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촌놈이 고향을 뒤로 하고 호남선 야간열차 도둑차 타고 추운 겨울에
서울의 유학의 길에
내가 맨 처음 서울에 정착지가 67년도 마포구 도화동 산 8번지, 앞으로는
한강이 보이면서 서해로 유유히 흐르고, 당인리 발전소의 하얀 연기가
한강의 강위에 펼쳐지면서 한 편의 그림 같은 곳 .지역은 낮은 야산 꼭대기
여의도는 미루나무와 모레가 날리며 가끔 헬리콥터가 나르고 ,마포강변의
나루터가 있으며, 한강이 여름철 홍수가 나면 물구경가던 시절
판자집에 루핑집,수도물은 공동수도 아침 새벽부터 물을 기르기 위하여
물지게를 지고 나오는 아낙네들 ,주루룩 물동이를 차례로 우물가에 놓는
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눈은 부시시 잠이 덜깬 주부들도 대 다수 .....
연탄을 새끼에다 메어 사오는 서민들의 집합소 ,연탄가게의 아저씨는
그 고바위에서 지게로 연탄을 나르며 집에데 갔다 주어 삶을 영위한다.
이렇게 추운날 일찌감찌 연탄 200백장하고 쌀 한가면 부자다 한 겨울
지내는데 큰 걱정이 없다.
한강가에서 불어오는 강한 세찬 추운 바람은 집안의 물그릇에 물이 얼어
있어 , 겨울철 추위는 기승을 부리며 서민들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 쓰레
기는 잔뜩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마포구청의 대형의 쓰레기 청소차가
와서 몇 일 만에 처간다. 먼지가 날으고 아이들은 그걸 쳐다보며 마포산
8번지의 꼭대기의 서울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 먼지는 펄펄 날으고 있다.
화장실은 공동의 쓰는 화장실로 먼저 일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린다.
기다리는 길이가 약 5m는 늘어져 있을까? 나는 여기서 맨 처음 서울 생활
을 하였다. 옆집에 있는 순이는 눈치가 나를 좋아하는것 같다. 그러나 눈을
내가 줄 사람이 아니다. 지금 어디서 잘 사는지 모르겠다. 나는 가끔 문홍주
헌법책을 가방에 넣어 대학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온다.
나주초.중.고 등학교를 나주에서 거쳐 우물안의 개구리가 한양으로 유학을
(저는 선생님 뒤에 서 있습니다 )
시골 나주에서 집안을 정리하고 오시는 노부모님의 부양을 위하여 인쇄소
공돌이 신세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인쇄소로 출근을 한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쉐타 그리고 양말, 등을 가지고 고향의 친지들에게 팔고 그 대신 먹을 쌀이나
고추가루 등을 잔뜩 가지고 오셨다 그 뒤로 어머니는 몸이 아퍼 둘어 눕개 되어
그 다음해 저 세상으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병환에 시름시름하는 어머니를 돌보아 가면서 이를 악물고 방안에 추운
찬 공기속에서도 아름목을 피하여 죽을둥 살둥 모르게 공부를 하여 인천 교육대
합격을 하였다 용산역에서 인천 제물포에 있는 인천교대를 예비소집을 위하여
학교를 가는데 ,전동차 ( 지금전철) 안에 책을 든 사람들이 전동차안에 꽉차 있었다.
전부 책을 보며 서울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인 이화,진명,숙명 또는 대학을 다니던
학생들도 전부 한 축에 끼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물포역에서 전부 내린다. 주욱
이어가는게 인천교육대 운동장 (현 경인교대) 수 많은 젊은 남녀 젊은이들이 경기도의
초등학교선생이 되겠다고 모여 든 것이다 경쟁은 13:1 이며 200명 모집이었다. 그러니
약 3천명 가까히 모여든 셈이다 .나는 당당히 합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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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제 인생의 회고 입니다
이때 쯤 돼나 봅니다 책 몇 권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대학입시를 보려 갔습니다
나주 고등학교를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하여 그 추운겨울에
상경 ,그 이튼 날 부터 시립남산도서관에서 공부에 매진 , 노부모님들이 살림을 정리를 하고
올라오셔 대학공부를 중단하고 인쇄소 문선공 출신을 하다가 경기도 초등학교 선생이라도 해먹어야 겠다
하여 그 후기입니다
추신 : 밖에는 기온이 차갑고 추워지니, 이때 쯤 젊음을 자산으로 하여 나주 산골의 촌 놈이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6십 년대 가난한 농촌을 벗어 나고 파 서울로 유학의 상경 길이
새록새록 남니다 불현듯 이 글로 나의 젊음을 회고하여 어려운 시절을 이겨 나갔던 추억이
나서 한번 회고하여 보았습니다
@타트바마시 감사합니다 공감을 하여주시고 격려를 하여주시니, 참으로 눈물을 흘려가면서 가난한 환경에
노 부모님을 모시면서 가장으로 역활 , 그리고 공부 주경야독으로 나를 형성하였다고 보아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 입니다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을 하고 2학기에 행정학과 학사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라마 본 것같습니다.
도화동 산 8번지가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서해로 흐르는 한강, 마포나루터를 묘사하신 이야기가 흑백필름으로 머리속에 그려집니다.
공동 우물터 물동이,
공동 화장실.
새끼줄에 엮인 연탄은 본적 없지만
모두들 어려운 시절 이었던 그 시대적 배경은 비슷한 연배의 외삼촌께 들어 본적 있습니다.
방안에 둔 물이 엄동설한에 자고나면 얼어 있었다 하더라구요.
고생하셨고 대단하셨다는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마도 영화로 촬영한다면 흑백영화쯤 되는 이야기 입니다.
작금의 5060 세대들은 거의 모르는 삶입니다 마포 꼭대기 여의도에서 본다면 북동쪽으로 보시면 될 것 입니다
지금은 그 고지대가 아파트로 상전벽해가 되었습니다 노 부모님 모시고 가난한 시절의 회고 입니다
제가 아마도 23세 쯤 되는 67년도 쯤 보시면 됩니다 고지대라 어렵게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고비를 거쳐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공감하여 주시어 고마움을 드림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시절이면 저는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중학교때 옛 용산경찰서에서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용문동에 살았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두들
부러워하는
천직이었지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용문동에 살으셨으면 부유촌입니다 ..ㅎㅎ
하 도화동꼭대기에서 어찌나 추운지 ......
나는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합격을 하였더라고요 선생이 천직인지도 모르고 먹고 살려고
한 몸부림이지요 고맙습니다
감동적입니다 만장봉님 치열한 삶을 마주 하는 가운데서도 학업을 놓지 않으셨던 그 집념 학구열 존경합니다 글 감사힙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한 참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농촌 출신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주경야독의 시간하고 싸워야
내가 존재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선배님이 도화동 사실때 저는 효창국교학생으로 마당에
닭장을 만들어 효창공원 뒤 언덕배기 판잣집동네에 가서
병아리를 사다가 키웠습니다
감사합니다
6십 년 대 만해도 서울의 산 동네가 많았습니다 .그 이후에 산 동네들의 마을을 서울시가
정비를 하였으며, 아파트 건립 등으로 주거 정책으로 주택 난을 해결하여 나갔습니다
만장봉님이 저의 인천교대 선배님이시라니요. ㅎㅎ
관등성명 대겠습니다.
저는 80학번 인천교대 19회 졸업생 여정은입니다.
선배님은 몇 학번 몇 회이십니까? ^^
아이고 반갑습니다 어쩐지 다르 더라고요
저는 발령이 않나서 공직으로 방향을 돌려서 고생 좀 하다가 서울시에서
정년을 하였습니다 저는 72군번에 11기 김용상 입니다 .
보아하니 훌륭한 교육자요 보람 있는 교육의 현장에서 근무하신 거 같습니다
계약제를 좀 해보니 서울교대 출신들이 만터군요 어느경제 신문사 기자 출신 ,사법고시 준비하다가 들어 오신 분
저야 공무원 하다가 그냥 놀 수가 없어 초등학교로 갔지요 감사합니다
글자체가
사실적이고 귀한 역사입니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선배님들은 물론이겠고
50,60년대를 살아온 후배들도 마음이 짠~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대견스럽습니다.
우리 세대가 일제 식민지의 조상을 둔 그 이후 세대들입니다
가난의 상속을 이어 받아 어렵게 학교를 다녔고 ,신생독립 국가로써 출발하는
어려운 난관의 세대들 입니다 식민지 노예와 같은 대우 ,가난의 후예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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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 아파트 뒤의 고층 산동네 입니다
야트막한 야산처럼 되어있어 사면이 다 바라보입니다
남산이 보이고 한강이 보이고 서민들의 집합소 입니다 서민들의 달동네 ..ㅎㅎ
감사합니다
인천교대?
그당시 인천의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제일먼저 미팅을 하던 대학이 인천교대 이엇다
그런데 부딧쳐보니 별로 이엇다
그래서 2학년때 부터는 미팅상대 여대가 바뀌기 시작햇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 내동창들 중 인천교대 출신과. 결혼한분이 종종 보이곤 한다
이상 나와 인천교대와의 인연을 말씀 드렷습니다
충성 우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