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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1일 화요일[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제1독서 : 지혜 2,23―3,9
복 음 : 루카 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의 묵상
김 동희 모세 신부
“겸손하게 섬겨라.”라는 소제목이 달린
오늘 복음은(루카 17,7-10 참조) 조금 모질게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종은 모름지기 주인의 호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철저히 종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왜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잘못된 전제를 바로잡으시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 전제의 오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리가 옳게 전개되지만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에
자세히 살펴보면 기본 전제가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인과응보 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하느님께 그에 맞는 보상을 받겠다는 것이지요.
크게 나무랄 만한 태도는 아닐 수 있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크나큰 호의에 바탕을 둔 계약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어릴 적 세뱃돈을 많이 받아 어머니에게 맡긴 적이 있습니다.
며칠 뒤 그에게 돈을 달라고 하였더니 다 쓰고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울며 따졌더니 어머니는
“그래, 그러면 그동안 내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거 다 내놔!” 하셨습니다.
어린 저였지만 어머니가 그동안 키워 주신 은혜가 더 큰 것을 알기에
눈물을 닦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이라 하신 것에 섭섭해 하기보다는 먼저 나에게 부어진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은 전쟁 중이라 갈 수 없지만,
이제까지 경험을 볼 때 성지순례 중의 최고는 단연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된 성지를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이 장소를 통해 주님을 더 뜨겁게 그리고 가깝게 느끼게 됩니다.
나자렛 거리를 돌아다니며 2,000년 전의 예수님 유년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장난도 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았을 때의 사건 이후부터
공생활 시작 전까지의 기록이 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완전히 우리와 똑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었던 어린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기에,
현재 보이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저는 ‘부수기 대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뜯어보곤 했습니다.
문제는 머리가 나빠서 다시 조립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 손만 다면 다 부서진다고 ‘부수기 대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장난도 많이 쳤고, 싸움도 했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누가 커서 신부가 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과거를 통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통해서는 미래를 알 수 있을까요?
이 역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늘 뜻밖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쓸모없는 종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그의 시간과 노동력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해서 쉴 수 있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즉, 이 정도 했다고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자기 공로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은 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행위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거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의 복을 주셔야 한다는 거래가 아니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실한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 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하고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말하는 주인을 섬기는 겸손한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조 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드시며,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특별히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는 곧,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아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 모든 선행은 은총 덕분이다.
우리가 그것을 내세우려 한다면,
은총을 거부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8,31)
즉,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느님 은총의 열매이며,
우리는 그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낮추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봉사가 본래 하느님께 대한 의무임을 고백하는 겸손의 태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을 빚 갚음으로 여기라.
은총을 얻기 위한 흥정이 아니라,
주님께 진 빚을 갚는 것임을 잊지 말라.”(Homiliae in Matthaeum 25)
따라서 참된 제자는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며, 더 큰 사랑과 봉사로 나아간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이 말씀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으로서 순종하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권세가 아니라, 봉사이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랑이다.”(104항 요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을 묻는다.
나는 봉사할 때, 은근히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바라지 않는가?
내가 한 선행을 내 공로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봉사와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는가?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높여주는 태도이다.
우리가 맡은 일을 다 하고도
“주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봉사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귀한 향기가 된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복음 묵상의 내용은 오늘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구절을 선택했습니다.
군인이 해야 할 일은 훈련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공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국민을 위해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서품 받을 때 했던 독신, 순명, 신앙고백의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 병자를 고쳐주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세례 받은 신자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마음에 새긴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시련과 고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시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금전적인 손해를 보거나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인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고,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또 다른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개업한 병원에서 피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몸의 지체들이 62년 동안 불평 한마디 없이 자기 몫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장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뛰었고, 허파는 새 공기를 들이고 탁한 공기를 내보냈습니다.
손은 글을 쓰고 음식을 만들고 성사를 집전하도록 도와주었고,
발은 기도하러, 병자를 찾아, 봉사하러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몸의 지체 하나하나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충실히 일하고 있는지를 깨달으며,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일본의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 씨는
5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며 깨달았다고 합니다.
“운이 좋은 사람은 감사할 줄 알고, 자신이 한 선행을 굳이 알리지 않는다.”
반면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속에 교만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을 잊으면 봉사해도 그것이 공로가 되지 않는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을 잊으면
봉사해도 그것이 공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 안에서 사제는 봉사자여야 하고, 성사를 집전해야 합니다.
봉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이고,
성사의 집전은 사제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미사와 고백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 국가도 가히 고르게 할 수 있으며
벼슬과 녹봉도 가히 사양할 수 있으며 서슬 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지키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맡겨진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고, 봉사와 성사 집전을 잘할 수도 있겠지만
사제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참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한 신자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싫은 소리,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으세요?”
저는 그분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머리로는 싫은 소리, 충고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저의 마음과 감정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저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섣불리 남에게도 충고나 조언하지 못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종이 주인을 위해서 일하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주님께로 돌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의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도 분부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동료 회원들, 사제들 가운데 정말이지 우러러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고난 개척정신과 탁월한 선교 정신, 거기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
저는 한국어 하나도 제대로 안 되는데,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한 살레시안은 구사하는 외국어 수가 엄청납니다.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불어, 독어...
그러다보니 당연히 중책이 주어져서, 전 세계를 안방 드나들듯이 드나듭니다.
틈만 나면 장거리 해외여행이 잡혀있기에, 삶이 참 피곤해보이지만,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참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16~397)도 그랬습니다.
그도 다양한 달란트, 그 위에 영혼 구원을 위한 강렬한 에너지를 지녔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영웅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마르티노의 이력서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원래 이교도였습니다.
헝가리 이교도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군인의 길로 들어섭니다.
든든한 빽인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그는 평생 군생활을 하다가 편안히 정년퇴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 생활 중에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말을 갈아탑니다.
힘과 권력과 출세의 말에서 내려 그리스도의 말로 갈아탄 것입니다.
사제로 서품된 마르티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합니다.
당시 다양한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복음선포 활동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교도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추방되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후일을 기약하며 깊은 산속으로 피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꿋꿋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마르티노의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는 감동적이고 명쾌한 강론으로 수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켰으며,
방황하고 흔들리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습니다.
이방인 군인 장교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그리스도인에서 주님의 거룩한 사제로,
사제에서 주교로 직분이 바뀌었지만,
그의 마음속 갈망은 오직 한 가지 가난하고 겸손한 수도자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 마르티노여!
수고도 죽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니,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았으며,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눈과 손을 항상 하늘에로 드높인 채
그의 무적(無敵)의 마음은 기도에 굳게 매달려 있었습니다.”(술피치노 세베로의 서한 중)
쓸모없는 종의 행복
전삼용 요셉 신부
찬미 예수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의 위대함과 그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로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그는 사흘 밤낮의 처절한 사투 끝에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배에 묶여 있던 것은
살코기 한 점 없는 거대한 '뼈'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 노인의 모습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했지만,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일'을 했지만, 세상은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토록 위대했지만, 왜 그 '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여기, 이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장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벽돌을 나르고 있는 세 명의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빌어먹을 벽돌을 나르고 있소."
그에게 '일'은 그저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브룩스나 헤밍웨이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눈을 빛내며 환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은 고통 속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의무감 속에서 일했지만,
세 번째 사람만이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그의 '일'은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비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얼른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고 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한 것을 다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9-10)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차갑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고작 '쓸모없는 종'이라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울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그 '일'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며 행복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벽돌공이 "나는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행복하게 외쳤을 때,
그가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제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자랑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 '일'을 하는 내내 제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일'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날의 행복도는 매우 높이 상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죄책감에 빠져 자신의 옛 '일', 즉 생존을 위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단 하나의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스승으로, 목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이든, 운전이든, 아이를 돌보는 일이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헤밍웨이의 허무함이 아니라 세 번째 벽돌공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생각보다 죄를 짓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서로를 존중하며 선하게 살 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대로 악한 사람이 등장하곤 합니다.
환경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좋은 환경에서도 그런 사람이 태어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일상에서의 작은 유혹 때문입니다.
단단한 둑도
작은 구멍이 하나 생기면
이내 구멍이 점점 커져서 무너지게 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마음이
어느 순간 위태롭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행복을 위한 간직하고 지켜야 할 가치마저도
타협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흔들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신앙 여정을 멀리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지켜나가는 것이고
많은 시험들을 나의 성장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만큼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만큼
겸손된 자세로 하느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거룩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였음을 기억하며
해야 할 일을 하며 작은 유혹을 경계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종들의 세상
박 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카 6,13; 마태 6,24)
인간이 하느님께 보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곧 빚이 아닌가?
그 빚을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당시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채권자의 종으로 귀속되는 이치만 봐도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착각을 경계로 삼아
예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