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홈의 메인 타이틀.... "못 다 부친 편지도 행선지는 있다" 란 제목의 의미에 대하여 반디가 처음으로 꺼내는 고백의 진솔한 옛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막 졸업하고 떠난.. 반디의 San Diego 미국 U.C.S.D 유학시절 그러니깐.. 유학 3년차, 울 엄니가 과도한 계모음과 부동산 투자로 재정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그동안 반디에게 꼬박꼬박 보내주시던 학비랑 생활비가 졸지에 끊어지고... 반디가 어쩔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지요. 식당에서 접시도 닦아보고, 옷가게에서 옷도 팔아보고, 시계방에서 밧테리도 갈아보고.. 그러던 어느날... 봄비 부슬부슬 내리던 대학 캠프스에서 울 대학에서 보기 힘들었던 동양 여학생을 마주치게 되었지요. San Diego란 도시는 따뜻하고, 건조해 노인들의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일년에 비가 오는 날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참 드문 일이랍니다. 그날 그 캠프스에서 운명인지, 우연이지.. 그녀를 만나게 된 이후로 나에게 엄청난 기쁨과 슬픔과, 내 人生의 폭풍이 몰아쳤답니다. 음~ 음~ .... 하고 싶은, 해야만 할 말이 너무 길고, 많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 그녀는 참 예뻤습니다. 너무나도 예뻣습니다.. 짧은 머리에 수박처럼 활짝 웃는 그녀의 자신있는 웃음이 참 좋았었고, 초롱하고 큰 눈망울에 우수어린 그 무엇인가 감춰진듯 했었지만, 감히 물어 볼 수도.. 또 늘 촐랑대며 히죽히죽 키키득거리며.. 살아온 반디에게는, 감히 그 어떤 한 영혼의 깊은 슬픔에 대해 짐작할 수도 없었답니다. 그 당시,, 우리 대학의 유학생들에게는 전통이 있었지요. 먼저 유학온 선배들이 막 신입한 후배들에게 "은행계좌 오픈" "운전면허 따기" "수강신청" 등등.. 낯선 문화의 적응에 힘들지 않도록 도와주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답니다. 행운인지.. 운명인지.. 비오는 날.. 기숙사를 찾아 헤메던 그녀를 반디가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여름, 새 학기가 시작되던 9월의 가을까지 한달 반동안... 우리는 선배와 후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이미 예견된 운명의 연인 사이로 제동장치 풀린 초특급 열차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 갔었답니다. 3번씩이나 떨어진 그녀의 운전 면허증을 따기 위해 마음 약한 그녀를 위해.. 옆에 instructor만 앉으면 사시나무 떨듯 긴장하는, 그래서 운전 실력을 제대로 발휘 못하는 참 여린 그녀를 위해서... 별의 별 테크닉, 최면술을 다 구사했었지요. 우짜든둥, 운전 면허를 통과하던 그날... 그녀는 내게 말했었지요... "대용씨! 오늘 제가 한 턱 낼께요~~ 선배님! 거절하진 말아 주세요!!!!" 참 바부... 그 당시, 한 때는 반디두 떵떵~ 거리며 살았지만.. 한끼 한끼를 총기로 연명하던 대용이가 그렇게 예쁜 여인의 제안을 거절할 뭔 이유가 있었겠나이까??? 우리는 저녁무렵, 샌디에고에서 자동차로 한시간 거리쯤 떨어진 "Wild animal park" 이라는 유명한 동물원의 사파리 야간 여행을 갔었답니다. 지글지글 구워대는 B.B.Q 고기 냄새와.. 아프리카 민속춤을 추는 쇼 프로그램을 즐기며 애궁~ 여기가, 아프리카인지, 천국인지..?? 우리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를 느끼며, 또 느껴지면서 함께 했었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젖은 입술 위로 첫키스를 건넸었고, 담담히 받아 들였던 그녀는... 잠시 행복해 보였던 그녀는... 캄캄한 차창밖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다.. 운전을 하고 있던 나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답니다. "대용씨! 나를 사랑하면 안 된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는 그녀가 하기 싫은 지난 일들을 말씀해 주었답니다... 그녀는 나보다 한살 위..(학번은 같은..) 이혼녀.... 법적으론 이혼조차 정리되지 않았던.... 그녀의 이야기인즉... 단국대학 어느 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중매가 들어 왔었구.. 그녀의 아버지는 방배동에서 이태리산 수입 전등을 판매하는 개인사업을 하는 유능한 사업가로 부유하게 살고 있었고... 하여,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부산의 대아호텔 사장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더군요. 반디는 부산 서면에 있는 대아호텔을 잘 알지요. 대학시절 여러번 가본적도 있었구... (아주 유명한 호텔이었었지요...) 문제는 두가지였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녀의 남편은 대아호텔 사장의 의붓 아들이었고... 인물은 배우 뺨치는 제비족이었다는 사실.. 그 당시 그 호텔의 나이트 클럽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던군요... 두번째는 그 사장이란 남편의 아버지는 나이가 무척이나 젊은, 이상야리꾸리한 인간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녁이면 남편은 나이트 클럽에 출근하고.. 그 시간이면 그 아부지는 퇴근하고.. 암 것두 몰랐던 그녀는... 신혼초.. 잘 해 볼려고.. 잘 해 보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고 애썼었는데..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소돔과 고모라 같은 그 공간이 무섭고.. 혼돈스럽고.. 뭘 어떻게 해야 옳은지... 방황하기 시작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남편에 대한 모든 더러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그 집안의 황당한 내력도 알게된 이후에.. 그러니깐, 시집온지 3개월째... 어느날 새벽에... 그녀는 가방 하나만을 챙겨들고 집을 나와 서울에 있는 친정집으로 돌아 왔답니다. 모든 친정 집안 식구들이 놀라 걱정할 때에.. 오직, 유일하게 그녀의 아버지만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 "선순아! 잘 혔다~~ " 하셨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숨어 지내던 그녀에게.... 두어달 동안 어깨들을 동원한 남편의 공포스런 행위는 계속되었고... 결국 그녀는 이혼의 동의조차 받아내지 못한 채, 고마우신 아버지의 도움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 과정조차도 대용이에겐 참으로 말도 안되는 소설같은 이야기이지만 내용은 이러하답니다. 어머니가 다니던 어느 사찰의 주지승 도움으로 일년에 한번씩 미국에 보내는 선교 차원의 불교 사찰단 속에 끼어서 (그래서 머리 빡빡 깍구서..ㅠㅠ) 미국엘 H-1 비자를(종교, 예술교류를 위한 비자) 받아 미국엘 오게 되었다더군요. 그런 이후, 어느 겨울날, 부산 대아 호텔에 엄청한 화재가 발생하여.. (불법 시설증축, 안전장비 미비, 불법영업 등등) 인명 피해 사망자 10명이 넘는 대 화재로 그 집안은 저주속에 초토화되어 교도소행으로 귀결되었고.. 그녀는 미국땅을 밟게 되었답니다. 自由의 땅.. 美國... 그녀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던 그 소원이 이루어지던 날. 그녀를 만나기 몇일전... 대용이는 샌디에고 발보아 파크(Balboa park)에 있는 아이맥스란 영화관에서 "우주의 신비" 란 단체로 입체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극장입구에 있던 파운틴 수돗가에서 어머님이 유학 떠날 때, 사주셨던 고급시계(방수아님..^^)를 벗어 놓고,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그만 시계를 놓아둔 채.. 집으로 돌아 왔답니다.(멍청한 반디..ㅎㅎ) 이 잃어버린 시계가 나중에 나의 운명이 될지를.. 그 때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답니다. 그 몇일 후... 비오는 날 그녀를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서... 첫눈에 서로를 알아 보았고... 사랑을 했었고... 열심히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 했었고... 아낌없이 서로 다 주려 했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던 그해 9월.... 그녀는 기숙사에서 나와서 나랑 함께 내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지요. 한국적 시각에서는 동거이었겠구, 그 당시 미국적 개념에서는... 룸메이트였었다고 굳이 변명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나의 소중한 짝이었지요. 선남선녀.. 젊디 젊었던 우리는 너무, 너무도 행복했었고.. 마치 이 세상을 모두 다 가진양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지요. 고백컨대... 암 것두 몰랐던, 女子가 뭔지도 몰랐었던... 어떤게 남지여야 하는지도 몰랐던 대용이를 男子로 만들어 준 고마운 女子였었지요. 그녀는 U.C.S.D.에 들어올 영어실력이 모자라 ELS 영어 어학 코스에 등록되어 있었고, 반디는 그 때부터.. 그녀의 영어선생, 선생 아닌 선생이 되었답니다. 반디는 대학원(graduate: 석사) 과정이었고, 그녀는 학부(undergraduate) 과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밤에 수업이 집중되어 있었고, 그녀는 낮 시간에.... 하여 우리는 하루종일 붙어 다녀었답니다. 참, 무지리도 행복했었답니다..... 영어를 못 알아듯는 그녀를 위해 그녀와 함께 듣던 학부의 강의실도.. 지금 생각하자니 한판의 신나는 굿거리가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그 정성인지, 그녀는 어학코스 시험을 통과해 학부 본 강의을 듣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날,,, 집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띵똥~~ 현관문 벨이 울리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펑펑~~ 우는 그녀의 모습에 앞치마 두르고 있던 나는 망연자실... 그녀는 술이 먹고 싶다 하였지요... 가까운 마켓에 달려가 그녀를 위해 와인 몇병을 사들고 돌어와... 반디가 할 수 있는 요리(계란찜, 불고기, 등등)를 놓구서 그녀가 왜 그리도 슬퍼하는지.. 그녀의 고백을 듣게 되었지요.... 그녀왈... 도무지 수업을 따라 갈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대용이에게 창피하고 미안하다 하더군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싫다고 하더군요. 호호호~~~~ 반디는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게만 웃었지요.^^ 문제인즉, 미국의 학부과정은 그림만 그리고 싶은 그녀에게는 엄청난 도전, 그 자체였답니다. 커리큐럼(교과과정) 상에는 필수 지정된 과목중에 미국사, 세계사, 철학, 등등.. 정말 하고 싶지도 않은, 하기도 넘 넘 힘든... 거지 밥생이 같은 필수과목이 하나 둘이 아니였습니다. 대학원 과정에 있었던 나로선 잘 몰랐었던 내용이기도 했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밤 늦도록 와인을 마시면서... 가장 현명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 머리를 맞대고 밤새 의논하기 시작했었답니다. "궁즉통" 이라고.. 궁하면 통한다고.. 우리에게 멋진 결론이 내려졌답니다. 결론인즉..... 그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 그녀가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대학은.... 그림으로서는 미국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시카코에 있는 "Chicago Art Institute"란 명문 예술 대학이라고 하더군요. 그 곳에 일단 합격하기만 하면.... 그런 미국 역사나, 세계사, 철학 같은 불 필요한 과목들을 하지 않아도 되니깐은.. 그래서... 그 날부터... 그녀와 나, 우리는 그 대학에 원서를 넣기 위해 3개월의 피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우선, 그 대학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메일로 원서를 신청하였고, 그 대학이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와 나는 함께 전력투구을 했었답니다. 그 대학이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 작품들, 즉.. 수채화, 유화, 조형물, 그리고 사진작품 등등 20개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portpolio를 제작한 후 슬라이드를 만들어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술에 대해선 암 것두 몰랐던 대용이... 그 날부터 영어 선생이 아닌, 미술 선생으로 전공을 바꾸어 그녀를 위해 산으로 들로 작품을 만들러 함께 돌아 다녔고, 암실까지 따라가서 사진 현상을 도왔습니다. 영어가 짧은 그녀가 헤메이는 모습도 안스러웠고, 반복되는 그녀의 실수로 시간적, 금전적으로도 만만찮게 애먹었으니깐요.. ㅎㅎ 우짜든둥, 곡절끝에 원서는 마감일 이전에 제출되었고... 그 후, 우리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엘 7박 8일로 여행을 다녀 왔었답니다. 돌아온 그 날밤... 별 생각없이, 우체통을 열어본 순간.... 전혀 기대하지도 않었던 그녀의 합격소식에 우리는 함께 끌어 안고 펑펑~ 감격의 눈물을 흘렸었답니다. ㅠㅠ 그때부터 울며 겨자 먹기로 본의 아니게.. 반디 전공이 미술이 되었다는거 아닙니까. ㅎㅎ 2개월후.. 어느 초 여름.. 우리는 모든 짐을 정리하고... (대용이는 이미 석사학위 마쳤던 싯점에..) 시카고에 있는 그녀의 꿈의 대학... Chicago Art Institute로 자동차로 떠난, 5박 6일 일정의.. 대장정의 이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미래가 보장된 너무도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시카고에 도착하여 내가 그녀와 함께 보낸 2달 남짓한 시간들.... 우선 그녀의 학교 시설과 도서관, 책방, 한국 음식점, 쇼핑 쎈터, 영화관, 박물관.. 등등, 그녀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시카고의 모든 곳들을 그녀와 함께 답사하며 소중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 당시, 반디는 비자 만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고, 통장에 가진 돈도 많지 않았고, 한국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둘러 한국엘 돌어와야만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 더욱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내가 다시 돌아오는 그날까지 별고없이 오직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가능한한 최선을 다하려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디는 한국엘 돌아 왔었지요... 떠나는 미국에서의 마지막 그날, 시카고 공항에서 그녀는 마니도 울었었지요. 그리고, 나의 빈 손목에 시계 하나를 사서 손수 채워 주면서.. 빨리 돌아 오라구.. 시간을 지켜서, 약속대로 돌아 오라구... 샌디에고 발보아 파크에서 유학 떠날 때.. 어머님이 내게 사주셨던 시계를 잃어 버린 후 줄곧, 빈 손목으로 지내왔던 나에게... 나의 빈 손목에 또 다른 기다림의, 약속의 징표로, 사랑의 징표로.. 그녀는 내게 시계를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한국에 도착한 나는.... 한국을 떠날 때.. 날 환송해 주었던 많은 친지,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고.... ㅠㅠ 쓸쓸히 홀로이 귀국해서, 일주일 후에 현대 그룹 HFI에 대리로 특채 입사 하게 되었답니다. 숙소는 그 당시 독신자들을 위한 압구정동에 있던 현대 아파트에서 기거를 했었답니다. 아침 저녁으로 통근 버스를 이용했었구요. 그로 부터... 3개월 동안.. 미국 달라스 텍사스 미 주재원으로 떠나기까지 그녀에게서 하루걸러 국제전화가 오는 겁니다. 신입사원으로 해야할 일도, 배울 일도, 눈치볼 일도 넘 넘 많은데.... 우리과 여직원 왈,,, "윤대리님! 미국서 전화 왔습니다!" 눈치봐 가며.. 엉엉~ 울면서 미국에서 전화하는 그녀에게 같이 울어 주지도 못하고..ㅠㅠ 누가 들을세라, 소근소근... 선순아~~~ 나 어떻게 해서든 곧 미국 갈께.... 조금만 더 기다리며 열심히 공부하구 있어... 제발 울지만 말구... 길고도 긴, 짧다면 짧았던 서울에서의 3개월이란 혼동과 좌절의 시간은 어느듯 지나가고.... 이게 뭔 행운이지.. 날벼락인지.. ♣♣♣♣♣♣ 달라스 텍사스에 주재원 발령났으니, 다음주, 미국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너무도, 너무도 행복해서.. 퇴근후, 반디가 같은 부서 동료들 모두에게 이별주겸, 감사의 표시로 한달치 월급을 다 날렸다는 후문이..^^ 그날밤, 몹시 취한 반디.. 이 세상에서 젤루 행복한 윤대리, 국제 전화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 왈.... "대용씨는 술취하면 영어를 더 잘해.. ㅋㅋ" "그날, 대용씨가 한밤중에 내게 한 전화... 내가 태어나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어..." "당신이 그날 내게 한 말 기억은 하니..?? ㅎㅎ" "야! 선순아! 너 고생 끝~ 행복 시작~~" "이 눔아! 내가 곧 간다구 하든, 안하든..?" "넌 까불지 말구, 공부만 욜심히 혀라 했었지?" "다음달쯤에, 미국 시카고에서 보자...^^" "잘자라~ 나 잔다... 띠~ 띠~ 띠~~~~ " 그녀의 이름은 "김선순(Sunny Kim)"이었고, 화가로서의 그녀의 필명은 "김미아"였답니다. 유난히도 수채화풍의 그림을 좋아했던 그녀는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음악을 틀어놓고,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었지요. 그동안에 대용이는 앞치마 두르고, 요리책 들고 한번도 해 보지도 않은 뭔 요리를 한답시고, 그녀가 좋아할만한 요리를 찾아 이름도 없는 국적없는 요리를 창조해 내곤 했었답니다. ^^ 내가 뭘 만들어도 맛나다고 잘 먹어주던 사람. 요리를 내가 하고, 설겆이조차 내가 다 해도 당연한듯이 쳐다만 보다, 조용히 내게 다가와 방긋~ 웃으면서, 키스해 주던 사람... 그런 얄미운 그녀가 나는 미치도록 좋았습니다. 그녀가 손가방 하나만 가지고 부산의 시집을 뛰쳐나오던 운명의 그날 새벽..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다짐했었답니다. 다시는 여기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꺼라고.. 그리고, 부산 시집에 두고온 많은 것들중.. 결혼패물, 귀금속, 그녀의 옷가지들, 등등 그녀가 가장 소중히 생각했었던 것은.. 시집갈 때, 그녀가 젤루 사랑하던 아버지가 선물로 사주셨던 하아얀 새 피아노.. 그 피아노를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것이 그리도 마음 아프고, 속 상했었다 하더이다. 미국 Dallas, Texas로 발령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기전 대용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 발령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답니다. "어머님!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세요.." "형님이랑 상의해서, 조만간, 가능한 빠른 시일안에 어미님과 아버님을 모셔 가겠습니다." 달라스에 도착한 나는 맨 먼저 짐도 풀기전, 시카고에 있는, 목이 빠져라 날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전화를 넣었답니다. 수업도 빼먹고 기숙사 전화통에 붙어 앉아 내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왜 이제야 전화하는거니.. 밉다, 미워.." "고로콤 화를 내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장난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는.. 삐져있던 그녀를 놀려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순아! 비자에 문제가 있어, 미국입국이 거부되어 L.A에서 다시 돌아와 서울서 전화하는거야. 정말 미치겠구나.. 이럴 어떻게 하면 좋니..?" 그러자 그녀는 잠시동안 말이 없더니만... "전화상으로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들려오고.." 마음 약한 대용이 더 이상 그녀를 아프게할 자신이 없어.. 내 마음이 더 아파와서.. (원래 계획은 한참을 놀릴려 했었는데..ㅎㅎ) "노옹담~~ ㅎㅎ 여기 달라스에 도착했어.." 그러자 뚜~ 뚜~ 뚜~~ 갑자기 전화기 수신음은 끊어지고... "오잉~ 내가 넘 심했었나..? 이럴 어쩌나?" 조금 지나자, 나만큼이나 마음이 약한 그녀.. 내게 전화를 걸어 와... "너! 한번만 더 그런 농담하면 쥬거~~~ 씨잇~" ㅎㅎㅎ 달라스 지점에 도착하여, 새로운 업무파악도 채 하기전에, 그 다음주 주말을 이용해서.. 2박 2일의 일정으로 시카고로 날아 갔었습니다. 내 사랑, 그녀를 만나기 위해... 꿈속에도 그리던 그녀의 얼굴이, 향기가 그리워서..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마중나온 그녀를 언 4개월만에 다시 보는 그 순간.... 우리는 부둥켜 안고, 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답니다. 아무 말도 필요없었답니다. 지금 내 곁에 그녀가 있고, 내가 지금 그녀를 안고 있으면 그게 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로 2박 2일의 꿈같은 여행을 함께 하면서, 앞으로 우리 앞에는 아무런 시련도, 장애물도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살 맛 났습니다. 잘 살고 싶었습니다... 밤에 본 나이아가라 폭포의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 폭포의 오색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마치 우리의 사랑이 무지개되어 밤하늘에 피어나는듯한 꿈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약속을 지켜, 내게로 돌아온 것은 어쩌면 그녀가 내게 선물한 손목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 운명의 시계가.." 그 때, 나도 그녀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정말 이렇게도 빨리.. 다시 미국에 주재원으로 올 수 있으리라곤, 꿈에서 조차도 기대하지 못 했었답니다." 시카고 여행에서 달라스로 돌아와, 거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새로운 업무와 환경적응에 두어달을 정신없이 보내고 있을쯤.. 어느날... 무지 더워 에어컨 앞에서 떠나질 못하던, 그 참으로 무더웠던 여름, 어느 늦은 밤... 따르릉~ 따르릉~~ 전화기를 드는 순간,,, 흐느끼는 그녀의 음성에 대용이의 심장이 덜커덕~~ 보통 때 같으면, 또 왜 그러니? 울지만 말구 말을 해야지.. 이 울보 대장아~~~ 그렇게 놀려대며, 장난을 쳤을텐데... 그날밤에 걸려온 전화 한통.. 흐느끼는 그녀의 울음소리... 왠지, 왠지 그날은.. 뭔가 육감적으로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하기를... "아버님이 어젯밤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어.." "흑흑흑~~" "대전에서 일 보시고, 저녁 식사중 약주를 조금 하시고, 직원들과 상경중에 교통사고를..." "나 이젠, 어쩌면 좋아.. 엉엉엉~~" 그녀가 이 세상에서 젤루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비보였습니다.... 너무도 슬프고, 마음 아픈 부고 소식였습니다. 지금, 그녀곁에 내가 함께 있지 못함이 마음 아팠고, 안타까웠습니다.... 이 넘의 세상.. 왜 자꾸만 꼬이는 걸까..?? "이제 고생끝~~ 행복 시작인데..."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녀는 내가 한 말을 하늘같이 믿고 있는데..ㅠㅠ 그녀는 내게 말했습니다. 내일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다녀와야겠다고.. 그 순간, 왠지 나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면서, 왠지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습니다. 왠지 그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온 몸에 닭살이 돋으면서.. '아니야~ 아니야~~ 선순아! 우리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냉정하게 따져본 후에 결정하자." 그녀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 H-1(종교, 예술교류를 위한 비자)와서, 불법으로 F-1(학생비자)로 변경하였음에, 나중에 한국 갔다 다시 미국으로 입국할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히 있어 보였습니다... 지금의 대용이는 확실히 잘 알지만, 그 당시에는 짐작만 할 뿐, 정확한 Visa에 대한 시스템을 이해 내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었지요. 그 다음날 아침,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내게 전화를 다시 했습니다. 아마도 밤새 한숨도 못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서울의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한 후, 내린 결정인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젤루 사랑하는 아빠의 장례식에 못 간다면 아마 평생을 후회하고, 죄짓고 사는 일이 될꺼라면서... 나는 왠지 불길한 운명의 장난이 지금 싯점.. 게재하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그녀를 붙들만큼의 당연성과 설득력은 이미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나의 의견에 한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너무도 잘 이해하고, 따라주었었는데... 그래서 지금껏 아무런 문제도, 시련도 없이 멋진 희극의 시나리오처럼 하나하나 멋지게, 잘 진행되었고, 이루어져 왔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결국 그녀는 10일간의 일정으로 서울로 가게 되었고.. 장례식을 마친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미 대사관을 방문해서, 비자를 신청한 순간.. "무단 비자 용도 변경" 이란 빠알간 도장과 함께 그녀는 다시는 미국으로 올 수 없었습니다. 대사관 직원의 설명인즉... 애초에 미국으로 갈 때, H-1 Visa로 가서 불법으로 변호사를 사서 F-1 Visa로 변경한 것이 한국 미대사관측의 심기를 노하게 했다는 것.. 최근에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아, 대사관측에서 단호히 대처하고 있어, 지금으로선 별 다른 방법이 없다고... 그녀가 혹시나 해서 가져갔던, 시카고 대학의 재적 증명서 조차도 종이조각에 불구했답니다. 내가 직접 미 대사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미국 변호사를 만나보고,, 별의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속수무책.. ㅠㅠ 일단은, 그녀의 시카고 대학측에 사정 설명을 하고 휴학계를 내고, 그녀의 기숙사에 있던 짐들을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부탁해, 반디의 달라스 회사 숙소로 옮겨 놓았답니다. 그 때까지도, 대용이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요. 그녀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고, 하늘이 무너져도 쏫아날 구멍은 있다고.. 이런 저런 방도를 다 물색하다, 어느듯 세월은 1년이 지나갔고, 미치도록, 미치도록 나는... 그녀가 있는 한국엘 다녀오고 싶었는데.. 주재원 발령 받아 온 처지에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딱한 상황에서.. 지점장님을 만나서.. "진실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자초지종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지만... 윤대리가 서울갈려면 1년정도는 더 지나야 된다고.. 그녀가 미국에 있으면, 어떻게라도 해 보련만... ㅠㅠㅠㅠㅠㅠ 사랑에 목숨을 거는 반디... 바보 반디..ㅠ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반디 주재원 동료 친구의 도움으로, 거짓말로 캐나다 일주일 출장간다 말하고, 지점장을 속이고.. 나의 미래가 보장된 회사에서 쫓겨날 각오로.. 나의 人生을 걸고.. 그녀가 한국에 들어간지 꼭 일년째 되는 날.. 나는 일주일 예정으로 무작정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그녀에게로 달려 갔었습니다. 방배동 어느 카페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아~ 아~ 이럴 수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술도 조금밖에 못 마시던 그녀가... 지난 일년동안 상실감에.. 좌절감에.. 지지리도 못난 그녀의 운명에 대한 배신감에.. 낮술에 취했는지,, 본드를 불었는지,, 그동안 나 몰래,,, 나에겐 말도 않고 서울서 어떻게 살았었는지..?? 누구랑 어울리며 망각의 청룡열차를 탔었는지..?? 이 세상에서 젤루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를 잃고.. 그토록 하고 싶던 미술공부도 좌절되고.. 지지리도 떠나고 싶던 한국을 떠나지도 못하고.. 법적으로는 아직 쓰레기같은 인간의 아내이고.. 사랑하는, 보고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그녀가 선택한 길은 오직 하나.. 망각.. 망각.. 반쪽이 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면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다짐했었지요.... "대용아! 그녀에게는 너뿐이다.. 니가 약해지면 절대루 안된다.. 그녀에게 희망과 용기를 줘라!!" 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지요.... "선순아! 힘내! 아직도 넌 시카고 대학에 휴학한 상태로 남아 있으니,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없다면, 캐나다, 영국, 아니면 멕시코라도 통해서 라도, 일단 미국에 들어 오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학비는 내가 해외수당을 많이 받으니, 그걸루 해결하면 되구,,, 이런 저런 것들이 모두 여의치 않으면 반디가 주재원 생활 3년차면 본사 귀환이 될꺼니깐, 한국으로 꼭 돌아 올께...!!!" "넌 아무런 걱정도 말구, 그냥 몸과 마음을 잘 추스리며, 건강하게 지내야만 해.." "너 얼굴이, 너의 몰골이 이게 뭐니?? 바보야! 날 실망시키지 마아~~ 잘 할 수 있겠니..??" '망각을 위해, 또라이 친구들이랑 어울려, 술이나 이상한 것들에 의존하지 말구.. 제발~ " "나 곧 돌아 올께... 바붕아! 내가 언제 약속 안 지키던.. 이제 웃어봐~~~ 사랑해.."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활짝 웃는 모습을 본 후 홀가분한, 하지만 왠지 걱정되는 마음으로 나는 급히 달라스로 되돌아 왔었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로 갔는지..??? 대용이가 하루에 두세번씩 거는 국제전화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ㅠㅠ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그녀의 연락처는 4가지로, 집, 화실, 친구네집, 그리고 그녀가 잘 가던 방배동 그 카페.... 그 어떤 전화로도 그녀를 contact 할 수 없었고... 그 카페에서 본 그녀의 여위고, 헝클어진 얼굴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ㅠㅠ 아마도, 그녀는 나를 위해, 사랑하는 대용이를 위해서 사라져 주려구, 바보 멍청이 얼간이 축구같은 엉뚱한,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던 같습니다... 내 말만 들으면 잘 되는데... 잘 될껀데... ㅠㅠㅠㅠㅠ 그 이후로, 반디가 지점장 몰래 한국 다녀올 때, 나를 진실로 도와주었던, 그 동료친구랑 매일밤 술에 절여 살았었고, 참으로 힘들었던 반디를 그 친구는 진실로 위로하고 도와줬었답니다. 지난주에 그 친구랑 만나 식사도 했었습니다. 우리는 저녁 식사하는 내내 한번도, 단 한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도, 하지도 않았답니다.. 그때 반디가 서울로 보낸 편지만해도 수백통은 더 되었을 겁니다. 한번의 답장도 오지 않았었고... ㅠㅠㅠㅠ 어느 술 많이 취한 날에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이왕 돌아 오지도 않을 편지... 우라질... 하늘나라에라도 전해지라고... 언젠가는 내 마음이, 내 사랑이 전해질꺼라고... 주소도 쓰지 않은 채 우표만 떠억 붙여서.. 우체통에 넣곤 했었답니다. 이왕 돌아오지도 않을 편지인걸.. 중얼대면서.. "못 다 부친 편지도 행선지는 있다!" 그때의 그 심정을 한마디로 표현한 글이였어. 그러던 어느날,, 내 운명의 징표였던 그녀가 내게 준 손목시계를 골프를 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다, 그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어머니가 내게 준 시계를 잃어버렸던 똑같은 방식으로 시계를 벗어 놓고 나왔답니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놓고 온걸 알고 부랴부랴, 달려가 찾아 보았지만,,,,,, ㅠㅠ 우라질~~ 이게 뭔 운명의 장난인지.. 장난의 운명인지.... 그리고, 야속한 세월은 또 흘러 흘러.. 1년후 다시 서울출장의 핑계로 한국에 와서 사방팔방 수소문을 해봤었지만, 그녀의 서울집은 이미 이사를 가버렸고... 아무리 찾으려 애를 써 보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오리무중,, 전혀 알 수가 없었답니다. 그녀가 죽지만 앟았으면..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제발... 선순아!!! 내 말 들리는거니..??? ㅠㅠㅠㅠㅠ 허탈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North Carolina, Greenboro 지점으로 재발령이 났고, 그녀와 더 먼 동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술을 끊고, 내 사랑이 살아있고,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난다고... 굳게 자위하며, 그렇게 믿으면서... 열심히 회사일에만 몰두하며 3년이란 세월이 더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 지나갔었지요... 그 이후에 혹시나 해서, 그녀가 다니던.. 시카고 대학에 전화도 해보고, 그 대학 졸업생 명부 알럼나이 주소록을 뒤져봐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ㅠㅠ 난 아직도 그녀의 기숙사 짐을, 그녀의 옷가지들을 모두 다 가지고 보관하고 있는데... 그녀의 향기가 소롯히 배어 있는 옷가지들, 그녀가 그렸던, 그녀의 꿈과 영혼이 담긴 수채화 그림들.. 습작들, 일기장과 메모들... 그녀의 귀거리, 목거리, 반지, 브라자, 팬티까지도.. 내가 그녀에게 준 선물까지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날 보구 어쩌란 말이니??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 꼭 필요할 것만 같았지만,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도, 난 그녀의 짐을 서울로 보낼 수가 없었었고,,, 가타부타.. 보내달라, 말라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대답조차 들을 수도 없었고,,, 이제는 이사간 그녀의 옛주소로 보낼 수도 없는... 참으로, 미칠 것만 같은 잿빛 세월이었답니다. 그리고 세월은 마니도 흘러, 흘러,,,,,, 회사를 퇴직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살기까지 한시도 반디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그녀.. 그 이후, 무역업을 시작했던 나는 한국에 출장와서도 여기저기, 이곳 저곳,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맨땅에 머리박고 허당 짚는 일.... ㅠㅠㅠ 혹시나, 그녀가 아직도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민가지 않고 서울에,,,, 아니, 한국 어디에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그림을 그리고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한국 화가 협회, 대한 예술인 협회, 등등,, 반디의 상식이 닿는 모든 곳에 "김선순" "김미아"의 두 이름으로 최선을 다해 알아 보았지만... "그런 이름은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라는 차디찬 음성만 메아리되어 들려 왔답니다. 꿈에도 들려오던 그 차거운 목소리... 목소리... "그런 사람은 명단에 없습니다...." 무슨 명단....???? 제기랄~~~~~ 산者와 죽은 者의 명단..? 니가 뭔 저승사자니??? 그래도, 지금까지도... 내가, 반디가 믿는 믿음 하나가 있으니... "못 다 부친 편지도 행선지는 있다!" 내 마음이, 나의 간절하던 그 마음이... 분명 그녀에게, 사랑했던 그녀에게,,, 아니, 하늘에게 전해졌으리란 믿음 하나로.. 반디는 그렇게 살았었답니다..... P.S.: 지 꼴을 연필 스케치로 그려 봤어요.. (팍~ 늙은 할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