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독후감
부제는'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후기의 삶'이다.
내용은 제목과 부제 그대로다.
다만 대다수가 아닌 소수인 양반쪽에 많이 치우친 시각이라는 점이 아쉽다.
(너머 북스 2009간)
좌우간 주인공 노상추가 17세때부터 죽기직전인 84세까지 쓴 일기이다.
시기적으로는 영조38년(1762)부터 순조29년(1829)까지인데 물가도 세세히 기록할 만큼
조선인들의 실제 삶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헌데 당시 조선인들의 삶이나 오늘날 21세기 한국인의 삶이 그리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사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때의 삶과는 더욱 닮아있다.
전설따라 삼천리지만 일제시대인가 오래전 작고하신 우리 할머니께서 실제 그러셨다한다.
시계에 밥을 주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시계추밑에 밥한공기를 넣어주었다나.
라디오를 처음 보고 그 속에 귀신인지 난쟁이가 산다고 믿고는...
오늘날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쥐어준다면 어떤 표정이 되실지...
하여간 조선시대 적서의 차별, 반상의 차별, 천민의 질고등은 심각했었지만
반드시 義와 禮가 私情을 압도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고 요령과 수단은 어느 시대나 통했던 것 같다.
가령 아무리 양반이라도 양민이나 상놈에게 돈때문에 욕을 당하기도 했으며,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양반들 행태 역시 성욕보다는 대를 잇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 많았다.
주인공 노상추도 그러했지만 당시의 유아사망율은 무려 70%가 되었고
아이를 낳다가 혹은 질병으로 일찍 죽는 여인도 50%가량은 되었던 것이다.
실로 평균수명이 마흔밖에 안되는 것이 조선인의 삶이었다.
하기야 가까운 일제시대 때만 해도 천연두로 한마을 어린이가 몰살당하다시피하는 참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물론 각기 읽는 감상이야 모두 다를 것이지만....내 흥미를 많이 끈 부분을 옮겨본다.
주인공 노상추는 23세때 출사의 뜻을 품고 무려 12년간의 도전을 거쳐 무과에 급제한다.
그러고도 임용되기까지 4년이나 더 걸려야 되었다. 그러니 39세때에 첫 출사를 한 것이다.
늦었다고? 아니, 노상추의 동생과 아들도 무과에 급제하는데 십수년의 재수는 보통이었다.
후기만이 아니라 조선중기때도 다르지 않은 것이 충무공 이순신도 거의 그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문과는 무과보다 더 힘들었다니 상상을 못하겠다.
사실 노상추의 할아버지도 무과 급제로 출세한 사람인데 영남의 명문가이기도 했지만
관운이 많은 집안임에도 그리 급제가 힘들었다는 것은 많은 걸 시사한다.
문제는 본래 넉넉한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공부, 즉 교육에 투자하느라
집안의 전재산을 들이붓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매년 한양에 한두차례 왕래하고 한양서 몇달씩 기거하는 등 그 비용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하다못해 시험도구인 활과 화살까지 응시자가 조달할 지경이니...
노가 갈수록 빚에 쪼들리며 탄하는 장면이 많다.
실은 아버지 노철이 집안일에 전념했기에 부친과 아들 노상추의 공부나 벼슬길의 뒷바라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 문제는 그리 힘들게 벼슬길에 나아가더라도 녹봉이란 것이
겨우 직계가족만 입에 풀칠할 정도의 수준밖에 안되었다는 점이다.
아주 고위직이거나 지방장관쯤이라면 모를까 대다수가 축재커녕 먹고 살기도 바쁜 현실이었다.
노상추는 국왕 정조를 가까이에서 모시기도 했음에도 속된 말로 개털이었던듯...
출사하면 명예는 크게 얻을지언정 재물과는 별무상관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체면때문에 빚은 더 느는 수가 많고 집안에 과거지망생이라도 있다면 더욱 질고에 허덕이는 것 같다.
더욱이 그렇게 고생하여 입신한 노상추의 동생은 출사후 십년도 채 안되어 죽었다(미관말직으로).
물론 오늘날 같은 황금만능의 시대가 아니라서 노상추는 제법 자부심도 갖고 성취감과 함께 만족도 한다.
작으나마 이렇게 조선역사에 이름도 남겼다.
경우가 많이 다르겠지만 오늘날에 비교해본다.
지방의 보통 집안에 수재가 있다.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에 있는 두어 명문대에 진학하면 초시인지 향시를 통과한 셈이다.
대학졸업하고 각종고시나 취업준비에 몰두하는 기간이 십년여라고 치면...
대학과 합쳐 이른바 진사등과까지 십오년간은 별다른 수입이 없이 집안의 뼈골을 빼먹는 꼴이다.
조선조때의 모습과 크게 틀리지 않는 양상이다.
가난도 대물림 된다지만 돈이 없으면 입신출세도 못하는 세태는 실로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 같다.
얼마전 대학 시간강사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학문의 끝이라 할 박사까지 되어서도 현실은 월 백만원 수입의 시간강사 신세였단다.
그동안 흘린 땀과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진급(교수임용)하려면 일억인지 삼억인지를 처발라야 한댄다.
시간강사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노비에서 일약 양반으로 도약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런 세태에 삶의 가치도 의욕도 상실했을 것이리....ㅜ
허나 다시 생각해보자. 전국 6만이 넘는 시간강사중 반이상이 월 50만원 정도의 벌이란다.
과외나 투잡을 하지 않고선 그리고 부인의 힘 없이는 살기가 힘들다.
그러나 조선시대 노상추의 녹봉에 비하면 그리 열악한 것도 아니다. 백이면 먹고 살고도 남는다.
물론 오늘날 사람이란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존재지만....
그이가 노상추의 일기를 읽어봤다면...자살까진 안 했을지도 모른다는....
........하고픈 말은 넘쳐나지만 가다듬으려니 모다 쓸데없는 말이다.....무슨 말을 더 하리오...
...여름이 코앞이건만 스산할 따름....
2010년 늦봄에 씀
첫댓글 남의 일만도 아닌 것이...
시골의 장조카가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몇년간 고시공부하다 불발인지 포기하고는..ㅜ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방황하는 현실이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