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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허하다 원문보기 글쓴이: 맹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가방을 볼 때, 늘 나에게 의문이었던 점은 ‘왜 사람들이 어느 브랜드 것이라는 불도장을 찍은 듯한 로고 프린트에 열광하는가’였다(로고 프린트 백을 소장한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그러나 내 눈앞에서 윙윙거리는 LV, GG, FF, CC 등 브랜드 머리글자 시리즈는 늘어만 가니, 이 로고 라인들의 선풍적인 인기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내 취향과는 반대로, 왜 브랜드들이 로고 라인에 열광하는지는 자못 선명하다. 그것은 마치 국가를 세울 때 국가의 탄생 설화와 국기 같은 상징물을 중요시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브랜드들은 앞날을 좀 더 공고히 하기 위해 브랜드의 상징인 로고를 발전시키는 데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샤넬 CHANEL 20세기 최고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코코샤넬" "그랜드 마드모아젤"이라 애칭되던 20세기 최대 디자이너의 한사람이다. 1883년 8월 프랑스의 오베르뉴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는 18세까지 고아를 교육시키는 엄격한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이때 입었던 검은 제복은 후에 샤넬의 의상에 종교적인 엄숙함을 반영시키는데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남성 디자이너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여성복 세계에서 유일하게 첫 번째로 승리한 여성인 샤넬은 처음에는 파리의 조그만 모자가게의 디자이너로서 출발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10년 경부터 패션계에 진출해 여성복 디자인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파리 캉봉가에 그녀의 이름으로 매장을 열었다. 심플하고 스포티한 옷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여러 개의 혁명적인 디자인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남성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동안 공장과 회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여성들은 당연히 편안하고 활동적인 샤넬 스타일을 선호하게 됐다. 그 예로써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상의가 길고 스커트가 짧은 남성스런 옷(가르손느룩)을 창안하여 복식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스웨터를 일상복과 함께 입기도 하고 저지를 옷의 소재에 사용한다든가 스포티하고 입기 편리한 복장의 보급에 힘씀으로 그녀는 30년대 유럽과 남미, 중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39년에 폐점하고 향수의 샤넬 NO. 5를 발표해 이 분야에서도 대 성공을 거두었다. 1954년 샤넬은 파리로 돌아와서 소위 "샤넬룩"이라 불리는 가디건 수트, 사슬끈을 단 퀼팅의 핸드백을 전세계에 퍼뜨렸다. 샤넬은 1954년부터 1971년까지는 파리 모드계의 전무후무한 여왕으로 군림했다. 장식이 달린 정장 투피스, 모슬린 원피스, 두터운 퀼팅 핸드백, 동백꽃, 모조 보석, 금색 체인, 검정과 흰색의 장난스런 조화, 반 모드의 모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샤넬룩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1971년 1월의 컬렉션 준비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난 샤넬은 사생활이나 연애도 매우 다채로웠으며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콕토, 디이기레프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전설적인 화제가 많다. 현재는 칼 라거펠트가 디자이너로 샤넬라인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샤넬의 패션은 편안함, 활동성, 심플함에 우아함을 가미,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영원한 브랜드다
■ 루이뷔통 LUIS VUITTON 나폴레옹 3세 유제니 황후의 짐꾸리는 도제로 시작한 루이비통은 1854 년 피리 카푸신가에 매장을 열어 이 매장에서 왕족들과 귀족들의 여행가방을 제조해 주면서 현재 명성의 기초를 닦았다. 그때까지는 원형으로 되어있어 운반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던 가방을 뚜껑을 평평하게 만들어 여러 개의 여행가방을 한데 포개어 운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수십개의 가방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던 귀족에게 있어서는 루이비통이 개발한 여행 가방은 그들에게 대단한 혁신을 안겨다 주었다. 이로 인해 루이비통은 여행 가방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다. 144년이 지난 현재까지 루이비통의 가방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여행 가방의 으뜸이 되었고 전통이 소중히 지켜지면서 시대상의 혁신을 반영하는 그들의 디자인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역사와 중요한 순간을 같이 해왔었다. 루이비통의 전통은 제작 과정에서 뿐만이 아닌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디자인을 수십년동안 계속해서 만들어 오랜 시강 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꽃과 별 그리고 창시자 루이비통의 이니셜 LV를 조합해 만들어 진 모노그램 캠퍼스는 루이비통의 아들인 조르쥬 비통이 당시 극성이었던 모조품과 구별하 기 위해 1896년 창안 한 것이다. 이 모노그램 캔버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루이비통 가방 의 이미지로서 1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루이비통은 전통만을 고집하지않는다. 전통을 소중히 간직해 나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통 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1986년 루이비통 제품에 처음으로 검정,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색을 도입한 에피 제품, 1993년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남성들을 위한 타이 제품,1997년 의류 사업 도전으로 새로움에의 전통을 루이비통은 증명해왔다. L과 V와 꽃,별의 무늬가 조화된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캔바스 시리즈는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문양으 로 탄생 100주년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세계인의 시각에 선명한 각인을 새긴 제품. 특히 모노그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96년 초에 로메오 질리 , 헬무드 랭, 아이작 미즈라히, 시빌라,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7인의 디자이너들이 모노 그램을 이용해 자신들의 개성적인 디자인 세계을 표현한 제품들로 전 세계를 도는 순회 전시를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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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디터에게도 이 로고 백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저 코코 샤넬 머리글자의 조합이라 여겼던 CC 로고가 샤넬이 어린 시절을 보낸 수녀원 창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 달빛이 비치는 수도원의 창문이 마치 C자가 등을 댄 듯 보이는 것이었다 - 다분히 순정만화 같은 스토리를 들은 후, 왠지 모르게 CC 로고가 새겨진 샤넬 백에 정이 가는 것이었다. 이렇듯, 루이 비통의 LV, 구찌의 GG, 펜디의 FF 등에는 단순한 머리글자 이상의 재미난 뒷얘기가 많다. 브랜드의 창립자인 루이 비통의 머리글자인 LV와 모노그램 플라워, 이 두 가지 로고에는 아버지에게 바치는 존경이 담겨 있다. 패션 비즈니스에 천재적이었던 루이 비통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은 자신의 성공이 모두 아버지의 덕이라 여겨 1896년, 아버지를 상징하는 LV 로고를 디자인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꽃 모양을 새긴 모노그램 플라워 로고를 발표해, 아버지에게 헌사한다. 그의 각별한 효도심 덕이었을까? 루이 비통의 성장은 거침없는 질주 그 자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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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라가모 Slavatore Ferragamo 80년 전 시작된 페라가모의 구두와 기타 패션상품 속에서의 혁신적인 사고방식, 기술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투자, 우아한 연출에 대한 노력은 처음과 같은 강도로 지금까지 늘 유지되어 오고 있다. 페라가모는 라이센스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두의 디자인은 누구나 모방할 수 있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는 지론 때문이다. 토탈 패션을 추구하는 페라가모지만 사업의 중추는 여성용 구두로 전체 매출의 1/3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비중은 각 시장상황에 따라 다르며, 현재 한국시장에서는 의류의 매출이 좋은 편이다. 페라가모는 가을/겨울 시즌에 내추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의 컬러를 도입, 전통적으로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몸, 선에 맞는 라인이 자연스럽고 우아한 모습을 형성하며 여성미를 강조한다. 더블 스트레치, 울, 울 크레이프, 조젯, 세이블 스트레치, 플란넬, 리버서블 셜링 등이 소재로 사용되었고, 구두와 핸드백은 기존의 전통적인 스타일에 조금 더 장식을 기묘하게 연출해 모던룩을 강조했다. 현재 페라가모의 매장은 3개가 있으며, 하반기에는 2개의 매장을 더 오픈할 예정이다.
■ 구찌 GUCCI 귀족적 취향과 세련된 감각 [구찌]는 이탈리아의 마구아 피혁제품의 생산으로 출발, 격조높은 우아한 귀족적인 취향과 현대여성의 세련된 감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토털 패션 브랜드로 인식 전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브랜드. 창업자인 구치오 구찌씨에 의해 말안장과 가죽 제품을 제조하면서 시작된 [구찌]는 그의 아들 로돌포가 가방, 구두 등의 피혁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로돌포의 아들 모리지오는 숄, 스카프, 향수 등으로 사업을 확장, 지금의 구찌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가 바로 루치아노 소프라니와 손을 잡고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성립시킨 장본인이다. 네임벨류를 인정받은 구찌의 명예를 바탕으로 프레타 포르테 라인은 성장가도를 달려 오늘날 전세계 1천2백여개의 체인망을 형성하고 있다. [구찌]는 1990년대부터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트렌디하고 모던한 콜렉션과 젊고 경쾌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시킨 주인공은 디자인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 포드이다. 톰포드는 거리나 나이트크럽에서 얻은 새로운 영감으로 섹시한 가죽 샌들, 스파이크 힐, 테크니컬 디자인에 구찌 특유의 금색 말재갈 문양을 혼합시킨 스타일을 등장시켰다. 최첨단의 디자인과 구찌 특유의 전통을 혼합해 놓은 그의 작품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구찌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는 여전히 매력적인 요소를 현대에 맞게 적절히 조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감각은 복고물결에 편승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구찌가 갖고 있던 클래식함과 품격을 현실 가능한 것으로 변형시켜 여성들에게 새로운 섹시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옷은 구찌의 클랙식함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미래적인 클래식함과 모던의 미묘한 균형을 찾았으며 이렇게 디자인된 의상들은 구찌의 모든 아이템과 토털 코디네이트 됨으로써 완벽한 룩을 제시, 매시즌 새로운 실루엣으로 끊임없는 변혁의 움직임을 메시지로 전하여 패션계의 이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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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앙 디오르 Christian Dior 모자 디자인의 스케치로 호평을 받아 디자이너로 데뷰한 프라스 꾸띄르에. 1905년 프랑스 그랑빌 출생으로 부유한 실업가 가정에서 태어나 부친의 희망대로 외교관을 지망하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가정의 몰락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태피스트리를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패션 디자인으로 전환, 1938년 로베르 피게사에 들어가 지도를 받았다. 그후 1941년 루시아 뤼통사에 일했고 그곳에서 피에르 발망을 알게 됐다. 1946년 매종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열고 오뜨꾸띠르를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 성공을 거둔다. 전쟁과 경제 침체기를 겪은 여자들은 디오르의 풍성한 코롤 (꽃잎) 라인과 당시 황금기에 달한 텍스타일 산업의 산물인 아름다운 직물을 즐겼다. 1949년부터 디올은 5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일로 '뉴 룩'이라는 새로운 라인을 발표해 이것을 계기로 패션 혁명을 가져왔다. 디올은 전 세계 여성들의 높은 어깨와 짧은 스커트를 처진 어깨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통 스커트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 이로인해 크리스찬 디올이란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지고 1957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 시즌 발표하는 창작 실루엣을 튜립 라인, H라인, Y라인 등으로 이름을 붙여 패션계를 계속 리드했다. 그의 최후의 라인은 스핀들 라인 ( SPINDLE LINE ) 이었다. 스탈린과 간디처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섯 사람들 중 한명으로 꼽혓던 디올이 죽은 후 이브생 로랑, 마르크 보앙 등이 디올사를 이끌어 갔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패션계의 거장 으로 불리는 지방시의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가 쟝 프랑코 페레에 이어 주임 디자이너로 새로운 디올만의 뉴 룩을 선보이고 있다. 페레는 97년 S/S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디올사를 그만두고 이탈리의 자사 브랜드 [페레]에만 전념하고 있다. 존 갈리아노는 영국의 디자이너로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졸업 작품은 브라운 백화점에 전시돼 많은 언론과 바이어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87년 존 갈리아노는 BGC에 의해 그해의 디자이너로 뽑혔으며 바드의 의상 박물관은 그가 디자인한 옷을 그 해의 옷으로 선정했다. 이 외에도 패션에 관련된 많은 상을 수상했 으며 요즘 뛰어난 평가를 받고있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 프라다 PRADA 패션계 안티룩의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프라다]는 입기편하고, 세련되며 우아한 클래스가 있는 옷을 만들어내는 적지않은 브랜드 중 하나다. 밀라노의 유명한 가죽제품 메이커인 프라다의 상속인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 정치학을 공부한 좌익학생 이었다. 밀라노 유명 가죽제품 사업을 상속받은 그녀는 조부의 마리오의 사업을 이어받아 오늘날 토틀 패션을 지향하는 국제적인 패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78년 전통적인 가죽 백의 전통을 이어 미우치아 프라다는 프라다백을 창조한다. 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지만 당시에는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행동파 여성들을 위한 우아하고 견고한 나일론 소재의 가방으로 당시의 모드와는 완전히 다른 가방이었다. 그후 80년대 경영학을 전공한 기업인인 남편 파트리지오 베르델리와 만나면서 프라다의 사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마구공 장식의 가죽백에서 나일론 레인코트,베이지와 갈색을 조화시킨 마스코트 컬러에 이르기까지,프라다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뚜렷하다. 튀지않은 옷 특별히 [섹스 심벌]로 불리우는 몇몇의 소수 여성이 아니라 자신이 즐겁기를 원하는 [ 보통 아줌마 ] 를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세계다. 데생이나 재봉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단순하고 클래식한 형태에서 순수하게 본능을 따라 창작 작업을 하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백에 이어 제화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1988년에는 최초의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발표했다. 부부가 창작과 제조를 맡은 프라다 에서는 제조 전 과정에 있어서는 엄격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소비자의 욕구를 잘 감지하고 재빠르게 들어준다는 점이 프라다의 인기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나일론 파커, 소매없는 짧은 원피스, 무릎까지오는 블루 마린 스커트에 가는 벨트, 검은 개버딘 밀리터리 외투에 이르는 옷들로 패션을 주도해왔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우아함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창조 하는 것이다. 프라다 실루엣은 특별히 정의할수 없는 특징을 가지지만 프라다 나름의 친숙함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왔다. 프라다의 옷에는 한순간반짝이는 인기가 아닌 영원히 사랑받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련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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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에베 LOWEBE 로에베는 언뜻 보기에 스페인 제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명품하면 이태리나 프랑스 産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며 이는 우리가 가지는 선입견의 뿌리가 깊음을 의미한다. 스페인은 GDP 규모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이며 세계 제2의 관광대국이다. 산업 구조 상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열악해 보이나 자동차, 철강, 건설, 항공 기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 21 세기 유럽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로 주목 받고 있는 스페인. 그 스페인의 다국적 브랜드 로에베를 알아본다. 1872년 마드리드에 도착한 엔리께 로에베는 가죽공방을 연다. 독일인의 장인 정신에 스페인의 재료로 제품을 만들며 점차 명성을 알려가던 가죽 제품 공장은 1892년 새로운 도약을 한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특수한 재질 즉 이구아나, 악어, 뱀 가죽 등을 이용한 제품으로 세인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한다. 1905년 콩키스타 공작부인의 소개로 스페인 궁정에 로에베를 납품하기 시작하고 품질의 우수성에 반한 알폰소 XIII 왕은 로에베를 왕실 공급 업체로 선정한다. 그 후 영국 왕실의 빅토리아 여왕, 세기의 연인으로 유명한 윈저공과 심슨 부인 등이 즐겨 찾음으로써 고급 명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로에베는 가죽 전문 브랜드로 항상 고급품만 만들었던 것은 아니라 때에 따라 품목을 달리했다. 스페인 내전 (1936-1939)동안은 가죽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 권총집, 탄약 벨트, 탄띠 등 군수품을 만들어 공급했다. 1965년에는 아르마니 등과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만들어 가죽 제품에 의류용품을 추가했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향수를 발매하며 토탈 패션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스페인적 이미지 즉 가우디와 벨라스케스, 살바도르 달리 등 스페인의 혼이 담긴 작가의 작품을 바탕으로 강렬한 색을 선보인 로에베는 나르시소 로드리게스에 이어 2002년 컬렉션부터 스페인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호세 엔리케 오냐가 로에베의 ‘프레타 포르테’라인을 이끌고 있다.
■ 버버리 BURBERRYS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 영국이 낳은 것은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이다. 특히 코트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토마스 버버리의 [버버리]는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탄생한 옷. 1835년 영국 남서부의 셔리주에서 태어난 버버리는 20살이라는 나이에 포목상의 주인으로서 당시 농부들이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버버리는 이 옷의 소재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세탁하기에도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다른 직물에 이용해보기로 결심하고 소재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8년 [개버딘]이라는 천을 개발했다. [개버딘]은 미리 방수처리한 면사를 촘촘히 직조한 후에 다시 한 번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방수성이 뛰어나고 비나 눈을 맞아도 한기를 느끼지 못할 만큼 보온력이 뛰어나며 더운 기후에서도 열을 차단하는 내수성과 내구성, 통기성 및 단열성이 뛰어난 천. 1세기 전인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소재였던 [개버딘]은 많은 스포츠 애호가들과 탐험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아문잰과 스코트도 개버딘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남극탐험에 성공했고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했던 알콕경도 이 소재로 만든 특수 방수복과 텐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개버딘의 우수성과 뛰어난 실용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개버딘은 당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도 애용해 그는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하인들에게 말해 오늘날 영국의 상징처럼 되버린 [버버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버버리사를 대표하는 품목인 [트렌치 코트]는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참호(Trench)에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때 50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착용, 방수복으로 많은 각광을 받았으며, 영국 육군성과 해병대도 공식 방수복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 후 전쟁의 형태가 참호전으로 발전하자 버버리 방수복에 견장과 군장비를 담을 수 있도록 'D고리(앞면에는 수류탄을 뒷면에는 칼을 휴대하도록 고안)'를 부착한 새로운 스타일의 코트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트렌치 코트]이다.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는 '라글란 소매(Raglan Sleeve : 팔이 움직이기 쉽도록 되어있어 운동량이 많은 옷에 좋은 소매)'와 가슴쪽의 비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스톰 플랩(Storm Flap : 비바람을 막기위해 오른쪽 어깨 위에 덮는 천)'이 달린 나폴레옹 칼라 등으로 실용성이 뛰어난 이 코트는 디자인이나 길이로써 그때 그때의 유행을 반영해 변화를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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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느 CELINE
가장 고급스럽고 편안한 소재를 우아하면서 동시에 모던하고 입기 쉽게 디자인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셀린느(CELINE) 브랜드의 시작은 셀린느 비파이나 부부가 1946년 프랑스 파리 말트가에서 아동용 신발 매장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부부는 그들의 성을 딴 셀린느라는 브랜드네임을 붙였고 아동용으로 시작한 매장의 구두는 곧 좋은 품질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여성용 구두 또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 에르메스 HERMES 예술로 불리우는 에르메스의 정신은 150년간 6대에 걸쳐 변함없이 전과정을 수작업으로만 하는 완벽한 장인정신에서 비롯된다. 원래 프랑스에서 마구를 만드는 메이커로 출발, 1837년 마구상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훗날 자신의 성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르메스는 말의 장식품을 제작했고 1879년에는 마구도 제작했다. 자동차가 출현하자 에르메스는 피혁제품과 여행용 가방, 그리고 일반 가방과 핸드백류로 사업의 방향을 전환했고 뛰어난 기술의 장인들이 마구를 꿰매던 기술을 새로운 분야에 적용, 최고의 품질을 보장받았다. 창립 후 5대를 이어오면서 12개의 계열사로 이루어진 에르메스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확장과 발전을 해올 수 있었던 까닭은 명쾌한 스타일과 단순성, 품질의 우수성 때문이었다. 에르메스의 모든 상품은 파리에서만 생산 일체의 라이센스가 없으며 스카프는 리옹에서 가죽제품은 뽕당에서 생산한다. 에르메스에서 장인정신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가죽제품은 특히 제품 한 개당 한사람의 장인정신에 의해 전 작업과정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모든 가방에는 이를 만든 장인에게 가방의 수리를 직접 요청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르메스의 가방을 대를 물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파리의 직업학교에서는 에르메스의 가죽 마스터가 평생의 꿈으로 학생들이 벽에 에르메스의 로고를 붙여놓고 공부할 정도로 유명하다. 에르메스의 백중 유명한 것은 역시 켈리백이다. 이 백은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가 캐롤라인 공주를 임신했을 때 배를 가리기 위해 가장 큰 사이즈의 켈리 백을 든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 폭박적인 인기를 끌었다. 켈리백은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제품을 기다려 할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늘 공급이 부족한 아이템이다. 이밖에 H자 마크로 유명한 콘스탄스 백, 세계 최초로 지퍼를 단 백인 볼리드 백 등도 인기가 높다. 가죽제품에는 핸드백, 가방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리, 가죽상자, 말안장 등이 포함된다. 에르메스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품목으로는 스카프가 있다. 매년 주제에 맞춰 12가지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스카프는 생생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감으로 미국 워싱턴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유명하다.
출처-www.wkorea.com 와 인터넷정보를 발췌하여 사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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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허하다 원문보기 글쓴이: 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