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니 기독교니 천주교니 하는 틀에 갇히지 말라
나의 신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물론 나는 불교신자다. 불교 수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이슬람교며 힌두교 신자도 될 수 있다.
내가 불교 수행자라는 이유가 나를 기독교 신자가 되지 못하게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
다. 이 종교적 생각이 내 불교적인 신앙 정체성을 흔들어놓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다. 참된 불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활짝 열려 있으며 어디에도 갇
혀 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삶이고 종교인의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에 고집하지 않는다. 불교라는 것은 다만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진리
를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일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이나 틀 속에 스스로 갇히길 좋
아하고, 그러한 틀 속에 좀더 많은 신자들을 편입시키려 애쓴다.
'이것은 불교다'라 이름 지어놓고, 그렇게 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갇혀 다른 것은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불교에 갇혔을 때는 이미 불교
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금강경』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라는 유
명한 게송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 틀에서 빨리 빠져나오라.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진리의 향기, 본질적인 가르침
참된 불교 신자라면, 기독교나 천주교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
어야 한다. 저 고대 인도인이나 페르시아인, 아프리카나 호주, 북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
도, 공자나 노자에게서도, 저 들녘의 농부나 한 송이 가녀린 꽃송이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꽂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 향기는 바뀌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무조건 금기시하거나, 터부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
이다. 기독교 신자는 너무 편협해 열려 있지 못하고 불교를 너무 싫어한다고. 또 어떤 사
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경을 보면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다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다
고, 또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과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는, 이래서 이것은 불교와 전혀 다르
니 이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따진다면 불교도 할 말이 없다. 논리적
으로 따져 불경의 게송이나 이야기 하나하나를 반박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처님 일대기를 보면 부처님을 신격화한다거나 신비하게 미화시킨 부분이 적지 않다. 이
것을 문자 그대로 풀이해 불교 역시 진리가 아니라며 좌절할 텐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경이나 성경 자체의 본뜻을 파악하지 않고 피상
적으로 바라본 것일 뿐이다. 문자에만 치우쳐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졌다거나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신격화해놓은
것일 뿐, 거기에 나의 온 존재를 내맡길 필요는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
요한 것은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진리의 향기, 그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특정한 관점 없는 관점이 바로 진리의 관점이다
어떤 한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려 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불자인
데 왜 저 모양인가? 저 사람은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데 어떻게 저런 나쁜 성품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몇몇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그 가르침 자체를 판단하지 말라.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부처님을 헐뜯는다거나 반역을 일으킨 자도 있었
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다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하셨다. 부처님께서도 '원을 세
우지 않는 자와 인연 없는 자는 교화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람을 보거나
경전의 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가지고 그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크게 보아 기독교도 불교고, 천주교도 불교다. 모든 이들의 그 모든 행위가 그대로 불교
다. 불교는 어떤 특정 종교만의 진리가 아니다. 불교란 삶 전체의 진리이며, 온 우주, 온
세계 모든 이들, 모든 존재들에게 공통이 되는 진리기 때문이다. 어찌 불교가 불자들만의
진리일 수 있겠는가. 이는 타종교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도 기독교이고 불교도 천주교란
말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 말에는 물론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그것은 불경이나 성경을
열린 지혜의 안목으로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성경을 꽉 닫힌 시각으로 바라보거
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성경에 담긴 참뜻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 텅
빈 마음으로 한없는 사랑으로 바라볼 때 가능한 말이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분별이 없다.
당신들께서는 불교 신자를 늘리고자 애쓰지 않고,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를 늘리는 데
는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 어떤 틀에 가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틀에 가두는 순간 진리
도 그 빛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다. 늘 활짝 열린 자세를 취한다. 활짝 열려 있어 어떤 특정
한 관점이 없다. 특정한 관점이 없는 관점이 바로 진리의 관점이다. 불교니 기독교니 천주
교니 하고 나누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정작 부처와 하느님은 그런 분별을 생
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누고 울타리 치는 것은 더 많은 분별과 분열만 일으킬 뿐이다. 진
리는 그런 울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고집하지 않으
며 부처님은 당신을 부처라고 부르라 고집한 적이 없다.
그 이름은 사람들이 편의상 붙인 것이지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불교를 제창하셨거나 기독교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불교의 교세를 확
장하거나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애쓰신 적이 없다.
열린 눈으로 불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에서 부처님을 만나라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관점이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가지 신관이 있을 수 있
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온전하게 서 있고, 하느님은 항상 진리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
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신관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성경의 해석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사람들의 해석과 관점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피
를 흘리는 수많은 전쟁과 싸움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느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 아무런 분별없이 진
리의 빛을 다투고 계셨을 뿐이다. 진리는 늘 그 자리에서 현현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다
툼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지 진리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
다.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
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로마서 8장 6절)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견해에 집착하지 말라. 아집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
에 이르게 할 뿐이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관념과 견해에 묶이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 집중
하라. 우리 안팎에 충만한 하느님의 본질에 집중하라. 하느님의 진리 자체에 집중하라. 그
랬을 때 삼매(三昧)를 얻을 수 있고,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이 현현될 것이다.
불경 또한 마찬가지다. 불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온갖 불교가 나뉘어왔다. 소승과
대승, 현교와 밀교, 선불교 등 수많은 해석이 나뉘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면서도 진
리 그 자체는 한번도 나뉜 적도, 바뀐 적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근거에 따라 수많은 가르
침으로 나누어놓았을 뿐이다. 거기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수
많은 다툼과 분열로 고통당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본질은 한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한
적이 없이, 늘 그 자리에서 진리의 향기를 꽃피워왔을 뿐이다.
사람이 분열됐다고 부처님도 함께 분열되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시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있다. 진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해석이 피를
흘리게 했고, 전쟁과 분열을 낳았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어떤 한 가지 관점을 정해놓고 그
것을 진리로 고집하고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
진리는 하느님 그 자체이지, 그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있지 않다는 잊은 결과다. 요즘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또 불교적인 법신의 관점에서처럼 활짝
열려 있는 눈을 자주 만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은 어떤 하나의 해석이 아니다.
부처라는 것은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자체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신이 아니다. 신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선악을
초월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바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을 지혜의 관점으로 올바로 볼 수 있
다면, 그것이 그대로 진리이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 속에서 부처님과 불경의 가르침과 진리를 볼 수 있으며, 불경 속에서 하느
님과 성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지혜의 관점에서는 하느님과 부처님이 다르지 않다.
관점을 버리고 무분별로써 있는 그대로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
다. 문제는 늘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분별과 해석 그리고 집착에 있다. 부처님도 하느님
도 진리의 빛을 한없이 비추실 뿐이다. 그러니 불자가 기독교를 싫어한다거나 기독교 신
자가 불자를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싸우고 배격하며 헐뜯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느님과 부처님이라는 진리 그 자체에 마음을 두라
어떤 종교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 한쪽 편벽되지 않고, 어떻
게 활짝 열린 눈길로 온전하게 믿는가, 그 점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목사님, 신부님, 수녀
님들 중에는 그야말로 활짝 열린 분들이 많다. 목사님이면서 불경도 공부하고, 법회에도
참석하며, 그 속에 담긴 진리의 가르침에 깊이 깨우쳐 감사하는 분도 있고, 신부님이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며 참선하고 불경을 암송하는 분도 있다. 물론 스님들 가운데
에도 성경을 참된 마음으로 공부하고 예수님의 삶에 깊이 감명 받는 분들도 많다.
종교를 믿는 데에도,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영적 정신적인 수준이 있다.
그리고 그 수준이 가늠하는 가장 큰 잣대는 첫째 '열려 있음', 즉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음'에 있고, 둘째 한없이 큰 사랑에 있다. 집착을 버리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야말로 모든 종교며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지혜의 일깨움이다.
하느님과 부처님 그 자체라는 진리에 마음을 둘 일이지, 자신이 만들어놓은 하느님과 부
처님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억지 견해를 진리라 여기고 거기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
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마음을 비웠을 때, 바로 그때 사랑과 자비가 끊임없이 용솟
음친다. 어느 한쪽에 집착해 그 한쪽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말라버린다.
기독교 신자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안의 가르침만 집착하고, 울타리 안에 사는 이
만 사랑하고, 나머지 다른 종교인은 모두 사탄이며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라 몰아간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사랑이지 온 우주 전체를 하나로 사랑하는 그런 참된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런 편협한 분이 아니시다. 믿음을 지닌 자는, 하느님을 편협하고 옹졸한 테두
리에 가두는 어리석은 짓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만 따로 구분해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면 누구나 하느님
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하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 35절)
문제는 '하느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온 우주를 사랑하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자기 종교, 자기 종파만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참
된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단독으로 사랑하셨다고 해석하지 말라. 물론 구약을 곧이곧
대로, 문자 그대로 풀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힘
입은 당시 유대인들의 해석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특히 신약보다도 구약을 문자 그대
로 해석했을 때 오류를 범하기 쉽다. 구약의 하느님은 살생하고 폭력적이며 질투가 넘쳐
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시대
적 상황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런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느님을 그대로 표현한 것
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하느님을 묘사해놓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모두가 똑같은 형제자매, 똑같은 길동무일 뿐
그에 현혹되지 말라. 그 말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진실을 찾으라.
하느님은 어느 한 부족만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분별이나 차별도 없다.
온 우주 법계의 본질이신 하느님께서 어찌 조악하게 한 부족만을 사랑하고 다른 부족을
죽이려고 안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의 해석과 견해, 그런 신관을 버려라.
진리는 문자 그 너머에 있다. 문자로 진리를 그대로 나타낼 수는 없다. 문자는 항상 오류
가 많다. 한 가지 말에 백 명의 사람은 백 개의 해석을 댈 수도 있다. 그것이 언어, 문자,
말이 가지는 치명적인 오류다. 문자에 연연해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자기 맘대로 풀고, 그
로써 무리를 만들며,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하지 말라. 제멋대로 만든 자기 해석으로 상
대방의 해석을 공격하며 싸우려들지 말라.
분명히 기억하라. 하느님은 어떤 견해도 있지 않으신 분이다. 특정 견해, 특정 부족, 특정
가르침에 치우친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항상 진리만을 말하며 진리로써 살아가는 분이
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가 우리를 자
유케 하는 것이지 진리에 대한 해석과 견해가 우리를 자유케 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매번 나누고 구별 짓는 것은 바로 우리들 인간이다. 내가 해석한 대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된 사랑은 내 종교, 네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선을 그어놓지 않는다. 모
두가 똑같은 사랑의 대상, 모두가 똑같은 형제, 자매, 똑같은 길동무(道伴)일 뿐이다.
내 종교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고, 내 종교를 믿어야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불교에서도, 기독교나 천주교에서도, 스님들이나 신부
님이나 목사님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치우쳐진 낮은 수준의 신앙을 고수하는 분들이 있
다. 그런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길 것이고, 그렇
게 신앙생활을 해야 잘 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될 것은 뻔하다.
1960년대, 로마의 교황 요한 23세는 세계종교사에 획을 그을 놀라운 말을 하여 많은 종교
인들을 경이롭게 한 적이 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천
명한 것.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 물론 보수주의자들의 반
발도 컸지만, 교황의 말씀 한마디는 세계를 평화로 물결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신자의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기독교, 천주교, 불교라는
하나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더 많은 신자 확보를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믿
든 참되게 믿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되게 믿는다면 어떤 종교인일지라도 참된
진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힌두교도였지만 참된 진리를 따랐기에 힌두교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불교와 기독
교를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교황 요한 23세 역시 참된 진리를 따랐기에 천주교를 버리
지 않으면서 다른 종교를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스님, 틱낫한 스님, 숭산 스
님, 청화 스님 역시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서 모든 종교 안에서 진리를 맛볼 수 있었다.
참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한결같이 '모든 이'들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 수 있어
야 한다. 내 종교의 신자만 행복으로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참된 자비와 사랑이라 할 수 없
다. 또한 모든 이들이 '참된 행복'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궁극적인 참된 행복으로 가
면 되는 것이지, 왜 '해탈'이거나 '천당'이어야만 하는가. 그 길을 왜 꼭 '예수'를 통해서
만, '부처'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단 말인가. 지복의 자리, 깨침의 자리에 고정된 모양을 만
들어두지 말라. 불교의 해탈과 기독교의 천당은 절대로 다른 곳에 따로 있지 않다.
달라이라마 스님은 ‘이 세상에 종교가 불교밖에 없는 것보다는 오히려 여러 종교가 있는
것이 더 좋다’라고 했다. 깊이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왜 애써 내 종교를 키우려 혈안이 되
어야 하는가. 왜 내 종교 신자를 늘리려고 다른 종교 신자들과 다투고,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해야 하는가. 부처님도 하느님도, 보살님도 예수님도 정작 바라는 바가 아닌데.
'올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냐 기독교냐 천주교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참되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종교인가보다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
성경을 열린 시각으로, 지혜의 시각으로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간
들의 견해가 너무도 많이 들어 있는 탓이다. 물론 이것은 불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불경
은 부처의 시각이, 깨달음을 이루신 성현의 시각이 비교적 올곧게 담겨 있다. 이렇게 말하
는 까닭은 다른 종교의 신자를 만나더라도 애써 개종하려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다면
그 속에서 불경을, 부처를,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올바로' 믿고 실천하
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로 믿고 실천하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나 천주교를 믿어도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해탈에 이를 수 있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든 기독교
나 천주교를 믿든 모두가 지옥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경에 이런 말이 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어떻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행위가 중요할 뿐이지, 어떤 종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
다. 참되게 믿으면 기독교를 믿어도 불교를 믿는 것이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더라도 외도(外道)를 믿는 것이다.
반대로 참되게 믿으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믿는 것이지만 참되게 믿지 않는다면 기독
교를 믿더라도 사탄을 믿는 것일 뿐이다.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본래 구족(具足)되
어 있는 부처를 깨닫게 되고,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게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어
떻게' 종교를 믿는가에 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어떤 종교라도 좋다. 어디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다른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믿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고 관점일 뿐이지 '그분'들의 입장이 아니다.
'그분'들은 사실 '-들'이 아니다. '-들'이란 접미사를 써서, 둘로 여럿으로 나눌 수 있는 분
이 아니시다. 어떻게 믿고 신앙할 것인가. 어떻게 다른 종교인을 대하고, 다른 종교를 대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첫댓글 좋은 글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