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배는 예정 시간보다 15분 늦게 도착했다. 아니다. 24시간 15분을 늦게 도착했다. 2월28일, 이른 새벽 대구를 출발하여 포항의 여객선 터미널로 달려 왔지만 배가 뜨지 않았다. 파랑주의보가 내려 출항이 통제되었다는 것이다. 발길을 돌렸다가 하루를 지나고 다시 포항으로 달려와 217㎞의 물길을 내닫게 되었다. 높은 파도 뒤끝이라 너울이 높게 일었다. 배가 너울의 파장을 따라 춤을 췄다. 사람들은 요동치는 배를 멀미에 힘겨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오륙 년 전, 얼마나 많이 달렸던 뱃길이던가. 사는 게 곧 바다 건너기임에야 광막한 바다 그 파도와 너울도 곧 우리 삶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하물며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던가. 파도도 너울도 배의 요동도 모두 내가 품어야 할 나의 삶이다.
바다는 파도가 쳤지만, 섬의 부두는 따뜻했다. 하고많은 섬의 절경 속으로 떠났어야 할 공휴일, 사람들은 모두 부두로 나왔다. 환영 피켓을 들고 트랩을 내려서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 새로운 섬 살이의 정다운 섬 가족들이다. 뜨거운 악수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연전에 섬 살이를 함께 했던 사람과는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섬과도 감격의 포옹을 했다. 도동항에 우뚝 솟은 화산암, 그 위에 고고히 서 있는 창연한 향나무, 오밀조밀 모여 사는 도동 사람들, 모든 것이 예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제 보던 모습을 오늘 그대로 다시 대하는 듯 익숙하고 정겨웠다. 내가 섬을 포옹할 때, 섬은 더욱 큰 가슴으로 나를 안아 주는 듯했다.
언제나 나를 그리움에 젖게 했던 모시개, 그 언덕 위에 다시 섰다. 산비탈에 몸을 붙이고 서 있는 내 삶의 터 울릉종합고등학교, 좁다란 운동장 너머 저동항에는 괭이갈매기가 유유한 날개짓으로 날고 있고 노란 조상기를 무늬처럼 달고 있는 배들이 제 철을 기다리며 정박해 있다. 방파제 위에 우뚝 선 촛대바위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고기잡이 나간 아비 그리는 소녀의 전설 속으로 묻혀 들고 있다.
촛대바위 그 전설과 더불어 살아나가야 할 나의 섬 살이-.
3월2일. 자고 일어나자마자 항구로 달려나갔다. 펄펄 뛰는 오징어가 어판장에 가득 차야 할 항구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항구는 오징어도, 뱃사람도, 할복 아낙네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 가을로 성어기가 끝나고, 다시 찾아올 여름 어번기를 기다리며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방파제로 나아갔다. 촛대바위 꼭대기의 푸른 소나무가 바다를 지키고 있다. 저 멀리 수평선 한 점이 홍조를 띠기 시작한다. 바다는 오늘도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결을 이루며 한 판의 매스게임을 벌린다. 언제나 새 해를 사는 나의 섬 살이다.
취임식 겸 시업식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오늘은 여러분과 나에게 모두 뜻 깊은 날이라고 했다. 나는 그리던 곳을 찾아와 새 삶의 터에 다시 몸을 붙이게 되는 날이고, 아이들은 또 한 해를 새롭게 성장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우리 모두 아름다운 마음들을 키우자고 했다. 모두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는 새로운 섬 살이를 기약하는 시그널로 울림졌다.
새 학년 새 학기에 계획할 일도 많고 준비할 일도 적지 않을 터이건만, 선생님들은 능란하게 모든 일을 갈무리해 나갔다. 섬에 온 사람들은 산전(山戰)은 이미 다 겪고, 망망대해 속의 한 점 섬을 살면서 수전(水戰)에 임하고 있다. 먼 물길의 험한 파도를 넘어와 소망을 가꾸며 희망의 섬을 살고 있는 것이다.
3월3일. 학교 언덕 위에 동백꽃 빛이 유난히 붉게 피어났다. 새 학년도 입학식이 열렸다. 섬에 큰 경사가 났다며 군수 님과 군의회의장 님이 만사를 제쳐놓고 내빈으로 참석했다. 지난 2월에 44명이 졸업하고 64명이나 입학을 한 것이다. 농어촌의 어느 학교든 학생수는 점점 줄어만 가는데, 이 섬의 학교에 입학생이 불어났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무려 20명이나. 섬이 한층 살기 좋은 곳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서기(瑞氣)가 비친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나의 새로운 섬 살이에 대한 축복이라는 덕담을 하기도 했다.
신입생은 물론 많은 학부모들이 모인 가운데 식이 진행되었다. 동백꽃 붉게 피어나는 희망찬 이 새봄에 새 가족이 된 신입생들을 축하하고 환영하며, 이 천혜의 비경 속에서 곱고 맑은 정서를 함양하면서 아름다운 꿈을 가꾸어 가자고 했다. 교가가 울려 퍼졌다. "흰 구름 피어 넘는 성인봉 기슭 동해의 파도 소리 한결 맑은 곳……." 바다에는 새내기 가족을 축복하는 결 고운 파도가 밀려오고, 하늘엔 괭이갈매기가 청아한 목청을 돋우며 축하 비행을 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사동리 바닷가에 있는 청소년문화체험장에서 제1회 대보름
달맞이 축제가 열렸다. 내 섬 살이의 시작을 축복하기 위한 축제인 듯도 했다. 대보름은 내일이지만, 내일은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에 따라 하루를 당겨 달맞이 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섬사람들은 언제나 날씨와 더불어 사면서 울고 웃는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이 흐려 바다가 검은 빛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풍물 소리에 신이 났다.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었다.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달집이 세워져 있다. 군내의 기관장들이 다 오고, 동네, 읍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인사말과 축하의 말이 이어졌다. 축제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와 함께 윷놀이, 제기차기, 줄다리기 등의 놀이가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이 줄다리기를 한다. 섬을 지켜나갈, 섬의 꿈나무 저 아이들이 줄을 잡고 용을 쓴다. 이겨라, 이겨라. 누구든 이겨라. 모두들 튼튼히 자라 섬을 번성케 하고 독도를 지켜내라. 어른들은 한결 같은 소망을 모았다.
편부경 시인을 만났다. 그는 경기도 고양 사람이지만 독도가 좋아 그
곳에 주소지를 두고 오매불망 그 섬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오늘 축제 소식을 듣고 함께 뛰어 들고 싶어 왔다고 했다. 우리 함께 지키고 가꾸어가야 독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은 구름 속에 들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가슴속에 커다란 달을 띄웠다. 그리고 달집에 소원들을 써서 붙였다. 한결 같이 풍년과 풍어 그리고 행복과 건강을 빌었다. 이보다 더 간절한 소망이 있을까. 섬사람들에게는 있다. 울릉 발전, 독도 수호다. 그 소원을 빌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깡통에 불을 담은 쥐불을 돌리기 시작했다. 불이 덩이를 이루
며 허공을 돌았다. 불은 원을 그리며 하늘을 수놓았다.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쥐불은 달집으로 던져졌다. 달집은 순식간에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훨훨 타올랐다. 섬사람들의 소망이 불길이 되어 힘차게 타올랐다. 그 소망을 하늘에다 전하려는 듯 불길은 높이 높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손뼉 소리는 구름을 뚫고 높은 하늘로, 파도 넘어 먼바다로 울려 나갔다.
내 섬 사랑도 소망이 되어 그 불길 따라 솟아올랐다.
뜨거운 불빛으로 솟아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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