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기 보다는 개별적으로 경쟁적으로 전체의 한 부속품으로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의 기제에 익숙해진 탓이다. 더불어 사는 것 보다는 방해받지 않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필요한 것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잘사는 방식으로 정착 되었다. 더불어 사는 것은 불편하다는 사고, 이런 유형은 가족 내에서도 발견된다.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와는 최소한의 대화만 하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서로의 일과 영역이 다르며 가정은 더 이상 기초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하숙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다른 구성원의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의견을 애기하면 꼭 다툼이 되고 만다. 더불어 살려는 의도가 가족들을 불편하게 한다. 따라서 더불어 살기 보다는 포장만 가정이고 내용은 개인적인 삶에만 관심있는 하숙집이라면 좀 과장된 얘기일까. 개인과 가정과 사회, 그어디에서도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장식 문구로만 작용한다.
생태적으로 살기 보다는 편리함과 속도,그리고 풍요를 삶의 방편으로 여기는 집단적 심리가 우리 삶을 좌우한다. 생태적 삶은 쓰레기 분리수거.화학세제 안쓰기 운동,건강 먹거리 관심으로 대치되었다. 생태적 삶은 TV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위안거리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으로 인식된다. 나와는 거리가 먼, 언젠가 아이들 다 키우고 돈 걱정 없을 때 시도해볼 수도 있는 훗날의 모습으로, 얘깃거리감으로 회자될 뿐이다.
더불어 사는 것도 힘든데 거기다가 생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 요원한 일인가!
먼저 기존의 생태 공동체가 떠오른다. 영국의 핀드혼 공동체,미국의 트읜오크스, 일본의 야마기시즘 실현지,실상사 공동체와 한농복구회등 다양한 종교 공동체,국내외의 여러 시도들... 책도 꽤 나왔다. 관심만 있으면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여러 생태공동체에 관한 글을 읽는다고 생태적이고 공동체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공동체에 관한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영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과연 성공할 것인가.
‘절대 공동체는 하지 말아라’ 귀농을 한다고 하니까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특히 공동체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강조해서 말했다. 적당히 간격을 두고 살라고,너무 깊이 관계를 가지면 반드시 쪼개진다고, 무어라도 공동소유로는 하지 말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사실 많은 공동체들이 시도 되었다가 깨졌다. 공동체로 시작되었는데 몇 년이 가지 않아서 개인 농장으로 변한 곳도 많다. 종교적 내용을 지닌 공동체 이외에는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공동체는 아직 소수이다. 왜 그럴까? 원인을 나의 내부에서 찿을 수는 없을까?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일려면 지금의 내가 획기적으로 변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 되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건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모습도 다르고 성격도 변하고 친구관계도 달라지고 사는 방식도 이질적인 것이 공동체적인 특징이라면 그건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생태공동체는 나한테 원래 없는 새로운 영역의 추구가 아니다. 그것은 원래 내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나를 회복.발견하는 과정이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되찿는 것과 같아서 많은 기쁨이 있다. 잃어버렸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집 어딘가에서 발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따라서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나를 탐구하는 과정이며 즐겁고 행복한 삶으로의 복귀를 뜻한다.
과연 내안에 더불어 살고자 하는 요구가 있는가! 개인적이고 경쟁하면서 사는 삶보다 공동체적인 요구가 더 내 안에 내재하는 요구인가.
과연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공동체의 진정한 출발은 무엇인가. 가정 공동체부터 진지하게 검토해 보자. 나와 아내와 아이들과는 과연 공동체적 관계가 형성되었는가. 무엇이 공동체 관계를 가로 막고 있는가. 생태 공동체의 첫 출발은 가정이 될 것이다. 귀농하기 전 가정공동체의 건강한 자리매김이 생태 공동체의 진정한 시작이 될 것이다.
농사짓고 먹는 것에서 어떻게 해야 내 안의 요구가 될 것이며 더불어 사는 기초가 될것인지 탐구해 나가자.
집짓기,교육문제,문화, 의료...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본성으로서 생태적 공동체성을 발견해내는 것이 가능한가? 또 공동체적으로 살면 행복할 것인가?
생태적인 삶으로 가는 생활 방식은 나와 타인과 작물을 포함한 자연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다.
내 몸과 대화를 해보자. 내 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몸이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해야 평온하고 자연스런 상태인지. 내가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것이 진정 내 몸이 원하는 것인지 .
내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기적인 사고가 아니다. 내 몸을 떠나서 내 사고가 따로 놀게하는 것, 내 몸이 아니라 이기적인 나의 즉물적인 요구에만 대응하는 방식이 오히려 이기적인 방식이다. 사실 지금의 나라고 여기는 이기적 자기를 나라고 생각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귀기울이고 익숙해지면 생태적 삶은 어느덧 자신의 삶으로 정착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내 몸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생태적 삶의 기초다. 편의상 타인 이라고 할 뿐 타인이라고 해도 나와는 뗄레야 뗄 수 없이 연결된 한생명.우주생명인 사람을 타인이라고 할 뿐이다. 내가 생태적으로 산다고 해도 타인이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삶도 생태적 방식을 실현 할 수 없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 역시 내 삶에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공기와 물, 농사와 생활 방식,교육과 문화,주거와 먹거리 이 모든 면에서 이웃과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 몸은 한 지역에서 놀지만 사고는 전지구적으로.우주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물을 포함한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가장 낯선 문제일 수 있다.
자연을 우리 생활에 필요한 공급원 쯤으로 여기는 사고가 현대 사회에 팽배해 있는 현실에서 자연을 우주생명체로 대할 수 있을까?
작물은 우리에게 먹거리를 준다. 작물은 자신의 몸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데 기꺼이 희생한다. 작물은 몸의 변화로 사람과 다른 동물들의 생명을 유지하게끔 작용을 하는데 우리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나의 능력의 결과라고 여긴다. 쌀에서 햇볕을 보고 쌀을 도정하는 사람과 도정기계의 원재료인 철과 동력원인 전기,전기를 일으키는 물과 원유를 봐야 한다. 밥을 먹으면서 중동의 사막과 아랍인들의 노고,원유를 나르는 배와 배를 만드는 재료인 나무와 그 나무를 성장케 하는 물과 햇볕... 다시 돌고 돌아 쌀 농사를 가능케 하는 이 자연으로 돌아 온다.
작물과 대화를 하자. 영성이 깨인 사람이 아니라도 최소한 콩대를 보고 콩의 고마움을 온몸으로 느끼자. 콩의 자연스런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지- 내가 콩이 되어 보자.
땅과 물을 살리자는 지구적인 노력은 땅과 물을 내몸과 동일시할 때만 진정한 치유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내몸의 자연 치유력을 믿듯이 땅과 물을 병들게한 인간의 행위만 바꿔도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해갈 것이다.
내 가족을 믿듯이 자연을 끝까지 믿는 마음은 자연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된다. 마치 다른 사람이 나를 끝까지 믿어줄 때 내가 나의 온전한 역할을 하듯.
자연을 믿지 못하는 행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해 농사가 안되면 실망하고 다른 일을 찿는 사람들,남과 비교하여 더 많은 소출에 급급한 마음, 땅의 자기 치유력을 믿지 않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치는 행위,땅을 살리려는 노력보다는 편하고 좋은 땅을 찿아 전국 각지를 누비는 귀농자들.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는 행위를 잘 살펴보면 공통된 것은 사람과 자연을 믿지 못하는 마음과 종국에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근저에 자리하고 있다.
나를 믿는 마음과 자연을 신뢰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마음은 둘이 아닌 것이다.
생태적인것과 공동체적인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앞에서 보았듯이 진정 공동체적일려면 생태적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진정 생태적인 삶을 살려면 더불어 살아야 한다. 생태계는 더불어 공존하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두 말은 실로 동어 반복일지 모른다. 어려운 것은 마음의 원 자리를 찿는 일이다.
생태 공동체의 정해진 형태와 방식은 없다. 미리 주어진 형식도 없다. 사람 마다 다 다르고 주변 여건이 다 다르며 자연의 파괴 상황도 다 다르기에 각각의 준비와 여건에 맞게 형태와 방식을 정하면 된다. 어떤 완성된 형태를 가정하고 그 틀에 맞추는 방식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완성된 형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도 완성된 정형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무엇보다 내안의 본래 요구에 충실해야 한다.
단번에 무소유의 생태 공동체를 일궈 낼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접근해 갈 수도 있으며,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조건에서 주변 여건에 맞게 형식이 정해질 수도 있으며, 형식이 따로 없이 내용적으로 생태 공동체를 실현할 수도 있다. 또 이러 저러한 양식이 혼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생태 공동체는 사람의 본성적 요구에 충실한 것이기에 누구라도 부담없고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것이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사람들의 내부가 주변여건에 흔들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선뜻 같이 하지 못할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농촌의 주민들도 자신의 내적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농촌에서 기존의 관행적인 농법과 생활방식으로는 더 이상 인간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의 요구에 응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폐한 농법으로는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없다.
생태 공동체는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뜻맞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자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두번째는 기존 마을의 구성원이 되어서 그 마을을 점차 생태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형식일 것이다. 첫 번째는 좀더 빠르고 더 생태적이며 더 실험적이다. 두 번째는 느리게 진행 되지만 더불어사는 법을 더 대중적으로 익혀나가며 점진적으로 생태 공동체로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태 공동체들은 계획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주위 마을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상호 영향을 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도시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계획적 생태 공동체를 만들어 마을과 교류하는 이 방식이 더 잘 와닿을 수 있다.
어찌됐든 내안의 요구, 내 내부에 난 길을 따라 간다는 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곤란에 부딫친다. 나부터 내 내부의 요구에 귀기울이는 습관에 익숙해지자.
왜 생태공동체 얘기만 나오면 농촌만 언급이 되는가. 도시에서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이 불가능한 것일까?
답은, 가능하지만 농촌 보다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더욱 개인주의화 되었고 속도 경쟁적이며 편리함과 효율이라는 측면이 훨씬 강조되는 삶이 보편화 되어 있다. 농촌도 큰 차이는 없지만 도시는 문명화로 인해 생태는 더욱 회복 불능한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도시를 없애지 못하는한 우리는 도시에서 생태공동체를 일구어야 한다. 녹색 공간 한 평 마련하기 힘든 도시의 빌딩 숲,매연과 오염된 물, 바쁜 일상 속에서 갈갈이 파편화된 사람들의 군상,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우리는 더불어 사는 생태 공동체의 단초를 마련하고 그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아파트 공동체 내에서 녹색 공간을 넓히고 하천을 살리며 시멘트 문화를 건강한 흙의 내음이 어울리는 환경으로 바꾸고, 자동차를 줄이고 대중교통이 주가 되는 도시,자동차와 시멘트 포장을 없애고 높은 담벼락을 허물며 아이들이 흙장난 하는 골목 공동체, 농촌과의 직거래 영역을 넓히며 도시 텃밭 농사의 확산을 통한 도시농업 운동... 생태 도시.도시 생태 공동체의 기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쿠바나 브라질을 비롯한 도시 생태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선례들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좋은 사례는 부산 ‘물만골 공동체’를 들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발걸음을 떼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농업의 위기,생태의 위기는 도시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시의 생태 공동체를 버려두고 농촌의 생태 및 공동체를 운운한다는 것은 우리의 내부 요구 반 이상을 방치하는 것이다.
원칙은 같지만 더욱 집단적이고 더욱 집중적인 힘이 요구된다. 도시가 우리 내적 힘을 소진 시키는 힘이 강대하면 할수록 우리의 노력은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 도시에는 생태와 환경을 표방하는 시민 단체들이 많이 있기에 인적 자원은 더 풍부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생태 공동체 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다. 국내외의 여러 사례는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시작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실정과 전통 ,사람들의 내적 요구에 기반할 때에만 우리 사회의 대안 운동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생태공동체는 어떤 형식을 가지고 모여 살아야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순간 이미 우리는 더불어 사는 생태적 삶의 한 길을 걷고 있다. 내 마음속에 난 길을 따라 갈려 하는가 하는 것만이 남은 문제다.
** 이 글은 2005년 4월 15일 불교 귀농학교에서 강의할 주제에 대한 안내문 형식으로
첫댓글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리함과 풍요에 너무 익숙해 버린 나머지 자연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방식은 나와 거리가 먼 낯선 이야기처럼 느껴졌었지요. 울님의 말처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보아야 되는데 부담스럽고 불편한 환경을 빙자해서 자연을 터부시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가득했었던 것 같네요.
첫댓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리함과 풍요에 너무 익숙해 버린 나머지 자연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방식은 나와 거리가 먼 낯선 이야기처럼 느껴졌었지요. 울님의 말처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보아야 되는데 부담스럽고 불편한 환경을 빙자해서 자연을 터부시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가득했었던 것 같네요.
이 글처럼 생태 공동체의 진정한 시작은 가족 공동체의 건강한 자리매김이라는 말에 특히 공감하구요. 생태적인 삶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길인 동시에 모두가 더불어 사는 길임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
산소리 식구들도 자연으로 들어가 모두 농사짓고 살았으면 좋겟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