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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의 고장 서강과 양화나루가 참으로 아름답다.안산에서 내려온 잠두봉이 고개를 서강으로 내민다.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목젓 인후(咽喉)에 해당한 곳,잠두봉이다.그 봉우리 안쪽에 기와집이 몰려있다.
이 길목을 지키는 조선 최강의 군부대 양화진(楊花鎭)이다.영조 때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양화진>이다.
많이 달라졌다.백사장은 사라졌다.강물이 모래벌판을 덮었다.그 위로는 길이 놓였다.봉우리 옆으로는 지하철이 달린다.
잠두봉 이름도 끔찍하게도' 사람의 목을 잘랐다'는 절두산(絶頭山)으로 바꿨다.그 꼭대기에는 육중한 구조물이 놓였다.
'골로 간다' 서쪽 고택골 양화진 잠두봉이다.새남터에서 직선으로 흘러온 한강이 잠두봉에서도 감김이 없이 거침없이 그대로
북서진하고 있다.이런 곳을 풍수지리에서는 '허망하다'고 한다.땅이 허망하고 그 기(氣)가 곱지 않고 드센 곳이니 '처헝장'이
들어설만한 곳이라고 한다.한양도성 밖 서쪽에 세 군데 처형장 순교지가 있다.서소문 새남터 절두산이다.
이 세 곳이 공통점이 있다.첫째 기(氣)가 드센 곳이다.둘째 물가에 있다.세째 철길이 옆으로 지난다.
육중한 전철 기차가 지나면서 이곳의 드센 기(氣)를 눌러주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절두산 서쪽 기슭에 있었던 양화진(楊花鎭)의 옛 터이다.
양화진은 송파진·한강진과 더불어 서울의 3진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대는 조선의 도읍지 한양의 주요한 수로 입구에 해당하는 군사요충지였다.
조선 영조 30년(1754) 한강 수로의 경비를 통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군사상 요충지로 어영청 군사가 배치되었고, 나루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많은 상인이 왕래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양화진 공원을 조성하면서 옛 군진(軍鎭) 터 일부를 장대석으로 구획하여 놓았다.
오른쪽 선유봉이다.그 선유봉 아래 말탄 선비가 백사장에서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다.뱃사공은 서둘어 다가오고 있다,
뱃사공 뒷쪽이 잠두봉이다.잠두봉 꼭대기 기와집은 양화진 군부대다.조선시대 중국에서 귀빈이 오면 배를 띄워 선상에서
환영연을 배플었다.제천정을 떠난 그 배는 용산을 지나 서강에 접어들면 연회는 한껏 고조된다.선유봉을 돌아 양화나루에
배를 댄다.귀빈들은 양화진으로 들어가 마무리 환영연을 만끽한다.조선 조정의 고위관리들도 한강에 배를 띄워 용산 마포의
서강을 따라 잠두봉 앞에 이르면 그 봉우리에 올라가 하루를 즐기곤했다.위의 그림은 겸재 정선의 <양화환도(楊花喚渡)>다.
양화나루는 한양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교통의 요충지였다.또한 군사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 초기 바닷물이 용산까지 밀려와 한때는 용산이 으뜸가는 나루였다.염창의 모래언덕이 조수의 침입을 받아 허물어지고
점차 한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큰 배가 용산까지 직접 들어가지 못했다.그래서 양화나루가 크게 번창하였다.
이 나루는 경상 전라 충청 경기도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서강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항구로서 농산물의 재분배를 담당하는
중요한 곳이었다.양화나루 일대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이다.
이곳 서강일대에서는 뱃놀이를 즐겼다.
1866년 프랑스 해병대를 태운 군함 두 척이 서강대교와 마포대교까지 들어왔다.프랑스 군함은 장찰 끝에 여의치 않아
강화도로 퇴각한다.이 사실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어진다.특히 흥선대군 이하응은 대노한다.
서해 강화도에서 양화진까지 그 뱃길을 어떻게 알고 프랑스 함대가 진입했는지를 파악에 나섰다.프랑스 신부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뱃길을 유도했다는 점을 찾아냈다.조선 정부는 즉각 포복에 나섰다.
"서양 오랑캐가 더럽힌 이 강을 사교(邪敎) 천주교 교도의 피로 씻어내자!"
천주교 박해에 나섰다.그렇게 병인박해가 시작된다.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다.
극적으로 이 순교를 표현하는 이들은 절두산 높은 언덕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목를 잘랐고 그 목에 언덕에서 굴러 백사장으로
떨어졌다고들 이야기한다.사실은 잠두봉 앞 백사장에서 '처형'을 했다고 전한다.갑신정변 실패 후 중국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돼 잠두봉 앞 백사장에서 끔찍하게 효수된다.그 장면은 사이버공간에 흘러다는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피로 물든 백사장의 모래는 명동성당을 지을 때 콘크리트를 칠 때 들어간다.명동성당은 피 묻은 잠두봉 앞 백사장 모래로 콘크리틀
처서 지었다고 전한다.새남터의 순교자의 피로 물든 흙 등으로 벽돌을 찍어 명동성당을 올렸다고 전한다.
우뚝 솟은 절두산 벼랑 위에 산봉우리 그 성지에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들어섰다.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 아래 옛 백사장에 세운 <영혼의 강>시비다.
영혼의 강
한강아,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순교의 터,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핏물 삼키고 가는 어둠이 아니라
물결 가득 영혼의 빛살로 흐른다
한강아,너는 피의 역사를 굽이쳐
우리들 가슴에 쏟아 봇고 가는
놀란 침묵이 아니라 성혈로 흐른다
시 이인평 아구스티노/글씨 동고 이석수
2000년 11월말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이춘만 조각가의 웅장한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제작 설치되었다.
‘큰칼’ 모양의 주탑과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절두탑’으로로 불리는 우측탑,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무명 순교자를 조각해 넣은 좌측탑으로 이루어져 있다.또한 주탑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정에서 배교했다가 마음 고쳐먹고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좌측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 순교탑’으로 박해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은 치명자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서울대교구 절두산 성지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앞 마당에 설치된 성 정하상 바오로 조각상이다.
2005년 제4회 카톨릭미술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행균 조각가의 작품으로 그 작품의 제목은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정하상 바오로와 44인'이다.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맏아들인 복자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다.어머니인 성녀 유 체칠리아는 기해박해의 여파로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겨우 일곱 살이었던 정 바오로와 누이동생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은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해 살길이 막연해지자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기에 천주교를 믿지 않던 친척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정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충실히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누스에게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세례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와 조신철 카롤루스(Calolus)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됨과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정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 앵베르 주교가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정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동생을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정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 다시 끌려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는 심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을 쓰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절두산 천주교 성지 동쪽 야외전시장에 묘비 하나가 눈이 들어온다.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인 송 마리아와 남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묘비이다.
그의 묘는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8번지에 있었다.그 묘는 파묘되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는 한 사찰에서 은언군과 송 마리아 묘비가 발견되어 한동안 보관되다가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은언군 이인(李裀)은 영조의 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숙빈 임씨(肅嬪 林氏)이다.
부인은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이다.
사도세자의 서장남으로 1754년(영조 30) 탄생하였다. 1764년(영조 40) 11세에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진다.
1765년(영조 41) 12세에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과 관례를 행하였다.
1768년(영조 44) 2월 3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官)에 제수되고, 이해 4월 20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이복동생 은신군과 함께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이해 이복동생 은신군은 제주에서 별세한다.
1774년(영조 50) 안치된지 3년 만에 은언군은 석방되어 다시 서용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5월 8일 종부제조(宗簿提調)에 제수하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었고,
이해 8월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이해 8월 24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었다.
1777년(정조 1) 3월 5일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이해 8월 2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778년(정조 2)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1779년(정조 3) 6월 28일 종부제조(宗簿提調)을 거쳐 이해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1786년(정조 10) 종척집사(宗戚執事)를 역임하였다. 이해 당시 홍국영(洪國榮)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다.원빈이 1780년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존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고, 완풍군(完豊君 : 완(完)은 왕족의 본관인 완산(完山)을 가리키고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키며 후에 상계군(常溪君)이라 부르면서 가동궁(假東宮)이라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이 계속 역모를 꾸며고, 상계군 담은 자기가 연루되자
1786년 음 11월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다.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시켰다.1797년(정조 21)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뒤로도 벽파대신(僻派大臣)들과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자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영세받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함께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향년 48세였다.1849년(헌종 15) 손자 원범(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이해 9월 12일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하여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다.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처절하게 저지른 병인박해다.그는 전국 주요 지역에서 '척화비(斥和碑)를 세운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그 이름도 끔찍한 절두산(切頭山) 아래 척화비 모형을 세웠다.그 형식이나 내용은 진본과 다름없다.
그 앞 구리판은 척화비문과 그 역사를 밝혀주는 설명문을 싣고 있다. 그 설명문을 그대로 아래에 옮겼다.
척화비(斥和碑)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