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홍대 인디밴드의 베이스캠프 살롱 바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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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춘오 (Uchoono) on March 20, 2013
인디밴드 베이스캠프 ‘살롱 바다비’
출연 : 우중독보행(바다비 대표), 정민아(모던 가야그머)
‘빵, 프리버드, FF, 클럽 오뙤르, 에반스, 살롱 바다비’ 뭔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면, 불금을 즐기러 홍대깨나 다닌 축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홍대 전철역 주변으로는 위에 나열한
곳 같은 인디음악 라이브 연주 업소들이 꽤 많다. 인디음악이란 한 마디로 묶긴 했지만, 업소마다 나름 내세우는 것들은 다르다.
빵은 1994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문을 열 때만 해도, 강렬한 록 위주의 음악이었지만, 지금은 모던록이나 포크 등으로 볼륨이
조금 낮아졌다. FF는 하드록이나 펑크 위주고, 클럽 오뙤르 처럼 어쿠스틱한 분위기도 있다. 에반스처럼 재즈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곳도 있다.
그중 살롱 바다비는 인디음악의 A to Z 같은 분위기다. 차마
무대에 오르기 민망하다 싶은데 용기는 가상한 연주자부터, 꽤 팬층이 두터운 인기 밴드까지, 그리고 저 멀리 아랍 음악부터 우리
국악까지 스펙트럼이 아래위 좌우로 좀 넓다. 온갖 잡동사니가 뒤죽박죽이고, 끌끌 거리며 한심하게 쳐다보는 어른들의 싸늘한
눈빛부터, 세상에 이런 해방구를 언제 또 만나겠느냐며 아침까지 비벼대는 청춘들이 공존하는 홍대 앞에서 국악도 한 자리 꿰어찰
심산으로 슬슬 비집는 중이다.
바다비는 이런 곳이다
살롱 바다비를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우중독보행’ 씨. 본명을 밝혀도 그만이겠지만, 본인의 고사도 있는데다 난 이런 칼칼한 이름에 왠지 끌려 애정 가득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우중독보행 : 홍대 앞은 사슴이 많이 있는 동물원
같은 곳이요. 착한 사슴, 나쁜 사슴, 변태 사슴이 같이 살고 있어요. 여긴 사슴들이 뛰어놀기 좋은 동네예요. 많은 사람이 ‘홍대
있는 애들’ 하면, ‘이상한 애들’, ‘그들만의 리그’ 아닌가?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거부감을 갖지 마시길 바래요. 사슴
같은 사람들이 노는 곳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그는 변태 사슴이란 말은 오해받기 쉽다고, 빼달라고 했지만, 난
‘변태’라는 말을 너무 모욕하는 현실이 얄미워 실례를 무릅쓰고 쓰니 ‘우중독보행’님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애벌레에서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는 모습을 ‘변태’라는 말로 써왔던 기억이 너무 가물 해졌다. 인간에 대한 존경과 이해심이 눈곱만큼도 없는 작자들이
변태란 말을 얼마나 더럽혔는지. 누가 변태란 말에 대한 기억을 옛날로 되돌린다면, 오래도록 점심을 사고 싶을 지경이다.
우중독보행 :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라고 할 수
있는 마해송님의 ‘바위 나리꽃과 아기별’에서 바다비라는 이름을 떠올렸어요. 아기별을 외롭게 기다리던 바위 나리꽃은 시름시름 앓다가
썰물과 함께 어느 날 바다로 가버렸지요. 아기별은 이 사실을 알고 구슬피 울다가 하늘에서 추방되어 바다로 떨어져 버렸는데, 그
후로 바닷가에는 해마다 아름다운 바위 나리꽃이 피어난다는 이야기예요. 결말이 너무 슬프게 끝나는 게 싫었어요. 이 동화를 밝은
결말로 바꾸고 싶었죠. 그래서 바다비라는 이름이 태어난 거예요. 바다 위로 내리는 비가 아니라 바닷속에 내리는 비예요. 그리고
바다비는 서커스장 같은 곳입니다. 문화예술인들이 장르의 경계를 넘어 다 같이 참가할 수 있는 그런 무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중독보행(왼쪽)과 정민아가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민아와 바다비의 첫 만남
우중독보행은 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행여 인터뷰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그가 지은 시집은 없는지 알아보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그런
관행에서 비켜서 있는 것인가? 모호함을 안고 시작하려던 차에 정민아 씨가 바다비에 찾아왔다. 정민아 씨는 2006년 ‘상사몽(모던
가야금)’이란 1집 음반을 내면서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보통 소개를 하지만, 이미 홍대 앞에선 2004년부터 익히 알려진
뮤지션이었다.
유춘오 : 정민아 씨 바다비 1기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정민아 : 네, 그렇죠. 바다비의 엄마?
우중독보행 : 어? 누가 그랬는데?
정민아 : 바다비 생일 내가 요리해서 오니까 엄마 마음이라고 팬이 그러던데.
유춘오 : 2004년 하반기에 ‘바다비’가 문을 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민아 씨는 언제부터 함께였나요?
정민아 : 2004년부터예요.
유춘오 : 오호 처음 만나던 모습 재미나겠는데요.
우중독보행 : 정민아 씨 첫인상은 (쿵후영화에서)
도장 깨기 하러 온 방랑자 이미지였어요. 가야금을 메고 혼자 왔어요. 일종의 오디션을 보러 왔는데 느닷없었어요. 당시 국악기를
갖고 오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걸 보고서 ‘가야금을 들고 인디판에 들어와? 이거 재밌네?’ 생각했죠. 일단 만났으니 부침개
안주라도 만들려고, 강판에 감자를 갈았어요. 소주를 못 먹는다고 했고, 그때 맥주밖에 못 먹는다고 하더군요. 오디션 개념이
아니었고 그냥 가야금 얘기했어요. 그러다가 여기서 공연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홍대 앞에서’, ‘인디음악에서’
국악기는 최초…뭐 이런 생각을 할 틈은 없었고 그냥 음악(정민아 씨의 연주)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어요. 고정관념
속의 국악은 아니었고, 장르를 섞어서 독자적으로 만든 음악. 그때부터 공연하게 되었어요. 그 무렵부터 서서히 살롱 바다비라는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당시 인디 뮤지션들이 단체로 여기서 숙식도 하는 등 바다비가 뮤지션들의 아지트 역할을 좀 했어요.
정민아 : 뮤지션들의 아지트가 된 배경을 보면,
당시에 관객보다 뮤지션이 더 많았어요. 공연 마지막 곡할 때쯤 (뮤지션들이) 자기 돈으로 안주를 만들어요. 그 자리에서. 그러곤
같이 놀아요. 그게 그대로 뒤풀이가 되죠. 풀이 중에 공연보다 재미있는 쨈의 향연들이 일어나고, 서로 얘기하고, 소통하고,
뮤지션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영상 찍고, 사진 찍고, 자연스럽게 화학작용이 일어났어요. 물론 사귀고, 헤어지고… 예술가들의
사랑(love)방 같기도 했어요.
우중독보행 : 정민아 씨가 많이 먹여 살렸습니다.
자체 제작한 음반 500장을 현장에서 판매했는데 공연장에서 잘 팔렸어요. 국악이라는 벽이 없었고, 장르를 떠나서 좋은 음악이니까 잘
팔렸고, 잘 팔리면..개콘(개그콘서트)처럼 “소고기 구워먹겠지”. (웃음) 그래서 음반 팔면 그 수입으로 술 사고..여신이었요.
유춘오 : 정민아 씨에게 바다비와 우중독보행의 첫인상은 ?
정민아 : 이상한 노숙자. 똘끼 충만한 사람이었어요.
다른 공연장에서도 공연하는데 그때마다 사랑하는 공간은 바다비라고 얘기하고, 그 똘끼가 있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한마디로 이상한 사람. 사회에서는 못 만나는 사람! 첫 기억이 다른데 당시 홍대 앞 ‘로베르네집’에서 처음으로 공연하고 있었어요.
갤러리 카페였는데 한 달에 2번 정도 공연을 했어요. 거기서 바다비라는 곳이 생겼는데 거기가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소개받았어요.
그래서 사실 오기 전에 연락하고 왔고, 와서는 노래 몇 곡 부르면서 오디션도 좀 했었는데… 만나자마자 바로 강판에 감자 갈아
먹은 게 아니요.
국악과 홍대 앞의 화학적 결합? 물리적 결합?
유춘오 : 가야금 같은 악기는 실제로 볼 기회가 적었을 텐데, 우중독보행 대표는 당시에 국악이 처음이었는지요?
우중독보행 : 볼 일이 거의 없었어요. 황병기 선생의
‘미궁’ 이런 거 들으면서 비 오는 날 소주 마시고 그랬던 기억 정도만 있어요. (그러다가 정민아 씨의 공연을 보니)
신선했어요. ‘정형화된 국악은 이런 것이다.’라는 틀을 깼어요. 현대적인 가사를 붙이고, 연주도 일반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했고.
유춘오 : 최근 홍대 앞에 국악 전공자들이 많아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두 분이 조언한다면?
우중독보행 : 국악인들이 홍대 앞에 들어올 때
쭈뼛쭈뼛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도 않겠지만… 국악도 당대에 활발히 활동하는 음악 예술 장르잖아요. 홍대 지역은 두루두루 섞여서
노는 곳인데, 국악도 같이 놀면 좋지 않을까? 국악이라고 특별할 것 없다고 봐요.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듣는 건 그리고 감동을
는 건 듣는 사람의 몫이요. (국악인들이) 와서 놀면 됩니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 모인 동네인데.
정민아 : 시류를 따라가지는 않았으면 해요. 트렌드 따라가는 그런 거 안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목적 없이 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음악적)신념은 있어야 하지만, 부나 명예나 유명세를 추구하면, 그 의도가 금방 ‘뽀록’ 나니까.
정민아 : 대학까지는 소위 말하는 국악계 엘리트
코스를 밟아간 셈입니다. 그러다 사회에 나와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안양에 있는 공간에서 처음 공연을 했어요. 그때 느낀 게 그냥
공연장이었지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죠. 화학작용을 일으키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바다비를 통해, 수많은 편견이 깨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다비 만의 더럽고, 우울한 느낌, 찐득한 느낌에서 오히려 인간의 아름다운 그런
것들(인간애와 정) 그런 게 느껴졌어요. 이런 게 인간의 본 모습이 아닐까? 여기서는 그런 모습을 봤어요. 겉으론 그럴싸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게끔 도와주는 게 바다비예요. 사고의 전환 ? 또 바다비는 자기가 만든 음악을 아무런 제약 없이
관객에서 들려주고 그것을 바로 평가받는 겸허한 곳이기도 합니다.
‘살롱 바다비’를 추억하다.
살롱 바다비가 일간지에 나온 적이 있는데 엉뚱하게도 훈훈한 미담
때문이지 음악이 아니었다. 2011년 9월 재정난에 빠진 바다비의 운영과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우중독보행의 수술비 마련을 위한
인디뮤지션들의 자발적 모금 공연인 ‘바다비 네버 다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크라잉넛, 장재인, 십센치 같은 인기 인디밴드 137개
팀이 11일 동안 홍대 앞 곳곳에서 바다비를 돕기 위한 모금공연을 벌인 것이다. 덕분에 바다비는 큰 고비를 넘겼다.
유춘오 : 바다비를 추억할 때 기억나는 팀은?
정민아 : 지금 활동하는 이름으로 말하면, 사이, 하이미스터 메모리, 박종현, 갤럭시 익스프레스, 비둘기 우유, 적적해서 그런지, 불나방스타 쏘세지클럽의 조 까를로스 등등입니다. 아!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도 있네요.
유춘오 : ‘바다비 네버 다이’ 당시 우중독보행님은 병원에 계셨는데.
우중독보행 : (당시 우중독보행은 수막염이란 병에
걸려 큰수술을 받았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뜨니 의사가 의식을 확인했어요. 그 의사가 바다비 뮤지션인데
‘셀린셀리셀린느’라고요(공연을 위해 바다비를 드나들던 그 의사가 우중독보행의 건강이 심상찮음을 알고 치료를 주선했다.). 그
친구가 들어와서 말해주는데, “밖에서 지금 형 살리고 공간도 살리려고 뮤지션들이 모여서 페스티벌 준비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
얘기 듣는데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심박 그래프 뛰고 그랬어요. 눈물이 났어요. 내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같이 계속 놀자고, 공간 살려고 페스티발 준비한다는 소리에 너무 벅찼어요.
유춘오 : 바다비 왜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우중독보행 : 수익이 입장료뿐입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한 친구가 술도 팔고, 음료도 팔아서 좀 보태자고 했어요. 돈 궁해도 그건 안 한다고 그러고는 치킨집, 김밥집에서 배달일 했어요.
ㅡ 치킨집이력서 ㅡ저는 관내도도 볼 줄 알고설겆이 전단지 닭튀김도 잘 합니다
이안에서 하는 일은 다 잘 할 수 있습니다
저를 알바로 써 주세요
홍대에서 살롱 바다비라는 공간을 운영하며
그공간에 제가나가는 시간은
목요일 저녁 8 : 00
금요일 “
토요일 ” } 5 : 00 (앗 ! 17:00분입니당 )
일요일 “
(2008 테이블)
<작 : 우중독보행>
유춘오 : 바다비를 살리려는 모금 운동이 2011년 전에도 있지 않았는지?
정민아 : 2006년 겨울 넘어가기 전에 있었죠.
우중독보행 : 건물주가 월세랑 보증금 올린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월세는 일주일 공연하면 모아서 내고 그랬는데, 공연 입장료만 갖고 운영을 하니까 부족해서 밀리고 밀리고 하다가
결국 건물주가 나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뮤지션을 모아놓고, 한 달만 재밌게 놀고 나가자고 했어요. 버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그 친구들이 회의했습니다.
살롱 바다비에는 거의 매일 이런 공연들이 올라온다. 오랜만에 정민아(왼쪽아래)가 바다비에 출연했다.
정민아 : 즉석 회의를 하는데 뮤지션20팀 정도가 모였어요.
우중독보행 : 재계약을 하기가 어려워 9월 말까지
공연을 할 수 있다고 하니, 뮤지션들 반응이 이렇더군요. “여기 없어지면 어디 가서 자냐?”, “주말마다 어디가서 자냐 ?” 딴
곳에서 공연해도 와서 자고 했는데 잘 곳이 없어진 것이죠. (웃음) 그래서 뮤지션끼리 무기명으로 쪽지에 자기 능력대로 월요일 입금
가능금액을 써서 모았어요. 계산해 보니 200만 원이더군요.
정민아 : 나중에 실제로도 모였고.
우중독보행 : 수입도 없는 사람들인데 모금한다고
밖에서 공연했습니다. 승합차에 악기 실어서 낮에는 거리에서 모금 운동을 하고 그 관객들을 저녁에 공연장으로 데리고 오고, “우리가
공연을 이렇게라도 할 테니 형은 건물주랑 협상해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건물주랑 협상했죠. 일부러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났습니다. 큰 소리 못 낼 것 같아서. (웃음) 처음에는 한 달 유예 두고, 며칠씩 연장하다가 그렇게 한 열댓 번 만나서
2달까지 늘렸어요. 그렇게 11월 말까지 늘리고, 돈은 700만 원 필요해서 모았지만, 결국 50만 원이 부족했습니다. ‘인디락
공연 마니아’라고 공연을 보러 가는 팬들이 모인 단체가 있었죠. 그 친구들이 대관을 한번 했어요. 그걸로 50만 원이 딱 맞춰져서
극적으로 부족분 메우고, 바다비 생일(12월 3일) 맞춰서 바로 성대하게 공연에 들어갔습니다.
정민아 : 고생 엄청했어요. 겨울에 거리에서 앰프
하나로 모금 때문에 공연이라니… 앰프도 많이 필요하고, 노동력도 많이 필요했었죠. 모금할 때 걷히는 돈이 그 자리에서 십만 원
남짓에 불과해 조급했었죠. 바다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모금 마지막 날에 다 같이 앉아서 모금 통에 들어있는 돈을
셌는데, 다 세어보니 700만 원 조금 넘더군요. 그리고 한번 살렸으니까 다신 안 살린다고 그랬는데…(웃음)
여기까지 듣고 나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싶다. 아! 그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전생에 우중독보행에게 뭔 짓을 했길래, 이승에서 이렇게 발목 잡혀 살지? 가난한 인디뮤지션을 도와주는 착한 아저씨
우중독보행으로 인터뷰하려던 계획이 그냥 와르르 무너졌다. 이 관계가 뭘까? 누가 누구를 보살피는 걸까? 문득 정민아 씨가 말하던
화학작용이란 단어와 함께 오히려 우중독보행의 이런 모습이 바다비가 10년 동안이나 홍대 앞 인디음악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참 별난 사람이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가치를 향한 그의 두서없는
열정이 홍대 앞 인디음악을 지켜오는 한 축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쉽게 홍대 앞이 젊음의 해방구니 뭐니라고 말해왔지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여러 예술적 실험이 잉태되었던 것은 옛날이야기다. 홍대 앞은 이미 여러 대기업의 브랜드 플래그숍 전쟁터로 변했다.
사연을 갖고 있던 오래된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수억 원의 권리금 폭탄을 돌리는 기획 부동산이 건물주를 들쑤시다 보니, 그
좁은 골목길은 리모델링 공사로 늘 부산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디음악을 하는 이들이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홍대
앞이라는 살얼음판의 숨구멍 같은 ‘살롱 바다비’ 를 지켜오는 우중독보행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중독보행과 바다비를 살리기
위해 137개 인디밴드팀이 ‘바다비 네버다이’ 페스티벌을 기획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것을 나중에 보답하는
수준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바다비 그리고 우중독보행은 인디밴드와 이미
한 몸뚱어리니 말이다.
인터뷰 / 사진 / 글 / 영상 : 유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