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한, 그러나 굳은 얼굴의 엘바토르 후작 영애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더욱 상냥하게 말했다.
“호호,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요.”
“…….”
내 말 속의 가시를 알아챘는지 후작 영애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그것을 즐겁게 감상하며 말을 이었다.
“내 말로만 후작 영애에 대해서 들어왔는데, 소문보다 아름다우시군요. 과연 사교계의 꽃이라 칭송 받을 만하네요.”
“과찬이십니다.”
소르드 사교계의 꽃. 엘살바도르의 사파이어. 이 두 별칭은 모두 한 인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루비아 엘바토르,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또한, 마샬에게 내 욕을 이죽거렸던 네가지 없는 시녀장의 주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칼을 갈아왔던 상대란 말이지.
‘하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겉으로는 여유 있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저 영애를 누를 수 있을 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엘바토르 영애는 겉보기에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여느 귀족 영애 같지만, 소르드 왕립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입학, 현재 우수한 성적으로 촉망받는 인재이며 불과 21세라는 나이에 5클래스 마법을 마스터한 천재적인 마법사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나치리만큼 똑똑한 여자란 말이지.’
그 뿐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인 루드비히 엘바토르 후작은 소르드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 도시인 엘살바도르를 영지로 삼아 해상무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대부호이자, 가지고 있는 재물만큼이나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는 권세가이기도 했다.
막강한 부와 권세를 가지고 있는 후작의 후광에다 천재 마법사라는 타이틀까지 매달고 있으니 당연히 여기저기서 혼담이 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눈이 어지간히 높아서 그런지 몰라도 영애는 모든 혼담을 거절하고 있지만 그녀는 단연 소르드에서 최고의 신붓감임에 틀림없었다. 한 때는 애쉬와도 혼담이 있었다고 하니, 말은 다 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명성도 내 아래에서만 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다시는 나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다시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게 말이다.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지 후작 영애는 무심하게 내 말을 넘겼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 시녀장이 그 쪽의 시녀장과 싸움을 일으켜 후작 영애의 고귀한 명성에 먹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주인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제 시녀장도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니,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지요.”
루비아 후작 영애는 여전히 정중한 얼굴을 유지하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철없는 귀족 영애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도 고개를 까닥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워하는 것에 비해 매우 대조적인 모습. 과연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잘못이라. 그 쪽 시녀장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싸움은 어느 한 쪽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 시녀장도 분명 자작님의 시녀장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호오, 그래요?”
나는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탁, 하는 날카로운 부채소리에 일순 후작 영애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쪽 시녀장이 내게 천한 창녀의 자식이라고 모욕을 준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
시종일관 유지해왔던 후작 영애의 포커페이스가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긴 했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후작 영애의 당황한 얼굴을 보았을 터였다. 나와 후작 영애 주위로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 구경꾼이 있는 법. 구경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내가 후작 영애보다 한수 위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후작 영애의 굴욕적인 모습을 전할 것이다. 나는 한 쪽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했다.
“엘바토르 영애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시녀장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내가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그 쪽 시녀장이 내 시녀장에게 범한 잘못은 그것밖에 없습니다만.”
“…….”
내 조롱 섞인 말투에 후작 영애의 손이 꽉 쥐어진 채 하얗게 변했다. 나는 비아냥거리며 후작 영애를 차갑게 내려 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놀라셨습니까? 아니면… 너무 당연한 말을 내가 꺼내서 그러신 겁니까?”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후작 영애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내가 그에 쉽게 넘어가 줄리 없었다.
“하, 죄송하다?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부디 선처를….”
“지금 선처를 바랄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애?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했다는 영애께서 그리 상황판단에 둔하시다 말입니까?”
“…….”
“무릇 종은 주인을 닮는다 하였습니다. 영애의 시녀장의 태도를 보았을 때, 영애 역시 나를 욕되게 생각하고 있으며, 영애의 심성과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목소리를 높여 마치 판사가 피고에게 선언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또한 자식은 어버이를 닮는 법. 더 나아가 나는 안타깝게도 엘바토르 후작님의 인품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여태까지 내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루비아 후작 영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애써 수치심을 누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루비아 영애가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저에게 어떠한 모욕을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불찰로 인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자작님께서 아버님까지 모욕하신다면 참을 수 없습니다.”
‘오, 강하게 나오는데?’
억눌린 어조에서 느끼지는 후작 영애의 분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화를 내는 것보다 더한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참을 수 없다.’ 어디 해보자는 건가? 나는 비웃음이 가득했던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무례 하군요, 영애. 나는 지금 후작님을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여태까지의 정황으로 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애께서 그렇게 나오시면 저 또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뭔가 잊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무얼 잊고 있단 말입니까?”
후작 영애는 어느 새 아까 전의 차분한 표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슬금슬금 밀려오는 불안감을 내색하지 않고 나는 거만하게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루비아 영애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아까 자작님께 드렸던 말 중에, ‘싸움은 어느 한 쪽에만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었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자작님의 시녀장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겁니까?”
젠장, 얘기가 왜 또 이렇게 흘러가냐고!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내 등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이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후작 영애는 그 예의 정중한 얼굴로 내게 당당히 말했다.
첫댓글 와우! 역시 싸움은..구경해야 제맛...+ㅁ+ 시험끝나고 이렇게 여유롭게 모두읽어요.ㅠㅠ 이 감격의 순간..ㅠㅠ
ㅎㅎ 너무 잼있어요.... 처음 부터 여기 까지 다시 읽는데... 다시봐두 잼있어여..^^
헉..; 아린이 밀리진 않겠죠?? ㅠ 아린아 밀리지마!!!
역시 싸움구경이 제일 재밌는거죠, 네 (<</ . 우리 무적의 아린!! 지면 안돼 ㅜㅜㅜ!
역시 쌈구경이 최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