나온 여자를 보니, 문득 참 좋을 때란 그날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여자를 만나면 저네들 둘이 만날 일이지 나는 왜 불러냈을까. 혹 점심 먹자고 불러내어 나한테 보험 들어달라고 압력 넣는 건 아닐까.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은근히 걱정도 좀 된다. 요즘 형편으로는 든 보험도 해약해서 쓰고 싶을 만큼
곳곳에서 가랑잎 구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종착역이 가까워오자 차 안에는 우리 연치의 늙은이들뿐이다. 차비가 따로 들지 않으니까 모두 지하철을 이용한 것 같다. 공짜로 야외 바람까지
쐬며 점심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문양까지 지하철이 들어가고부터는 그곳에서 점심 먹는 게, 요즘 우리 지공들한테는 유행병처럼 번져 있다.
지하철역마다 무임승차로 인한 적자가 대구에서만 연간 200억원이 넘는다면서 이를 정부에서 해결하라는 시위성 벽보가 역마다 붙어 있는데 이를
볼 때마다 솔직히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모처럼 혜택을 받은 복지정책에 또 이런 못할 짓이 가담되어 있구나 해서.
사실 말이 났으니 얘기지만, 그리고 나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꼭 나설 일도 없으면서 교통비가 안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저기
헤매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건 아니다. 가끔 노인들만 가득한 차 안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나, 젊은 층들의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 나라의 오늘이 있는 게 모두 누구의 덕이냐고 반론을 제기하며, 어차피 다니는 차 그냥 좀 얹혀가자는 건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따지면, 이야기는 충분히 된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자기 시각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눈높이를 맞추고 보는 데야 도리가 없다.
이날 매운탕은 얻어먹어 그런지 맛이 너무 좋았다. 만에 하나 노심초사했던 보험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이 친구가 자랑으로
여자를 차고 나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너하고 사는 방법이 다르다는 걸 구경이나 하라는 듯이 말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말이 언뜻 스친다. 자기의 거문고 솜씨를 알아주는 이라곤 친구 종자기(鐘子期) 하나뿐인데, 그가 죽자 더는 거문고
만질 일이 없다면서 그 줄을 끊었다는 백아의 이야기. 오냐, 잘 먹었다. 자네의 그런 모습 내가 안 알아주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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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자 차고 나오는 것 말고 '알아 달라'고 뽐내는 친구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진기야, 잘 지내고 있는가.. 내가 위의 글을 읽으면서 '지공 나이'라는 제목이 있길래 언뜻 머리에 스쳐지나 가기를 '저거... 지공나이는 진기가 카나다 가기 전에 우리 카페에 소개해준 말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후에 '지공나이'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간간히 볼 수가 있었지. 난 그래서 지금도 지공나이라는 말이나 단어를 보면 자네 생각이 우선 나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콤에서 꼬리글에 자네 이름을 만나니 지난 봄에 재훈이 딸내미 결혼식 마치고 운철과 여의도 벚꽃 축제라고 한바퀴 돌자며 거닐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때 꽃구경을 간다고는 했지만 일기기 좋지않아 우리가 웃으면서 히디닥거리던 것이 꽃보다노 더 아름답고 재미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지나간 모든 건 별 것 아니데도 불구하고....아름답고 아쉽다. 나이가 이쯤되고 보니 언제 다시 그렇게 해 볼 수 있겠느냐는 미련과 여러가지 제약 때문인가... 하여튼 건강을 잘 챙겨서 굳건히 다시 일어나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네에게 칭찬을 보내고 카페에 열심히 수고를 해 줌에 다시 한번 감사하네.
듣자하니 글의 배경이 대군데 멀리있는 정수가 용케도 발굴해서 씨리즈로 올려죠서 재밌게 보고 있네. 그러고보니 우리도 어느듯 내년엔 마카 지공파가 되는 처지가 되었네. 우리친구 중에서도 이 나이에 여자 끼차고 우리집에 자랑삼아 놀러왔던 유능한 친구 한키 있었는데...농담으로 혹 남는거 있거들랑 나도 하나 달라했더니 그길로 통 보기 힘드네...정수야~ 담 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