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혀두건데,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홀든 코울필드의 캐릭터가 맘에 들어서 쓰게 된 것
이구요.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말투나 문체가 비슷해요.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누나의 연인..
그는 누나의 연인이다. 언제부터 그랬는고 하니 자그마치 여덟 살
때부터 그랬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누나가 초등학교 입학식 날 딱
찍은 사람이다. 여덟 살 짜리로서는 생각해내기 힘든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마수를 뻗친 것이다. 우리 누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운데
글자만 나와 다른 이해원이란 이름을 가졌고, 온순하고 부드럽지
만 뚝심 있는 스타일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간이다.
혹시라도 나의 말투 때문에, 내가 누나와는 그다지 의좋은 남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사실상 나는
누나와 매우 친하다. 게다가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누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의 사랑을 건전치 못하게 바
라봐선 안 된다. 나는 누나를 누나로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다.
누나와 그가 만나는 자리엔 언제나 내가 함께 있었다. 어렸을 때에
는-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누나가 날 떼어놓고 학교에 가는 것이 서
러워서 죽을세라 진드기처럼 붙어 다녔고, 제법 대가리가 굵어졌을
때는 셋이서 만나는 것이 둘이서 만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실은 ‘그’라는 호칭으로 제법 거리를 띄워 딱
딱하게 굴고 있지만 실제로 그와 나는 형제처럼 지낸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에 대해서 밝혀볼까 한다.
일단 그는 나보다도 2년 앞서 사회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어
떻게 보면 조금 창피한 일이기 때문에 끝까지 밝히지 않으려 했으
나 사실 나는 아직 사회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
고 나를 젖살이 포동포동한 데다 맑은 날엔 옅은 우유비린내마저
풍기고 다니는 어린 녀석으로 상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유
감이올시다, 다.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성장한 부류에 속한다. 신
장은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당시 180cm에 육박하여 그 후로도 성
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진실로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에 관한 소개이지 나에 대한
소개가 아니다. 그러니 내 얘긴 여기서 그만두겠다, 어쨌든.
암튼 그는 우혁이 형이다. 우혁이 형은 성이 장씨이다. 사실 우혁
이 형이 장씨만 아니었어도 나는 처음부터 형이라고 깍듯이 부르
지 않았을 것이다. 형이 여덟 살이었을 때부터 형은 나보다 작았
다. 그렇지만 형의 이름은 장우혁이다. 장우혁이란 이름은 어쩐지
남을 주눅들게 하는 이름이다. 차라리 이우혁이라거나 김우혁 신
우혁 민우혁 등등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우혁이 형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의젓했다. 넘어
져도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사실 나는 우혁이 형이 실제로 넘어
지는 꼴을 본 적은 없다. 누나로부터 걔는 그래. 라고 전해들었을
뿐이다. 내가 하루에 해대는 것들을 우혁이 형은 평생 하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우혁이 형이 화내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우혁이 형이 욕을 하거나 짜증을 내고 남에게 해꼬지하고 흥분을
참지 못해 구타하고 담배를 피고 침을 퉷-! 하고 뱉는 등등의 짓
을 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사실 위의 일들을 단 하루에 다
해치운 적도 있는데 말이다.
형은 나한테 매우 잘해줬다. 원래 셋이란 숫자가 묘한 것이, 셋이
잘 어울리려면 셋 중에 하나가 무지 잘 해야 한다. 그런데 우혁이
형이 결정적으로 무지 잘 했다. 물론 누나가, 누나의 연인인 우혁
이 형이 누나의 동생인 나에게 무지 잘 한다고 해서 질투를 하지
도 않을 테지만, 우혁이 형은 누나가 절대 질투하지 않을 정도로
만 나에게 잘해줬다. 그건 대단한 능력이다. 말하자면 우혁이 형
은 자기 컨트롤이 뛰어난 사람이란 것이다.
나는 우혁이 형을 매우 좋아하고 따랐기 때문에 일부러 누나와 우
혁이 형 사이에 끼곤 했다. 전에는 말이다. 전에는 그랬다는 말이
다. 하지만 지금은 잘 그러지 않는다. 사실은 그러지 않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잘 그러지 않았다. 중학교 3
학년 여름 즈음부터는 우리 누나란 작자가 나만 보면 습관처럼 잔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내가 말을 했던가? 나는 누나랑 둘이 산다. 엄마랑 아빠는 내
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돌아가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
사실은 이혼을 먼저 하셨다. 이혼서류를 법원에 제출하고 두 분이
서 차를 타고 돌아오는 중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일이 또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 아리송한 일이다.
암튼 그 후 우리들은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다가, 외할머니는 점점
고령이 되어 점차 그 댁에서 발언권을 잃어가고, 게다가 나란 녀
석은 점점 말썽쟁이가 되어가고, 누나는 주민등록증까지 발급 받
았으니. 우리는 독립했고 그 댁에선 양육비만 꼴랑 보내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도 온라인으로 넣어준다. 외할머니 손을 통해서 돈
이 오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막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주 막 나간 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학교에 갔으며 학
교에 가면 제법 공부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
로 말이다. 실업계나 공업계로 가는 건 싫었다. 우혁이 형은 인문
계 고등학교에 갔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 누나도 인문계 고등
학교에 갔다. 셋이 같이 만나지 않게 된지 일 년이 넘어간다. 우혁
이 형은 애써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나를 만나면 전처럼 대했
다. 조금 싫었다. 우혁이 형이 자기 조절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게 말이다. 내가 학교에만 겨우 나가는 생양아치가 되어 가는데도,
전에 없이 누나한테 대들기만 하는 못된 동생이 되어 가는데도, 형
만 보면 욕을 해대고 건방지게 구는 안하무인이 되어 가는데도.
빌어먹을 미치도록 싫었다.
나는 우혁이 형이 다니는 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연하기도 한
데 그것은 어쨌든 행운이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영 다른 학교에
걸리는 수도 있다. 내 중학 동창인 칠현이 놈과 승호 놈은 그렇다.
그 놈들은 엎어지면 코 달 데에 살고 있는데도 하필이면 그 엎어
지면 코 닿을 거리 하나에 동 하나가 갈리는 바람에-결과적으로
칠현이 놈은 송현 1동에 살고 승호 놈은 송현 2동에 산다- 버스
로 스무 정거장이나 떨어진 학교에 각각 배정 받았다. 그러니까
나는 행운인 셈이다.
아까도 말했었던가? 우혁이 형은 아주 의젓한 사람이다. 게다가
주민등록증도 발급 받았고 내 년이면 대학생도 될 것이다. 대학
생이 되지 않아도 형은 대학생만큼 의젓하다. 형은 그렇다. 나는
형이 어른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형은 나처럼 학생주임한테 빳따를 맞지도 않을 것이고 신고식이
랍시고 3학년 얼간이들한테 아구맞고 피 터트릴 일도 없을 것이
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상처가 끊일 날이 없이 싸움질을 하고 다
니고. 싸움질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게 한번 시작하
면 끊일 날이 없게 되어버린다. 끝났나 싶으면 어느 놈이 어떻게
알고 와서 거치적거리고 좀 쉬려나 싶으면 또 저느 놈이 저떻게
알고 와서 거치적거린단 말이다. 그런 고로 학교에선 입학한지
일주일만에 심각한 문제아로 찍혀 버려서 이 선생 저 선생 할 것
없이 또 보이기만 하면 거치적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피곤하기
짝이 없던 어느 날.
“야, 이재원. 너 그거 들었냐?”
“나 좀 자게 거치적거리지 마라.”
나는 이제 막 잠이 들려던 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몹시 피
곤했다. 어제 또 한바탕 했던 것이다. 내가 타고난 괴력의 소유자
도 아니고. 사실 선천적으로는 연약하게 태어났는데 피나는 노력
으로 파이터가 된 것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아웃복서 스타일로,
행동이 민첩하고 상대의 힘을 이용할 줄 안다.
“오늘 동아리 홍보하러 장우혁 선배님이 우리 반에 오신다 그 말
이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칠현이 놈을 노려봤다. 어
쩐지 그 놈 하는 말투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칠현이 놈 말대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우
혁이 형이 우리 반으로 들어왔다. 우혁이 형은 화사하게 웃는 것을
신호탄으로 동아리 홍보를 시작했다. 아마 끝내줬을 것이다. 그 동
아리는 입부하려는 사람들로 넘쳐 났을 것이다. 우혁이 형은 말도
근사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할 수
는 없었다. 나는 우혁이 형이 화사하게 웃고는 안녕..하자마자 반
을 뛰쳐나왔다.
겉으로는 변화가 없었으나 알게 모르게 우혁이 형의 참을성은 한계
를 치닫고 있었던 모양이다. 많은 후배들 앞에서 배은망덕한 짓을
해버린 내게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혁이 형은 워낙에 의젓한
사람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말로 나를 나무라려 했을 것이다. 원래
계획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날
저녁에 나는 고1인 주제에 7년 동안이나 꾸준히 쿵푸를 해오고 있
던 덩치가 산만한 강적을 만나 실력을 겨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는 어제도 몇 놈들과 한바탕 했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고, 그래서
그런지 재빠르게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한방 얻어맞았다. 코피도 줄줄 났고 녀석은 그
러고도 손이며 발이며 사정없이 날렸기 때문에 이도 하나 나갔다.
세상에 녀석의 구두발은 칼날 같았다. 나는 눈썹 위도 살짝 찢겼다.
내 얼굴에 피가 낭자했다. 사실 아주 아프지는 않았지만 피만 보면
기절할 만큼 아픈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형은 피를 보고 돌아버린 것이다. 아니 돌아버렸다는 표현은 알맞
은 표현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형이 피가 낭자한 내 꼴
을 보고 아주 무척 많이 놀랐다는 것이다. 형답지 않게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나를 두고 아주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이다. 아니 호들
갑을 떨었다는 표현은 역시 알맞지 않다. 다만 내 말은, 나 때문에
형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나는 국어 실력이 형편없다. 그럴 수밖에.
국어시간에 내가 한 짓이라곤 먼산 보고 딴 청 하지 않으면 엎어져
자고 가끔은 자리도 안 지켰으니까. 그러니까 내 국어실력을 감안
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가끔 튀어나오는 경박한 표현들은 사실과
약간 다르다.
“재, 재원아!”
우혁이 형이 내 이름을 외치자마자 사실상 싸움은 끝이 났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빌어먹을 덩치 녀석이 우혁이 형을 마음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녀석은 갑작스레 우혁이 형이 나타나 나
를 부르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우혁이 형은 필사적으로 날 끌어내
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수건
이라니! 사실은 그 때부터 어쩐지 괴로움이 커져오고 있었다.
아아. 아까 내가 말을 했었던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셋이
모이는 자리에 절대 나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날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무슨 일이 터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날은 7월 23일이었다. 숫자를 더하면 딱 30이 되었다.
7월 23일날 아침에 그렇게 되었다. 날씨는 그저 그랬다. 원래는 비
가 왔어야 하거나 아니면 무지 맑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뽈
딱지가 나있는 날씨였다. 비도 안 왔고 맑지도 않았다. 후덥지근했
다. 그야말로 괴로운 날씨였다. 나는 그런 날씨에 매우 민감하다.
민감한 기분으로 거울을 딱 보았다. 그 날은 누나와 우혁이 형이
바캉스용 의상을 사주겠다고 한 날이었다. 나는 아, 이따가 그런
약속이 있었지. 하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면서 말이다. 그러다 별
안간 몹시 괴로워졌다. 그냥 괴로운 게 아니라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졌다. 사나이가 혀를 깨물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
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무라이가 할복하는 것과 같거나 크
다. 쉽게 말해서 〔혀를 깨무는 것 사무라이의 할복〕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식도가 타는 것처럼 괴로웠다. 또는 똥
줄이 타는 것처럼 괴로웠다. 아니 똥줄이 탄다는 말은... 어쨌든
중요한 것은 7월 23일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이유 없이 너
무도 괴로워졌다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항상 그랬다. 이따가 누나랑 우혁이 형이랑 만나야
하는구나 생각만 하면 어김없이 그랬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내가
왜 그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식 후에는
알게 되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왜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것일까. 나는 우
혁이 형의 귀여운 동생인 채로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것이
다.
“재원아, 괜찮아?”
우혁이 형이 손수건으로 아직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내 코를 막았
다. 손수건의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똥줄이
탔다. 아니 그건, 다시 들어주길 바란다. 식도가 타고 내장이 뒤틀
렸다.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다리에 힘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우혁이 형이 더욱 놀라 날 끌어안았다. 그리곤 괜찮냐고 또 소리치
는 것이다. 형은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 빌어먹을.
내가 말했었던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누나를 몹시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누나의 연인..
손수건 향기 때문에 미쳐버린 것일 수도 있다. 우혁이 형이 나의
코에 그 손수건을 들이밀었을 때 사실은 미쳐버리고 싶었다. 나는
누워 있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리는 말짱했다. 하나도 아프
지 않았다. 눈썹 위가 조금 쓰라리고 입이 조금 얼얼하고 코는 시
큰했지만 아픈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팔팔했다.
나는 십할..하고 웅얼거렸다. 형 앞에서 욕을 다 하다니! 다른 놈
들 앞에선 달고 살았지만, 형 앞에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욕이 튀
어나온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면 놀랄지도 모르지만 쌍소리를 입에
담기 전에 나는 우혁이 형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형이 뒤로 완전히 나동그라졌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장담 못 하겠다. 누가 뭐래
도 나는 한창이니까 말이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이 추잡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형은 놀라서 어벙하게 내 이름을 불러쌌다. 나는 시팔 꺼져! 소리
를 질렀다. 내가 좀 너무 한다 싶겠지만 그것은 그 때 형의 표정을
못 봐서 하는 소리다. 형이 미적거리길래 나는 내가 절대 장난치는
것이 아니며 지금 반쯤 돌아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주위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었다. 결투 장소는 그러니까 체육관이었으니까 나
는 체육관 청소용 마포자루를 두 동강 세 동강 내기 시작한 것이다.
쿵푸를 7년이나 한 놈도 미친놈은 당해내기 어려웠는지 줄행랑을
쳐버렸다. 우혁이 형은 잠시 머뭇거리다 급기야 내가 공갈로 마포
자루를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자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런 말은 몹
시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지만 콩알만하게 작아지는 우혁이 형
의 뒷모습은 미쳐버리게 귀여웠다. 빌어먹을, 의젓하지 않은 우혁
이 형은 졸라 귀엽다. 나는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 날 일에 대해서 우혁이 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서 아무란 말이 아무지 사실은 우리 누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누나는 내가 싸움을 한 것에 대해서만 잔소리를 했을 뿐 다른 얘긴
없었다. 우혁이 형은 원래도 입이 무거운 편이지만, 반드시 남자다
워야 할 땐 꼭 그렇다.
그런데 가끔 우혁이 형은 반드시 남자다워야 할 때가 아닐 때도 남
자다우려 할 때가 있다. 형의 그런 모습이 가끔 날 화나게 한다.
그러니까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 내 성적표가 집으로 날아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시험을 떡쳤기 때문에 당연히 한동
안 누나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을 거라 예상하긴 하였다. 그러나
누나는 한술 더 떠서, 남자답고 어른스런 우혁이 형에게 날 의뢰한
것이다. 여자란 어리건 늙었건 그런 생각을 떨치기 힘든 것일까?
내가 말썽쟁이가 돼버린 것은 아버지란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누나가 엄마 역할은 해줄 수 있어도 아버지 역할은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우혁이 형이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랬다. 나는 누나
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내가 누나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누나로서는 최선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누나는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 누나 같은 사람이 성공하
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는 머지않아 망하게 될 거다. 그건 확실하다.
하여튼 그래서,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에 예고도 없이 우리 집
벨이 울렸다. 잡상인 이외에는 우리 집을 방문할 사람이 전혀 없었
다. 외할머닌 요즘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쇠약해지신 것이다. 그래
서 나는 잡상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잡상인일 경우, 누나보다는 내
가 나가는 것이 처리하기 수월하다. 그래서 문을 연 것이다.
“아, 재원아.. 집에 있었네?”
다행이라는 듯 형이 말했다. 형은 과일을 한 아름 사왔다. 사과랑
딸기랑 오렌지였다. 우리는 막 저녁식사를 끝낸 뒤였다. 누나가 반
색을 하여 우혁이 형을 반겼다. 우혁이 형은 물론 반길만한 사람이
다. 잡상인도 아닌데다 과일도 한 아름 사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누나처럼 반색할 순 없었다. 우혁이 형은 이미, 다시 예전처
럼 의젓해져 있었다. 하긴 그럴 것이다. 의례히 졸라 귀여운 모습
은 두 번 보기 힘든 법이다.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과일을 깎아 먹었다. 형은 딸기를 제일 많이
먹었다. 딸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형과 누나는 내가 잘 모르는
얘기들을 좀 하다가, 별안간 누나는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가야 한다
고 말했다.
“지금 나가서 할 일이라곤 경애 누나 따위를 만나 여드름에나 신
경 쓰는 쫌생이 얘길 하거나, 시시껄렁한 연예인 얘기를 하는 일밖
에는 없잖아. 그런 얘길 낮에 하는 것은 조금 봐줄만 하지만 말많
은 처녀들이 밤에 그런 얘길 하면 토하고 싶어져.”
나는 어떻게 해서든 누나를 붙잡아두고 싶었다. 누나와 싸워서라도
나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경애누나와 밤에 만나 뼈
도 안 먹히는 시시한 얘기를 우리 누나가 늘어놓는다는 생각을 하
면 토가 쏠렸다. 그런 건 정말 싫었다. 게다가 경애 누나는 목소리
가 매우 크고 탁했다. 그 소리로 웃기 시작하면 나는 팔뚝에 소름
이 돋을 정도였다. 사실 그 목소리로는 어떤 주옥같은 명언을 말한
대도 끔찍하게 싫을 것 같았다. 나중에 우리 누나가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고 나면 경애누나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의 얘기를 떠벌리고 다닐 것이다. 이 밤중에, 자신은 이해원과
만나서 여드름에 신경 쓰는 쫌팽이 얘기와 시시껄렁한 연예인 사생
활 얘기를 함께 나눈 사이라고 말이다. 그 놈의 끽끽 쇳소리가 섞
여 나오는 탁성으로. 맙소사,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이재원. 또 이런 식으로 굴지, 응?”
“대원슈퍼가 있는 골목 끝에 새로 오락실이 생겼는데, 우리학교에
서 제일 더럽고 치사한 녀석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야. 지금 나가
면 분명히 험한 꼴을 당하고 말 거야.”
“야, 이재원!!!!”
내가 남동생이 아니라 여동생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분명히 머리채
를 잡혔을 것이다. 물론 우리 누나는 원래는 온화한 성품의 사람이
다. 다른 사람의 머리채를 잡는 식의 교양 없는 짓은 하지 않는 사
람이나, 어쨌든 내가 온화한 사람의 속을 긁어놓았음엔 틀림없다.
“해원아, 그만 됐어. 같이 얘기로 풀어보자.”
저 깔끔한 한 마디라니. 누나는 군말 없이 앉았다. 우리는 다시 식
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과일을 깎아먹는 그런 풍경을 이룩해낸 것
이다. 형의 깔끔한 한 마디에 말이다.
“재원아, 요즘 가장 맘에 안 드는 일에 대해서 말해볼래?”
형은 친절한 말투로 상담에 돌입했다. 차라리 대놓고 너 성적이 왜
이래, 이래가지고 대학가겠어! 윽박질렀다면 나는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 다루는 듯한 사근사근한 형의 말투를 듣자마자 나는
돌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돌아버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누나가 경
애누나를 만나러 나가버렸다면 티를 냈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일이
다. 나는 꾸역꾸역 사과를 입 속에 몰아 넣었다. 입이 찢어질 지경
이었다. 아마 한 조각만 더 넣었다면 입이 찢어지거나 볼이 터져서
피가 낭자했을 것이다. 진짜다. 그렇게 되면 우혁이 형의 졸라 귀여
운 모습을 또 보게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졸라 귀여운 모습은 두 번 보기 힘들다. 그냥 귀여운 모습이라면 또
몰라도.
“그런 거 없어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전에는 그래도 중간은 했었잖아.
공부하는 게 힘드니?”
우혁이 형은 완곡한 표현에 능했다. 형이 능한 분야는 의외로 여러
가지다. 형의 계속되는, 나긋한 말투에 나는 뿔딱지가 나버렸다.
아무 대답도 안 할 작정이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깔아버렸다.
그런데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가? 식탁 맞은편에서 꼼
지락거리고 있는, 앙증맞은 발가락들을 보고 만 것이다. 나처럼 멋
없게 길쭉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엄지발가락은 오동통하기까지 했
다. 엄지발가락의 앞부분 말이다. 형은 엄지와 검지를 꼬아대고 있
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발가락들에게 아는 척 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재간이 없었
다. 그래서 나는, 길쭉하기만한 나의 엄지발가락으로 앙증맞게 꼬
여있는 발가락들에 대고서 나름의 인사를 하였다.
“흡.”
“우혁아, 왜 그래?”
그런데 뜻밖의 일이 터진 것이다! 내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행
동을 하기란 일쑤인 일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우
혁이 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벌떡 일어났다.
“우혁아.”
“미안해, 잊었던 일이 생각났어. 다음에 얘기하자.”
그리곤 쏜살같이 가버렸다.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졸라까진
아니더라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적어도 나긋한 목소리로 요즘 내
문제에 대해서 묻는 따위의 행동보다는 훨씬 귀여웠다.
내가 말했었던가? 나는 어렸을 때 잠깐 피아노를 친 적이 있었다.
우혁이 형이 나에게 어울리는 악기를 하나 생각해낸다면, 그것은
피아노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칠현이 놈과 승호 놈도 사실은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친구이다. 동창생이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학원엔 남자애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친했다. 승
호 놈은 가끔 케네디 대통령 같은 말투를 쓴다. 그렇게 가끔은 훌
륭한 말을 하기도 했다. 승호 놈이 누나와 형이 만나는데 따라나가
려 하는 나를 두고.
“이런 일들이 미래의 너에게 커다란 약점이 될 것이다. 보아라,
너는 오붓한 남녀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승산 없는 것
에 목을 메느라 네 젊음을 허비하고 있지 않느냐.”
물론 정확하게 저렇게 얘기한 것은 아니나, 여하튼 녀석은 케네디
대통령과 비슷한 말투를 쓴다. 내 생각에 녀석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 같다. 녀석이 30년대쯤에 태어났다면 지금 교과서에 실
려 있을 것이다. 운도 지지리도 없는 놈. 하필이면 80년대에 태어
나 같은 학교가 된 칠현이와 나 사이에서 소외되지나 않을까 조바
심이나 치고 앉아있는 운명이라니.
그나저나 승호 놈 칭찬이나 하려고 이 얘길 꺼낸 것은 아니다. 우
혁이 형은 그 후로 우리 집에 절대로 오지 않았다. 확실히 그것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뭔가 꾸리한 것이 있으니까 안 오는 것이다.
내가 우혁이 형을 학교에서 필사적으로 피한 것도 꾸리한 것이 내
게 있기 때문이다. 단지 꼬물거리고 있는 발가락들에게 잠시 아는
체를 한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단 말인가. 혹시 형이
발가락 따위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러
나 형은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이다. 정말 없다. 정신분석을 받는대
도 자신 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할 부분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형은, 자신의 행동이 이상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은 것이다. 개교기념일이 끼어 있던 연휴에 놀러가자고 제안하
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어떻게어떻게 하다보니 가고 말았다. 게다가 칠현이 놈과 승호 놈
까지 끼어서 말이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푸르게 녹음이 돋아났다. 바람도 제법 더
웠다. 우리는 강원도에 있는 우혁이 형의 친척집에서 하룻밤 신세
를 지기로 했다. 칠현이 놈이 얼마나 신났는지는 말로 담기도 지루
하다. 사실은 나도 그만큼은 신이 났었다. 여하튼 노는 것에 가장
열광할 나이가 열 일곱이니까 말이다. 가까운 곳에 신록이 우거져
있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었다. 낮 동안은 계곡에서 놀기
로 했다. 물놀이를 하기엔 아직 추운 날씨였다. 그래서 그 주변에
서 여러 가지 게임을 하고 놀았다. 사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마흔
여덟 가지 중에 하나가 놀러가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
에서 걸려서 뭣도 아닌 놈들에게 등판을 두드려 맞는 일은 더더욱
싫다. 엿 같은 일이다. 게다가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기분이 엿 같았다. 나에겐 엿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
다. 어떨 때는 나의 하루가 온통 엿 속에 빠져버리는 때도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칠현이 놈 승호 놈한테 등판을 두드려
맞는 것도 그렇고, 칠현이 놈 승호 놈이 우혁이 형 등판을 두들기
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중간에 일어나
버렸다. 한창 놀고 있는 흥을 깨는 것은 염치 없는 짓이다. 믿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염치없는 짓을 하면 늘 미안하다. 그래서 비
교적 애를 써서, 나는 잠시 산책을 하고 오겠다고 일동에게 말했다.
나는 하염없이 산을 오르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게 지루해져 버렸다.
내가 하고싶은 것은 산을 오르는 것 따위가 아니다. 별 것도 아닌
게 숨만 가쁘다. 계속 올라서 뭐할 것인가. 나는 주변 경치를 감상
하지도 않았다. 경치란 걸 감상하려면, 마음 한 구석의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주위 경치를 감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엔 아주 작은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빽빽하게 새끼손가락 하나 쑤셔 넣을 공간도 없이 꾸
리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산길을 따라서가 아
니라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내려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
러, 혼자 바위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동상 같은 우혁
이 형을 목격하였다.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는데 망설이는 와중에
형에게로 다가갔다.
..누나의 연인..
계곡의 물소리는 우레와도 같았다. 간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소
리가 들리기도 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밑에 잔돌이 버석거
렸다. 나는 형이 앉아있는 바위에서 바위 두 개만큼 떨어진 곳에
걸터앉았다. 산의 울음이 들리는 듯 했다. 우혁이 형은 내 쪽을 바
라보지 않았지만,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럴 것이
다. 사실 나는 죽을 뻔했다. 잔돌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아
마 그대로 넘어졌으면 바위에 머리를 찧고 즉사했을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형이 몰랐을 리가 없다. 우리는 잠시 산의 울음
안에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우리가 같은 울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다. 드디어 나는 말문을 열었다.
“형. 제가 발가락 만져서 화났어요?”
형은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내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우레와 같은 계곡의 물소리보다도 내 목소리가 삼천 배는 더 컸다.
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형의 옆모습을 말끄러미 보았다. 옆 볼이
따가웠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가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면 그 쪽이
따갑다. 조금 있다가, “그래.”라고 형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나는 금방 사과했다. 개중에 어떤 열 일곱은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절대 사과하지 않는 얼간이들도 많지만 나는
그런 얼간이는 아니었다. 나는 금방 사과하는 편이었다. 형이 그래.
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내 잘못을 금방 시인했다.
어디로부턴가 미지근한 남풍이 불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나는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마에 생겨났을
잔주름이 신경 쓰였다. 나는 한가로운 때에 가끔 영양가 없는 것을
고민하곤 한다. 저번에는 칠현이 놈이 아침마다 하이킹을 하자고
제안했었는데 허벅다리에 쥐날까봐 거절했다. 특히 허벅다리에 나
는 쥐는 불쾌해서 싫다. 어른이 돼서 여자와 성 관계를 가진다면
그 느낌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그런
식으로 영양가 없는 고민들을 길게 하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
는 고요하고도 치열한 산의 울음 안에 우혁이 형과 함께 있다는 것
을 말이다. 형은 손을 있는 대로 뻗어서 바위 안쪽에 푸른 이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동하는 물의 흐름을 느껴보고 싶
었는지 앉은걸음으로 조금씩 물가로 다가갔다. 계곡의 바위에는 어
느 것이곤 푸르게 이끼가 돋아나 있었다. 형은 샌들을 신었는데 저
번에도 확인했다시피 발가락들이 매우 앙증맞았다.
“물이 좋은가 봐요?”
그건 정말 좋아 보여서 한 말이었다. 형의 즐거운 한 때에 산통을
깨는 짓은 진정으로 하고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진정으로 하고
싶지 않은 짓을 모르는 사이에 하고 마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바
로 그랬다. 내가 묻기 시작했을 때 우혁이 형은 손바닥으로 계곡의
세찬 물살을 느끼며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말을 끝마칠 때쯤에는 왼
발이 미끄러지면서 앞쪽으로 고꾸라지려 하였다. 나는 잽싸게 팔을
길게 뻗어서 형의 왼쪽 팔을 잡아채 내 쪽으로 강하게 끌었다. 그
러니까 나는 놀란 나머지 잡아끌어야겠다는 생각만 굴뚝같았을 뿐,
어느 정도의 적당한 힘으로 형이 적당한 위치까지만 물러나게끔 해
야한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순발력이란 그러하다.
순발력에는 이성이 껴들 여지가 전혀 없다. 너무 힘을 쓴 게 화근
이었다. 형은 나에게 폭삭 안긴 꼴이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뒤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형은 금방 일어나 나에게서 멀리 떨
어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운 채로 포개져 있던 상황은 매우 짧은
찰나의 일이었다.
“미, 미안하다, 나는...”
형은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신께 들통난 이브라도 되는 것처럼 몹시
당황했다. 형이 사과할 이유도 동기도 전혀 없었는데. 아니 더 정
확히 말하자면 형은 사과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형, 왜 그래요. 뭐 잘못했어요?”
햇살이 눈부셔서 눈알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나의 태도는 매우 비
딱했다. 눈이 아팠기 때문에 두통마저 일었다. 신경이 몹시 예민해
져 있었다. 발가락도 살살 저려왔다. 형은 뭔가에 놀란 듯 날 바라
보더니 “아냐.”하곤 걸음을 빨리 하여 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산 아래로 내려갔을 때, 마침 누나가 우혁이 형을 찾고 있었다. 나
는 누나가 걱정할까봐 내려오다 만났는데 금방 내려올 거라고 대답
해주었다. 나는 만 번에 한번쯤 기특한 짓을 한다. 그런데 금방 문
제가 생겼다. 산에는 해가 빨리 지는데 산중턱에 해가 걸리더니 넘
어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우혁이 형이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
는 모두 우혁이 형을 찾았다. 아까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에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괜찮았다. 그런데 우혁이 형은 이미 그곳에 없
었고, 그 근처에도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또다시 식도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물가에 박힌 돌덩이 두 세 개를 뛰어넘어 계곡의 발원지 쪽으로 올
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나의 비명이 들렸다. 정신없이 달렸더니
갑자기 시력이 딸렸다. 물위에 둥실 떠올라 있는 그것이 해파리로
보였다. 해파리가 바다에 사는 생물이란 사실이 떠올랐을 때 그것
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혁이 형이었다. 우혁이 형
이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동그랗고 굽어보이는 등만을 수면 위로
내보인 것이었다. 내가 형을 기슭으로 끌어냈을 때 이마에선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누나는 지혈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진짜 급한 것
은 지혈이 아니었다. 이마의 상처는 깨진 바위에 살짝 긁힌 거였다.
진짜 급한 것은 형이 숨쉬는 것을 멈춘 것이었다. 근데 누나는 피
때문에 놀라서 그것만 신경 썼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누나가 피에
만 신경을 쓰니 숨이 멈춘 거는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거다.
나는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칠현이 놈이랑 승호 놈은 반대편을 찾
아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이 있었으면 그 놈 중 한 놈이 인공
호흡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인공호흡을 할 줄 모른다.
그냥 입술을 갖다 붙이고 숨 불어넣는 거라는 것밖에 모른다. 그
래서 무조건 입술을 갖다 붙이고 숨을 불어넣었다. 네 번째 숨을
불어넣었을 때는 누나의 숨소리가 멈췄고 여덟 번째 숨을 불어넣
었을 때는 나의 심장이 멈췄으며 열두 번째 숨을 불어넣고서야 비
로소 형이 눈을 떴다.
나는 원래도 오기가 넘친다. 그런데 나는 열 일곱이다. 자고로 열
일곱들은 오기가 전혀 없던 놈까지도 전신 가득 오기가 들어차곤
하는데 내가 바로 열 일곱이다. 우혁이 형은 놀랐을 것이다. 십분
이해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눈을 떴는데 처음 보이는 광경
이 내가 형 입술에 입술 붙이고 있는 광경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경악으로 가득 찬 동그란 눈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니까 오기가 생
긴 것이다. 그래서 나도 마주 보아 주었다. 입술도 안 띠었다. 두
눈을 희번뜩 뜨고 형의 눈을 쏘아보았다. 내가 깜빡했는데 형은 나
보다 두 살이 많다. 형은 오기가 없다. 그런데도 형은 내가 속으로
다섯 이상을 세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깊고 뜨겁고 어찌 보면 차갑
고 서글프고 짜릿한 것이 들어 있었다. 형은 다섯 반 정도에 눈을
감았고 속눈썹이 떨렸다. 동시에 손바닥으로 내 머리통을 천천히
밀었다. 나는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밀려나면서도 나는 형처럼 눈
을 감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천하의 배러먹을 짓을 했으
나 식도가 타는 아픔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나쁜 짓을 할수록 고
통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재원..”
누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최대한 인상을 구기고 벌레 씹은 얼굴
로 돌아봤다. 나는 누나한테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딱! 소리가 났
다. 딱! 딱! 딱! 딱! 누나는 그 뒤로 네 차례 더 때렸다. 누나는 나
를 적어도 서른 번은 더 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족할 만
큼 때리지 못했다. 우혁이 형이 말렸기 때문이다. 형은 별 거 아니
라고 했다. 이런 건 별 게 아니라고 여러 번 말했다. 형이 그렇다
면 그런 것이다. 누나는 현명한 사람이라서 형의 말을 금방 알아
들었다. 우리 모두 갑작스런 사고에 놀란 것이라면서 얼른 돌아가
자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머리가 엄
청 딸린다. 그래서 나만 못 알아들은 채로 우리들의 사고가 순조
롭게 끝맺었다. 산밑에서 승호와 칠현이를 만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도 형도 그 날의 사고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저질렀는데 저지른 게 아니라고 한다. 뭔가를 봤는데 본 것이 헛
것이라 한다. 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도 둔하고 멍청한 놈이
경험한 것조차 틀렸다고 지적 받으니 뇌가 터지고 간이 쪼그라들
었다. 나는 매일매일 나쁜 짓을 했다. 행동으로도 했고 생각으로
도 했다. 나쁜 짓을 하면 덜 아팠다. 덜 괴로웠다. 뇌가 터지고 간
이 쪼그라들어서 나쁜 짓 하기에는 더 좋았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나는 가장 나쁜 짓을 했다. 외할머니가 온라
인으로 넣어준 한 달 생활비를 가로채서 현금으로 모두 바꾸고
속주머니에 두둑하게 넣었다. 그리곤 우혁이 형의 집을 찾아갔다.
깊은 밤이었다. 나는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형이
있을 방의 창에는 꺼멓게 어둠이 내렸다. 아주 작은 돌멩이를 집
었다. 그리고 창을 겨냥했다. 두 번 빗나갔고 세 번째에 맞았다.
형은 잠귀가 밝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불이 켜졌고 창문이 열렸다.
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형의 작은 머리
위에서 빛났다.
형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오래도록 형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형이 나를 불렀다. 재원아. 하고. 별안간 나
는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졌다. 형이 별 것이 아니길 바란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형이 아무 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자 한
다면 나는 그럴 수 있다. 나는 떠날 것이다.
“가출할 꺼야.”
“재원아, 거기 있어, 나 지금 내려가!”
“떠날 꺼야. 내려와도 소용없어 난 여기 없을 거야.”
“재원아 제발 기다려!”
나는 기다렸다. 아니 기다린 게 아니다. 안 기다리려고 했다. 나
는 오기로 꽉꽉 들어찬 배러먹을 열 일곱이다. 내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못 떴다. 형이
자다 깬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겉옷도 갖춰 입지 못한 채로 그
작은 발바닥으로 계단을 뛰어내려와 문을 열고 내가 있을 자리
까지 쉼 없이 달릴 텐데 생각하니까 발이 땅에 붙었다. 형은 씩
씩거리며 나타났다. 나는 형에게서 등을 돌렸다.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형이 나한테 자길 봐달라고 말했고 그래서 조금만 몸을
돌렸다. 형은 나랑 가방을 번갈아 보았다.
“금방 괜찮아질 꺼야.”
형의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가로등 불이 노랗게 밝았다. 내 그림
자는 너무나 새까맣게 길어서 그 끝이 형의 발끝에 닿아 있었다.
“나도 모든 것을 참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어. 태풍처럼 당시에
는 그것이 세상의 끝이며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나가면 아
무 것도 아냐. 참을 수 없이 괴로워도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이 피
어나. 이런 시기는 금방 지나가.”
나는 점점 힘이 들었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다. 갑자기 내 가방에
3톤 짜리 철근이 들어찬 것처럼 무거워져서 팔이 끊어져나갔다.
나는 가방을 놓쳤다. 툭. 둔한 소리가 났다. 그림자의 배열이 바뀌
었다.
“딱 십 년 후만 생각해봐. 내가 스물 아홉이 되고 네가 스물 일곱
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봐. 그 때 우리 어떻겠니.”
“그런 생각을 왜 해요? 그 전에 죽어버리면요.”
“어떻게 할까? 우리가 어땠으면 좋겠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배러먹을 열 일곱이
었고 스물 일곱의 생각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형 또한 열 아홉
일 뿐인데 십 년 후를 생각할 수 있다니 이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내 생각에 나에게 앞으로 이년동안 귀신이 곡할 노릇
의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열 아홉이 되어서도 스물 아홉의
일들을 추측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너의 곁에 있고싶어. 네가 직장을 갖고 사랑을 하
고 아이를 낳고 늙어 가는 것까지 나는 지켜보고 싶어.”
세상에 열 아홉의 형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형이 누나랑 사랑을 해서 내 조카를 낳고 늙어갈 때쯤에 나는 여
기 없을 거예요.”
“재원아.”
“그런 걸 좋다고 두고 볼 수는 없어요. 자존심이 허락칠 않아.”
“이러지 마, 재원아. 네가 이러면 내가 불행해. 우리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어. 내 말 알겠니?”
우리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어. 라고 형이 말하자 내 마음은 태평
양과 대서양을 합친 만큼 넓어졌다. 맞아요 형 말이 다 맞아요.
형 말대로 할께요, 내가 바보였어요. 갑작스레 줄줄 울면서 나는
형에게 말했다.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형이 앞으로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줄줄 울면서 그런 말도
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형은 연신 괜찮다고 말했고 집까
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나쁜 짓
도 안 할 거예요. 진짜예요. 형은 행복해했다.
10월 10일이었다. 외우기 쉬운 날짜다. 칠현이 놈이랑 승호놈이랑
아파트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나는 소주 한 병을 마셨다.
다른 놈들은 안 마셨다. 나만 마셨다. 대낮이었다. 대낮이라 그런
지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고기만
꾸역꾸역 처먹었다. 나는 소주 먹고 담배도 피웠다. 졸라 헤롱거
렸다. 매우 오랜만의 일이었다. 한 달만의 일이었다. 우혁이 형
손에 이끌려서 집에 돌아온 후로 나는 졸라 착실한 생활을 했다.
나쁜 짓을 하나도 안 했다. 하나도 안 했다는 것은 사실은 거짓
말이고 조금은 했는데 하도 조그만 나쁜 짓이라 밤 되면 다 잊어
버릴 만한 나쁜 짓을 했다.
그렇게 나쁜 짓을 안 했더니 우리 누나랑 우혁이 형이랑 많이 행
복해 했다. 우리는 전처럼 셋이 곧잘 만났다. 같이 공부도 했다.
내가 공부를 한다고 했더니 더 행복해하는 것이다. 셋이 같이 밥
도 먹었고 누나가 내 옷을 고른답시고 함께 쇼핑도 하고 그랬다.
“더워.”
“더워? 나는 추워죽겠다.”
“술 마셔서 그러지. 작작 마셔라. 그러다가 나중에 커서 노숙자
된다 너.”
나중에 커서? 나중에 커서?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몹시 더위를 탄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바람을 맞고 싶었다. 셔츠를
펄럭거렸다. 하늘을 봤다. 하늘이 돌고 있었다. 하늘이 도는 것에
맞추어 졸라 둔한 내 머리도 돌기 시작했다. 십 년 후의 일을 생
각하게 되었다. 십 년이 지난 후에 단지 연도의 숫자만 지났을 뿐
나는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이면 어떻게 하나. 십 년 후
에도 여전히 저 하늘이 돌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 모든 것이 지금
과 같으면 어떻게 하나.
“재원아!!!!!”
하늘이 돌았다. 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는 채로.
나는 아파트 옥상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때에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