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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대한 경이로운 해석!
(5) 덤으로 깨달은 찜찜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던 것들!
♣ 로마서 7장 9-10절은 정말로 바울의 유아 시절과 무관한가?
이것은 2024년 6월 4일 새벽에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인 6월 23일 주일설교를 마치고 수양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깨달은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것을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파헤쳐도 해석할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른 구절이나 단락을 이해해야 비로소 해석이 가능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오랫동안 궁금해하고 미제로 있었던 다른 구절이 갑자기 이해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설명한 5가지도 그렇지만 특별히 로마서 7장 9-10절이 그중 하나입니다.
저는 전에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라는 책에서 이 구절들이 선악을 구별할 수 있기 전 바울의 어린 시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저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고, 그것이 맞든 틀리든 그 자체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표현들이 이 해석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다시 로마서 7장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견해 자체는 옳지만 이 단락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무능력, 즉 율법으로는 죄를 이기거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영이 몇 살까지 살아 있어 천국에 가고, 언제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대로 죽으면 지옥에 가는가?'가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어린 시절과 연결시키지? 이 단락의 문맥과 동떨어진 것이고 뜬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구절들을 잠정적으로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로마서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것임이라."
이 구절의 "죄가 죽은 것임이라"는 율법을 통해 탐심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면 탐심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에 착안해서, 저는 9절의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표현이 전에는 상대적으로 내맘대로 할 수 있었고 내가 살았었는데, 계명을 통해 탐심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죄는 살아나서 힘을 얻고, 나는 전보다 무력하게 된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죄는 살아나고'는 죄가 강하게 활동하게 된 것을, '나는 죽었도다'는 이전보다 마음대로 행할 수 없는 자유와 힘이 위축되고 무력하게 된 것을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이 표현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당히 그럴듯하고 일리가 있지요!
그러고 있는 와중에, 본문의 해석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오래전에 7장 7-25절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캐치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나아갔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경험이긴 하나, 7-13절은 율법하에서의 초기의 경험이고, 14-25절은 그 이후의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율법의 무능에 대한 것인데, 왜 어린 시절에 대한 것이라고 하느냐?'며 이 견해를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대분의 학자들과 전에 제가 이 견해를 거부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새 해석이 완성됨에 따라, 저는 7-13절이 14-25절과 달리 율법하에서의 초기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 후 서서히 이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과 마찬가지로 이 단락은 율럽 아래 있을 때의 바울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를 30세 전후 바울이 성장한 때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었고, 어릴 때부터 유대교에서 성장했다.
빌립보서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 아래 있었고, 디모데처럼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탐심이 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어린 시절에 일어난 일일 수 있다. 또, 새 해석에 의하면 이 단락이 율법하에서의 초기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태인데 웬 어린 시절?' 이런 생각 때문에 이 견해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개연성이 있고 거부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이 단락이 율법의 무능력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실제로 어렸을 때의 경험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그 해석이 가능한 것 아닌가? 새 해석을 통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는 주제가 서로 일치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그때의 경험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해석이 옳은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구절들을 해석하면서 왜 엉뚱하게 아담이 나옵니까? 그 이유는 아담이 아니면 이 구절들과 같은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을 깨닫기 전에 영적으로 살아 있던 사람이 아담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소환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 해석 때문에 이 구절들을 바울의 어린 상태로 보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또, 바울의 어린 시절도 이 구절들에 나오는 표현들과 조화가 됩니다. 아담 못지않게, 아니 아담보다 더 이 구절들과 조화가 됩니다. 이처럼 본문의 새 해석을 통해서 보면 서로 관계가 있고,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이제 그 해석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 차 안에서 이것이 맞는 해석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이것이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이해하는 학자들이 거의 전무합니다. F. F. 브루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서전적인 해석이 과거에는 인정을 받았으나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어떤 저술가는 그러한 해석을 가리켜 '터무니없는 해석들을 소장해둔 박물관 속으로 추방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외면당하던 해석이 신뢰할 수 있는 옳은 해석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그 결과, 로마서 7장 전체에 대한 획기적인 해석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본문에 대한 초유의 해석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7-13절에 대한 획기적인 해석까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갑절로 경이롭고 감사한 일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지금부터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라는 책에서 로마서 7장 9-10절에 대해 설명한 것을 수정 보완해서 여러분에게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로마서 7:8-9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누구의 경험이냐? 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학자들의 여러 가지 견해를 종합해보면, '나'는 1. 아담, 2. 이스라엘, 3. 바울 셋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은 9절에 나오는 네 가지 진술입니다.
첫째,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둘째, "계명이 이르매"
셋째, "죄는 살아나고"
넷째, "나는 죽었도다."
우리는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이와 온전히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시금석에 비추어 세 후보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 아담
다수의 학자들이 이 구절들에 나오는 '나'가 아담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케제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9-11절에서) 묘사되는 사건은 엄밀하게 아담만을 언급할 수 있으며 이 본문에서 아담에게 들어맞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아담에게만 들어맞는다."
던도 9절에서 아담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거의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계명이 오기 전에 생명이, 계명이 온 후에는 죄와 사망이 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지요!
우리는 아담과 바울의 생애에서 '무죄, 계명, 범죄, 사망'이라는 똑같은 유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존 스토트는 그 외에도 공통적인 여섯 가지 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 ... 살았던 것'은, 낙원에서 무죄한 상태로 살았던 시대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계명이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명하신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셋째로, '죄가 살아나고 또한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는, "죄(뱀)가 인간이 있기 전부터 동산 안에 있었지만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지기까지는 인간을 공격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죄가 자신을 '속였다'는 바울의 불평(11절)은 마귀가 자기를 꾀었다는 하와의 불평을 상기시킵니다.
다섯째로, 바울이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된 계기는 탐심에 대한 금지명령이었는데(7-8절), 아담과 하와의 죄는 이와 비슷하게도 잘못된 욕망이 불러온 죄였습니다.
여섯째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은 바울에게나(9, 11절) 아담에게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로마서에 나오는 율법 - 죄 - 사망이라는 연쇄적 순서가 창세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 단락에 나오는 '나'는 아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먼저, 바울은 창세기 기사를 인용하거나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계속 '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아담을 예로 들고자 했다면 '아담'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존 스토트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분명 창세기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두 기사에서 똑같이 나오는 말이라고는 '계명', '속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식적으로 아담과 하와를 암시하고 있는지는 훨씬 더 모호하다. 그는 그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이 두 사람(아담과 바울)의 전기가 유사하다는 것뿐이다."
또, 더글라스 무도 로마서 7장 전체에서 '율법'(노모스)은 모세의 율법인 토라를 가리키며, 따라서 그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아담에 대해 언급한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면서 아담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왕 노릇 하고 있는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범죄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가 그 안에서 왕 노릇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죄가 계명을 이용해서 범죄하게 한 경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나'가 아담이라는 견해는 그럴듯하지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B) 이스라엘
무는 이 구절들에 나오는 "나"가 이스라엘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무도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만이 "법이 없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고, "계명이 이르매 ... 나는 죽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이후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기 전에는, 오직 5장 13절의 의미, 곧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의미에서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살았다'고 칭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월절 때 각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기 자신의 역사로 재현했듯이 "유대인 각자가 자기 민족의 역사와 생생한 '법인적'(공동체적)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런즉 바울도 자신을 율법을 경험하던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이스라엘과 연대한(결속되어 있는) 바울을 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무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절과 후절에 그들에게 사망이 왔고 사망이 왕 노릇 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므로 이 견해 역시 바른 것이 아닙니다.
C) 바울
이제 남은 것은 바울뿐이고, 저는 이 구절의 "나"가 바울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그런데 "나"라고 썼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누구겠습니까? 바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바울입니다.
그러나 더글라스 무는 이 구절들의 표현들이 아담에게만 어울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가 아담이라는 해석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들의 표현들은 바울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새 해석에 의하면, 7장 7-13절은 율법하에서의 초기의 경험을 나눈 것이고, 14-25절은 율법하에서의 지속적이고 현재적인 상태를 회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13절에 대한 해석이 이 구절들이 책임질 수 있는 나이에 대한 것이라는 견해와 서로 조화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담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우리는 이 구절들을 바울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에 대한 이런 해석은 의미가 큽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대한 저의 해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질문의 답을 제공해줍니다. 바로 갓난아기를 포함해서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답을 보여줍니다.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존 스토트도 이 구절들을 바울의 소년 시절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순진무구할 때 즉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살았었다.' 그가 열세 살이 되어, '계명의 아들'이 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성인식을 했을 때 '계명이 이르렀다.' 그리고 그때 그의 '양심의 새벽'이 찾아오면서 '죄는 살아났다.' 그리고 사춘기의 반항으로 인해서 그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즉 그는 '죽었다.' 이것은 그럴듯한 각본이다.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자란 유대 소년에게 '법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와 달리 그는 거의 태어날 때부터 계속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살았다'는 말을, 그가 의식적으로 율법의 정죄 아래 이르기 전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실제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다드(Dodd), 낙스(Knox), 바렛(Barrett), 미첼(Michel), 브루스(Bruce), 건드리(Gundry) 등입니다. 그중의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C. K. 바렛은 이 구절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릴 적의 순수함 가운데서 있었던 바울은 살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6:23), 그 초기 시절에는 죽음을 초래하는 죄가 없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 어린아이와 하나님 간의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교감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유대인 소년이 '계명의 아들'(바르 미츠바)이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이제 법 앞에서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법적 책임과 함께 소년의 경험에 죄라는 것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의 시야에 금지된 세상이 놓인 것이고, 그는 그곳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어 했고, 자신의 삶에 달갑지 않은 규제를 놓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독립하고 싶어 했다. 이것이 죽음이었다."
또, C. H. 다드는 이 구절들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바울이 말한다. 이 사실을 최대한 표현하려면 영어에서 '살았다' 보다 더 강한 단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살았다'는 표현은 단지 시간을 보냈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살아 있었다' - '나의 생을 스스로 살았다.' 즉 모든 능력과 기능을 다해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 것이다. ... 진학하기 전에, 부모의 권위에 압도당하기 전에, 골칫거리인 양심이 깨어나기 전에 말이다."
또한, F. F. 브루스는 이 구절들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이 죄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런 원리가 바울 자신의 경험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바울은 옛날에 죄의식 없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율법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평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옥의 그늘이 자라나는 소년 위에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바울이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스스로 짊어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마 '계명의 아들'(bar mitzwah)이라고 하는 의식을 계기로 하여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의식의 직전과 직후 어떤 기간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이 구절들을 같은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라는 책에 보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는 흥미로운 장이 있는데, 그곳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성경은 거듭난 사람들만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어린 아기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어린 아기는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로 갈까요?
나의 어머니는 맏딸이었는데, 어머니의 몇 살 아래 남동생이 막 아홉 살이 될 무렵에 죽었습니다. 때는 1900년 이전이었고 당시 어머니의 가족은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드레이크(Drake)라는 이름을 가진 외할아버지는 시골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농장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
어린 어니스트(Erne: 어머니의 남동생)는 물 침례를 받은 적이 없고, 어떤 종류의 믿음의 고백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죽던 해에 외할아버지는 집의 한쪽에다 목화를 심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상점은 구식 시골 가게였는데, 집의 다른 쪽에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토요일에는 항상 정오에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점심을 차리셨고 그들은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다시 열한 살이었고 어니스트는 막 아홉 살이 될 무렵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창밖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어니스트야, 네가 마음으로 원하던 것을 갖게 될 거야. 우리는 월요일 아침에 목화를 딸 거란다.'
어니스트는 '아니요, 엄마, 저는 아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니스트는 늘 착하고 순종적인 아이였기에 그가 '아니오, 저는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모두 놀랐습니다.
'아가야, 왜?'라고 외할머니가 물으셨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말하니?'
어니스트가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저곳에 있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어니스트의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을 때, 어니스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로 갔습니다.
어니스트가 한 번도 어떤 종류의 믿음의 고백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늘 외할머니를 괴롭혔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니스트의 구원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다녔던 교회에서는 물 침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니스트는 한 번도 물 침례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니스트의 영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향에 언제 갈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어니스트는 어디로 갈지를 미리 그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의 영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었습니다.
조만간 아이는 책임질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합니다. 보통은 아홉 살에서 열두 살까지가 해당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 더 어릴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지적 능력, 환경, 영향력, 특히 자라온 배경에 따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선하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해석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 옳다고 믿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우리가 다루고 있는 구절들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간증을 소개한 후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로마서 7:9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을 말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바울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후로도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전에 율법 없이도' 영적으로 살아 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9은 이어서 다음고 같이 말합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계명이 왔을 때 바울은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살아서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율법 없이도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 오자, 즉 그가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알게 되자 죄가 살아났습니다. 바울이 말한 '죄가 살아났다'(sin revived)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의 본성(어떤 사람들은 '원죄'라고도 함)이 항상 그의 육신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죄의 본성이 살아나자 바울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다시 말해, 그가 그의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언제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홉 살 때였습니다. 계명이 오자, 죄가 살아났고, 나는 '죽었습니다.' 이 말이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용어에 있어 혼란을 겪는 부분, 특별히 '영적인 죽음'이라는 어구와 매우 혼동하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어구를 들을 때 그것을 육체적인 죽음(physical death)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한 말의 의미는 그의 영이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영 또한 아홉 살부터 내가 구원받은 열다섯 살까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지 못했습니다. 내가 거듭난 순간, 나의 영이 다시 하나님께 살아났고, 부르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구절들이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의 계명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방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성장하면서 이성이나 양심이 발전하고 제 기능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아니어도 이성과 양심과 도덕률을 통해 죄를 깨닫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됩니다(롬 2:14-16). 그래서 전에는 영이 살아있고 천국에 가지만, 그 후에는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전환점이 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 인류에게 해당이 되는 참 진리입니다.
한편, 제가 이것을 깨닫고 설교로 준비하기 전 몇몇 목회자들과 나눴을 때, 허작 목사님이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것은 참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난제인데 ... 이것이 이렇게 풀리다니 ... 이것은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다윗의 아들의 죽음을 소재로 아기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쟁론이 되곤 하는 신학적인 난제입니다! 예전에 저도 연구를 해봤는데, 신자의 자녀들이 죽으면 천국에 가고 불신자의 자녀가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론도 있었고, 지옥에 간다는 것도 있고, 천국에 간다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 참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난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난제라고 생각할 뿐, 실제로는 난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입신 간증들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입신간증들 중에 이에 대한 간증이 엄청 많습니다. 불신자지만 어떤 아이는 죽어서 천국에 가 있고, 어떤 아이는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에 지옥에 가 있는 것을 보았다는 간증이 그것입니다. 또, 회교 국가들에서 어른들은 천국에 온 사람이 거의 없고 일찍 죽은 아이들만 천국에 와 있는 것을 본 간증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죄는 안 짊어지고 가셨나요? 책임질 수 없는 나이의 어린아이들의 죄를 안 짊어지셨나요?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전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런데도 다 구원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에 반항하므로 헛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완악하고 완고하고 강퍅해서 믿지 않거나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보내셔서 구원하기 원하시는데 모두 구원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분간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은 자기 선택에 책임질 수 없는 나이입니다. 때문에 그 아이들은 구원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야지 왜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절대주권' 운운하며 누구는 구원받도록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다는 잘못된 교리의 영향으로 생각이 삐뚤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의 구원 문제는 실제로는 난제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몸의 속량이 그것입니다. 몸의 속량은 자유의지로 복음과 진리에 바르게 반응한 신자들에게 일어납니다. 즉, 참 신자들에게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만물이 자유케 되는 것은 다릅니다. 모든 자연만물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자연의 경우, 꼭 그 나무와 그 동물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원하지만 그들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은 회개하고 믿는 그 사람이 영화가 되지만, 동식물은 그 동식물은 아니지만 아무튼 모두 영광의 자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도 그와 같은 상태입니다. 도덕적인 책임이 없기 때문에, 마치 식물 같은 상태이고 동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까? 조건이 똑같지 않나요. 그런데 왜 동식물은 안 버리는데 그것보다 무한히 귀한 어린아이는 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은 천국에 갑니다."
마지막으로, 이 해석에 근거해서 몇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신명기 1장 3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묻겠습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신1:39)에게 죄를 물을 수 있습니까? 세상 법정에서도 아주 어린 아이들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아이들은 다릅니다. 때문에 어려도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을 피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말로 전하기 어려우면 『당신의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와 『노후준비보다 중요한 사후준비!』를 비롯, 전도용으로 쓴 제 책들을 돈을 주어서라도 꼭 읽게 하십시오.
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약을 분별할 수 없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반드시 자기가 한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회개하고 돌이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회교국가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 태어난 저와 여러분도 믿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어릴 때 죽지 않은 것이 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릴 때 불치의 병이나 끔찍한 사고로 죽지 않은 것이 자기에게 화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건강하고 오래 살아도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이 가장 큰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 깨달을 때, 욥이 생각났습니다. 욥은 큰 고난들을 당하면서 어려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했습니다.
욥기 3:11-12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런데 욥이 당한 고난이 아무리 커도 지옥 형벌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로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욥보다 7배나 더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욥의 탄식은 일시적이었지만 영원히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곧, 어렸을 때 미혼모에게 버려져서 쓰레기통에서 죽지 않고, 불이 나서 타죽지 않고, 질병이나 교통사고나 동물에게 물려 끔찍하게 죽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며 영원히 지옥 불 속에서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똑바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편, 달랑 혼자만 지옥 불에 던져지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 자녀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이웃도 지옥에 가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 날마다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