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에서 오른 쪽 아래쪽 광주(廣州)라 쓴 곳이 남한산성이다.
고읍(古邑)은 광주의 읍치(邑治)가 전에 거기 있었다는 뜻이다.
읍치(邑治)를 옮기면 원래 있던 곳이 고읍(古邑)이 되는 것이니 전국 각지에 고읍(古邑)이란 지명이 꽤 많다.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있다.
"…성벽 밖은 산줄기가 가파르고 첩첩해서 적의 기병이 말을 몰아 다가올 수 없으며 성 둘레는 가파르게 출렁거리며 길게 휘어져
갑자기 포위할 수가 없었다. 성벽이 급하게 휘어지는 굽이에서는 멀리 볼 수 있고 넓게 쏠 수 있어 적병이 성 뿌리에 붙을 수 없고
성 밑이 가팔라서 밖에서는 치 쏘고 안에서는 내리쏘니 성 뿌리에 붙는 적병이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치욕의 병자호란을 치른 뒤 남한산성에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한다.
병자호란 때 청군의 화포공격으로 무너진 동문 부근의 성벽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였다.
인조대의 남한산성 수축의 핵심은 옹성 신축과 포루 설치 그리고 제2남옹성 치의 수축이다.
남쪽 성벽에는 3개의 옹성을 구축하였으며 옹성 끝부분에는 각 방면으로 포를 쏠수 있도록 포루를 구축하였다.
매우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는 연주봉 옹성이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하는 옹성과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한양도성 흥인지문은 대표적인 옹성을 두고 있다. 이때 보통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반원형이나
사각형으로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을 말한다. 연주봉 옹성은 둘레가 315m에 73개의 여담(낮게 쌓은 담장)이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체성벽의 바깥쪽에 길게 돌출시켜 성벽을 쌓아서 옹성이라기 보다는 용도(甬道)이다.
옹성의 상단부는 체성벽의 하단부에 연결시키고 옹성으로 출입하는 암문을 새로 만들었다.
이처럼 체성과 연결시키지 않고 부가적인 성벽을 덧붙여서 방어력을 보강하는 것은 기존의 성제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기술이다.
또한 성벽은 체성벽에 비하여 성돌의 크기가 현저하게 크고 다양한 형태의 성돌로 성을 축조하였으며 옹성 모서리부분과
성벽의 경사를 더 완만하게 하여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새로운 기술이다.
연주봉옹성은 성돌의 크기가 30-40cm 로 남옹성보다 작지만 역시 부정형의 성돌을 사용하고 있으며, 쐐기돌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옹성과 동일한 축성법을 보이고 있다.
『남한지』에 의하면 병자호란 당시 원성 성벽은 주로 동문 주변구간이 많이 훼손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실제로 동성벽 중 동문지 주변에서는 남2옹성치나 남옹성 성돌과 유사한 부정형의 거석으로 쌓은 축성기법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부정형의 성돌을 사용한 남옹성은 너비 40-60cm 크기의 성돌을
면을 맞추어 쌓았으며 10cm 내외의 쐐기돌을 많이 끼워 넣었다. 이처럼 쐐기돌을 활용한 축성기법은 3개의 남옹성과
제2남옹성치에서도 관측되는 것으로 보아 제2남옹성치는 원래 제1남옹성치나 제3남옹성치와 같은 구조였으나
원래의 치를 헐고, 남옹성과 동시기에 길게 내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말단부가 방형을 이루는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 및 제2남옹성치의 기울기는 매우 완만하게 구축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의 진법 전술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종래의 전술은 활과 창, 칼에 의존하였지만,
조총과 홍이포라는 대구경 화포의 위력을 경험하고 나서 신무기인 조총과 화포를 주무기로 하고, 창검과 궁시가 보조하는
전술개념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성에도 대포를 쏠수 있는 시설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었다.
남한산성에는 7개소에 모두 28개의 포혈가 설치되었다. 그중 제1남옹성에 설치된 8개의 포혈과 제2남옹성에 설치된 9개의
포혈, 제3남옹성에 설치된 5개의 포혈, 그리고 연주봉옹성에 설치된 1개의 포혈은 모두 병자호란 이후 원성 수축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2남옹성 포루 앞에 있는 남옹성 무인비이다.
"1638년 남한산성 수축에 동원된 축성군은 호남지방에서 올라온 군 1,000명에 충청도와
강원도의 승군, 그리고 목수, 석수, 야장(冶匠), 니장(泥匠) 등 각종 장인(匠人) 96명이 참여하였다."
숙종대의 수축은 산성의 취약점에 대한 본질적인 보강이 이루어졌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농성한 조선군은 홍이포(紅夷砲)의 위력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군은 남한산성이 바라다 보이는 봉암과 한봉, 남격대를 점령하고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노획한 홍이포(紅夷砲)로
원성을 공격하였다. 홍이포는 최대사거리가 4-8km이고 유효사거리만도 700m에 달하는 가공할 만한 무기로서,
한봉에서 쏜 포탄이 동벽을 무너뜨리고 남격대에서 쏜 포탄이 행궁 근처까지 날아드는 공포를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군이 보유한 원거리용 화포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 주력무기였다.
그 중 화포의 구경이 11.76cm 로 가장 큰 천자총통에 대장군전을 장착할 경우 사거리는 약 1∼1.4km 정도 였으며,
탄환을 장착하면 사거리가 60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병자호란 이후 홍이포의 위력에 대응할 수 있는 즉각적인 방어책이
필요했지만, 청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남한산성이 바라 보이는 봉우리마다 성을 쌓아 원거리 무기에
대응할 수 있는 취약점을 보강하게 되었다. 동벽의 대봉인 봉암과 한봉에는 각각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아 원성에 연결시켰으며,
검단산에는 돈대형태의 신남성을 구축하였다.
봉암성은 숙종 12년(1686)에 신축되었다. 축성에 사용된 성돌의 크기는 너비 60-70cm ,두께 30-50cm, 뒷길이 60cm 정도이고
두께와 너비의 비가 1:1.1∼1:2인 정방형에 가까운 성돌로 정교하게 성벽을 축조하였다.
봉암성의 축성시점은 남옹성보다 50년 정도 후의 일인데 그 사이에 조선의 축성기술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남한산성은 정조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진다.
남한산성은 수원의 독성산성, 안성의 죽주산성과 함께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어
도성과 경기를 지키는데 둘로 없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개축작업은 정조3년(1779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정조대의 남한산성 수축의 핵심은 신소재인 벽돌과 대량의 석회를 사용하여
화포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여장을 새로 쌓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벽돌은 이미 삼국시대에 제작기법이 도입되어 고분축조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건축물이나 탑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특수한 용도 외에는 벽돌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