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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9년 봄호.
【김현경의 회고담 8】
김수영 산문 읽기 ․ 1
일시 : 2019년 2월 20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선생님을 뵌 것은 물론이고 대담을 나눈 시간이 아주 많아졌네요. 단행본으로 대담집을 묶는 일을 앞두고 있는데 귀중한 말씀이 무궁무진하니 계속 들어야 할 것 같네요. 오늘은 김수영 시인의 산문에 나오는 상황들에 대한 말씀을 들어볼까 해요. 우선 「낙타과음(駱駝過飮)」에 대해서 여쭈어볼게요. 이 산문에는 Y라는 사람, Y라는 사람의 애인인 림 양, B양,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 등이 나와요. 혹시 아시는 분들인가요?
김현경 : 나하고 재회하기 직전에 쓴 작품이에요. 김 시인은 나를 만난 뒤에는 방랑을 하지 않고 180도로 생활이 바뀌어 완전한 가장이 되었어요. Y는 의사며 신문기자 등이 모이는 장소에 있었던 사람인가봐요. 신문사의 사람으로 보여요. B는 나하고 이화여대 동창인 이병복의 동생이에요. 이병복은 권옥연 화가 부인이에요. B는 이름이 이00인데, 김 시인한테 호의를 가졌어요. 그의 아버지는 식량공사 총재였는데 육이오 때 납북되었어요. 이호 장관의 조카들이 되기도 해요. B는 충무로에서 <싸라>라는 아동복 전문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과 인연이 되지는 않았어요.
맹문재 : 이 산문에는 후기도 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아요.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와는 죽마지우이다.” 등장하는 소녀는 누구인지요?
김현경 : 김 시인과 어렸을 때부터 어울린 친구 중에서 고광호 씨가 있는데, 그의 여동생에요. 이름이 고00이에요. 경기고녀를 나와 일본 여자대학, 즉 메지로에 있는 메지로 대학으로 유학을 갔어요. 김 시인이 그 여성을 좋아했는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던가봐요. 그래서 김 시인이 일본에 가서도 한 번도 못 만났대요. 그 여성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갔어요. 김 시인이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했는데 가세가 기울어 그 여성에게 호감을 못 받았나봐요.
김 시인은 어렸을 때 고광호, 최한검 씨 등과 잘 어울려 다녔어요. 최한검 씨는 최남선 소설가의 둘째 아들이에요. 큰아들인 최한웅은 서울대 의대 소아과 과장을 지냈어요. 육이오 때 월북했어요. 우리 큰고모가 최남선 소설가의 형이 되는 최홍선 씨 부인에요. 을지로 4가 전찻길 바로 옆에서 한의원을 운영했어요. 최남선 소설가의 동생인 최두선 씨는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지요. 최홍선 씨가 김 시인이 돌아가시자 조문을 왔어요. 조각보를 전시하고 그림도 그리고 수필집도 낸 이기옥 여사와도 잘 아는 사이에요. 이기옥 여사의 남편이 알레르기학계의 명의인 강석영 박사에요. 여사의 아들은 강홍빈으로 건축을 전공했는데 서울부시장과 서울 역사박물관 관장을 역임했지요. 원효 연구의 대가인 이기영과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이 여사의 오빠들이에요. 이기옥 여사의 아버님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출판사였던 한성도서의 대표였어요. 일제 말에 고향인 황해도로 가서 상록수 같은 사업을 했어요.
맹문재 : 이기옥 여사의 가계를 살펴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부친 이종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업형 출판사인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했네요. 심훈의 『상록수』,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비롯해 당대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간행했고, 나중에는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가서 봉산농사학교를 세워 농촌계몽에 헌신했네요. 이광수의 소설 「흙」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허숭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네요. 이 여사의 할아버지 역시 구한말 조양의숙을 세우고 농촌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네요. 김현경 선생님과 이기옥 여사가 가까운 사이인 것을 새롭게 알았네요. 그런데 산문에 등장하는 낙타산은 서울 강북에 있는 것이지요.
김현경 : 그럼요. 종로구 이화동과 동숭동에서 성북구 삼선동까지 걸쳐 있는 산이에요. 그곳에서 김 시인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모이곤 했나봐요.
맹문재 : 「소록도 사죄기」를 보면 김수영 시인이 소록도를 다녀왔네요.
김현경 :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부에서 문인들을 소록도에 견학 차원에서 보내주었어요. 김 시인은 논산훈련소도 그렇게 다녀왔어요. 김종필 씨가 기획한 것이에요. 문인들에게 원고료를 주면서 견문기를 쓰라고 했는데, 김 시인은 그런 글을 쓰기 싫어했어요. 그래서 속옷을 잃어버릴 정도로 술을 엄청 마시고 왔어요.
맹문재 : 그런 사정을 알고 나니 소록도에 다녀온 뒤 두어 달이 되었는데도 르포를 쓰지 못하는 김수영 시인의 고민이 이해가 되네요. 그러면서도 순진한 소록도의 환자와 원장과 직원들, 소록도 재건에 힘쓰는 청년 군의관, 수녀들, 외국인 선교사, 어린 환자 보모 등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스하게 느껴지네요. 「요즈음 느끼는 일」을 보면 방송 원고도 썼는가보네요.
김현경 : 1960년도에는 방송국이 KBS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이 어느 날 섭외가 와서 방송국에 출연해 자유와 관계된 이러저러한 생활 얘기를 했어요. 아마 그 출연 원고일 것이에요. 김 시인이 녹음하고 와서 밤에 시간 맞춰 들었어요. 일종의 출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는 지면이 넉넉하지 않아 작품 발표가 어려웠잖아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그 글에서 “자유를 모르는 것은 속물”이라고 한 것이나, “혁명의 시대일수록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한다는 말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물부리」를 보면 김수영 시인이 담배를 물부리에 끼워 피웠던가봐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고 가끔 불만을 얘기했어요. 내가 담배 파이프를 사다 드린 적이 있어요. 담배를 물부리에 끼우면 끝까지 피울 수 있잖아요. 그래서 김 시인이 잘 사용했어요. 산문에는 박훈산 시인도 흑산호 파이프를 사용한다고 했지요. 대구 사람인데 키가 꺽다리처럼 컸어요. 명동에 김 시인과 같이 나갔다가 본 적이 있어요. 우리 집에 편지가 온 것도 있어요. 내가 김 시인의 담배도 사다드렸어요. 휴지가 없는 시절이서 손수건도 한 10장 정도씩 삶아서 다림질을 해놓았어요. 그러면 김 시인이 외출할 때 가지고 나갔어요. 술만 들면 의치를 싸야 했거든요.
맹문재 : 이 산문에는 처제가 피아노 소리 때문에 힘들어 하는 장면이 나와요. 큰아드님 공부시키는 일도 힘들어하셨고요. 시작품 「피아노」의 상황이 좀 더 이해되네요.
피아노 앞에는 슬픈 사람들이 많이 있다
동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누이
잡지사에 다니는
영화를 좋아하는 누이
식모살이를 하는 조카
그리고 나
피아노는 밥을 먹을 때도 새벽에도
한밤중에도 울린다
피아노의 주인은 나를 보고
시를 쓰니 음악도 잘 알 게 아니냐고
한 곡 쳐보라고 한다
나의 새끼는 피아노 앞에서는 노예
둘째 새끼는 왕자
삭막한 집의 삭막한 방에 놓인 피아노
그 방은 바로 어제 내가 혁명을 기념한 방
오늘은 기름진 피아노가
덩덩 덩덩덩 울리면서
나의 고갈(枯渴)한 비참을 달랜다
벙어리 벙어리 벙어리
식모도 벙어리 나도 벙어리
모든 게 중단이다 소리도 사념도 죽어라
중단이다 명령이다
부정기적인 중단
부정기적인 위협
―이러면 하루 종일
밤의 꿈속에서도
당당한 피아노가 울리게 마련이다
그녀가 새벽부터 부정기적으로
타온 순서대로
또 그 비참대로
값비싼 피아노가 값비싸게 울린다
돈이 울린다 돈이 울린다
―「피아노」 전문
김현경 : 위의 작품에서 피아노를 친 사람은 내 동생 현락이에요. 현락이는 6·25전쟁 때 수원으로 피란 가서 수원여중을 졸업했어요. 공부를 아주 잘했어요. 그런데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초등교원 양성 교육기관인 서울 사범학교로 진학했어요. 졸업한 뒤에는 바로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어요. 대부분 지방으로 발령이 나는데 내 동생은 성적이 우수해서인지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어요.
동생은 교사로 근무하면서 공부를 더 하려고 한양대 야간부 원자력학과로 진학했어요. 그런데 남학생들한테 인기가 너무 많아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어요. 가방을 뺏어가는 학생도 있었고, 심지어 혈서를 쓰는 학생도 있었대요. 교무과에 가서 얘기를 했는데도 소용이 없더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입학시험을 봐서 서강대 생물학과로 진학했어요. 그런데 신당동에서 학교를 다니려고 하니 거리가 너무 멀어 우리 집에 와 있었어요. 우리 집 큰아이를 공부시켜준다는 조건이었는데, 올 때 집에서 치던 피아노를 가져온 것이에요.
동생이 서강대에 가보니 영어 등 기초 과목 수준이 떨어지더래요. 그래서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어요. 자지 않으려고 서서 공부를 하는 정도였어요. 피아노를 친 것도 졸음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러니 내가 신경이 쓰여 힘들었어요. 동생은 공부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는데, 김 시인은 소음에 예민했기 때문에 괴로워한 것이지요. 마침 친정어머니가 신당동에서 신수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동생이 다시 집으로 들어가게 되어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막냇동생이 이화여대를 입학하게 되어 학교에 다니는데 거리가 멀어 어머니가 이사를 결심한 것이지요.
우리 집 큰아들은 피아노를 아주 잘 쳤어요.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어요. 언젠가 최희준 가수의 노래를 한 번 듣더니 악보도 없이 그대로 치더라구요. 반면에 작은아들은 피아노를 치는데 흥미가 없었었어요. 현락 동생이 신수동으로 들어간 뒤에도 두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배우러 보냈어요. 큰아이는 좋아했는데, 작은아이는 잘 가지 않았어요. 내가 나중에 큰아들을 위해 피아노를 샀어요.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니 사준 것이에요.
맹문재 : 위의 작품에서 “나의 새끼는 피아노 앞에서는 노예/둘째 새끼는 왕자다”라고 한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네요. 또한 “벙어리 벙어리 벙어리/식모도 벙어리 나도 벙어리/모든 게 중단이다 소리도 사념도 죽어라”라고 괴로워한 면도 충분히 이해되네요. 평소에 김수영 시인이 소음에 민감했으므로 옆방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에요. 그런데 왜 “값비싼 피아노가 값비싸게 울린다/돈이 울린다 돈이 울린다”라고 빈정거렸을까요?
김현경 : 친정집의 돈에 대해 빈정거린 것이지요. 일종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비판 의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맹문재 : 그러면 “동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누이/잡지사에 다니는/영화를 좋아하는 누이/식모살이를 하는 조카”와는 대조적인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네요.
김현경 : 그렇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산문 중에서 「김이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가 있어요. 김이석 소설가를 두고 “그는 고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하고 있어요. 두 분이 가까운 사이였는가봐요?
김현경 : 김이석 씨는 김 시인하고 명동에서 술 마시다가 만나면 같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우리 집 근처에서 살았어요. 김이석 씨는 우리 집에 와서도 밥을 안 드셨어요. 구멍가게에 가서 사과라도 사먹지 남의 집 신세는 안 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술을 마시면 땡깡이 아주 심했대요. 김 시인이 못 당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어요. 박순녀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땡깡이 없어졌다고 해요. 음식점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때는 연재소설을 맡아야 먹고 살 수 있었어요. 이봉구나 김광주 소설가가 문인들에게 술을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연재소설을 썼기 때문에요. 김이석 씨는 연재소설을 『한국일보』에 막 쓰다가 세상을 떴어요. 결국 술 때문에 곯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남편이 세상을 뜨자 아내인 박순녀가 되려 가정살림을 잘 꾸려나갔어요.
박순녀는 인물이 고왔어요. 「어떤 파리」라는 작품이 있는데, 소설도 잘 썼어요. 함경도 출신 특유의 고집도 있었어요. 아이 둘을 데리고 시집왔어요. 김이석 씨도 월남한 분이어서 둘 다 재혼이었어요. 생활력도 강했어요. 어느 날 홍제동의 국민주택에 사는 김이석 씨 집에 김 시인과 큰아이를 데리고 갔어요. 이사를 했기에 집들이로 방문한 것이지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대접에다가 설탕물을 타고 앵두를 대여섯 개를 넣어 주는 것이 전부였어요. 점심으로 짜장면도 사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어요.
당시의 국민주택은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지원했기 때문에 시세보다 집값이 쌌어요. 혜택을 본 문인들도 있었지요. 대학교수들도 있었구요. 나중에 팔 때 이익이 있었어요. 박순녀가 나를 더러 찾아왔어요. 내가 계를 들고 있다고 하니까 자신도 넣어달라고 해서 같이 계를 한 적도 있어요. 계주가 진명고녀 친구였어요. 그녀의 남편이 진명고녀 교무주임이어서 믿을 만했는데, 계주가 도망을 간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박순녀의 돈을 메꿔주기도 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산문 중에는 아무래도 「양계 변명」이 주목되어요. 성북동에서 마포로 이사를 온 뒤 아내가 가정 살림을 위해 시작했다고 밝힌 것을 비롯해 열 마리부터 시작해 백 마리를 거쳐 수백 마리를 키운 상황, 전염병의 무서움, 사료값 파동으로 경영의 어려움 등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양계는 저주받은 사람의 직업”이라고 비하했어요. 그러면서도 “양계를 통해 노동의 엄숙함과 그 즐거움을 경험했”다고 밝히고 있어요. 이외에도 노모에게 병아리를 천 마리 길러 드린 일, 양계 일을 보는 만용이의 학비를 마련하는 일의 어려움, 도둑 든 이야기 등도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양계 일에 대해 좀 더 말씀을 해주세요.
김현경 : 그래도 양계를 해서 잘살았지요. 김 시인도 가끔씩 닭 모이를 주고 물을 주고 달걀 줍는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가졌을 거예요. 양계를 하면서 김 시인의 시도 생활을 담는 것으로 달라졌어요. 우리가 마련한 마포의 집은 월남한 여 순경이 지었어요. 집문서도 있었구요. 집 둘레에 500평 정도의 땅이 있었는데 자기 땅처럼 얘기하더라구요. 그래서 양계도 하고 채소도 키우는 등 잘 쓰고 있었는데 2년쯤 지난 어느 날 땅 주인이 나타난 것이에요. 평안도 사람으로 송 씨였어요. 도지세를 내라고 해서 낼 수밖에 없었어요. 양계를 그만둔 뒤에는 양계장이 있는 곳에 가건물을 지어 세를 주었어요. 그런데 송 씨가 무허가라고 고발하는 바람에 헐고 말았어요.
맹문재 : 「토끼」라는 산문을 보니까 양계를 할 때 토끼도 키웠는가봐요.
김현경 : 시골에 가면 닭과 토끼를 같이 키워요. 토끼 오줌이 독해요. 오줌 냄새가 일종의 살충제, 살균 작용을 하나봐요. 그래서인지 병이 있는 닭을 토끼장에 넣으면 잘 자라요. 처음에는 2마리를 길렀는데 한꺼번에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어요. 토끼 새끼는 정말 이뻐요. 말도 못해요. 토끼는 번식이 빨라 금방 20마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만용이 몫이 되었는데, 너무 바빠졌어요. 결국에는 토끼가 먹어야 할 풀을 대는 일을 당해낼 수가 없어 손을 떼고 말았어요. 토끼띠와 닭띠는 상극은 아니지만 궁합이 잘 맞지 않는대요. 그런데도 김 시인은 산문에서 은근히 자기편을 들었어요. 김 시인이 닭띠이고 내가 토끼띠였거든요. 그래서 토끼와 닭이 갈등 없이 잘 지내는 것을 좋아한 것이에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닭띠라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장마 풍경」이란 산문을 보면 “사람은 바빠야 한다”거나 “바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라고 했어요. 맡은 일에 대한 성실함을 볼 수 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아주 성실했어요. 그날 할 일은 꼭 마무리했어요. 김 시인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번역도 열심히 했어요. 번역 원고를 확인하기 위해 소공동 국립도서관에 자주 갔어요. 자주 드나드니까 그곳의 사서하고도 친해졌어요. 「국립도서관」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등의 시작품도 있잖아요. 잡지의 원고 쓰는 일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했어요.
맹문재 : 번역 이야기가 나와서 여쭙는데, 「모기와 개미」에 나오는 번역자 최모 씨와 정모 씨는 누구인지 아시는지요?
김현경 : 최재서 씨와 정명환 씨가 아닐까 싶네요.
맹문재 : 「생활의 극복」을 보면 김수영 시인은 담뱃갑에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어요. “잡지사의 원고료의 액수 날짜, 사야 할 책 이름, 아이들 학비 낼 날짜와 액수, 전화번호, 약 이름과 약방 이름, 외상 술값……” 등을 적었어요.
김현경 : 아리랑 담뱃갑에 적었어요. 그날그날 할 일을 적었지요. 그전에는 일기를 쓰더니 나하고 재회한 뒤에는 안 썼어요. 가정을 이루니 심리적으로 편안해진 것이지요. 메모 얘기를 꺼내니, 김 시인이 소설을 쓰려고 했던 일도 떠오르네요. 내 친구 중에 황00이 있었는데 참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어요. 친구는 이대 자수과를 졸업했는데 손솜씨가 기가 막혔어요. 마포 종점과 서강 근처에 넓은 밭을 가지고 있었고 100칸짜리 한옥에서 살 만큼 부유한 집의 딸이었는데, 정00 군인에게 농락당한 뒤 인생을 망쳤어요. 해방 뒤부터 육이오전쟁 때는 군인들 세상이었잖아요. 친구는 나중에 결핵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최00 소설가를 만나 매춘을 하며 여관에서 살림을 했어요. 김 시인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뒤 종로3가에서 만난 적이 있대요. 나중에는 친정집에 붙잡혀 갔는데 끝내 아편 과용으로 세상을 떴어요. 김 시인은 그 비련의 얘기를 소설로 쓰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메모만 해놓고 쓰지는 않았어요. 불편해서 쓸 수 없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무허가 이발소」에서 동네의 무허가 이발소에 가면 편안하다고 밝히고 있어요.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요 고객인데, 그들이 그곳에서 사람 대우를 받는 것이 측은하면서도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고도 했어요.
김현경 : 실제로 김 시인은 꼭 허름한 동네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했어요. 어떤 때는 머리를 빡빡 깎고 들어오기도 했어요. 김 시인은 이웃 어른들에게도 겸손하고 친절하게 잘했어요. 허름한 사람들에게 배운 티를 내지 않고 잘 어울렸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산문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아주 많네요. 모두 소중한 이야기여서 오늘 다 듣기가 어렵네요. 다음에 다시 듣도록 할게요. 감사해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 맹문재 孟文在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 『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