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룹'해피돌스'로 보낸 월남에서의 2년
중학교에서도 학교를 빠지는 날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다.
워낙 내가 정신없이 돌아다니 다가 한번은 당시 담임이셨던 김상기 선생님이 나의 어머니를 조용히 학교로 부르셨다.
막 상 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공부를
제대로 못하여 평소부터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나와 어머니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 앞으로 갔다.
선생님은 이제 나의 장래를 생각할 때도 되었으니
공부든 노래든 하나를 확실히 결정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그해 여름 나는 언니들과 '해피돌스'라는 그룹을 조직,
유니버셜 레코드사의 주선 으로 월남으로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들과
떨어지는 것이 슬프기도 했고 더구나 가는 곳이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전쟁터라는 생각에 무섭기도 했다.
공항에 내렸을 때 제일 먼저 사이공에 대한 인상은 무섭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더위 와는 질적으로
다른 끈적끈적하고 습한 열대 특유의 공기가
트랩을 내리자마자 몸을 감아왔 다.
우리는 사이공의 한 가정집을 얻어서 단체생활을 했다.
단체생활 얘기가 나왔으니 말 이지 월남시절을 포함해서 나는
내 사춘기의 거의 전부를 외국에서 단체생활로 보냈다.
해피돌스의 멤버 중 가장 위는 김승희 언니였다.
지금은 미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승 희언니는 색소폰과
리듬기타를 연주했는데 제일 맏언니답게 우리들을 리드하고 어려울 때면 잘 도와주었다.
그리고 퍼스트 기타를 맡았던
새침떼기 김승미 언니, 베이스를 맡았던 걸걸하고
남자같았 던 이종숙 언니. 모두가 같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지금도
만나면 형제 이상의 정을 느끼는 언니들이다.
아무튼 우리는 숙소에 여장을 풀던 날부터 바로 일에 들어갔다.
월남 각지에 있던 미군 부대에
위문을 다니는 일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오늘은 다낭으로,
내일은 캄란만으로 차 위에서 자는
날도 많았고 군인들이 비워준 막사에서 자는 날도 많았 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너무 어렸을 때라 피곤한 줄도 몰랐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기겁을 해대던
대포소리도 날이 갈수록 익숙해지고 어디나 전쟁터라면
으레 그렇듯 지저분한 거리 풍경도 차차 정이 들어갔다.
당시 월남에 있었던
미군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별칭이 많았다.
어린 소녀들로 구 성돼 있었기
때문에 베이비 팀이라고도 불렀고 잭슨
파이브의 <벤>등을 잘 불렀기 때문에 코리안 잭슨 파이브라고도 불렀다.
한번은 공연을 위해 돌아다니던 중에 이주일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주일씨는 국군위 문단 소속이었는데 서울에서 극장쇼를 하던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주일씨는 대뜸 여기 웬일이냐고
하면서 악수를 청했는데 하도 얼굴에 수염이 많이
나고 열대의 태양에 검게 그을려서 하마터면 나는 못 알아 볼 뻔했다.
지금도 이주일씨를 만나 면 그때 얘기를 하시곤 한다.
그땐 새까맣고 조그마했는데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신세가 됐다며.
그런 월남생활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은 부모님들이었다.
틈날 때마다 편지도 쓰고 사진 도 부쳐주면서 매번 우리는 같이 붙잡고 울었다.
다들 말쑥한 교복을 입고 사춘기소녀의 꿈들을 꾸며 학교에 다닐 나이에 전쟁터로 날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월남에서 우리가 베트콩이나
대포소리보다도 더 무서워한 것은 거의
생쥐만한 열대의 도 마뱀들이었다. 열대의 도마뱀들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담장 위에 올라가 있기 도
하고 마루 밑, 심지어 어떤 때는 침대에서
잠을 깨면 말똥말똥 눈을 뜨고 머리맡에서 나 를 쳐다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문단속을 하고
도마뱀들이 들어 올만한 곳을 틀 어막았지만
열대의 집들이 기본적으로 허술하게 지어져서 그런지 허사였다.
우리는 속수무 책으로 도마뱀을 볼 때마다 기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생도 많았던
월남생활도 어느덧 2년이 흘러 귀국할 때가 되었다.
덥고 도대체 정들 곳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게 느껴졌던 월남이지만,
어느 사이에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 는지 막상 떠나려니까 왠지 섭섭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귀국을 미룰 수는 없었다.
73년 우리 해피돌스 5명의
소녀들은 부산항을 통해 그립던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부모님 들은 그만큼의 세월만큼 늙으신 것 같았고 동생들도 많이 자라 있있다.
귀국하자마자 우리 는 곧바로 서울에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명동의 실버타운이나 라스베가스
같은 클럽에 나 가서 월남에서 고생하며 갈고 닦은 기량을 과시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인기그룹은 히식스, 트리퍼스 등이었는데
우리 역시 그 중의 한자리를 차지하려고
귀향의 감회에 젖을 겨를도 없이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서서히 국내에 다시
우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또다시 모국땅을 떠나야 했다.
소속사였던 유니버설 레코드사에서
미국으로 들어가 본고장에서 본격적인 그룹활동을 시작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다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 져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이왕 음악으로 인생의 승부를 걸자고 작정한 며칠의 숙고 끝에 그 제안에 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