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목 자른 김유신?, 삼천궁녀 의자왕?, 저는 그래도 황산벌하면 가장 먼저 신라 화랑 관창과 백제장군 계백이 떠오릅니다.
오늘 그 중에 계백을 얘기 해 볼까 합니다. 계백은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서 수적 열세에도(5천 VS 5만) 굴하지 않고 패망이 뻔히 보
이는 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충직함을 인정받아 논산에 있는 '충혼공원'에 가면 그의 당당한 마상 동상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그의 충직함과 우직함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패배가 뻔한 황산벌 전투에 출전하기
전에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인것 입니다.
여러 의견들이 있으시겠지만 저는 역사 교육이 의도한 방향대로 가족과 자신을 바쳐 결연한 의지를 보였던 충직했던 역사속 장수로
막연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니... 계백 그의 나라를 위하는 충직은 높이사나 그의 끔찍한 '존속살인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가 불가능한 소시오패스적 범죄라는 것이 지금의 제 의견입니다.
나라의 패망이 자명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 던지는 것이야 자유라 치더라도 그의 처 자식의 살길은 마련했어야 마땅했고,
가족과 함께 살아서 생존을 도모 했어야 더 올바른 가장 아니겠습니까?
저도 가장인지라 적군들 손에 비참하게 죽어갈 가족을 생각해서 비탄에 잠겼을 그의 마음은 어느정도 짐작은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
걱정에 휩싸여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절규하는 가족을 하나 하나 죽인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일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계백의 파괴적 행위는 "오늘날의 도덕 관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하지만 이런 계백이 오늘날도 칭송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살던 7세기 중엽 당시의 도덕적 관념과 윤리적 사고로는 그의 파괴적 행위가 충직한 장수의 선택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 당시의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은 취악했고 따라서 가장의 마음대로 모두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도덕관이
자리잡던 시대였기에 계백의 살인도 명분을 붙여 합리화 되면 '있을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현재 우리가 볼땐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과거를 살다간 계백이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한계임을 우리는 알며 그렇기에 계백은 오늘날 '존속 살인자' 보단 충신으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백의 결연한 의지와 충직함은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일화를 "진리"라고 부르며 그를 밀접히 본받아 그의 행
동을 따라야 한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달리 신성한 기록, 이른바 "진리"로 표현되는 전지 전능한 자 "신" 의 기록 속 내용도 시대착오적 도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가요? 그것을 과연 진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3번.에 비춰본다면 계백의 행위의 기초가 된 그의 신념은 결코 진리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모르겠으나 현재에는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죠.
그럼 이와 유사한 성경의 기록들은 어떠합니까?
하느님께서 물질화한 천사 둘을 소돔에 보내셨을 때 밤에 그 도시의 폭도가 롯의 집을 둘러싸고는
부도덕한 목적에 이용하려고 그 방문객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롯은"내 형제들이여, 부디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부탁이오. 여기 나에게 남자와 결코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두 딸이 있소.
내가 그들을 당신들에게 이끌어 낼 터이니, 부디, 당신들의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시오."
자신의 딸들을 방문한 손님을 위해 소비될 수 있는 소유물 쯤으로 여기는 고대의 비 윤리적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롯의 추리와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우리는 이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올바르므로 그분이 롯을
“의로운 사람”으로 보신 데는 틀림없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롯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였기에 덮어놓고 그의 동기가 어찌됐는 그의 언행도 옳았다고 단정 짓는것이 맞습니까?
아님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 쯤으로 여기던 그 시대착오적 도덕관이 그대로 드러난 인간적 한계를 보인 증거라 볼 수 있을까요?
욥기 1, 2장 속의 "욥"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일반적 견해라면 욥의"충절, 인내"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의 충절 증명을 위해 무고하게 희생된 그의 자녀들 더 나아가 욥1:16에-“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 가운데서 타오르더니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라고 동물들과 묶어 하찮게 표현된 종들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탄이 갑작스레 재기한 중요 쟁점을 풀기위한 어쩔 수 없는 판단(?)으로 창조주 여호와께서 자신의 소유였던 욥의 시험을 묵인하시고 그로인해 욥은 영문모를 고통을 받게 된다. 그로인해 또한 욥의 소유였던 그의 자식들, 가축들, 종들이 다 죽었다. 결국 욥은 인내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축복을 받았다. 그러니 끝. 우리도 인내하자.-
"여호와께서 욥의 여생을 처음보다 더 축복하시니,
욥이 양 1만 4000마리, 낙타 6000마리, 소 2000마리, 암나귀1000마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다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게 되었다."
우선 너무 풍부히 보상해 주셔서 상세히 기록된 가축들의 수가 보이십니까?
그러면 가축들과 함께 희생된 종들의 생명은 어찌 되었나요? 왜 언급이 없을까요?
창세기에 언급된 요셉은 형들에 의해 종으로 은20세겔에 팔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래위기27:5 -5세에서 20세까지,
남자는 정해진 값이 20세겔이고) 현재 가치로 40~50 달러로 추정됩니다.
"율법에 노예에게 상해를 입힌 죄가 상대의 물건을 손상시킨 죄와 동급이었던 걸 보면 인간으로서 대했다기보다는..
물건으로 대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욥 때문에 무고하게 죽었던 당시 종들의 가치는 위에 언급된 가축들의 가치보다 같거나 낮게 여겨졌을
시대적 한계 그대로를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는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서 그들의 부활이나 회복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을 축복하셔서 다시 일곱 아들과 딸 셋을 주셨으면 충분한가요?
원래 살다가 이유없이 죽은 악울한 자식들의 생명은 무엇으로 보상 가능합니까?
부활이요? 영생에 비하면 잠깐의 죽음은 비교 불가라 충분한 보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당시 종들의 신분 보다는 나았지만 그들의 가장이었던 욥의 충절 입증을 위해서 얼마든지 소비 될수 있고
단지 갯수로 세어져 보상 받으면 그만인 소유물로 여겨지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시대 착오적 발상이라
보는것이 더 합리적일까요?
이것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를 너무 사랑 하셔서 머리카락 수까지 다 세고 계시다는 창조주 아버지의 사랑일까요?
탈관 후 다시본 성경...제 눈에는 창조주의 따뜻한 사랑 보다는 앞서 언급드린 계백처럼 인간적 관념에 휘말려 사탄이 제기했다는 모
함에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적에게 충실한 욥과 그 가족을 내어준 존속 살인의 방관자가 보입니다.
아니 사이코패스 인간 여호와가 보입니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일화(롯,욥)들이 성경이 아닌 다른 기록에서 발견되었다면 사람들은 그 내용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었을까요?
과연 진리 라고 말하며 오늘날 우리도 그 교훈을 본받자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계백 장군의 일화가 삼국사기가 아닌 성경 기록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의 처 자식들의 부활을 믿으며 계백의 인내와 충
절을 진리라고 믿고 있을까요?
진리는 어느곳에 기록 되었냐 보다는 그 기록의 내용을 통해 증명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드린 진리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했습니다.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첫댓글 재미있는 글이네요.
그런데 백제의 멸망은 서기 660년이므로 계백장군은 7세기때의 인물입니다 ^^
그렇죠.ㅋ 660년이면 7세기죠. 오타지적 감사합니다.^^
멋진 비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인간들이 불쌍해 보이는 이유가..
진리란 국어사전에 잘 설명되어 있거든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 특히 3번..보편 타당하게 인정하는 것. 이처럼 진리는 단순 명쾌해요. 사랑을 베풀고 사는 것.이런게 진리에요. 신념을 진리라 착각하는게 무서운거죠. 내가 옳다는건 진리가 아니라 그냥 신념이에요. 많은 이들이 이걸 착각하거나 망각하고 목숨을 걸죠.
그 기저에는 냉정하게 내가 옳다는 욕심.욕망이 예쁘게 그럴싸하게 포장 됐을 뿐..제가 찿은 진리..모두가 인정하는 진리..그건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있는데 누굴 죽여요? 사랑이 있는데 누굴 미워해요? 사랑이 있는데 사기치고 해할까요? 진리는 바로 내 앞ㅇ
진리의 깨달음... 부럽습니다.
'소유한다.. 소유물로 여긴다..'라고 쓰신 표현에 깊이 동감합니다. 또 롯, 욥에 대한 생각도 저와 많이 비슷하네요^^
심지어 롯은 나중에 그런 두딸들에게 강간을 당하죠..;;
과거엔 말도안되는 그 모든 의문들 덮어두기만 했으니..
동감...
감동^^!
정말 카페 게시글중 간만에 보는 명문입니다...여증식 진리서 탈관하는것이 진짜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아닐까 싶습니다...
운전 중 가끔 선글라스를 쓰고 터널에 들어가 "왜 이렇게 어둡게 해놨지?" 하며 제 두자릿수 IQ를 증명 할때가 있습니다.ㅋ
그 가짜 진리인 JW식 선글라스가 제 시야를 왜곡한 걸 30년 넘게 모르고 세상이 온통 어두운 줄 알았네요. 필터링 없이 세상을 보는 요즘 모든것이 새롭고 눈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