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들 황제가 되고 싶어하나 이해가 잘가지 않았지. 금은보화와 미녀, 막대한 권력, 자신의 업적과 역사에 남을 기록들... 그런건 귀족일때도 얼마든지 할수 있잖아. 근데
오늘 알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황제가 되야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단의 복무 선서를 들을수 있어서 다들 그렇게 황제가 되려 했나 보군."
나는 병상에서 너스레 농을 던지는 황제폐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농담하실 여유가 있으신걸 보니 곧 전장에 서실날도 멀지 않은 듯 합니다. 다음 전장은 좀 강력한 놈으로 부탁드리죠. 그때 지리지 마십시오. 이미 아시겠지만 전장에서
황제의 속옷까지 갈아입히는 건 저희 복무규정에 없는 일입니다."
"아아... 그래그래 잘알고 있지. 황제의 속옷은 아무나 갈아입힐수 있는게 아니지. 오죽하면 테오도라 황후께서는 보라색 팬티는 포기할수 없다며 반란을 피해 도망가는
대신 진압하는 걸 택하셨을까..."
"뭔가 왜곡이 좀 심한듯 하지만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보고부터 올리겠습니다. 지난 3년간 카프카즈 전선에서 남방으로 정규군으로 압박을 하며 북방에서 바랑기안을
비롯한 현지 용병들로 지속 압박을 한 결과 몇일전 조지아와 알라니아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었습니다. 이제 복잡한 외교적 공방이 오가겠지만 카프카즈 전선에서는
주력부대를 철수시켜도 무방할듯합니다. 헝가리 전역에 대해서도 에스테르곰 공작의 내응으로 게자 2세를 체포하고 페스트와 템즈를 우리 제국의 영역으로 확보하였습니다.
당분간 헝가리 전선도 역시 한산할듯 합니다. 곧 두 전선의 병력들이 귀환을 시작할꺼고 일정기간 휴식과 훈련이 진행되면 서둘러 그들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지적이다. 그 재배치는 곧 새로운 전장을 의미하지. 여기서 근위대장의 식견을 확인해보지. 내 가 생각한 다음 공격목표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파티마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진 세개의 성지,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하니깐요. 헤라클레이오스의 팽창 정책을 다시한번 공표하신 황제폐하의 정책의 근간으로
전임 황제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서 회복하고 영광을 거두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다 알아서 해주는 근위대장이 있으니 걱정거리가 덜었군. 그래 우리의 공세의 방향은 레반트와 이집트이다. 지중해의 해상보급로를 따라 해안도시를 탈환하며
적직 깊숙히 진격하여 옛 제국의 곡창지대까지 군사를 내어 평정하는 전무후무한 대사업이다. 이미 그것을 판단하다니 역시 자네는 제국 최고의 명장이야. 이래서야 제국
첩보부에서 기밀로하자고 유치한 보안정책이나 강화할 필요가 없잖아."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요하네스 공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꺼라 생각합니다만..."
"아아... 그래, 그 녀석이 있었지. 하지만 그녀석은 그런 얘기 안했어."
"네? 정말입니까?"
"응, 그 녀석은 이미 말하지도 않고 부대를 수도가 아니라 아다나의 작전 전초기지로 이동시켰어. 망할 아들놈, 내가 조금만 더 멍청했으면 반란으로 오해하고 체포하란 명을
내릴지도 모르는데 대담한건지 겁대가리가 없는건지 원..."
"콤네누스는 실리를 중시하지 않습니까? 요하네스 공은 그것을 폐하께서 이해하시리라 생각했을겁니다."
"해석이 명언이군. 그래, 뭐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때문에 조금 문제가 생겼네."
"어떤 문제입니까?"
"제국의 전 주력부대가 동원될 작전이다. 자네, 거기서 요하네스와 같이 작전 조율해서 싸울수 있겠나? 둘이 지금 사이 안좋은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잠시 심각해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그는 고귀한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사감으로 작전을 그르치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황제폐하와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울뿐 불필요한 일로 그와 마찰을 빚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점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란게 있지. 제국의 불세출의 두 명장이 예전에 절친이었다가 지금은 같이 밥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다른 부대의 장병들은 조금 불안하게 생각하게
될듯하네. 그렇다고 한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는 황제의 근위대인 자네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도 웃기고, 제국의 황태자인 그 녀석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도
많이 어색해지지. 황제는 그런 것까지 감안한 인선을 해야 하지. 그래서... 결론을 내린건 자네는 시리아 방면에서 내륙에서 오는 무슬림 원군의 방패역활을, 그리고 요하네스는
레반트를 넘어 시나이를 지나 이집트 본토로 가는 창의 역활을 맡기려고 하네. 수락하겠나."
나는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 마음을 접고 대답했다.
"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몇달후 우리 바랑기안의 안티오크 기습을 발화점으로 레반트 탈환 전쟁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명령대로 우리는 시리아 방면에서 우회해서 오는 파티마의 기습부대나 지방
토후들의 원군들을 남김없이 도끼밥으로 만들며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는 주공의 측면을 지키는 벽 역활을 수행했다. 하지만 무슬림의 특성상 병력을 축차투입하면서 소진하리라
생가되었던 적들의 작전은 지나친 과소평가의 발로였다. 파티마의 명장이었다 칼리프가 된 잘랄웃딘은 전방에 배치된 주력부대를 소진하지 않고 이집트 본토로 불러들여
병력의 집결을 개시하였다. 곧 정예부대와 지방 토후들의 군대를 합쳐 거의 5만에 육박하는 대군이 시나이 남쪽에 편성되었다.
우리는 지연전술로 들어갔다. 5만의 대군의 보급은 원활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아군의 병력을 집결하여 시나이 반도 너머의 페트라에 진을 치고 적의 동향을 관찰했다. 우리측이
병력은 적지만 보급과 정예 병력은 훨씬 우세하다. 우리는 적이 보급 부족으로 인해 곧 움직임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이 나타났을때 우리는 경악할수 밖에
없었다. 적들은 베네치아의 잔당들과 해군 용병 계약을 맺었고 거의 5만여명이 탑승 가능한 함선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불러들였다. 상륙전이다. 곧 제국 첩보부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목격되었다. 적의 상륙지점을 예상해야 한다.
예상 목표는 세군데,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해군기지가 있는 키리비오트, 그리고 우리 원정군의 보급기지가 있는 안티오크였다. 곧 집결한 병력중에 3만이 승선하고 출발
대기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긴장감은 더해졌다. 그리고 어느 목숨을 건 첩보작전의 결과로 적들의 행선지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밝혀졌다. 위치가 알려지자 각 부대에
명령이 떨어졌다. 기존에 레반트 원정군은 각 점령한 레반트 지역에 점령지들을 넓히고 성들의 항복을 받아낸다. 수도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의 부대는 제국군 총동원령을 통해
그리스와 왈라키아의 징집병 4만이 상대하기로 결정되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주력부대를 회군하는 건 적들이 바라는바, 주력부대의 적의 본토 침공은 잠시 보류하더라도
전선을 유지하여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수도에 대한 기습공격은 그에 상응하는 병력으로 상대한다. 현재로서는 가장 적정한 판단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곧 부대를 이끌고 아즈자르카의 점령을 위해 북상했다. 요하네스와는 집결해있는 몇일 동안 작전 협의외에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못내 서운함을
느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단 것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요하네스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 나는 조금 이른 전역을 고민하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근위대장을 전역하고 나서 에보카티 예비역으로 재입대 하는 방법도 있으니 부대에서는 계속 머무를수 있다. 나는 그가 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몇일후 예상치도 못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적들이 자파에 상륙했다고?"
"폭풍우를 만나 원래 목표인 크레타를 경유해 도성으로 가는 항로를 포기하고 우회해서 자파에 상륙했다고 합니다."
전령으로 달려온 생도대장이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
"이런 망할... 우연치고는 더럽게 운이 안좋군. 마침 부대가 지역 점령때문에 산개한틈에 우리 후방에 대군이 전개한 상황이잖아. 우리도 어서 집결해서 병력수를 맞춰서 대응해야해."
"근위대장님... 문제가 있습니다. 일부 부대들이 여전히 페트라에 멀지 않은 지역에 있습니다. 집결을 위해 분산되서 이동하다가는 적들에게 각개격파당할것 같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현재 적에게 가장 인접한 부대는?"
"캐타프랙터 연대입니다."
"좋아, 요하네스라면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면서 시간을 벌어줄꺼야. 다른 부대들의 집결은 포기한다. 우리를 티루스로 강행군해서 캐타프랙터와 합류한 뒤에 거기서 적들과 교전한다."
나의 말에 부대장인 에기놀프가 이의를 제기했다.
"무모합니다. 시간에 맞출수 있을지 거리가 애매합니다. 그리고 다른 부대들이 집결하지 않으면 병력수가 절대적으로 열세입니다. 우리와 캐타프랙터가 합류해도 적들은 우리의
3배 이상의 전력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곧바로 합류해서 조율없이 교전을 벌이면 부대간에 효율이 날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안티오크까지 후퇴해서 병력을 재집결하심이..."
"그러면 지연전을 펼칠 캐타프랙터 연대는 무사하지 못한다. 그들을 잃으면 설령 다른 부대들이 안티오크에 무사히 집결한다 해도 승산을 기대할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슨 이유입니까?"
"안가면 그 녀석들이 우리보고 겁쟁이 고자새끼라고 놀릴지도 모른다."
"다들 경장비로 무장하고 강행군 준비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라이벌들이 조롱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의외로 부대의 사기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그들과 그런 심한 경쟁의식을 느끼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부대의
다른 녀석들은 우리 라이벌 녀석들이 엿먹는 장면을 보는 자리라면 월급을 다 털어서라도 관람 티켓을 구매할 용의가 있는 듯 했다. 나는 낙오하는 녀석들이 없도록
행군속도를 조절하면서 부디 늦지 않기를 기도했다. 다행히 정상 행군 거리로 열흘이 걸리는 티루스에 3일만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시저의 10군단이 있었다면 그 표정을
보고 싶은 행군속도였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기 몇분전 이미 교전은 시작되었고, 캐타프랙터 연대는 거대한 적의 공세에 힘겹게 돌격과
응사를 반복하며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뿔나팔을 불어라! 우리가 왔다는 것들 아군에게 알려라!"
뿔나팔 소리와 거대한 함성이 하늘을 찔렀고 우리는 곧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적들의 주력은 우리 제국을 오랫동안 괴롭혀오고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킨 파티마 왕조의
친위부대, 맘루크들이었다. 칼리프의 노예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장비와 실력을 가지고 주변 2만여명의 보조병력을 총알받이로 사용하며 빈틈없이 전력을 유지하며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그들의 주력 기병들은 아직 예비로 아껴두고 있었다. 우리의 접근은 알아채자 캐타프랙터 연대는 동요했다. 나는 저너머로 깨알같이 작게 보이는
요하네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언의 눈빛이 오갔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우리 부대와 적군들, 심지어 그들도 놀랄 명령을 내렸다.
"모두 퇴각하라! 병력을 보전하라."
몇일간 용감하게 적의 공세를 지연시키며 긍지높게 싸워온 캐타프랙터는 우리의 출연과 동시에 비겁하게도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캐타프랙터 연대 내부에서도 웅성거리며
말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들은 중앙으로 돌격하는 우리를 내버려두고 양 날개로 도주를 시작했다. 우리 부대원들 역시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부대원들에게 정숙을 명했다. 그리고 3열로 대형을 갖추고 적들을 향해 진격했다. 적들 역시 동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원군이 왔다고 하지만 그대로 지원군에 전선을
맡기고 꽁무니를 빼는 캐타프랙터 연대를 보며 비웃으면서도 다음 대책을 수립하느라 고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적군의 움직임이 발생했다.
"양 날개로 기병대 출격!"
적들은 특유의 알라를 외치는 함성을 지르며 지금까지 아껴두고 있던 주력부대를 양 날개로 퇴각해 이제는 우리 뒷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캐타프랙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치는 캐타프랙터를 확실하게 추격 섬멸한 이후 우리를 포위할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은 우리가 바라던 바였다. 적의 예비부대를 모두 소진하는 것.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부대원들이 일부 뒤로 돌려 적 기병대가 후방에 들러오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했다. 오로지 정면에 집중하고 부대를
3열 횡대로 도열시켰다. 적의 중보병과 경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어왔다. 나는 히죽 웃으며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통쾌한 기분으로 소리쳤다.
"트리아리가 상대한다!"
내 명령에 따라 1열과 2열의 부대가 일사분란하게 양 날개로 산개하여 이미 양익의 부대를 아군의 추격에 써서 측면이 비어버린 적군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우리
부대의 정예들은 정면에서 밀려오는 2만명의 압박을 바랑기안의 방식으로 쳐부수며 자리를 이동하지 않았다. 적들의 지휘관을 계속 공격을 명했지만 정면의 우리 거친 녀석들의
손에 육편이 되어 날아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적들에게 무한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양 날개를 친 우리 부대도 적들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전장을 이제 우리가 주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시절 졸업시합의 그 전투를 떠올렸다. 나는 거짓 퇴각 전술을, 녀석은 3면 포위전술로 서로에게 일격을 날렸지. 오늘은 반대로 그때 서로가 사용했던
전술을 사용하여 공동의 적을 뭉게고 있다. 곧 후방에서 함성이 울려퍼졌다. 아아... 이미 알고 있다. 유인되어 산개한 적의 기병대가 벌써 처리되었군. 우리의 승리다.
나는 방금전 우리 옆으로 후방으로 퇴각했던 캐타프랙터 연대가 다시 돌아와 적들의 양 날개와 후방으로 난입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내 눈앞에 시미터를 든
병사의 머리통을 쪼개버렸다.
전투가 종료되었다. 제국은 환호에 휩쌓였다. 우려하던 적의 정예를 아무리 주력부대이기는 하지만 3분의 1밖에 안되는 우리 바랑기안과 캐타프랙터가 무참하게 박살내버린
것이다. 곧바로 다른 부대들은 집결해서 기다릴 필요도 없이 적의 본토를 향해 진격했고, 너무나 엄청난 패배의 충격에 적들은 이렇다할 반격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올해가 가기 전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여 항구로 들어오는 황제를 맞이할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나는 항구에 도착해 수백년만에 수복한 제국의 본토를 밟는 황제의
앞에 요하네스와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병마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듯 황제의 얼굴은 다소 어두워 보였지만 수백년만에 이룩한 제국군의 쾌거에 표정만은 그 어느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곁눈질해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완벽하게 군의 중심과 양날개에 역활을 맡아 완벽한 호흡으로 적을 물리친 우리를 과거 메소포타미아의 영웅들이었던 길가메시와 엔키두를
비교해가며 칭송했다. 요하네스는 그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유년시절의 호승심과 청년시절의
연대감과 내가 주어야 했던 깊은 상처에 대해 회상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친구로 생각할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황제가 되면 그는 나와 다른
존귀한 위치에서 나의 섬김을 받는 지존이 된다. 나는 그날 그에게 받은 모욕보다는 그와 같은 선에서 설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더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황제의 치하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밤... 화려한 연회가 마쳐갈 무렵 나는 요하네스와 함께 황제의 숙소에 불려갔다.
"충분히 즐겼나? 다들 수고가 많았네. 다시 한번 제국의 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그 옛날 졸업시합장에서 만났던 제국의 효웅은 다소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안광을 보이며 우리를 보고 말했다.
"이제 전쟁은 자네들 같은 불세출의 영웅들의 것이 아닌 재미없고 따분한 관료와 현지 병력의 것으로 바뀌어 갈것 같군. 이제 제국의 판도는 과거 유스티아누스의 영광을
상회할만큼 넓어졌고 자네들같은 제국의 주력부대들을 파견하기에 전략적 부담이 너무 커졌지. 그리고 나또한 이제 예전같지 않지. 이제 전쟁의 선봉에 서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병상에서 다음일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죽기전에 이렇게 영광의 끝자락이나마 잡을수 있던게 주님이 내리신 내 마지막 축복이라 믿어도 좋을듯하네."
"폐하께서는 아직 제국의 무력의 상징이십니다. 저희는 폐하가 일어서셔서 노도와 같이 적의 잔당들을 물리치라 명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약한 말씀이나 죽음을
거론하지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아직 제국을 위해 할일이 더 있으십니다. 그리고 저도 황제의 역활을 맡기에는 부족함이 많고 아직 돌아봐야 할 전장이 넘쳐납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마시길
바랍니다."
나와 요하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젊은 레오도 견뎌내지 못했던 병마를 내가 어찌 감당하겠나. 이 또한 거대한 권위에 자만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인것을 무리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길 바라네. 아아... 그러고 보니 레오가 그립군. 자네 두명과 그 친구까지 세명이서 이 제국의 미래를 떠받드는 대들보라 생각했는데 한축을 이렇게 빨리 잃을 줄이야..."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레오 카미테로스가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나는 전우로서 같이 싸울수 있기를 고대한 한 무인의
요절을 애도하고 동시에 남겨진 미망인에 대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수 없다. 나의 그런 생각속에서 황제폐하는 말을 이어갔다.
"이제 잠시 원정을 중단하고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네. 텐그리를 믿는 일칸국과의 동맹은 굳건하네. 이교도이지만 무슬림을 상대하는데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지. 그들과
약정된대로 이제 군단들은 시리아 지역의 독립해나간 일부 무슬림 군벌들을 평정함과 동시에 기지로 복귀를 할 예정이네. 요하네스, 너 역시 네포우드 전선의 평정을 마친 후에
도성으로 돌아오너라. 너를 공동황제로 임명하고 앞으로 있을 황위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겠다. 그리고 루셀도 역시 시리아 지역을 점령함과 동시에 제국으로 복귀하라.
새로운 황제의 사열을 받아 제국의 권위가 굳건함을 만방에 알리도록 하겠다. 올해까지 전선을 안정화 시키고 당분간 내치를 정립하겠다. 모두들 오랫동안 수고해주었다."
우리는 황제의 강력한 의지에 더 말을 할수 없었다. 기침을 심하게 하는 황제를 쉬도록 물러나오며 나는 요하네스에게 말했다.
"제가 불편하시다면 사열식을 마치고 근위대장의 자리를 에기놀프에게 넘기고 전역하겠습니다."
요하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말했다.
"아그네는 지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고 있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뿐이라고 생각한다만."
"폐하, 저는..."
"아무말도 하지 마라. 나는 충분히 너에게 실망했다. 오직 너만이 내 주변을 맴도는 권력과 지위에 굶주린 늑대들과는 다른 녀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너라면 아무런 경계없이
친구가 될수 있을것이라 생각했고, 내 여동생을 맡길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너는 그저 권력에 복종하고 사람의 마음 하나도 받아주지 못하는
겁쟁이 야만인이다. 이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너는 나와 영원히 대등하게 설수 없겠지. 분명 너에겐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것에 상관하지
않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더이상 너에게 기대하지 않겠다."
그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걸어나갔다. 나는 슬픔을 느꼈다. 그 또한 나를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크게 배신한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황제의 지위보다는
전쟁터에서 어께를 맡대고 한바탕 난리를 친 다음 술집에서 사납게 웃으며 한잔 걸치는 친구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 그를 나는 벽을 쌓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 벽을 허물지는 못할것이다. 나는 조용히 부대의 복귀 이후 근위대장 직위의 인수인계에 대해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처소를 빠져나왔다.
운명의 시간은 시리아 전선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던 작은 성에 찾아온 한 전령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오기전 우리는 몇일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두고 과거 콘스탄티노플에서
젊은 치기로 쳤던 사고를 사납게 웃으며 회상했고, 그날 한모금씩 먹었던 와인 비슷한것도 찾아볼수 없었던 성채에 저속한 농담을 지껄이고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부대들은 현지
부대를 제외하고 본대로 복귀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우리 바랑기안과 바스라의 토후와 외교적 협상을 위해 떠난 캐타프랙터 연대 뿐이다. 그때 나는 전장에서 졸업을 앞두게 된
생도대장에게 내년에는 도성에서 졸업시합에 멋지게 활약할수 있겠다며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 무리 하지는 말게나. 알고 있겠지만 피를 보는 것은 금지인 행사야. 그래도 지나치게 흥분하며 피를 보거나 큰 부상을 입는 친구들이 종종 있단
말이야. 부디 차가운 물처럼 냉정함을 잃지 말도록 하게나.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네."
나는 어느새 근위대장님과도 많이 닮아 있는 듯 했다. 그의 대사를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여전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을 두들겨 눕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듯 합니다. 외람되지만... 근위대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듯 합니다만..."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멋 옛날에 기억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근위대장님이 하셨던 말씀을 전해주고 나는 실패했지만 내앞의 차세대들은 부디 서로 친구가
될수 있기를 기대하며 답을 해주려던 찰라였다. 누군가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에기놀프였다.
"대장, 제국 첩보부에서 밀사가 왔다. 뭔가 심각한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그의 긴장된 표정에 나는 면담을 중단하고 서둘러 그들을 만나러 갔다. 밀사들은 황급하게 달려왔는지 아직도 숨이 턱에 차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나는
그들이 서둘러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칸국이 배신했다고?"
"그렇습니다. 수니파로 갑자기 개종한 그들은 병력을 몰아 시리아에 지하드를 선포했습니다. 지금 페르시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그들의 공포의 군단들이 노도와 같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외무부 녀석들은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될때까지... 서둘러 철수해야 겠군. 잠깐, 아직 잔류부대가 남았다. 캐타프랙터 연대... 바스라로 간 그들을
서둘러 구출해야 한다. 맙소사 정말 큰일이군. 지금 거긴 황태자 전하까지 계시잖아. 제국 황위 1순위 후보가 적진 한복판에 있는 상황이군. 에기놀프! 당장 부대원들 집합시켜.
강행군으로 녀석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나의 명령에 첩보관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근위대장님, 지금 캐타프랙터 연대는 너무 깊이 들어가있습니다. 지금 그들을 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미 적들의 선봉부대는 다마스커스까지
와있습니다. 그 와중에 그곳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불충한 개자식들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귓구멍 막혔냐? 지금 제국의 황위 1순위 후보가 거기 있단 말이야!"
나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분명 제국 황위 1순위 후보는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국 1순위 후보를 도저히 구할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제국 황위 2순위 후보와 3순위 후보의 안전이라도 확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첩보국의 동료들 중 살기를 포기한 몇몇 요원이 지금쯤 바스라에 도착해 같은 연락을 전하고 있을 겁니다. 루셀 근위대장님. 당신에게 지금 내려진 지령은
1순위 후보가 아닌 2순위와 3순위 후보를 우선 구하라는 것입니다."
"젠장할... 그 멍청한 개자식이 누구야? 당장 구출해준 다음 요하네스를 구하러 가겠어. 누군지 대답해!"
첩보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바로... 당신입니다."
순간 부대의 장교들이 침묵했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그들의 말에 소리쳤다.
"설명해봐!"
"지금 황위 2순위 후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 아기님이십니다. 바로 아그네님의 태중에 계신 아기님이죠. 그분이 남자일 경우 다음 황제는 그분이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여자아이거나
유산할 경우 3순위 후보는 아그네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후보들은 승계를 하기에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2후보에게는 섭정이, 3후보에게는 부군이 필요합니다. 저희 첩보국에서는
섭정과 부군으로 선택될 사람을 당신 이외에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습니다."
"내... 내가 황제?"
"그렇습니다. 이는 또한 병환이 심각하셔서 지금 몇일을 못가실듯한 황제폐하께서 마지막으로 정신이 온전하신 상황에서 내린 지시이시기도 합니다. 요하네스를 구할수 없다면
루셀에게 제국을 맡긴다고 전하셨습니다. 저희와 같이 최우선적으로 탈출해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나는 아연해졌다. 스코네의 천한 출신인 내가 제국의 황제라니... 하지만 논리적으로 그것은 문제될것이 없었다. 아니, 현재 제국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첩보관의
말처럼 바로 나였다. 그리고 현재의 비상사태에서라면 나는 아그네를 아내로 맡고 태어날 레오 둑스의 아이의 후견인으로 제국을 책임져야만 한다. 그것이 제국을 위하는 가장
합리적인 길이고, 요하네스도 동의할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 오랫동안 나와 같이 울고 웃으며 전쟁터를 누빈 동료들이 뭔가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지금의 시간속에 내게 얼마되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추억...
'돌아오실꺼죠?'
내 기억속에 남아 있는 갈라타의 배를 타고 멀어져가며 나를 바라보고 말하던 아그네의 애절한 모습... 나는 결심했다.
"돌아가겠다!"
요하네스는 많은 보급품들을 버리고 최소 장비만을 갖추고 사막을 달렸다. 바스라에서 토후들이 내놓은 무슬림 답지 않는 술잔을 의심한건 옳바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연회장에서 벌어진 난투극에 몇몇 부하들을 잃었고 그제서야 달려온 첩보관들에게 들은 소식으로 함정에 빠졌음을 알수 있었다. 적의 위치를 파악했을때 이미 절망적인 상황임을
그는 알수 있었다. 이미 적의 선봉부대는 퇴로를 차단할수 있는 길목으로 앞질러가버렸다. 그리고 한편으로 바랑기안측으로 간 첩보관들이 루셀을 탈출시키려 한다는 소식에
조금은 안심을 할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실패하더라도, 복수를 해줄 사람이 있다. 그는 귀족답지 않게 품위 없는 말로 배신한 일칸의 군사들을 욕하며 앞으로 그들을 도륙할
저승사자가 분노했다는 점에 작은 애도를 표했다. 앞에선 생도대장이 소리쳤다.
"전면에 흙먼지 발견, 적부대로 예상됩니다."
벌써 3번째 적들의 분견대와의 교전이다. 다행히 그때마다 큰 피해없이 물리칠수 있었지만 우리측의 피해도 조금식 누적되고 있었다. 이런식으로는 위험하다. 그리고 정면을 보자
생각보다 흙먼지의 규모가 거대했다. 상당히 많은 병력이다. 이번에는 가벼운 피해로 마칠수 없을지도 모른다. 요하네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여파가 부대에
미칠것을 두려워 더욱 크게 소리치며 적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캐타프랙터 돌격!!!"
"제국과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순식간에 쇄도해간 그들은 흑먼지 속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가졌다.
"어이~ 좀 늦었네."
그것은 처참하게 유린된 일칸 궁기병 부대와 그들을 기습해 짖밟은 바랑기안들의 모습이었다. 요하네스는 기가막혀 하는 부대원들을 뚫고 나와 나의 멱살을 잡았다.
"너 지금 무슨짓을 한거야. 왜 여기 네놈이 있는 거냐!"
"흐음... 여기가 캐타프랙터 녀석들을 엿먹는걸 보는 최고의 좌석이라고 누가 그래서..."
"장난하냐!"
"우리는 황제의 근위대, 다음 황제를 구하러 오는 건 당연하잖나."
"지금 나를 구하는 건 다음 황제를 포기하는 행동일 뿐이다. 이 미친 자식, 제대로 말못해."
나는 분노한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돌아간다면, 친구와 같이 돌아갈수 있길 바랬다."
"너어... 이 자식이..."
"같이 돌아가자. 요하네스. 나의 친구여... 옛 원망이 있다면 내가 사과하지. 그리고 다시는 후회하고 상처입힐 행동을 하지 않겠다. 같이 가자."
그는 더 아무말도 못하고 내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부대로 돌아가며 소리쳤다.
"저 야만인 녀석들과 동행한다. 부대를 4개로 나누고 바랑기안을 중심으로 전후 좌우에 배치한다. 어서 서둘러!"
나도 그에 맞추어 지시했다.
"중앙에 행군대형으로 이동한다. 최대한 속보로 기병에 발목을 잡지 않도록 무거운 짐들은 버리고 최소한의 식량만 휴대한다."
그리고 40일간의 전설적인 행군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40일간 27회의 적과의 교전을 겪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바랑기안이 중심을 버티며
캐타프랙터의 연계를 통해 적을 물리치고 행군을 계속 했다. 적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산악지대와 사막으로 이동하면서 우리
바랑기안도, 캐타프랙터도 조금씩 병력이 소진되어갔다. 우리와의 전투에 열이 받을대로 열이 받은 적들은 거의 5만여명의 병력을
분산시켜 하루하루 공격해오는 차륜전으로 우리를 괴롭혔다. 그날도 기습해온 적은 많은 피해를 입고선 겨우 산골짜기에 조그만
진을 치고 부상자와 생존자들이 휴식을 취했다. 나는 에기놀프와 대화를 나눴다.
"너 황제되면 나 이제 근위대장 한번 해보는 거냐?"
"훗... 내가 황제가 안되도 넌 다음 근위대장이다. 요하네스가 즉위하면 나는 전역할 생각이었다. 그래, 만년 2등인 내 친구여. 이제 나를
넘어서겠구나. 기쁘냐?"
"흥, 나도 근위대장 자리에는 관심없다. 난 너랑 같이 노는게 더 재밌었다. 네가 없으면 나도 굳이 여기 묶여있을 생각 없다. 몇일전에 나
마리아 부인에게 편지 받았다. 남편이 전사하고 친척들이 아이들과 부인의 재산을 노린다더라구. 와줄수 없겠냐는데... 그냥 거기 가서
친척들 겁좀 주고 남작 행세하며 살아볼까봐."
"그래, 마리아 아가씨... 아직 연락하고 있었구나. 시집 간단 소식 듣고 네놈이 술먹고 난동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래, 그러니깐 이까짓 상처 아무것도 아니야. 원래 남자들은 흉터 하나는 있어야 고독하고 멋져 보이는 거라구. 그러니깐... 잠깐만 눈좀
붙일께. 깨면 다 나아 있을꺼야..."
그리고 에기놀프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 천을 덮어주고 조용히 일어나 요하네스에게 다가갔다. 캐타프랙터 연대는 죽은
동료를 위해 기도중이었다. 나느 잠시 기다리고 기도를 마친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300여명 밖에 안남았다."
"우리도 500여명 정도... 그것도 부상자 포함에 말은 100여필 정도 밖에 없어."
"첩보관들의 말에 의하면 마르마라 해에 제국군 총동원령으로 집결한 20만 대군이 해군의 보급을 이용해 이곳으로 와서 티베리어스 인근에
상륙해 적과 대치하겠다고 했는데... 과연 시간에 맞게 도착할수 있을까?"
"오직 주님만이 아시겠지. 이미 이곳까지 온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다."
그말 그대로 였다. 우리는 40일간 8,000여명의 병사를 잃었고 그리고 어림짐작으로도 4만이 넘는 적들의 시신으로 우리의 발자취를 남기고 왔다.
적들은 악에 바친듯 산개해서 시리아 전역을 공격하던 공세의 방향을 바꿔 전 병력이 우리에게 집중된것처럼 달려들었다. 이제 티베리어스는
3일 거리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우리는 살아 돌아갈수 있다. 그리고 나는 친구와 황제를 구할수 있다. 이제 그와 나의 거리는
사라졌다. 40일간 역사에 남을 치열한 행군동안 우리를 끊임없이 얘기하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공유했다. 내가 미친게 아닌가 싶을 만큼
잠시간 즐겁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부대와 그의 부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으르렁 거리던
부대원들은 이제 서로 뒤섞여 상처를 치료해주고 군량을 먹여주고 고향에 있는 예쁜 여동생 자랑을 나누는 동료가 되어 있었다.
"어께의 창상이 심해지는 것 같다. 바실, 붕대를 갈자."
"관둬. 크누드. 내일부턴 웃통을 벗고 싸울 작정이냐? 출혈이 멈췄으니 옷을 찢어서 붕대를 만드는 건 그만둬. 화살이 스치면 위험해질수 있다."
나는 물끄러미 요하네스와 같이 우리 생도대장과 캐타프랙터 생도대장이 서로를 치료해주는 모습을 보았다. 내년까지 무사히 살아서 도성에
돌아갔다면 졸업시합에서 서로를 쓰러뜨리기 위해 경계했을 두 녀석이 목숨이 위태로운 이 상황에서 마치 오랜 친구처럼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아아... 그렇지. 우리도 저렇게 어린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참전도 부상도 기묘한 동료의식도 생길리 없었던 시기였지만... 그러고 보니 평생을
복수할 기회를 노렸는데 결국 이룰수 없게 되버린 것 같군."
"복수? 아아... 엉덩이... 큭큭큭... 이제 알것 같군. 콤네누스 가문에서 사위들 장가오면 조리돌림하면서 엉덩이에 매질하는 풍습있었지?
너 설마 그거 노리고 아그네님 허락한거냐?"
"그래! 그걸 노렸다. 다른 방법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 엉덩이를 두들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크하하하하...."
"큭큭큭큭..."
우리는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나는 죽어간 내 많은 동료들을 잃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랠수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살아돌아가라."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 잘 알겠지만 우린 전쟁터에서 네 빤스를 갈아입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흥, 그럼 움츠려들지 말고 내일 다시 힘내서 저 개자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줘라. 한놈도 남기지 말고. 그럼 나는 무사하겠지."
"그래... 그거라면 내가 좀 자신있지. 어디가서 네가 겪은 일을 부끄럽지 않게 자랑할수 있도록 거칠게 걷어차주지."
그렇게 사막의 밤이 지나갔다. 다음날도 이어진 차륜전으로 부대의 손실이 심각하게 증가되었다. 그리고...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티베리어스에 이틀거리가 남은 시점에 저너머에서 적들의 본군이 집결해서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였다. 모래를 통해 전해져
오는 10만여명이 넘는 거대한 기마의 발구름... 우리도 징하게도 오래 살아남았지만 적들도 제대로 악에 바쳐서 부대를 한곳에
집결해 우리 수백명을 죽이려 달려오고 있었다. 좀더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고... 우리는 해안가가 보이는 산의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적들은 우리를 곱게 보내주지 않았다.
마지막날 조금 방심했던 탓인지 우리는 야밤에 기습을 당했고 남은 부대원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나 역시 큰 부상을 입고 필사적으로
부대를 후퇴시켰다. 정상으로... 정상으로... 그곳에서 해변가를 볼수 있다면 조금은 사기가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상에 마침내
도착하였을때 우리는 실망할수 밖에 없었다.
"아직... 상륙이 시작되지 않았군요."
선배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용케 살아남은 생도대장은 친해진 캐타프랙터의 바실 생도대장의 어께를 부축하며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의 말 그대로였다. 일부 전초부대들이 해안가에 상륙하기는 했지만 저너머에서 수송선들이 몰려오고 일부 부대들만이 해변에
내려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그곳까지는 10시간 거리... 그 사이에 적의 본군이 기습한다면 한번에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저너머에 폭풍처럼 거대한 흙먼지가 보였다. 적들의 본군이 시야에 들어올 만큼 접근해오고 있었다. 십만여명의 기병대가
무섭게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요하네스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좀 안맞은것 같다."
"그런것 같군."
"어쩌면 한두명을 탈출시키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대가로 우리 제국군은 수만명이 참살당하겠지만."
"난 패스하지. 어차피 이제 난 황제 못해. 눈에 피가 들어간줄 알았는데 베였나보군. 이제 앞이 보이지 않아. 어차피 난 황제 못해."
"아아... 그렇군. 유감이야. 내 한쪽팔이 날아간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비웃어줄 기회를 영원히 놓쳤군."
"그래? 그것참 아쉽구만. 그래도 난 말을 몰수는 있어. 시야는 안보이지만 야간전투의 감과 비슷하게 몰아갈수는 있지. 하지만
자네는 이제 바랑기안으로서도 좀 힘들겠구만. 은퇴하고 놀고 먹으면서 봉급받는 한가한 직업으로 이직하는게 어때?"
"그게 뭔데?"
"황제!"
"큭큭큭큭...."
"크하하하하...."
"아직 남은 한쪽팔로 도끼를 들고 자네 덥수룩한 수염을 면도해주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군. 이제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야. 내 생각은 결정되었네. 자네는?"
"마찬가지야. 우연치고는 참 더럽게 꼬였구만. 두 녀석다 살아남다니... 생도대장들은 이리오도록."
전방을 불안하게 보고 있던 두 생도대장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시는 내가 내렸다.
"지금 당장 살아남은 말을 타고 두 사람은 해변에 상륙한 부대에 적의 접근을 알리고 하역보다는 방비 태세를 취하라 전해라.
나 루셀 연대장과 요하네스 연대장의 명령임을 전하라."
"네... 넷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 남겨진 말을 타고 해변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외쳤다.
"다들 수고 많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들 했다. 근데 저 뒤에 날파리 같은 녀석들이 우리를 좀 귀찮게 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여기 있는 캐타프랙터 연대장이 저 녀석들에게 예의를 좀 가르쳐 줄까 한다. 얼간이들은 따라오고 똑똑한 놈들은
해변으로 가서 아군에 합류하라."
그리고 요하네스도 소리쳤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고난을 받은 40일, 그 마지막날 마귀를 신성한 힘으로 퇴치하셨듯이 우리도 녀석들을 손봐주리라.
오늘 여기에 부대 구분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제국의 자식들이고 우리는 서로 전우다. 가자! 친구들아!"
"와아아아아아아아!!!"
모두들 얼간이들 밖에 없었다. 그는 흐려진 눈으로 말고삐를 잡고 등자를 더듬었다. 내가 그를 잡아 말을 타는 것을 도왔다.
자세를 갖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타자. 난 앞이 안보이고, 넌 팔이 불편하지. 네가 방향을 알려주면 내가 널 인도하겠다. 적들의 면상도 좀 거친 면도가
가능하겠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에 타고 말했다.
"아아... 얼마든지. 바라던바다. 내가 널 지키겠다. 나보다 먼저 죽지 마라. 내가 바랑기안으로서 황제보다 먼저 죽는 수치를
겪게 하지 말아다오."
"너도 황제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의무는 정하지 말자. 그저 같이 어께를 맡대고 싸울 뿐이다. 친구여."
"그래, 가자! 친구야! 전원 돌격!!!"
"와아아아아아!!!!"
오늘 바랑기안과 캐타프랙터는 서로 어께를 맡대고 적진을 향해 사이좋게 쳐들어갔다. 시간을 얼마나 벌수 있을지는 장담할수 없다.
하지만 다만 몇분이라도 그들의 전진을 멈추게 한다면 제국의 승리는 확실해진다. 그들이 두 황제의 시신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해주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내 등뒤에서 말을 몰아 용기백배하게 적을 향해 짓쳐들어가는 내 친구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소리쳤다.
"루셀과 요하네스가 간다!"
그도 소리쳤다.
"여기 두 황제가 간다!"
병사들도 소리쳤다.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었지만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소중한 것들을 소리치며 돌격했다.
적들의 표정을 읽을수 있을 만큼 접근했을때... 나는 잠시 환상을 보았다. 그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품에는 귀여운 사내아이를 안고...
미소지으며 나에게 손을 건내었다. 나도 그녀에게 걸어갔다. 나는 여기 있지만 그녀의 곁에 있는 내가 보였다. 단란한 세명의 가족이
어딘가 따듯한 곳으로 걸어갔다. 나는 내가 바란 작은 이상의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속으로
창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일칸의 첫번째 병사의 안면에 화려하게 도끼를 내려 찍었다.
고개를 돌려 성벽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눈속에 희미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엷은 홑옷 한벌만을 걸치고 눈속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모습의 중년의 남자... 그는 한 제국의 황제였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역량과 한계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존경받는 품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국내의 반란을 연달아 진압하고 교황과의 연대를
확립하자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제국의 여제에게 감당할수 없는 외교서한을 보냈다. 아름다운 수식어로 미화된 그 내용은 미망인으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온 여제에게 이혼한 자신의 후처가 되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제국의 여제는 그 서한을 받고 온화하게 미소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중하게 방문한 게르만족의 후예들인 사절단에게 다음해 봄까지
혼담을 상의할 자신의 측근들을 보내겠다고 알려주었다. 사절들은 그녀의 우호적인 태도에 남몰래 숙소에서 비웃었다고 했다. 역시 여자 군주란
이런 식으로 다루어야 한다며 낄낄거렸다고 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그런 온화한 태도는 일칸국의 칸을 체포하고
눈과 목구멍에 끓인 은을 부어 죽일때 이후 처음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모든 비잔틴의 신료들이 그녀의 태도에 공포에 휩쌓였고, 그녀의 뒤에
시립한 지적인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도끼를 든 사나이의 눈빛이 빛났다는 사실 또한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결혼 사절단은 세기의 결혼식을 연출하였다. 어떤 음유시인은 그것을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창검을 들고 피로 물든 붉은 카펫에 서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대등한 교전은 초기 몇회 뿐이었다. 그후 1년간 제국이 자랑하는 두 부대는 공포와 악몽으로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닌 도당들의 무리들을 지푸라기 처럼 무참하게 짖밟았다. 그리고 결국 사건의 주범인 황제는 체포되어 이곳 카노사 성으로 끌려왔다.
그는 끌려 오면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근위대장에게 황제로서의 대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발언에 근위대장은 조금 난처해하며
그의 친우에게 물었다고 했다.
"어쩌지? 그러고 보니 황제였지. 엉덩이는 못 걷어차겠는데? 자네에게 부탁하네, 바실."
그리고 그런 그의 질문에 캐타프랙터 연대장은 짜증내며 답변했다.
"크누드, 남에게 할일을 미루지 마라. 정 할말이 없다면 다시 한번 4천개의 목 드립이라도 치던가."
크누드 연대장은 어깨를 으쓱했고, 결국 황제를 굴복시키는 일은 바실 연대장이 맡게 되었다. 바실 연대장은 황제의 품격에 맞는 비잔틴식 처분
몇가지를 부복하는 황제에게 알려주었고 눈뽑기와 코찢기까지는 버티던 황제는 거세의 항목으로 넘어가자 결국 모든걸 포기하고 성밖의 눈밭에서
자신의 과오에 용서를 비는 굴욕을 맛보게 된것이다. 첫날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아마도 각국의 외교사절, 스파이들로
짐작되는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다 철수한듯 하다. 이미 전 유럽에 그의 몰락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제 불가능한 희망을 꿈꾸는 자들과,
적들과 내응하는 자들과, 양쪽에 발을 걸치고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은 자신의 이후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데 한결 편해졌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어리석은 자를 그만 용서해주라는 청원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도착했을때 나는 막 방에서 나오고 있는 크누드 연대장과 마주쳤다. 아직 30대에 불과하지만 십여년전 몇십명밖에 남지 않은 근위대를 인수해
복수와 계승을 외치며 3년만에 원상복구하고 일칸국에 복수를 허가받은 남자, 제국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는 그 강한 사내는 외모로서는 전혀
그래보이지 않는 지적이고도 현학적인 모습이었다. 도끼와 방패보다는 메스와 가운이 어울리는 지적인 외과의와 같은 인상이었다. 실제로 그는 병종특기를
의학으로 수료한 흔치 않은 의무병 출신의 연대장이기도 했다. 그가 은퇴하고 교수로 초빙할수 있는 날을 제국의 모든 의과대학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 남자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요하네스 황태자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네, 들어가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출진이신가요?"
"아키텐의 왕을 칭하는 우리 제국의 영지 갈리아의 불법 점유자들은 여전히 전방에 우리와 대치한 로마를 사칭하는 무리의 잔당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눈밖에 있는 얼간이만으로는 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좀 자극적인 방법으로 다뤄야 하겠다는 결론은 내렸습니다. 조금 오래 못뵐지도 모를것 같습니다.
다음번에 뵙게 될때는 보르도의 와인을 제국의 라벨을 붙여서 선물로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함부로 농담을 하지 않는 사나이다. 아마 내년쯤에는 제국의 근위대는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대서양 해변에 보랏빛 깃발을 꽂을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이제 막 마지막 결재를 마치고 계셨다.
"폐하를 뵙습니다."
"오늘 훈련은 일찍 마쳤구나, 요하네스... 조금만 기다리렴. 지금 마지막 서류만 결재하면 된단다. 교황의 처우에 대한 문제지. 한쪽은 교황을 석방해주고
대신 큰 돈을 지불해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다른 한쪽은 교황을 부디 죽여주고 대신 우리에게 협조하는 교황을 선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나는 양쪽에
그 사실을 고했고 서로의 제안을 채택하기 위해 가격을 올릴것을 제시하는 중이다. 복잡한 문제지. 하지만 황제는 이러한 문제를 피해서는 안된단다.
결론이 어찌되건 우리 제국은 큰 이득을 볼것이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아마 어머님이라면 분명 두가지를 다 취할것이다. 결국 돈은 지불될것이고 풀려난 교황은 의문의 죽음을 맞을것이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교황은 죽어가며 범인을 그의 사망을 원하는 측으로 지목하는 유서를 남길 것이고 그쪽에서 어머님에게 보낸 편지 들이 그 증거가 될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두 세력을
모조리 멸절시키고 더이상 교황이 더 선출되는 것을 막고 막대한 교황령의 재산을 압류할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틴인들이 비난하고 교활하다 욕하는 비잔틴의 방식이다.
하지만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다. 적으로부터 듣는 비겁하다는 말은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항상 덫에 걸려드는 것은 욕망을 가진 자들이다.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잠시후 결재가 끝나고 어머님은 멈을 푸시는 듯 고개를 돌리다 일어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셨다. 내가 다가가자 어머님은 집무실의 윗벽을 가리켰다.
"보아라, 플랑드르의 진상품이다. 교활한 모직 상인들은 그래도 현명하게도 라이벌 베네치아인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하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선물들이 오는 구나. 어리석은 황금만능주의자들... 그런다고 그들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으련만... 하지만. 오늘 받은 것은 조금 나를 감동시켰다.
우리 콤네누스 황조의 일대기를 수놓아 찬미한 거대한 태피스트리란다."
나는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속에 보이는 거대한 모직 융단을 보았다. 섬세하게 수놓아진 그림들은 마치 살아 있는듯 생생했고 정교했다. 바이유의 헤이스팅스 전투의
묘사따위는 허접쓰레기로 치부할만한 물건이었다. 그곳에는 지난 20여년간 우리 콤네누스 황가가 제국을 부흥시킨 역사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머님은
그중에 한 장면을 가리키며 말하셨다.
"저 장면을 보아라. 요하네스."
그곳에는 옥좌에 앉은 황제와 그의 뒤에 시립한 도끼를 든 사내, 그리고 황제의 명을 받는 황제와 닮은 장군, 그리고 하늘에서 대천사 미카엘에게 제국의 수호를 부탁하는
한 성자같은 모습의 청년이 그려져 있었다. 어머님이 물으셨다.
"옥좌에 앉은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저의 조부이신 바르다스 콤네누스 폐하십니다. 아마도 천사의 계시를 받아 성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저 하늘위에 있는 청년은?"
"저의 부친이신 레오 카미테로스 공이십니다. 주님의 시렴으로 안타깝게 요절하셨지만 영원이 제국의 영광을 위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옳다. 그러면 황제 앞에 무릎꿇고 명령을 받는 장군은?"
"저의 숙부이신 요하네스 콤네누스 전하십니다. 제국 최고의 명장이셨고 황제가 되실 분이셨습니다. 저의 이름은 제 숙부의 것을 따왔습니다."
"그래... 네 이름에 실린 무게를 잊지 말거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 뒤에 시립한 사나이는?"
"근위대장님이신 루셀님이십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미 언급한 세분에 대한 기록과 공부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교육받았다. 하지만... 마지막 언급된 루셀 근위대장, 제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분에 대해 이상하게도 나는 별다른 교육을 받을수 없었다. 다들 그분에 대해서 물어보면 애써 외면하거나 억지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의 엄명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조급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 어머니가 그분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의 머뭇거리는 대답 이후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망설임이 있구나. 그래, 그분에 대해 너에게 고하는 이가 없었겠지. 하지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단다. 그건 내 명령이 아니었단다. 그저 주변의 궁인들이 알아서
대화를 피했던 것 뿐... 이리 가까이 오너라, 요하네스. 내 무릎위에 앉거라."
나는 어린 시절 책을 읽어주시던 것 처럼 오랜만에 무릎위로 앉으라는 어머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을 감추며 다가갔다. 내가 어머님의 무릎위에 낮자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에게 들려주마.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제국과 황제와 연인과 친구를 구하기 위해 모든것을 버리고 떠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지존의 자리에 가장 가까웠음에도
모든것을 버리고 신화가 된 한 남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삶을 내게 들려주마. 긴 이야기가 될것 같구나... 그러니까 처음은... 그래, 그건 아마도 햇살이 빛나던 너무나도
좋은 날씨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바랑기안의 생도 졸업시합에서 시작된단다. 나는 그때 13살이었고..."
어머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어머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창밖에는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어머니의 감정이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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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킹치고는 좀 평범한 스토리를 가지고 적은 글입니다. 비잔틴 제국을 플레이 하는데 어떤 노인 대장이 내전 이후 교체되고 새로운 대장이
바랑기안 치고는 전투력 외에 외교력이나 음모력, 학식도 수준급이었습니다. 나이도 제법 어린 편이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마침 플레이 하던 콤네누스 가문에도 비슷한 또래에 괜찮은 무력과 재능을 갖춘 왕자가 있길래 캐타프랙터를 맡겨서 각종 전투에
내보냈더니 3배수 이상의 적들도 뭉게면서 돌아다니더라구요. 그러나 일칸의 둠스택이 몰려오자 병력 빼는게 늦어져서 후계자였는데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같이 있던 바랑기안 대장도 같이요. 그래서 덕분에 모계결혼해서 아들이 있던 아그네가 여황제가 되는
바람에 당분간 좀 자중하는 플레이를 해야 한적이 있었죠.
스토리적으로는 음모와 패륜이 난무하는 크킹에서 좀 평범한 내용이지만 비잔틴 빠돌이 근성이 더해져서 이래저래 살들을 덧붙이면서
터무니 없는 바랑기안 미화 팬픽이 생겨버렸습니다. 실제 역사 고증을 생각해보면 저런 멋진 신사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이번에도 플레이한 짧은 내용 가지고 망상을 듬뿍 끼얹은 졸렬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선댓글 후 감상!
결국 해피같은 베드엔딩인가 ㅠ...
아ㅜㅜ결국은 베드엔딩이네여. ㅜ
하핫 역시 크킹에 해피엔딩따위 있을리가 없지
머리속의 생각을 글로 적는건 참 어려운 일인데 잘 표현하신것 같내요. 저로선 엄두도 내기 힘든,, 개인적으로는 5번으로 나눠져서 올라온게 아니라 단편식으로 한번에 읽었다면 상당히 몰입했을듯
역시 크킹은 배드엔딩인가!
가차없는 베드엔딩!
고자새끼들 ㅠㅠ
너무 멋진 글에 찬사를!
크킹 단편집 크 취한다.
으앙ㅠㅠ 이런 명작을 이제 보다니.... ㅜㅜ 글 완전 잘 쓰셨어요. 엄청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