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 [책 소개]파독(派獨) 광부, 간호사들의 눈물 젖은 40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60, 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 같은 신화의 첫 주역은 바로 이역만리 독일의 지하 1200미터에서 땀과 눈물을 쏟아낸 파독 광부였다.”
2006독일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독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1960년대부터 쏟아낸 땀과 눈물의 기록을 1960, 70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자리매김한 역사교양서 “독일아리랑”(에세이 펴냄)이 나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독일아리랑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해석에 있어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보이고 있는 극단적인 모습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 보되 조화롭게 보려는 시도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특히 전형적인 ‘탐사보도’ 저작으로 평가받는 독일아리랑에는 기존 한국 현대사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 발굴, 공개돼 주목을 끌기도 한다(첨부 참조).
대표적인 것이 광부 파독의 진실. 저자는 광부 파독은 애초에 박정희 정권에서 독일에 먼저 제의한 것이 아니라, 독일 측이 먼저 제의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추적해 공개했다.
또 서독과의 차관 교섭과정에 관여한 유태계 ‘브로커’ 슐 아이젠버그의 행적을 추적,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섭에 관여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많은 사업권을 따내는 등 특혜를 받았음을 폭로했다.
이와 함께 세계를 강타한 1967년 동백림사건 당시 연루된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의 대부’로 불리는 이수길 박사가 엄청난 고문을 받았음을 인터뷰 등을 통해 주장하기도 했다.
재독교포 사회에서 회자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소개된다. 지하 1200미터에서 쇠동발을 붙잡고 엉엉 울었던 사연, 한국인 차별대우에 맞서 입갱거부를 벌이던 사건, 간호사를 찾아 나서던 광부들의 모습 등.
독일아리랑은 1960,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진정한 신화의 첫 주역인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역사에서 온전히 복원하려고 ‘시도’했다는 평가이다. 아울러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 교정도 ‘시도’하기도 했다.
저자 김용출은 전기작가이자 현역 신문기자로서 이 책을 위해 독일 현지 취재와 국내에서의 문헌 연구, 인터뷰 등 2년여의 취재와 연구를 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나주 금성고,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뒤 세계일보에 입사, 편집부 사회부 기획취재팀 체육부 정치부 등을 거쳐 현재 경제부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애 운동가 최옥란의 삶을 다룬 전기 '최옥란 평전'(서울포스트, 2003), 한국적 독서 경영을 모색한 '한국의 독서 경영'(위즈덤하우스, 근간) 등이 있다.
김 기자는 “진실은 진실대로 기록하고 규명해야 하며,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분석할 것은 분석해야 한다”면서 “또 부문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개선하거나 실천해야 할 점은 종합적인 검토와 판단을 통해 실천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파독 광부, 그리고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며 “시간은 많기도 하지만 거의 없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첨부. 이 책이 새롭게 밝혀 낸 사실들
◈ 당시 서독은 이미 진출해 있던 한국인을 통해 한국인 노동력의 수준을 상당히 파악하고 있었고, 먼저 광부 파독을 제의했다. 서독과의 차관 교섭이 끝난 뒤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서독은 지급보증 예외를 조건으로 광부와 간호사 파독을 먼저 제의했다.
“한국에는 실업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독일에 광부 5천 명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독일 광산의 지하에서 일하게 하려는데,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잘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5천 명이 아니라 5만 명이라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호사 2천 명도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시골에 병원을 지으려고 하는데 간호사가 부족합니다.”
“그것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한국은 노동력이 아주 풍부합니다.” (본문 41쪽)
◈ 서독과의 차관 교섭에서 에르하르트 경제성 장관과 같은 오르도 학파였던 프란츠 포크트 교수를 매개로 백영훈 박사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정부 간 협상이 이뤄지기 전 백영훈 박사는 본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던 프리츠 포크트 교수의 집을 매일 찾았다. 동독이 고향인 포크트 교수는 그의 뉘른베르크 대학 스승이었다. 그는 포크트 교수의 소매를 붙잡고 방독의 목적을 설명했다. 때론 포크트 교수의 부인을 붙잡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본문 51쪽)
◈ 파독 광부 중 일부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이들 ‘동백림 사건’ 관계자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그들이 비록 현행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간첩이 아니라는 증언을 녹취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알몸뚱이로 나무의자에 앉히고 전깃줄로 팔을 묶고, 전기판을 양쪽 새끼손가락에 감은 후 한 사람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고 물을 먹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군이 사용하는 야전용 전화기의 벨을 돌리는 손잡이를 돌렸다. 전기가 통한 나는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전기쇼크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졌다. 맨 나중에는 한쪽 새끼손가락의 전기판을 음경에다 감은 후 물을 먹이면서 전기고문을 반복했다. (본문 149족)
◈ 유럽, 특히 독일에서 한국 가발이 시장을 석권하는 과정에서 파독 광부 출신의 활약을 최초로 조명했다.
1968년 9월 어느 날 오후, 독일의 내륙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뒤셀도르프까지 이어진 아우토반 위. 한국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쏜살같이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파독 광부 1차 2진 출신인 L과 최병진, 그리고 1차 5진 출신인 구성원이었다. 독일 최대의 공업지대인 루르 지역에서 가발을 팔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본문 175쪽)
◈ 독일 사회에서 이미륵이 대중적으로 정착하는 데 파독 광부의 역할이 컸다.
독일 사회에서 이미륵이 자리 잡게 되는 데에는 정규화 씨와 전혜린 씨 등 이미륵 연구자뿐만 아니라 송준근 등 파독 광부의 힘도 적지 않았다. 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이미륵을 조명했다면, 파독 광부들은 현실적인 문화와 역사로 정착시켰다. 만약 파독 광부가 없었다면 이미륵의 대중적인 정착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다. (본문 257쪽)
◈ 독일의 지하 1200미터에서 이름 없이 숨져 간 파독 광부들의 이름과 삶에 대한 추적을 시도하여 최초로 그들의 명단을 밝혔다.
주독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82년까지 독일 현지에서 광산 노동 도중 숨진 광부는 26명에 이른다. 이는 파독 광부 사망자 78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다. 또, 교통사고(21명), 질병(17명), 익사(2명), 자살(4명), 사인불명(8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본문 281쪽)
◈ 서독과의 차관 교섭 과정에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미스터리 인물, 유대계 슐 아이젠버그의 역할을 최초로 규명했다.
서독 기업의 ‘한국 특수’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기록되고 기억돼야 할 사람이 있다. 유대계 ‘브로커’ 슐 아이젠버그(Shoul Eisenberg)다. 아이젠버그는 서독 기업의 ‘한국 특수’ 정점에 서 있었던 인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아이젠버그는 또 한일협상과 일본 기업과 자본의 한국 진출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김종필 등 실력자들에게 일본 기업을 소개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307쪽)
◈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삶의 에피소드도 소개
마지막 한국인 광부였던 정용기 씨의 태권도 은메달리스트 이야기, 회충 때문에 파독 광부들의 입갱이 늦어진 웃지 못할 이야기, 신체검사 합격을 위한 광부들의 눈물겨운 노력, 체류 연장과 미국, 캐나다 등지의 비자를 얻기 위해 선원이 된 파독 광부들의 이야기, 파독 광부들의 불법재판 사건, 파독 광부들의 입갱 거부 사건, 서류위조 사건,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사랑 등 파독 광부사회에서 구전되던 얘기를 생생히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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