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켄재활센타는 나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이들이 자립을 위해 수공예를 만들기도 하고 카드, 농사 등을 하고 있다. 가격은 일반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들이 만든 물품을 사주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사가 1960년부터 1964년까지 그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더욱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치앙마이 시내에서 남쪽으로 삥강을 따라 좁을 길을 4키로 정도 내려가면 꺼끌랑(중앙섬)이라는 조용한 섬이 있다. 마름모 모양으로 65헥타아르 정도의 면적을 가진 섬은 삥강의 동쪽 제방의 저지대와 크림 색깔의 벽돌과 치장벽토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치앙마이의 멕켄 재활센타로 들어가는 입구로 한때는 나병 혹은 한쎈씨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었으며 나병 환자들을 위한 수용소였으며 오늘날에는 현대적인 재활센타의 자리로 많은 잔디와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쌓여 있다.
장로교 선교사인 다니엘 멕길버리가 처음에 보트를 타고 오가면서 벵갈의 보리수 나무를 그 섬에 심었을 때 그 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민간 설화에 의하면 이 당시에 이 섬은 치앙마이의 통치자가 후대에 그의 아들에게 물려 주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행운의 코끼리를 키우고 있었다. 불행이도 이 코끼리는 애완용이기는 하였지만 매우 난폭하고 사나웠다. 배가 고프면 코끼리는 닥치는대로 곡식 창고나 그를 돕는 사람까지도 해쳤다. 심지어는 그가 알고 있는 나락을 저장해놓은 창고마저도 파괴해 버렸다. 결국 코끼리는 그 섬에서 추방되었다. 그때 이후로 시내지역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을 차단하게 되었고 밭과 정원 등은 파괴된 채로 버려졌으며 30년 이상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개척자인 다니엘 멕길버리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치앙마이에 미국 장로교 선교부 지부인 라오 선교부를 오픈하였다. 이후에 미국 아이오와 주의 스코치 그로부에서 온 의사인 제임스 멕케인이 1889년 태국 북부의 수도인 치앙마이에 도착하게 되어 환자들을 치료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불치병으로 알려진 나병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897년경에 그는 방콕에 있는 태국 정부에 시 외곽의 조금은 떨어진 지역에 나환자 요양원을 설립해 줄 것을 허락해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지금은 붉은 코끼리의 폐허로부터 자유로와진 꺼끌랑(중앙섬)이 가장 적합한 장소로 제시되었다. 치앙마이 왕자(당시의 군주를 그렇게 불렀음)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코끼리 주인은 멕케인 박사에게 나환자 요양원을 위해 그 섬을 제공하였고 그는 기쁘게 받았다. 1908년에 멕케인은 자신의 수중에 있던 많지않은 재정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9명의 초기의 나환자들과 함께 섬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고 드디어 멕케인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 나병을 연구하던 멕케인 연구소는 매우 조그맣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환자들과 재정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멕케인은 태국 북부 지역과 그 인근 지역에서 나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였으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나병연구소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태국내의 나병환자들은 물론이고 라오스와 중국 남부 지역인 쿤밍에서 꺼 끌랑으로 모여들었다. 이와 동시에 이 위대한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들은 치앙마이 지역 거주자로부터 시작해서 태국 왕족들과 귀족들, 중앙 정부와 지방정부 관리들은 물론이고 국제 나병선교단체에서도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 사역을 위해 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병원과 병실, 클리닉, 나병환자들의 주택들, 행정실, 교회 등이 전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황폐했던 섬에 모습을 드러냈다. 1927년에는 태국왕인 라마7세 쁘라차띠뽁왕이 치앙마이를 방문하자 꺼끌랑으로부터 치앙마이에 이르는 길이 새롭게 정비되어 태국의 다른 지역과도 좀 더 쉽게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멕케인의 헌신적인 공헌으로 말미암아 나환자 치료에 있어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930년대 나환자 연구소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열대 의학을 연구하는 극동 회사로부터 모본이 되는 기관으로 인정받아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멕케인 박사의 나병에 대한 노력이 진전을 이룰수록 그 섬의 모습도 달라졌다. 예전의 보리수 나무들은 여전히 잘 자라고 있지만 이제는 커다란 레인트리가 잎이 많은 긴 가지들을 뻗어서 잔디와 정원을 덮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채소를 재배할 수 있도록 키친 가든을 만들어서 요양원에 자신들이 손수 재배한 채소들, 허브와 양념류들을 공급하고 있다. 기관의 행정실, 병원의 병동들, 접견실, 클리닉 등은 섬의 남쪽 지역에 건립되었다. 요양원은 나병으로 인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북쪽으로는 커다란 망고, 람야이, 린찌나무 등의 과일나무를 심어 과수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병요양원의 규모가 커지고 명성이 늘어나자 삥강의 동쪽 제방을 중심으로 다리를 건설하여 확장하였다. 그곳에 마을 주민들과 나병환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건축하였다.
1931년 멕케인 박사는 태국인들의 최대의 영예인 하얀 코끼리 훈장을 수여받고 은퇴하였다. 그가 헌신적으로 일했던 원장 자리는 치앙마이에서 1893년에 태어났고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의 아들 휴 멕케인(Hugh MvKean)이 대신하였다. 그의 아들은 2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재활원의 책임을 맡으며 꺼 끌랑의 리서치 사역을 감당하였었고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태국을 떠나 인도로 피신하도록 하였다. 그는 1942년에 미랏병원에서 죽었다. 계속하여 그를 기리고자 그를 기념하는 기념홀이 꺼끌랑의 여자들 병동 앞에 세워졌고 그를 기념하는 흉상도 제작되어 행정실 앞에 서 있다.
은퇴한 후 그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간 제임스 멕케인은 89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그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멕케인 가족들과 멕켄재활센타와의 연합의 관계는 끝났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과 선한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40여년간 나병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로 말미암아 태국에서는 한때 불치병으로 알려졌던 나병은 퇴치되었다. 하지만 아직 멕켄재활센타는 남아서 이웃나라인 라오스와 미얀마에서 나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돕는 것은 물론이고 환자들을 위한 치료법과 나병에서 치유받은 노인들이나 나병으로 인한 장애인들을 위한 거처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멕켄재활센타는 수십년간 장애인들을 위한 치료법과 재활교육을 지속적으로 선도하고 있다.
멕켄재활센타의 우선 순위와 목표는 변경되었을지 모르지만 초창기의 병원을 설립할 당시의 정신은 좀 더 나아진 건물과 잘 가꾸어진 정원안에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꺼끌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건축물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오래된 장치들로 치장한 하얗고 크림색의 치장 벽토의 건물들은 태국 북부 지방의 양식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바닷가의 양식이다. 분위기는 치앙마이보다는 페낭이나 말라카나 싱가폴과 더 가깝다. 길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의 보호를 받으며 고색창연한 빌딩과 빌딩 사이의 오래된 연꽃으로 덮여있는 연못을 거니는 경험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치앙마이에서 말레이시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재활센타로 들어가는 낮고 노란 페인트로 칠해진 다리를 건널 때이다. 제임스 멕케인 박사의 흉상이 행정실 건물 앞의 잘 관리된 정원에 서 있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포장된 좁은 도로는 재활센타 전체를 돌아볼 수 있도록 남쪽으로 길이 나있다. 가장 역사적인 건물은 꺼끌랑의 남쪽 끝 근처에 있는 놀랄만한 멕클라나한 기념홀로 트럼펫을 든 코끼리들이 네 모퉁이에서 받처주고 있다. 조금 더 가면 멕케인 병원교회가 있는데 교회는 태국 북부 지역에서는 독특한 형태로 치장 벽토와 벽돌로 날아가는 부벽으로 만들어졌다.
북쪽을 처다보면 현대식 병원을 볼 수 있는데 성같은 물탑 모양 혹은 19세기 카메룬의 산지의 건축물 모습인데 오래된 나무 가지로 둘러쌓여 있다. 서쪽을 따라 걷다보면 118년 전에 다니엘 멕길버리가 예전에 약을 배포하던 시약소가 있던 지점에 다다를 것이다. 그곳에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가 있는데 아래에 돌에 새긴 그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