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세상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배타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권력은 물론이요, 종교권력과도 손을 잡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칼 같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그럼에도 예수님을 욕하는 사람은 지금,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타협이 없는 예수님을 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다 찬송 받습니다. 예수님의 배타성과 비타협이 오히려 거룩함이라 찬송 받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악된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칼은 죄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은 거룩한 칼을 심장 깊숙이 품으시고, 거룩한 심장에서 뿜어 나오는 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예수님은 너무 융통성 없고 지나치게 배타적이지만, 그런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거룩하다’ 찬송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막11:9). 우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골1:18).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교회라면 당연히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인 우리가 혹 세상으로부터 찬양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세상을 위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죽지 않고, 세상의 보통 사람들처럼 특정한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특정한 사람은 지옥에 갔다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물론 동성애자는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동성애자가 죄인인 것은, 동성애가 죄이기 이전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도 죄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죄인이어서 죄를 짓습니다(롬5:12). 그래서 원죄(原罪)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인이듯 동성애자도 죄인이요, 동성애자가 죄인이듯 우리도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민족 반역자와 전염 의심 병자와 간음하다 잡힌 여자와 혼혈 외국인과 혐오스런 나병환자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과 대화하셨고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끌어안으신 것은 칼을 끌어안는 것과 같아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정죄 받아 죽으셨습니다(마27:44).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가 동성애자를 비롯한 특정한 사람들을 향하여 칼을 들었다면 칼끝은 자신의 심장을 겨누어야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자를 위하여 자신의 심장에 칼질하지 않고, 얼굴 가린 그들을 향하여 겨우 손가락질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죄인을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자를 비롯한 죄인들을 위해 죽을 때, 배타적이요 비타협적인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거룩하다’ 찬양을 받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아들 유다를 축복합니다.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창49:8)” 아버지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베푼 축복은 다른 형제들에게 베푼 것과 구별되는 축복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향한 축복보다 더 큰 것입니다. 지금 이집트의 총리이며 모든 가족들의 가장 노릇 하는 요셉마저 유다를 찬송할 것입니다. 요셉을 향한 축복도 아름답습니다. “그가 너를 도울 것이요...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창49:25)” 그 요셉마저 유다를 찬송하게 된다면, 유다를 향한 축복이 요셉을 향한 것보다 한 끗 위입니다.
유다는 형제들과 아버지를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44:33)” 유다는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갔을 때 문제가 발생하자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유다는 노인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살리기 위해 사실상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 야곱이 유다를 향하여 요셉보다 우월한 최고의 축복을 베푸는 이유입니다.
유다처럼,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처럼, 죽음을 결단할 때에, 교회는 세상 형제들로부터 찬송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교회는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차별금지법안’을 반대하는 것은 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저들을 죽여야 세상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 세상이 거룩해집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요셉보다 한 끗 위 축복이 있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첫댓글 아멘
정말이지...고민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날라오는 카톡문자들에...답도 아니하고 가만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에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았고 진정성있게 고민하지않고 사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집단이기주의는 아닌가...율법주의는 아닌가...
아직 방송에서 홍석천이 나와
동성애코드로 코메디도 하고 토크쇼하는 거 불편하지만
그가 정말 힘들때 교회왔다가 더큰상처받았다는게 미안했습니다.
힘든 사람들...교회로 데려오기가 망설여집니다...
더 말씀보고 더..예수님의 방식을 배워야겠습니다...
죄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 맞습니다. 분노하거든 죄인을 위해 죽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지요. 죽음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인데, 저 또한 어렵고, 한국교회 또한 타자를 향하여 너무 공격적이네요. 욕 먹을 각오하고 준비한 설교가 집사님의 마음에 닿아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