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둘이서 며칠간의 일정으로 강원도엘 다녀왔다. 굳이 말하자면 휴가인 셈이다.
뉴스에서는 연일 호우경보가 그치지 않았지만 강원도 가는 길은 다만 구름이 많고 가끔씩 실비가 내렸다.
내겐 그냥 맞아도 낭만적인 여름 비지만 호우가 휩쓸고 간 지역의 이재민에게는 이 한가한 여름휴가 이야기인들 어디 가당키나 할 것인가?
평소 차는 주로 아내 쪽이 쓰는 편이다.
아내는 타이어가 다 닳아가도, 오일 갈때가 지나도 차는 그냥 몰면되는 것으로 무사태평이다.
먼 여행을 위해 그동안 심하게 닳은 앞바퀴도 갈고 삐걱거리는 운전석 문짝도 수리를 했다. 오일도 점검하고 냉각수도 보충을 했다. 아내는 "가만 있어도 때가 되면 알아서 해 줄텐데 왜 사서 걱정을 하겠느냐"고 내심 즐거워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기름도 가득 채워서 우린 고속도로를 달렸다.
잔뜩 흐린 날씬데도 난 마냥 해방된 느낌이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 이야기, 밑도 끝도 없는 과거와 지금과 미래를 종황무진 오가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로 때론 깔깔거리고 때론 얼굴을 붉혔다. 이야기는 결국 요즘 방송 드라마들의 한결같은 화두처럼 어떻게 하면 아이들 짝짓기를 잘 할 수 있을것인가가 주제였다.
점심은 어디가서 뭘 먹을지 ...
그것도 당신 알아서 하란다.
참 팔자 좋은 여인네다.
살아가는데 도무지 스스로 결정해서 이렇게 하자는 자기주장 같은 게 없다.
다른 여자들 처럼 "여보 이거 이거 먹고 싶다"고 애교를 부릴줄도 모른다.
아니 "내가 이거 먹을까? "하면 "난 저거 먹고 싶다고" 투정 아닌 투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다 남편이 알아서 이거 먹자면 이거 먹고 저거 먹자면 저거 먹고. 너무 순종을 해도 재미가 없다.
지난 겨울에 먹었던 꿩만두와 막국수가 생각났다.
횡계에서 대관령 옛길로 접어들어 강릉쪽으로 들어섰다.
막바지 휴가철인데도 붐비는 차량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던 옛 영화는 어디가고 옛길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울철 스키어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해서 꽤 유명해진 이 꿩 만두집은 한적했던 길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어디서 찾아들었는지 이 여름에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연방 새 손님들이 들어 오고 다 먹은 손님들이 계산을 하고 나간다.
손님들이 하나같이 카드를 내 주는데도 주인은 카드기가 고장나서 안된다고 현금만을 달랜다.
맛있게 먹던 음식맛이 어째 좀 씁쓸해지기 시작한다. 장사가 좀 된다 싶으면 이런 저런 횡포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이런 휴가철에 관광지나 해수욕장의 바가지 상혼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예약한 콘도에 들었다.
언제 찾아 와도 고즈넉하고 풍광이 아름답다,
빌라풍의 분위기가 어느 외국에 와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먹고 자고
책도 보다가
산책도 하다가
티브이 드라마 보다가
스포츠 중계도 보다가
그냥 무작정 시골 길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높은 산도
깊은 내도
푸르른 들과 숲도
맑은 공기도
모두가 내것 인냥
마냥 좋아하다가
금새 사흘을 보내고 마지막 날 나흘째가 되었다.
일찌감치 체크아웃을 하고 강릉으로 나갔다.
비가 내리는 경포는 쓸쓸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얼마 전 "파도 소리가 규칙적..."이라는 어느 블로거 님의 글을 읽고 감동에 젖은 일이 생각났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글이나 말에서도 처한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는 색다른 감동에 젖는 수가 있다.
그러고 보니 파도는 너무도 규칙적이었다.
우리가 사는 매일 매일도 우리들 인간으로서야 똑같지 않은 나날이지만 창조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 본다면 크나 큰 우주적 창조질서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규칙성 안에 머물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다른 갈만한 곳이 없기도 하고 모처럼의 바닷가 나들이이기도 해서 가끔 경포에 가면 들르는 횟집으로 향했다.
비 오는 날은 배가 출어를 하지 못해 생선도 많지 않고 그래서 값도 많이 비싸진다.
또 비오는 날은 생선 비린내가 심해서 이런 날은 사람들도 생선 먹는 걸 피한다.
그래서인지 이른 시각이라 해도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이런 날은 비싸기만 한 회 보다는 얼큰한 매운탕이 좋겠다 싶어 탕을 시켰다.
생선이 싱싱해선지 값에 비해 맛이 그만이었다.
다시 일상으로의 회귀를 한다.
고속도로를 탔다. 대관령을 넘자 비가 새차지기 시작한다.
횡성에 이르자 빗줄기는 장대비가 되어 온통 고속도로가 물바다를 이루었다.
차창에 내리 치는 빗줄기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동차가 아니라 마치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빗속에서도 차들은 너 나 할것 없이 제한속도를 넘나드는 질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도 갓길에 차를 대고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집단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자신이 어떤 광기에라도 휩싸여 미친듯이 고속질주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휴게소를 알리는 표지판이 스쳐 지나갔다.
휴게소에 들러 차를 주차시키고 한참을 차안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정신 없이 폭우 속을 뚫고 달려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바삐 돌아가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모두가 달려가니까 달린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들 하는대로 휘둘러 사는 일이 많아졌다.
그건 무분별한 메스컴의 바람잡이와 상혼이라는 발톱을 교묘히 감춘 광고 홍수 속에서 개개인의 자각이 마비된 탓일 수도 있다. 남이 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왠지 이 집단에서 소외된 것 같은 의식의 저변에서 나도 모르게 휩쓸려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짐을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한다.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와 내 집의 안온함에 안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