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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들의 순례 & 걸음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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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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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16년 4월 16일.(토) (우곡 성지와 외씨 버선 길 ) |
시작 성가 |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1).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 /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 하고 픈데 /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님 나를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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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
기도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고통의 높은 산을 넘어, 끝내는 목숨 바칠 수 있는 믿음만이 믿음이라고/ 어서 굽이치는 강이 되어 소리 치 소서. /고통의 깊은 강을 건너 끝내는 죽을 수 있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 /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가파른 생명의 길 고독한 진리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걸어, /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신 님 들이여 이제 우리도 가게 하소서. 아멘 |
평화의 인사 |
서로 인사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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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소개 |
서울- 기흥 휴게소 – 상주 휴게소 –우 곡 성지- 두내 약 수 탕 – 백두대간 수목원- 외씨 버선 길 걷기 – 도심3리 마을회관.- 춘양면 서동리 – 춘양성당 – 춘양면 소재지- 영주- 풍기-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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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안내 |
우곡 성지 수덕 자 풍산 홍씨 홍유한과 그 후손들 13명의 가묘가 설치되어 있음. 2014.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가경자로 선포된 봉화출신 순교자: 솔뫼에서 이주 김종한(안드레아)- 김대건신부 작은 할아버지, 홍주에서 이주,이재행(안드레아), 예산, 여사울에서 이주, 김희성 또한 홍유한 후손들도 같은날 복자 반열에 든 순교자로 홍낙민(루카),강원숙(골롬바) 홍필주(필립보), 심조이(바르바라), 홍재영(프로타시오) 1984년 5월6일 여의도광장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됨- 성,홍병주 (베드로), 성, 홍영주 (바오로) 가 있으며 그외 순교자 홍정호, 홍(아기), 정소사가 있다. |
걸음 여행지 |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 오다 소백산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맥은 백두대간이지만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 맥은 낙동 정맥이 된다. 춘양면과 두내약수탕 구간을 걷는다. |
마침 기도 |
기도합시다.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은 바로 진리를 찾은 올곧은 마음입니다. 그들이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과 애덕은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연대입니다. 그 풍요로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 가는 순례자에게 순교의 밝은 빛이 찾아 들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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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봉화 문수산 우곡까지 가까운 길이 아니다. 영남의 오지, 봉화는 옛적 고구려 지배를 받았었다. 그러다 다시 신라 영역이된다. 태백에서 소백으로 접어들면서 백두대간은 급격하게 서쪽 방향으로 꺽는 바람에 영남 북서부는 대간에 가로막힌다. 북으로 나가는 길이 막힌 오지에 길을 열어 준 사람은 신라인 죽주였다. 소백산 남쪽 기슭에 죽령이 있다. 고갯길이 죽령이라 하니 사람들은 대나무가 많은 길이라 지레 생각하지만 대나무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곳이다, 길을 만든 신라인 죽주의 이름 빌려 사용한 고개마루의 이름이 바로 죽령이다. 봉화에서 한양으로 가려면은 영주, 풍기를 지나 죽령을 넘어 단양, 제천, 원주, 여주, 이천, 광주를 지나 광나루를 넘어서야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정치적 보복으로 지식인들이 가정과 처자식과 떨어져 귀양갔던 곳의 하나가 바로 봉화였다. 그만큼 첩첩산중인 곳이다. 그렇게 멀기만 한 곳을 단 하루만에 이런저런일 까지 보고 귀향한다는 계획은 무모하리 만큼 벅찬 일정이다. 아침 5시30분 집을 나선 후 귀가한 시간은 익일 새벽 12시 05분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 뿐이다.
나서지 않는 사람은 어디런가 갈 수 없고 걷지 않는 자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 대하여 스스로 묻고 답을 할 수 있기에 감사해 하는 것이다.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시시각각 다른 풍물과 풍광을 경험하며 문수산 우곡성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약 4시간이 소요된 여정이었다.
봉화 문수산은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서벽리, 봉성면 우곡리까지 이어진 지역 진산으로 해발 1205m다. 신라 자장 율사께서 태백산 일대를 순회하며 문수보살을 찿던중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문수산이란 지명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봉화 진산 문수산 우곡에 수덕자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을 기리는 천주교 안동교구 우곡성지가 있다. 이곳이 바로 작은자들의 순례단 58차 순례지다. 풍산 홍씨 홍유한은 1726년(영조 2년)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홍창보(洪昌輔) 모친은 창령 성씨 훤의 딸이다. 본향은 안동현 풍산, 선생의 자는 사량(士良) 호는 농은(隴隱 洪儒漢 )은 16살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성호 이익은 1750년경 부터 제자들(안정복, 권철신, 권일신 등) 함께 서학인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極),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때 농은 홍유한도 참여하고 칠극을 보고 깨달은 후 수계생활을 하려하였으나 문중의 압력을 받는다. 마침 병이 생긴 홍유한은 스승이 권하는대로 치료와 휴양을 위하여 서울 집을 정리한 후 친척들이 살고 있는 내포지방 예산으로 낙향한다. 호를 농은이라 짓고 18년 동안 칠극을 토대로 수계생활을 하다. 1775년 수계생활에 더 적합한 소백산 아래 순흥 동쪽 10리 마을 구구리에 기거하며 권철신 형제와 서신을 교환하며 더욱 정진한다. 당시 서로 교환한 서찰은 천진암 박물관 보관중이다. 칠극에 영향을 받아 철저한 수계생활에 빠져 드는 생활을 지속하다. 1785년 1월 30일(음력3월 10일) 세상을 떠나 4월 19일 순흥부 동쪽 이곳에 안장되어 영면의 길로 접어 든다.
도착한 순례단들은 우선 행장을 다시 추수린 후 준비한 예물을 들고 고상과 수덕자 앞에 섰다. 전형적인 봄날 풍경 안에는 모든 것이 봄이 었다. 그리고 성호 이익의 학파를 흉내를 내듯 전체 단원들을 여러학파로 쪼갰다. 그리고 칠극 조형물 앞에 섰다.
먼저 야고바 학파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 예수회 소속 판토하(Didace de Pantoja, 1571~1618) 신부가 쓴 교리서로, 일곱 가지 죄의 뿌리인 ‘칠죄종’을 이겨내어야 하느님 나라로 오를 수 있다는 지침서다.
다음은 안드레아 학파.
제1극 복오(伏傲): 교만을 억누르다
교만은 분수에 넘치는 영화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곧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요구된다.
다음은 방배4 본 학파,
제2극 평투(平妬): 질투를 가라앉히다
질투는 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하고 남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용서’가 필요하다.
다음은 모니카 학파.
제3극 해탐(解貪): 탐욕을 풀다
탐욕은 욕심이 많고 인색하며 끝없이 재물을 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탐욕을 이겨내려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고 베풀어야 한다.
칠극과 관련한 것들을 잠시 정리 한 후 다리를 건넜다.
밤색빛 안내판에서 수도의 빛을 보았다. 농은 홍유한 선생께서 우리들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는 지고지순한 천주님의 사랑과 그
분에게 다가 가려고 준비하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지향을 위한 수덕의 마음 때문이다.
정조의 어머니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바로 풍산 홍씨 가문이다. 농은 홍유한 선생은 종교적 신분을 알리는 세례를 받은 사실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지만 후손들중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가문이다. 그것은 바로 천주교 최초 수덕자 농은 홍유한 선생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많은 학자들과 교류했던 농은 선생께서 영주 구구리에서 수덕을 쌓고 이곳에 잠든 이유를 추론해 보면 진보적 성향을 보였던 영남 학자들의 영향과 도움이 있지 않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모셔진( 순교하신 분들의 시신을 모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순교터 흙같은 연관된 것들을 넣고 가묘를 만든 것이다) 13분의 박해시기와 순교자는 다음과 같다.
시기 | 인원 | 순교자 이름 |
신유박해 (1801년) | 5위 | 홍정호, 홍낙민 루카, 강완숙 골롬바 홍필주 필립보, 홍낙임 |
기해박해 (1839년) | 6위 | 홍재영 프로타시오, 심조이 바르바라, 홍(아기) 정소사, 성(聖) 홍병주 베드로, 성(聖) 홍영주 바오로 |
병인박해 (1866년) | 2위 | 홍봉주 토마스, 홍베드로 |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 시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봉화출신으로서 김대건 신부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김희성 프란치스코 시복을 받을 때 홍낙민(루카), 강원숙(골롬바), 홍필주(필립보), 홍재영(프로타시오), 심조이
(바르바라) 도 시복을 받았고 1984년 5월 6일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하여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는 시성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시복미사 집전 당시 - 본인의 사도 권위로 가경자(可敬者) 하느님의 종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를 앞으로 복자(福者)라 부르고 해마다 5월 29일 (천주교 순교 기념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 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라 선포하셨다.
일행은 참례의 예를 갖추기 위하여 간소한 상차림을 하였다. 그리고 술을 따라 올리고 예를 갖춰 절을 드렸다. 그 다음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맑고 청아한 성가 소리가 문수산 안부 계곡 사이를 타고 올라 농은 선생님의 묘택과 까지 들렸을 것이라 확신하며 참례마침 절도 올렸다. 각각 다른 박해영향으로 순교하고 한 문중으로서 인연을 맺고 살다 순교를 당한 무덤 앞에서 참례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가까지 옥에서 옥사하였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박해에 대하여 새삼 전율하게 된다.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충돌하는 역사적 사건에 불과하던 일은 서학이 학문 탐구 범위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돌아서면서 국가의 정체성에 위기를 느낀 국가권력은 강압의 수단으로 바뀌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당파싸움이란 정치적 배경이 얽혀 있다.
농은 홍유한 선생님을 만나로 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 길이다. 우린 그 언덕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행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걷기로 하였다. 나홀로 수덕자의 생활, 깊은 심산유곡에서 쉽지 않은 일이였을 것이다. 두견을 벗 삼고 때론
하느님게서 직접 키워 주신다는 야생화를 벗 삼아 위로 받으며 고행을 견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의 길,
첫걸음을 딛으며 슬쩍 13인의 순교자 묘역을 보면서 오늘 주제로 선정한 복음 말씀이 떠 올렸다.
-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제 1처에 모두 모여 다함께 기도를 드렸다. 우선 총무님부터.... 2처는 조금 언덕에 있다. 조금씩 오르다 보면 15처가 완성되고 거기서 다시 조금 오르다 보면 농은 선생의 묘택을 만나게 된다. 명당 중에 명당인 묘택은 풍수에서 중요시 여기는 좌청룡 우백호가 존재하고 앞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명당이라 13명의 순교자가 가문을 빛낸걸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아무 표시도 없이 붉은 조화가 꼿혀 있는 묘택이 눈 길을 준다. 농은 홍유한 선생의 일가의 묘라는 설이 있는 봉분이다. 목례로서 예를 갖춘 후 2처에 서서 1처에 들려 오는 기도 소리와 2처로 올라 오는 기척을 느끼며 서 있었다.
농은 선생을 만나로 가는 길섶 마다 야생화가 피었다. 애기 붓꽃이 만개되어 순례자를 반긴다. 화초는 사람이 키우지만 들에 핀 꽃은하느님께서 직접 키워 주신다 했던가! 애기 붓꽃의 색과 모양이 참 순수하고 아름답다. 손가락을 펴 나도 모르게 쓰다듬고 다음 처로 걸음을 옮겼다.
봄 기운이 가득한 송림 숲, 이 지역은 소나무와 함께 솔향의 고장이다. 곱게 하늘로 뻗어 올라 가는 붉은 빛 수피의 소나무,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파릇 파 릇 새싹이 돋고 짙푸른 소나무 숲 아래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은 창조적 질서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처로 옮기려고 어머님께 청하오니~~ 부르는 청원의 기도 소리가 정겹게 다가 온다. 그것은 자연의 해맑은 품에 도시에서 생성된 여러가지 이기심의 감성들이 순치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의 친교 또한 창조주의 의중과 진실을 살피는 충분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봐야 한다.
산길을 걷다, 잠시 만나게 되는 평지 길, 그것은 고도를 높이기 위한 수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곧 나에게 닥쳐 올 위험을 조심하며 준비하라는 일종의 예시이기 때문이다. 쉼과 노동의 반복, 열정과 정숙의 상반된 감정, 있고 없음의 차이 등 항상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셨다. 지혜가 없이는 분별할 수 없는 일도 참 많다. 그래서 선구자셨던 분은 자신이 세상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복음서로 남겨 주셨다. 우린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그 복음을 통하여 미리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복을 얻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농은 선생께서도 이러한 깨달음에서 수덕자의 첫발을 내딛으셨다는 생각이 든다. 오르는 길이 한결 쉬어진다.
한결 더 가파른 길로 변하였다.
결국 15처인 부활처에 도달하였다. 마침 정오, 부활 삼종기도를 다함께 ......
드디어 농은 선생 묘역에 도착한 후 예를 갖추고 모두 절을 드리고 술을 올렸다.
기도를 드리고 성가를 부르고 잠시 묵상하며 ......
모든 참례를 완성하였다. 이곳 선생의 묘 터는 국왕의 묘 잡이인 어풍(御風)이 터를 잡았다 전해지고 있으며 이 터를 잡기까지 가묘를 쓴 후 이 터를 잡은 후 정식으로 매장을 하였는데 그 기일은 약 100일 가량 소요되었다 한다. 또한 선생의 묘역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았는데 사후 207년만인 1993년 10월 묘지 단장 작업중 진흙에 숯으로 ‘홍공지묘’(洪公之墓)라고 쓰여진 글귀가 발견되어
논란은 가라 앉았다.
묘역을 새 단장을 하느냐 인부들이 동원되아 잔디와 산소 용품들을 나르고 있었다.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
농은 홍유한(1726- 1785) 선생으로부터 비롯된 풍산 홍씨 문중의 신앙적 가계는 조선 후기변혁기에 이 땅에 그리스도교 복음의 씨앗을 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모든 신앙인들에게 가히 귀감이 된다. 홍유한 선생은 한국 천주교 최초 수덕자이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1742년 16세에 당대 대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서학, 특히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57년부터 권철신, 이기양, 홍낙민, 등과 더불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들여와 신앙공동체로 거듭나게 할 것을 맹세하고, 자신부터 먼저 신앙적 수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회 여건상 강학회원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이들과도 신앙적으로 깊이 교유하면서 1785년 선종할 때까지 천주교 교리를 온몸으로 실천하였으며, 이러한 신앙적 열정은 1784년 이 땅에서 천주교를 창립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홍유한 가계 가운데 그 분의 뜻을 이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13명이나 된다. 그들 중 신유박해(1801) 때는 홍유한 선생의 인척인 홍정호와 제종 조카인 홍낙민루카, 1795년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한국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선교활동에 앞장섰던 강완숙 골롬바와 그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이렇게 다섯 분이 순교하였다.
기해박해(1839) 때에는 여 섯분이 순교하였는데 홍낙민의 세 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전주에서 참수 치명하고, 그의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라와 두 살 난 홍아기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홍재영의 부인 정소사는 그때 순교한 것으로 문중에서 추정하고 있다. 도한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 베드로,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서울 당고개 참수 치명하였다. 특히 이 두 형제는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한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미사 때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101위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어 성인 반열에 올라있다.
병인박해(1866) 때는 두 분이 순교하였는데 홍재영의 아들인 홍몽주 토마스는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고 아들 홍베드로는 1867년 가을 전주 초록바위에서 수장되었다. 이렇게 풍산 홍씨 가문에는 문헌기록으로 남은 순교자만 13명이나 된다 이에 지금의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하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던중,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13위 순교자들 함께 모실 것을 안동교구에서 정하여 협의 하였으며. 교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받아들여 후손과 함께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선조들이 순교한 각 순교 터의 흙을 담아 가묘를 조성하고 비를 세워 현양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곳은 농은 선생의 묘소뿐만 아니라 풍산 홍씨 가계 13위 순교자들을 한 자리에 모심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족적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우곡의 골짜기는 이곳을 찾는 신앙 인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신앙인 골짜기, 거룩한 땅, 성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09년 5월 29일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 4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수덕자 농은 선생님! 치열했던 당신의 종교적 삶이 부럽습니다. 그 본을 받아 마음공부를 하고 싶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순례를 마치고 떠나려 합니다. 당신과 같은 행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끈기와 지혜를 나누어 주시옵소서 아멘...
성모님과 농은 선생님에게 다가 가 섰다. 화인더를 통해 응시하면서 구도를 잡았다. 아주 간략한 기도문을 만들어 드렸다.
성모님! 아주 머~언 서울에서 우곡에 계신 성모님을 뵙고 싶어 온 세베리노와 일행들 입니다. 당신께서 주시는 자비 하나 마음에 새기고 떠난다 하여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대로 저희가 이루게 하시고 모든이에게 자애를 나눔하는 사람들이 되게 도와 주소서 아멘.
최근 신축한 농은 정자에 모여 서울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배식한 후 형제적 친교와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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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벽부터 서둘어 도착한곳.
첩첩산중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도착한
문수산 우곡성지.^^
처음 들어보고 가보는 성지다.
리더님의 상세 설명 들어며
봄의 따사로움과 함께~
순교분들께 참배한후
14처를 하며 오르는 좁은 산길
곳곳에는 푸른 새싹들이 꽃봉우리를 피워보려는자태~
피여있는 아름다운 자태에
취해서....
힘든 걸음도 잊고~~
새봄의 향기를 마음에 담아
도착한 농은선생의 묘역...
아름답고 뜻깊은
참배였음을~^~^
언제나 최선을 다하셔서 리더를 해주시는 대장님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 꾸벅~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간만에 동행 그리고 일년치 싸리꽃 증정 다 좋은 일이었습니다. 컨디션 건사 잘하시기 바랍니다. 꾸벅......
찬미예수님!봉화 우곡성지!
낯설고 먼길을 꿈결같이 다녀왔습니다 언제 다시 가볼수 있을지 ~~~걸음걸이에 동행했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대파손과 퇴행성관절염으로 모든일에 의욕이 사라졌던 나날이었지만 이번 순례를 통해 여러분의 격려와 관심과 세심한 보살핌에 힘을 얻었습니다 혹여 저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짜증도 날뻔한데 모두 형제적 사랑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불편하신 다리, 쾌유를 소원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창조적 질서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숲에서 그리고 수덕자의 깊은 신심이 어려 있는 성지 안에서 함께한 시간, 형제적 친교의 나눔 시간들이었습니다. 너와 네가 다름아니라 함께라는 인식이 참 중요합니다. 더불어 행복했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