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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삼릉골 솔밭의 소나무들은 간간이 곧기는 하지만 대체로 굽은 채 아름다운 곡선으로 구불거리며 더위를 다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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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폭염이다. 한여름에는 응당 냉기가 돌아 '냉골'이라던 경주 남산 삼릉골조차 속수무책이랴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울창한 송림이 큰 위안을 준다. 폭염에 소나무의 위안이라. 운이 좋으면 바람까지 얻는다. 그 시원함. 조용미의 시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가 절로 떠오른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나무들조차/ 내게로 몰려오고 있다/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삼릉골 솔밭도 남산의 심장인 양 한 낮의 더위에 펄떡이고 있었다. 다만 그 펄떡임은 더위에 지친 펄떡임이 아니었다. 더위를 다스리는 힘이랄까. 자연의 힘. 간간이 곧기는 하지만 대체로 굽은 채 아름다운 곡선으로 구불거리며 더위를 다스리고 있었다. 서로를 다독이는 몸짓도 잊지 않는다. 어디서 생겼는지 용케도 바람은 이런 소나무 사이를 마치 길을 훤히 알기라도 하는 듯 시원히 달리고 있을 뿐. 그러니 '냉골'이라 이름 하지 않았을까.
다들 잘 생겼다. 아직은 좀 어린 듯도 하지만 어느 훗날이면 성큼 자라 아름드리 당당한 기상을 자랑할 것이다. 그 철갑 같은 목피의 균열마다 역사는 새겨지고 숱한 곡절로 다져져 이야기 되어질 것이다. 완당이 그린 한 폭의 그림. '세한도(歲寒圖)'에서처럼. 잣나무와 대칭을 이루며 왼쪽의 것이 소나무. 곧은 모습. 찬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여전히 올곧게 서 있는 그림. 국보 180호. 그렇지만 요즘 같은 수상한 세월에 삼릉골 솔밭을 비롯해 우리의 소나무들은 얼마나 견딜까. 걱정이다. 호시탐탐 노리는 소나무재선충을 막느라 연일 방제작업에 바쁘다. 분무기로 뿌옇게 뿌려지는 연무가 오늘따라 그 빛깔이 너무 흐릿한 게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소나무들. 그냥 탈 없기만 바라서는 안 된다.
소나무는 입지의 환경에 따라 수형이 다양하다는 게 특징이다. 곡형소나무와 직형소나무. 곡선과 직선. 어느 것이든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그 소중함이야 어원을 따져보면 뚜렷해진다. 소나무는 '솔'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솔은 으뜸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수리'에서 변성한 것으로 나무 중의 으뜸이라는 뜻. 이처럼 어원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심성과 너무 닮아 더욱 사랑받는 이유다. 홍성천 전 경북대 교수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이 자라는 소나무의 끈질긴 인내력은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홍 교수는 소나무답사여행을 권한다. 경주 남산은 물론 울진의 월송정과 춘양목 밀집지대인 불영사 계곡 인근, 영주의 소수서원, 예천의 석송령,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장관인 하회마을의 솔숲, 강원도 영월 장릉 주위의 소나무, 청도 운문사 경내의 처진소나무와 주위의 소나무들 등 너무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너무 모르고 있다. 미술사학자 강우방은 '처진소나무'라는 글에서 그 나무를 이렇게 읊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소나무 안으로 들어와 웅대하고도 기괴한 세계를 체험했으니 이를 일러 송엽장세계(松葉藏世界)라 해도 괜찮을지. 이렇게 천 잎으로 된 처진소나무의 법신이 백억세계로 화현하여 솔잎 하나하나가 또한 하나하나의 세계를 이룬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소나무 안에서 무진연기(無盡緣起)의 원리가 다만 연화장세계로만 표현될 수 ! 없음을 알았다…"고.
소나무는 곧게 자라 하늘을 찌를 듯 줄곧 뻗은 것은 그것대로 장관이다. 반면 나선형으로 뒤틀어져도 여전히 하늘로용이 등천하듯 뻗은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소나무를 즐겨 그려온 한국화가 이호신은 이런 소나무에서 궁륭의 세계를 본다며 "제멋대로 뻗은 기괴한 가지가 서로 얽혀 소우주를 이루는 장엄, 이를 일러 화엄의 세계"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 소나무는 아무래도 굽은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많다. 왜 그럴까. 이경준 한국임학회장은 은사인 현신규 박사의 일대기를 담은 책 '산에 미래를 심다'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곧은 소나무를 먼저 베어 쓴 결과, 구부러진 소나무만 종자를 맺어 대물림한 까닭"이라고 했다. 이를 그는 인간에 의한 끊임없는 간섭이라며 과학적인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곡목과 직목의 일화를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간섭. 정말 싫은 단어다.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이양하의 나무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의 간섭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느낄 수 있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고 했다. 몇 백 년 오래된 나무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그는 그런 나무 앞에 서면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 참 안타까운 듯 '겸허'를 이야기한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며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 보며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며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소나무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럴 수 있을까. 재선충, 솔잎혹파리에 좀이나 응애로부터 소나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소나무의 유익은 무진장이다. 선비의 기상을 상징한다하여 숱한 그림에 등장한다. 김홍도의 '송하취생도', 이인문의 '송계한담도'를 비롯, 민화에서도 소나무는 고유의 그 유려한 곡선미와 함께 힘찬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하질 않는가. 굶주림을 면하려 송기떡 빚던 시절이 우리들에게는 있었다. 반면 송홧가루로 만드는 다식은 그 또한 얼마나 일품인가. 기둥, 서까래, 대들보 등 목재는 물론 지금은 맥이 끊긴 거나 진배없는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묵도 하루빨리 그 맥을 찾아야 한다.
마을마다 그 마을을 휘감던 솔숲도 어지간히 망가진 지금. 우리는 어디서 아름다운 소나무를 맞을 수 있을까. 작가 최명희의 '혼불'에 고리배미의 솔밭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져 마을을 나직이 두르고 있는 동산이 점점 잦아내려 그저 밋밋한 언덕이 되다가 삼거리 모퉁이에 도달하는 맨 끝머리에, 무성한 적송 한 무리가 검푸른 머리를 구름같이 자욱하게 반공중에 드리운 채, 붉은 몸을 아득히 벋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민촌에 아깝다'고 이 앞을 지나던 선비 한 사람이 탄식을 하였다는 적송의 무리는, 실히 몇 백 년생은 됨직하였다. 이런 나무라면 단 한 그루만 서 있어도 그 위용과 솟구치는 기상에 기품이, 잡목 우거진 산 열 봉우리를 제압하고도 남을 것인데. 놀라운 일이었다. 수십여 수(樹)가 한자리에 모여 서서 혹은 굽이치며, 혹은 용솟음치며, 또 혹은 장난치듯 땅으로 구부러지다가 휘익 위로 날아오르며, 잣바듬히 몸을 젖히며, 유연하게 허공을 휘감으며, 거침없이 제 기운을 뿜어 내고 있었다.…붉은 갑옷의 비늘이 저마다 숨결로 벌름거리고, 수십 마리 적송은 적룡(赤龍)의 관능으로 출렁거려…"
거침없는 관능의 소나무. 그것은 직선과 곡선의 조화다. 그러니 이를 어찌 결코 소홀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소나무. 경주 남산 삼릉골의 그 소나무들에도 여전히 거침없는 기운과 적룡의 관능이 지금도 흐르고 있음이니.
/김채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