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문인회 2022 성지순례 일정표
일시; 2022년 10월 15일(토)
목적지 ; 한티성지 --> 신나무 골 성지 --> 구상문학관
09; 00 어린이회관→ 09: 10 동아쇼핑→ 9; 30 성서 홈플러스
10; 00 한티 성지 도착 - 교우촌과 순교자 묘소 방문 (해설사)
11; 00 미사(순례자 성당)
12; 00 점심(순례자 식당) 및 산책
13; 00 신나무 골 성지로 이동
14; 00 신나무 골 도착, 순교자 묘지 참배 및 십자가의 길(이혜주 간사)
15; 00 구상문학관으로 이동
15; 30 구상문학관 도착, 문학관 둘러보기(여환숙 소화데레사 해설사) 및 영상자료 관람,
문학 강의('대구와 구상'-이태수 고문)
16; 30 대구로 출발 → 17; 30 대구 도착 (성서 홈플러스→ 반월당→ 어린이회관)
참가자 명단
1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지도 신부님 | 2 이태수아길로 | 3 박방희안셀모 | 4. 곽선희엠마 |
5. 김옥순 아가다 | 6. 김정실 벨라뎃다 | 7.여영희세실리아 | 8. 서정길시몬 |
9. 이규석 힐라리오 | 10. 이규석 루카 | 11. 이기창 리베르또 | 12. 이문향 수피아 |
13. 이순옥 세래나 | 14. 이진엽 비오 | 15. 이혜주 율리아나 | 16. 임우희 소피아 |
17. 연주 마틸다 | 18. 유만숙 비비안나 | 19. 조희경 소피아 | 20. 홍선희 마리루시아 |
21. 황유성 바오로 | 22. 박경선 안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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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티 성지
한티는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박해를 모면한 교우들이 숨어들기 시작하여 1850년 말경에 큰 교우촌이 되었다. 병인박해(1866년)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때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다.
가.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전국에 많은 성지가 있으나 순교자들이 실제로 살고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그 자리에 묻힌 후 지금까지 무덤이 그대로 전해오는 성지는 잘 없다는 면에서 한티는 특별한 성지이다.
나. 한티는 200년 동안 신앙의 숨결이 이어온 땅이다.
박해가 심하면 교우들이 떠남으로써 교우촌은 사라지게 되나, 한티는 박해가 시작되거나 끝나고 나면 또다시 교우들이 돌아와 지금까지 신앙의 숨결을 이어온 곳이다.
다. 한티는 박해 시대의 심산 교우촌이다.
해발 600미터에 자리한 한티는 지금도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주위에 다른 민가가 없는 외딴곳이다.
라. 한티는 순교자와 교우촌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순교자와 교우촌은 따로 뗄 수 없는 순교자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37기 순교자의 무덤이 십만여 평의 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서 있다.
마. 한티는 박해 시대의 이름 없는 순교자를 만나는 곳이다.
박해 시대에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대부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무명 순교자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고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바. 한티 가는 길은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을 배우는 곳이다. 200년 동안 신앙 선조들이 이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서 빌어주리라.
2. 신나무 골 성지
천주교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자 경상도 지방 천주교 선교의 요람지이다. 당시 청송, 진보,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신나무 골로 숨어들었다. 1815년 성 김종한(안드레아)의 옥바라지를 위해 그 부인과 아들이 가장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1827년 정해 박해 후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다.
1862년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 살던 이이전(안드레아) 가족이 부락민 들의 박해를 피해 이주하였고, 인근 신자 가족들도 이주해와 제법 큰 신 자촌을 이루었다.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들과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 (1849~1861)을 하였으며, 병인박해 때 아들과 함께 순교한 이선이(엘리 자베스)도 한때 이곳에 숨어 있었다.
신나무 골은 1880~1890년대 선교사들의 경상도 선교활동 거점으로서 대 구 본당, 전주 본당 ,부산 본당, 가실 본당의 산실이었다.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설립한 대구 본당(현 계산동주교좌성당)의 첫 본당 터가 바로 신나무 골이었으며, 신나무 골에서 사목했던 보두네(Baudounet, 윤사물) 신부는 전주 본당(현 전동 성당), 조조(Jozeae, 조득하) 신부는 부산 본당, 파이아스(Paihasse, 하경조) 신부는 왜관에 가실 본당(현 낙산 성당)을 설립하였다. 1894년 이후 신나무 골은 가실 성당의 공소가 되었고, 1928년부터 왜관 성당, 1968년부터 신동 성당의 공소가 되었다.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이다.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 ‘영남교회 선교 요람 기념비’를 세웠고 1984년 순교자 이선이(엘리자베스)의 묘를 이장하였으며,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 골 학당(연화학당; 한문과 서양학문,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던 학교로 로베르 신부가 설립하였다
3. 구상 문학관
구상문학관은 구상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구상 시인(1919~2004)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하여 22년간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구상문학관 앞마당에는 구상 시인의 시비가 있다. 한국 과 일본에서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폴의 강 모임'이 2008년 10월에 세웠다.
1층 전시실에 있는 시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절망과 탄 식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비극과 참회,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형제애와 인류애를 강조하며 기독교적 신앙이 바탕이 된 사랑으로 전쟁의 비극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시들이다.
2층 문학관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7,000여 권의 소장 도서가 보관된 공간이다. 2012년 9월 22일 한국기록원의 기록 인증 사업 중 최다 저자 서명본 도서 보유(6,062권) 문학관으로 대한민국 최고 기록에 등재되었다.
또 2층 사랑방은 문학인들의 토론의 장인데 당일, 여기에서 구상 문학에 대해 명사('대구와 구상'-이태수 고문)의 강의를 들을 계획이다.
그리고 구상 시인이 생전에 시를 짓고 생활하시던 ‘관수재’가 있는데, 단골손님은 천재 화가 이중섭이었고 지인들과 함께 삶과 예술을 노래하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상 시인은 프랑스 문인 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 한티 성지
한티는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박해를 모면한 교우들이 숨어들기 시작하여 1850년 말경에 큰 교우촌이 되었다. 병인박해(1866년)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때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다.
가.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전국에 많은 성지가 있으나 순교자들이 실제로 살고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그 자리에 묻힌 후 지금까지 무덤이 그대로 전해오는 성지는 잘 없다는 면에서 한티는 특별한 성지이다.
나. 한티는 200년 동안 신앙의 숨결이 이어온 땅이다.
박해가 심하면 교우들이 떠남으로써 교우촌은 사라지게 되나, 한티는 박해가 시작되거나 끝나고 나면 또다시 교우들이 돌아와 지금까지 신앙의 숨결을 이어온 곳이다.
다. 한티는 박해 시대의 심산 교우촌이다.
해발 600미터에 자리한 한티는 지금도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주위에 다른 민가가 없는 외딴곳이다.
라. 한티는 순교자와 교우촌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순교자와 교우촌은 따로 뗄 수 없는 순교자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37기 순교자의 무덤이 십만여 평의 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서 있다.
마. 한티는 박해 시대의 이름 없는 순교자를 만나는 곳이다.
박해 시대에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대부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무명 순교자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고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바. 한티 가는 길은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을 배우는 곳이다. 200년 동안 신앙 선조들이 이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서 빌어주리라.
2. 신나무 골 성지
천주교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자 경상도 지방 천주교 선교의 요람지이다. 당시 청송, 진보,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신나무 골로 숨어들었다. 1815년 성 김종한(안드레아)의 옥바라지를 위해 그 부인과 아들이 가장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1827년 정해 박해 후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다.
1862년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 살던 이이전(안드레아) 가족이 부락민 들의 박해를 피해 이주하였고, 인근 신자 가족들도 이주해와 제법 큰 신 자촌을 이루었다.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들과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 (1849~1861)을 하였으며, 병인박해 때 아들과 함께 순교한 이선이(엘리 자베스)도 한때 이곳에 숨어 있었다.
신나무 골은 1880~1890년대 선교사들의 경상도 선교활동 거점으로서 대 구 본당, 전주 본당 ,부산 본당, 가실 본당의 산실이었다.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설립한 대구 본당(현 계산동주교좌성당)의 첫 본당 터가 바로 신나무 골이었으며, 신나무 골에서 사목했던 보두네(Baudounet, 윤사물) 신부는 전주 본당(현 전동 성당), 조조(Jozeae, 조득하) 신부는 부산 본당, 파이아스(Paihasse, 하경조) 신부는 왜관에 가실 본당(현 낙산 성당)을 설립하였다. 1894년 이후 신나무 골은 가실 성당의 공소가 되었고, 1928년부터 왜관 성당, 1968년부터 신동 성당의 공소가 되었다.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이다.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 ‘영남교회 선교 요람 기념비’를 세웠고 1984년 순교자 이선이(엘리자베스)의 묘를 이장하였으며,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 골 학당(연화학당; 한문과 서양학문,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던 학교로 로베르 신부가 설립하였다
3. 구상 문학관
구상문학관은 구상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구상 시인(1919~2004)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하여 22년간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구상문학관 앞마당에는 구상 시인의 시비가 있다. 한국 과 일본에서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폴의 강 모임'이 2008년 10월에 세웠다.
1층 전시실에 있는 시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절망과 탄 식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비극과 참회,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형제애와 인류애를 강조하며 기독교적 신앙이 바탕이 된 사랑으로 전쟁의 비극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시들이다.
2층 문학관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7,000여 권의 소장 도서가 보관된 공간이다. 2012년 9월 22일 한국기록원의 기록 인증 사업 중 최다 저자 서명본 도서 보유(6,062권) 문학관으로 대한민국 최고 기록에 등재되었다.
또 2층 사랑방은 문학인들의 토론의 장인데 당일, 여기에서 구상 문학에 대해 명사('대구와 구상'-이태수 고문)의 강의를 들을 계획이다.
그리고 구상 시인이 생전에 시를 짓고 생활하시던 ‘관수재’가 있는데, 단골손님은 천재 화가 이중섭이었고 지인들과 함께 삶과 예술을 노래하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상 시인은 프랑스 문인 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첫댓글
다음카페 통합으로 인사가 늦었습니다.
지난 10,15(토) 코로나로 인해 3년여만의 가톨릭 문인회 성지순례시 구상문학관에서 정태우 신부님과 이태수 고문님의 '대구와 구상시인' 강의 감명 깊게 들으며 선생님들에게 인사 드릴 수 있어 의미 있고 소중한 하루로 보낼 수 있어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들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