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는 전자책을 어떻게 만들까. 흔히 전자책은 종이책 제작 과정에서 인쇄와 유통이 빠진 만큼 값을 매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자책은 종이책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파일 확장자를 바꾸기만 하면 되는 걸까. 약 2년간 EPUB 전자책 100여권을 제작한 도서출판 길벗(이하 길벗)이 전자책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길벗에서 전자책은 디지털콘텐츠사업팀이 전담한다. 이미 만들어진 종이책을 바탕으로 전자책을 제작하는 곳이다. 이광희 대리와 방혜수 인턴 사원은 종이책의 콘셉트에 따라 EPUB 전자책 시안을 만들고, ‘다이피아’라는 조판 업체와 프리랜서에게 EPUB 전자책 제작을 맡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자책은 국내에서는 한국출판인회를 통해, 해외쪽은 애플 아이북스 스토어 미국 시장에 판매한다. 현재 애플은 출판사가 국내 아이북스 스토어에 책을 등록하지 못하게 한다.
▲이광희 대리와 방혜수 인턴사원
#1. 시안 만들기
## 최종 파일 받기→HTML코드 뽑아내기/이미지 잘라내기→시길에서 코드 수정하기
이광희 대리와 방혜수 씨는 전자책 제작을 외부에 맡기기 전, 지침서 노릇을 할 시안을 먼저 만든다. 시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최근에 마무리된 파일부터 구해야 한다. 인쇄소에 보내기 직전 파일이 가장 따끈할 것 같은데 조판 과정에서 수정되는 때도 종종 있다. 그래서 인쇄소에서 CD로 보내온 PDF와 인디자인 파일로 전자책을 제작한다.
“최종, 최신의 데이터로 전자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최신 데이터는 인쇄소에 있지요. 종이책이 인쇄되기 직전 파일 말입니다.”
시안을 만들 때는 종이책 편집 의도를 최대한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종이책 편집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자책 특성에 맞게 편집이나 디자인을 바꿀 때도 있다. 가령 이미지가 복잡한 글상자를 전자책에도 넣으면 태그가 복잡해지고 전자책 파일 용량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형태로 바꾼다.
토익 문제집은 ‘몇 쪽 가기’라는 식으로 페이지를 표시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EPUB 전자책은 글자 크기, 줄간격 등을 조절할 수 있어 페이지가 고정돼 있지 않다. 이런 책은 페이지를 표시하는 대신 문제 번호와 해설집이나, 지문을 링크로 연결하는 방법을 쓴다.
이광희 대리는 “토익 문제집의 페이지를 링크로 바꾸자는 아이디어는 방혜수 씨가 냈는데, 이렇게 전자책에서는 화려한 기능이 필요한 게 아니라 스크린으로 책을 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방혜수 씨는 입사하고 ‘토익스피킹핵심패턴233’을 첫 시안 과제로 맡았다. 내지를 흑백으로 인쇄한 책인데 전자책 시안을 만들 때는 컬러를 넣었다. 방혜수 씨는 “컬러를 종이로 인쇄할 때는 비용이 들지만, 전자책은 추가로 돈이 들진 않는다”라며 “연습 문제쪽은 실제 시험과 비슷한 느낌을 내려고 흑백 디자인을 그대로 살렸고, 설명 중 강조할 부분을 골라 색을 넣었다”라고 설명했다. HTML5 솔루션은 원서는 컬러판이지만, 국내에서 번역하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종이책은 흑백으로 인쇄했다. 전자책으로 제작할 때는 다시 색을 살려 독자들이 읽기 좋게 만들었다.
▲흑백 종이책은 전자책으로 제작되며 컬러로 바뀌기도 한다.
#2. 편집자·디자이너와 회의하기
시안이 완성되면 이광희 대리와 방혜수 씨는 제작 의도에 맞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회의를 연다. 회의에서 나온 피드백을 바탕으로 시안을 수정하는 1번 단계로 돌아간다.
이 회의는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참여하는데 파일을 주고받는 방법 대신 얼굴을 마주하고 진행된다. 굳이 오프라인 회의로 진행하는 까닭은 여전히 전자책은 내부에서 정보 공유가 필요한 부문이기 때문이다.
“아이패드에 시안을 넣고 회의하는데요. 얼굴을 마주봐야 피드백이 제대로 나온다고 생각해요. e메일로 한다든가 하면 화면을 캡처하고 설명을 그려넣는 게 더 번거롭기도 하고요. 회의는 오래 걸리지 않는 편인데 처음에는 시안을 만들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꽤 걸렸어요. 민음사에서 ‘스티브 잡스’ 전기를 전자책으로 제작하는 데 한 달 걸렸다는 말을 십분 이해합니다.”
‘소설로 보는 주식’은 길벗이 출간한 책 중 레이아웃이 가장 단순한데 각종 전자책 단말기와 앱 10 종에서 테스트했다. 벌써 2년 전부터 이 작업을 시작한 터라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전자책에 관한 기초적인 질문을 하는 단계는 지났다.
▲회의할 때는 전자책을 더 간편하게 만들면서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을 의논한다. 사진은 종이책에서는 글상자를 다소 복잡하게 그렸지만, 전자책을 만들며 단순화한 모습.
#3. 외부 업체에 전자책 제작 맡기기
길벗은 처음에 조판업체 한 곳에만 맡겼다가 최근 프리랜서 1명을 섭외했다. 제작 물량이 점차 늘어나니 조판 업체도 늘린 것이다. 제작을 맡길 때는 시안을 보여주고 ‘이대로 만들어달라’라고 한다. 길벗 한 곳이 2년간 만든 전자책이 100여권을 웃도는데 “점차 전자책을 출시하는 출판사가 늘어나는 추세이니 협력할 조판업체도 많이 찾아야 한다”라고 이광희 대리는 말했다.
#4. 편집부에서 전자책 검수하기
길벗은 전자책도 검수한다. 시안대로 만들어졌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등 종이책을 제작할 때 인쇄 직전 필름 검수를 하듯 전자책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편집부가 보기에 레이아웃 전체를 변경해야 하면 조판업체에 되돌리지만, 간단한 수정은 이광희 대리와 방혜수 씨가 처리한다.
종이책을 만들 때는 출판사의 요구대로 외부 조판업체가 수정하는데, 길벗은 일부러 내부에서 이 과정을 진행한다. “우리가 하는 게 더 빠르기도 하고, 코드 분석력을 기르고 수정하다 다음 시안에 쓸만한 코드도 발견할 수 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전자책 제작을 출판사가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인 모양이다.
▲길벗은 전자책 뒷면에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명기하고 전자책 제작을 맡은 디지털콘텐츠사업팀과 조판업체도 표시한다.
#5. 납품하기
전자책이 완성되면 판매하는 일이 남았다. 종이책은 총판에 보내는데 전자책에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 한국출판인회인데 길벗은 국내 판매는 이곳에 맡기고, 애플 아이북스 스토어 미국쪽에 직접 등록해 판매한다. 시안 회의를 할 때처럼 이때도 길벗은 아날로그 방법을 쓴다. e메일로 파일을 전송해도 되지만, 이광희 대리는 한국출판인회의 담당 직원을 만나 USB메모리로 전자책을 전달한다.
“이렇게 만날 때 정보 교류가 일어나요. 요새 길벗책 반응이 어떤지,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이렇게 하면 좋겠다’라는 조언을 얻을 수 있지요. 예를 들어 MP3 파일을 내장한 영어 책을 만들었는데 ‘아직 국내에서는 MP3 파일을 지원하는 전자책 뷰어가 없으니 파일 내장은 다음에 하는 게 낫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전자책 시장은 성장 단계라서 정보 교류가 중요해요.”
#6. 데이터 백업하기
길벗은 전자책 데이터 백업을 삼중으로 한다. 일단 CD로 굽고, 외장하드에 옮기고, 사내 서버에도 옮겨둔다. 이광희 대리가 꿈꾸는 데이터 백업 방법도 있다. 바로 클라우드에 백업하는 것이다. 현재는 데이터 백업한 게 모두 회사에 있어, 자칫 회사의 모든 자산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는 눈치이다. 가장 이상적인 전자책 서비스는 출판사가 자사 서버에 전자책 파일을 등록하고, 유통사는 판매만 맡아 독자가 출판사 서버에 접속해 책을 보게 하는 것 아닐까.
<이광희 대리에게 묻는 EPUB 제작 이모저모>
- 시안 만들 때 실행하는 응용프로그램은 무엇이 있나.
= 포토샵과 인디자인, PDF, 시길이 있다. 포토샵은 이미지를 잘라내기 위해 쓰고, 인디자인은 원본 데이터를 보기 위해 띄워둔다. PDF는 종이책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졌는지 보기 위해 사용한다. 그리고 EPUB 저작도구인 시길을 쓰고 있다.
▲시길로 코드를 보는 화면과 미리보기 화면
- 이미지는 왜 잘라내야 하는가. 이미지 파일을 EPUB에서 사용하는 게 어려운 건가.
= 레이어가 여럿 겹친 이미지는 최종 보이는 모습을 잘라내 쓰는 게 낫다.
- 인디자인 파일을 EPUB 파일로 변환하는 건 단추 하나 클릭하면 되는 건가.
= 인디자인에서 HTML 코드를 뽑아내는 기능이 있다. EPUB이 HTML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이 과정이 유용하지만, 순서가 뒤죽박죽의 되어 나온다. 종이책을 만들 때 전자책으로 변환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동 변환된 코드를 하나하나 찾아 순서에 맞게 재배치해야 한다.
- 인턴사원이 할 만큼 EPUB 제작이 쉬운 것인가.
= 방혜수 씨는 종이책 편집을 공부한 사람이다. 전자책을 만드는 사람은 HTML 코드도 알고 편집도 아는 게 좋다.
- 전자책을 더 간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나. 파일 하나로 종이책을 인쇄하고, 전자책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 그렇게 되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전자책은 종이책과 마찬가지로 외부 조판업체와 인쇄업체까지 연결돼 제작된다. 파일 호환과 정산 시스템까지 맞물려 있어, 이 과정을 단순화하려면 길벗 혼자가 아니라 국내 출판계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출판계는 여전히 종이책 위주로 움직인다.
- 전자책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 아날로그 필름도 디지털로 변환할 때, 색상 보정과 사운드 채널 분리는 수작업을 거쳐야 한다. 솔루션이 있다고 해도 사람 손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전자책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종이책 제작보다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른바 ‘노가다’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얼핏 전자책 단가가 더 낮을 것 같지만, 이렇게 사람을 투입하고 있다. 단가를 낮추려면 전자책이 어마어마하게 팔려야 하는데 그 단계까지 전자책 시장이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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