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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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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르네 데카르트 / 새 시대를 연 거목들
촌놈 추천 0 조회 47 13.07.27 13: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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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단죄에 충격, 과학 버리고 철학 선택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6>르네 데카르트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1581/85~1666)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데카르트의 초상화(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돼 수학 시간에 배운 것들이 가물가물해도 방정식에 나오는 x, y, z, a, b, c라든가 x축 y축이 있는 좌표(座標, coordinates), 22, 23과 같은 제곱, 세제곱의 표기법을 잊어버리기는 힘들다.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창안한 것들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19세기 초반부터 그런 인정을 받았다. ‘근대의 아버지’ 중 한 명이라고도 해도 무방하다. 물리학·화학·심리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도 데카르트를 거론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좌표기하학이라고 불리는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analytic geometry)의 창시자다. 해석기하학이 없었으면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가 발전시킨 미적분학(微積分學, calculus)도 없었다. 1637년에는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를 설명했다.

데카르트는 16세 때부터 수학에 몰두했다. 수학의 확실성에 매료됐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에겐 수학이 철학보다 우선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말라고 1648년 경고하기도 했다.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데카르트는 생생한 꿈을 세 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해석기하학 창시무지개 원리도 설명

1633년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단죄 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이 데카르트의 귀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그는 과학 연구를 거의 중단하고 철학으로 돌아섰다. 데카르트는 라플레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신학·철학·논리학·수학을 배웠다. 자신이 받은 예수회 교육에 평생 만족했지만 불만도 있었다. 특히 수학과 달리 철학에는 논란·불확실성이 많은 게 아쉬웠다.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 철학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에게 철학에 수학적 확실성을 도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철학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과학에서 이룩한 성과를 방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의 과학이 가톨릭 신앙과 철학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활동한 시기는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데카르트는 과학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그는 교회의 철학인 스콜라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했다. 교회의 철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인물이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철학은 신앙과 이성 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성경에 나오는 계시가 곧 진리인 시대였다. 보조적으로는 교회 전통이나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저술한 문헌에 진리가 나와 있었다. 이를 무시하고 데카르트는 불확실성에서 출발했다. 그는 물었다.

“확실한 게 무엇인가?”

그의 방법은 모든 것에 대해 극단적으로 회의하는 것이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고, 악령(惡靈)이 나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너무나 자주 맥락을 떠나 인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의 결론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프랑스어 Je pense, donc je suis, 라틴어 Cogito ergo sum,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로 상징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쯤은 모든 것에 대해 최대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미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생각하기를 포함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의식하며, 이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가 진리 인식의 기준으로 내세운 조건은 명석(明晳·clear)과 판명(判明·distinct)이다. 어떤 개념의 내용이 명료한 사태(事態)가 명석(clear)이다. 명석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념과 충분히 구별되는 것이 판명(判明·distinct)이다.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지식은 신(神)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은 우리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앙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보는 견해가 주류다. 일찍 고아가 된 그가 예수회 성직자들을 부모처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으로 채택하게 만들겠다는 데카르트의 포부는 사실은 ‘위장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데카르트가 몰래 이신론(理神論)이나 무신론을 믿었다는 주장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기됐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도 신랄한 의혹을 제기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최선을 다해 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학문적으로는 데카르트에게 큰 빚을 진 아이작 뉴턴도 데카르트 철학의 귀결점은 무신론이라고 비난했다. 데카르트의 저서 중 상당수는 1663년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1720년에는 파리대학 커리큘럼에 포함됐다.

하루 10시간 자며 맑은 머리로 철학 매진

데카르트는 개신교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가톨릭 측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활동기는 30년 종교전쟁(1618~48) 기간과 겹친다. 데카르트에게는 가톨릭이냐 개신교 신자냐가 아니라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중요했다. 데카르트는 은총을 강조하는 가톨릭·개신교와 달리, 진리를 발견하고 덕을 쌓는 게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가톨릭·개신교 모두에게 이단이었다.

당시 지성계를 지배하는 인물들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예수회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데카르트도 이들이 형성하는 국제적인 공동체의 멤버였다. 데카르트가 예수회의 스파이였다는 설을 A. C. 그레일링이라는 학자가 제기했다. 데카르트는 군 생활을 개신교 진영에서 하기도 했다. 정보수집이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에서 거주한 것도 사상의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스파이 활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학자들은 스파이로 채용되는 일이 흔했다. 사회 명사들과 교류하는 학자들은 1급 첩보원감이었다.

데카르트는 변호사·판사·의사들이 우글거리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장 낮은 등급이긴 하지만 1668년 귀족이 됐다. 키가 1m55㎝였던 데카르트는 한때 눈동자가 안쪽으로 몰리는 눈(內斜視)을 가진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헬레나 얀스라는 이름의 하녀와 관계를 가져 1635년 딸 프란시엔을 낳았다. 관계한 날짜를 일기에 기록했다. 친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프란시엔이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 딸은 5세에 성홍열로 사망했다.

그는 비밀주의자였다. 20여 년간 네덜란드에서 생활할 때는 거처를 수십 번 옮겨 다녔다.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생년월일도 비밀로 했다. 누군가 서양 점성술로 그의 ‘사주팔자’를 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긴 서간문을 보면 데카르트는 달콤하면서도 논리정연했다. 비판을 당하면 참지 못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 차가움, 오만함,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같은 인간적인 약점들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당시 지성계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한마디 했으나 평생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학문에 몰두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게으른’ 철학자였다.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느긋하게 살았다.

사치만 하지 않으면 되는 어머니가 남긴 넉넉한 유산 덕분에 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예수회 학교에 다닐 때부터 몸이 약해 늦게 일어났다. 학교 측의 특별 배려로 10시 미사 시간에 맞춰 일어나면 됐다. 하루에 10시간씩 잤다. 하루는 친구가 정오가 다 돼 그를 방문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 놀라 “아프냐”고 묻자 데카르트는 “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충분한 수면으로 머리를 맑게 하는 게 데카르트가 철학을 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들도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랐다. 여자들 중에는 거물급도 많았다. 1649년 그는 철학 튜터가 돼 달라는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데카르트는 “날씨가 추우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양지바른 프랑스의 투렌 지방에서 태어난 그가 스웨덴으로 가는 것은 철학을 그만두는 것뿐만 아니라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마침 스웨덴에 60년 만에 최고의 추위가 들이닥쳤다. 그는 여왕을 만나러 새벽 4시 반에 마차를 타야 했다. 일주일에 3번, 한번에 5시간씩 가르치는 강행군이었다. 결국 스웨덴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추운 날씨에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그의 면역 체계가 약해졌을 것이다. 53세였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크리스티나 여왕은 루터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개종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제시했다. 몸은 기계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그의 이원론을 표방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 데카르트는 설명하지 못했다. 데카르트가 더 오래 살아 이원론을 발전시켰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방법론〉의 개요

 

그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은 〈방법론〉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단지 자기의 세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세기를 대표하며, 또 어떤 점에서는 근대도 대표하고 있는데, 그는 이 근대의 정신을 미리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은 한 사람의 사고(思考)의 전기(傳記)이다. 데카르트는 이 책 속에서, 숱한 모색(摸索)(연구, 여행) 끝에, 어떻게 해서, 그것 없이는 자기가 살아갈 수 없는 하나의 재산, 즉 지식을 자기 자신에게 주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책들 속에서 획득했었던 모든 관념들을 버리고, 아래와 같은 4개의 보편적 규칙을 자신에게 제시했다.

 

(1) 명백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2) 어려운 문제들의 하나하나를 가능한 한 작은 부분들로, 그리고 그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작은 부분들로 나눌 것.

(3) 항상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갈 것.

(4)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만큼 완전한 열거(列擧)와 총체적인 재검토를 할 것.

 

오랜만에 그는 감히 자기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였으며, 그리하여 모두가 서로 지탱하고 있는 진리들의 실마리와도 같은, 하나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찾았다. 그는 이 실마리와 같은 것을 아래와 같은 확인 속에서 찾아 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다시 말해서,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의심하는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존재임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자 곧 두 개의 다른 진리가 그에게 주어졌다. 즉 하느님의 존재(인간의 사고 속에 천성적으로 존재하는 완전이라는 관념은 더 완전한 하나의 본성에서밖에는 그에게 올 수가 없다)와, 외계(外界)의 존재(하느님은 완전성이므로 우리를 속일 수 없었다)이다.

 

〈방법론〉은 프랑스 어로 씌어 있다. 이야말로 하나의 중요한 혁신이었다. 즉, 철학은 이제까지 라틴 어로밖에는 논의하지 않았던 박사들의 손에서 벗어나, 문학과 사회 속에 들어온 것이다. 누구나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고,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분배되어 있는 것'인 각자의 양식(良識)에 따라서 그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

 

사실, 모두가 이 책을 읽었고 모두가 그것을 칭찬했다.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에 어렴풋이 지니고 있었던 이성의 힘의 매우 강력한 의식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교리를 존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합리적인 근거를 주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이 학설을 신학자들 자신도 환영했다. 방법의 위험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 자신도 못 알아차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 방법은 무엇보다도 전통, 계시 등 어떠한 권위도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삼는다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이 관념들의 논리적 연결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과학적 추리(推理)의 지상권(至上權)을 긍정하는 것이요, 18세기 합리주의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은 이 학설이 교리를 긍정하고 있는데 안심하여, 거기에 그토록 무서운 힘을 가진 파괴적 원리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기계 속 영혼

 

근대정신의 표상인 철학자 데카르트는 뛰어난 수학자이며 의학자다. 지금도 프랑스 고교생의 필독서이며 백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해 수백만 명이 읽는다는 『방법서설』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유명한 명제는 그가 이 같은 회의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었다.1)

 

하지만 그는 어떻게 생각과 존재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었을까? 그는 지식이란 형이상학이 뿌리이고 자연학이 줄기이며 도덕과 실용에 충실한 학문이 열매인 나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거꾸로 형이상학과 자연학이 당시 기술의 발전과 실용 학문의 열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존재와 확실성의 근거를 의심할 수 없는 '사유'에 두었지만 실은 사유마저도 삶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데카르트가 활동한 당시 유럽에서는 항해술의 발달로 수많은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고 있었다. 교회의 권위에 눌려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상이 자리를 잡았다. 천체의 운동을 초자연의 섭리가 아닌 자연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또, 시계를 발명함으로써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높아졌다. 데카르트는 이 같은 시대의 정신을 자신의 철학과 의학에 담아서 '기계 합리론'을 만들어냈다.

 

엄밀하고 확실한 불변의 답을 갖는 수학이 모든 학문의 모델이 되었고, 논리학과 수학이 아닌 다른 학문에도 절대 확실성을 갖고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절대 확실성을 담보하려면 마음이나 정신과 같은 모호한 개념을 배제해야만 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전혀 다른 실체로 분리하는 심신이원론이 탄생한다. 몸과 마음뿐 아니라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분리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산업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데카르트식 이원론'이다. 물론 그의 이원론은 '인간이 곧 정신'이라는 결론에서 끌어냈기에 이를 천박한 유물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물질 이외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기계 유물론으로 발전시켰다.

 

 

데카르트의 『인간, 태아발생론』에 나오는 시각과 운동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

 

 

반면에, 인간은 사유하는 마음이며 육체는 운동하는 연장이라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어떤 형식으로든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했다. 그는 뇌 속의 송과선이라는 곳에서 둘이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송과선을 제외한 육체의 어떤 부분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감각은 신경을 통해 전달된 입자(물질)들의 운동이 송과선에 전달되었을 때 마음에 보내는 신호라고 한다. 예컨대, 눈으로 들어온 이미지는 입자들의 운동으로 송과선으로 전달되고, 이렇게 전달된 이미지와 송과선 사이의 반응으로 운동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물질과 마음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데 데카르트의 체계에서 마음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인과 작용이란 입자의 운동일 뿐이므로 전혀 다른 범주의 현상이 인과관계로 묶이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은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제기된 것이다. 그의 제자였던 팔라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그에게 "분명 운동은 접촉해야 일어나고 접촉하려면 연장이 필요하며 영혼은 연장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영혼이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가?"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2) 결국 송과선은 사람 속의 사람, 즉 극미인(極微人, homunculus)이 되어버리고 그 극미인은 그 속에 또 다른 극미인을 담고 있어야 하는 식의 논리가 무한 반복한다.

 

이러한 논리의 모순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의 몸을 기계로 보고, 그 속에 영혼이 거주한다는 생각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이런 상황은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상을 어떤 시기에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의 정합성 때문이기보다는 시대정신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구성한 기계 속 영혼이라는 몸의 관념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후 의학의 발전에 꼭 필요한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파라켈수스가 의학을 통해 온몸으로 중세의 우상에 도전한 시대의 이단아였다면, 데카르트는 파괴된 우상의 터에 근대의학의 기초를 닦은 새 시대의 사상가이며 선도자라 할 수 있다. 이제 그 터에 어떤 건축물이 세워졌는지 알아보자.

 

 

각주

1) 브라이언 매기, 박은미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시공사, 2002.

2) 엔서니 케니, 김영건 외 옮김, 『서양철학사』, 이제이북스, 2004.

 

/ 네이버 지식

 

 

 

 

 

 

데카르트의 '방법서설(方法序說)'

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Ⅰ. 생각해보기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ㆍ수학자ㆍ물리학자. 근대철학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 형이상학적 사색은 의심을 가진 물음이라는 방법에서 출발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근본원리를 『방법서설』에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시작한 명석판명은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을 이끌어 낸다. 16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 Discours de la m?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데카르트는 진리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봤다. 때문에 데카르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의심(회의)하다 보면 언젠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그는 더욱 열심히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의심을 품어 그 의심에 대해 느껴 받아들이고 이성과 직관을 통해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모든 지식, 감각, 육체 등)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사실에 도달하면 그때야 비로소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였다.

 

1. 코기토(cogito =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중세와 근대는 나뉘게 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는 인간은 이성에 의해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는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이성의 능력에 대한 기초에서 출발하여 인간은 진리나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 철학은 중세 철학과 명확하게 구분 된다. 즉, 중세철학의 진리는 오직 신을 매개로 하여 파악될 수 있는 무엇이었다면(신의 이름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과 관계를 통하지 않고 바로 인간자신의 이성을 통해 독자적인 능력을 가지고 진리와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논리는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을 명확하게 구분 짓게 만든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진리나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바로 근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논리로 자리 잡게 된다.

 

2. 건축과 도시에 대한 은유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여러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보다 완전성에 있어 종종 떨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건축가가 시공하고 완성한 건물은 다른 목적으로 세워진 낡은 성벽을 활용해서 여러 사람들이 개조한 건물보다 더 아름답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또 애초에는 성곽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 큰 도시로 바뀐 옛 도시는 한 사람의 기술자가 자기 구상대로 벌판에 세운 규칙적인 도시에 비해 대체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다. 물론 그 건물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이 새 도시의 건물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기교가 가끔 발견되긴 하지만, 여기저기에 큰 건물과 작은 건물이 뒤죽박죽 배치되어 있고, 길들은 구불구불하고 반듯하지 않으며, 따라서 건물들이 이처럼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기획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연의 산물로 돌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 훨씬 아름답고 더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은 중세의 전체성으로부터 근대적 단일주체로 독립시키기 위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단일체계로 계획되어 건설된 도시의 모습은 이성의 통제에 의한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성찰』에서 증명이 후험적이라 명명되는 것은 사유하는 자아의 경험, 정확히 말해 자아의 유한성에 대한 체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후험적 증명을 몇 가지 분류에서 시작한다. 첫 번째 분류는 관념의 분류이다. 회의에 의해서 이 세계의 존재가 부정되었으므로 자아는 이제 자기 내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며 외부의 자연으로부터 내부의 눈으로 ‘코기토’(cogito, ergo sum)를 정의 하였다.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역, 『방법서설』, 문예출판사, 2001.

 

 

Ⅱ. 생각확대하기

 

▲ 『방법서설』 초판 표지

 

1. 『방법서설』 핵심내용

 

1) 기존 학문들에 대한 자서전적 고찰

거짓된 것에서 참된 것을 구별하고 올바로 판단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동등하게 누구나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에 의한 학문 탐구를 통해서만 인간의 정신은 진리의 길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것만 점점 더 발견할 뿐 그 어떤 이득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많은 의심과 오류에 빠져 곤혹스러웠다. 한 가지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참된 의견만 있을 터인데, 아주 많은 의견들이 학자들에 의해 실제로 서로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단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거의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사람들의 학문을 공부하고 생활 방식을 관찰해 보았을 때,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나는 선례와 관습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세상이라는 책 속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내 안에 있는 이성의 길을 따라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2)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네 가지 규칙

①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명증성의 규칙으로 명석판명을 말하고 있다. 신속한 판단과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피하고 명석ㆍ판명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동일한 것, 명료한 것은 근대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동일화는 수량화를 의미하며, 양적 수를 사용해서 대상을 모두 동일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명료화란 명료하지 않은 사실 세계를 명확하게 나누는 것으로, 이분법 사고의 시작이다.

②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분해의 법칙으로 사실이나 내용을 분석하여 가면서 따질 때 해결하기 어려운 점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③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순서를 상정하여 생각해 가야 한다.

순서의 규칙으로 일은 체계적인 순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기존연구를 검토하여 가설을 설정하고 나면 조사와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여 마지막엔 정리하는 체계적인 순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한 순서가 있다는 것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곧바로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④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문제의 모든 요소를 다 열거하고 그 중의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열거와 검사의 규칙으로 새로운 과학지식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과 검증의 절차를 말한다.

 

3) 방법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왜냐 하면, 과거의 불확실한 지식의 체계들을 무너뜨리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지식의 기초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뒤에도 내 신념 속에 확실한 것이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 보면, 모든 것이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아무리 의심해 보아도, 모든 것을 의심하면 할수록 ‘의심하고 있는 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하며, 다른 명제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일 원리가 되는 것이다.

한 명제가 참되고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의 확실성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만일 내가 생각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명석하게 알지 못했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명석하게 그리고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진리의 일반적 규칙으로 삼을 수 있다.

 

Ⅲ 생각정리하기

 

1. 중요한 지문

 

1)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히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누구나 그것이 충분히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대부분 자기가 갖고 있는 이상을 바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잘 판단하여 참된 것을 거짓된 것과 분리하는 능력(이를 양식, 또는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2) 나는 성년이 되어 선생들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학문연구를 모두 버렸다. 그리하여 나 자신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학문, 혹은 또 세상이라는 큰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학문 말고는 어떤 학문도 추구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나는 나의 청년시대 나머지를 여행으로 보냈다.

 

3) 나는 논리학을 구성하는 그 많은 규칙 대신에 다음에서 말하는 네 가지 규칙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첫째, 내가 명증적으로 ‘진실’이라고 인정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진실이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둘째, 내가 음미하는 문제를 가능한 한 많은 부분으로 나눈다.

셋째,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복잡한 것의 인식으로 순서를 잡아나간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전체를 헤아려 보고 종합해 본다.

 

4) 나는 즉시 깨달았다. 내가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필연적으로 무엇인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Je Pense, done je suis)’라고 하는 이 진리는 회의론자의 어떠한 터무니없는 상정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라는 점을 나는 인정했기 때문에, 나는 이 진리를 내가 구하고 있었던 철학의 제1 원리로서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5) 데카르트는 이성의 소유를 인간과 기계 또는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때 데카르트가 의미하는 이성의 개념은 주어진 여건에만 자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대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언어 사용능력과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이 두 가지를 데카르트는 인간을 기계 또는 동물로 구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는 데카르트에게 있어 이성의 능력 또는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 자신이 인정하듯이 몇몇 동물에게서는 언어 사용능력이 있음이 관찰되고 있으므로, 얼마나 정교한 언어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은 언어사용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문제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정신의 존재가 확실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물체와 정신을 구별하는 근거로 내가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의식의 사실을 들고 있으면서, 동물 또는 기계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사유한다는 사실 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지 않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 출처 : 『철학사상』별책 제2권 제3호, 데카르트 『방법서설』,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2003.

 

Ⅳ. 생각 찾아보기

 

1.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Cogito, ergo sum’이라고 했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생각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나는 존재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시리즈를 마치며-

못다한 수학자 이야기

 

누워있던 데카르트, 천장에 앉은 파리 쳐다보다 ‘XY좌표’ 구상

 

 

 

 

‘일생의 6분의 1은 소년으로, 12분의 1은 청년으로 살다 인생의 7분의 1을 혼자 살았다. 결혼해 5년 후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내 생애 2분의 1을 살다 죽은 후 (내가) 4년을 더 살고 일생을 마쳤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그리스 수학자 디오판토스(추정 생몰연도 246∼330)의 묘비 문구다. 디오판토스는 수학사에서 정수론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쓸 문구를 주변사람들에게 남겼는데, 정수론의 원조답게 묘비 문구 자체가 수학문제다. 즉 묘비의 ‘1차 방정식’을 풀어야 묘비의 주인공(디오판토스)이 몇 살에 세상을 떠났는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1170∼1250)는 ‘주산서(리베르 아바치)’란 책을 통해 인도에서 개발된 ‘힌두 아라비아숫자’를 유럽에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로마숫자 사용이 보편화된 유럽에서 홀대를 받던 아라비아숫자의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적극 알려 인류 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발견한 ‘피보나치 수열’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수의 신비를 드러내 피보나치를 수학의 암흑기인 중세 유럽에 독보적인 수학자로 자림매김시켰다.

‘피보나치 수열’은 1에서 시작해 선행하는 두 수를 더한 값을 다음 수로 놓는 것이다.


 

 

 

이는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등으로 이어진다(두 번째 수 ‘1’은 선행수가 하나여서 예외적으로 첫 수를 반복해서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수열은 자연 속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꽃잎의 수가 3(백합) 5(미나리아재비) 8(참제비고깔) 13(금잔화) 21(애스터) 34(데이지) 등이다(책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피보나치수열 앞뒤 수의 비율은 ‘황금비율’인 (-1 + 5)/2 즉, 1.618에 수렴해간다. 미국에는 ‘피보나치 협회’가 결성돼 지금도 자연 중에서 발견되는 피보나치 수열을 찾고 제보도 받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수학에서도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데카르트는 어느 날 누워서 천장에서 파리가 옮겨 다니는 것을 보고 X, Y 좌표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데카르트 이후 수학에서 정수론과 기하학이 본격적으로 융합되기 시작한다. 방정식을 그래프를 그려서 푸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의 소피 제르맹(1776∼1831)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 은행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집념을 불살랐던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푸는 중간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도형 문제를 푸는 데 열중하다 로마 병사에게 피살된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에 감동받아 수학에 빠져들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당대 최고 수학자였던 독일의 카를 가우스(1777∼1855)와 교류하기 위해 남자 필명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일화도 널리 전해진다. 이런 열정을 가진 인물이다 보니 후학 양성에 인색했던 가우스조차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르맹은 가우스의 학문적 은혜를 잊지 않고 독불(獨佛) 전쟁 중 자신의 프랑스 군부 인맥을 통해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지역에 있던 가우스의 안전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인도 출신 천재 수학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1887∼1920)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와서 연구하던 시절인 1918년 수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비관해 런던 지하철에 몸을 던졌으나 지하철이 극적으로 정차해 목숨을 건질 만큼 학문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고 시리즈에 동행했던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말했다.

헝가리의 수학자 에르되시 팔(1913∼1996)은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찾아서 각국을 다녔던 ‘떠돌이 수학자’였다. ‘수학 연구에 구속이 된다’며 평생 독신으로 집, 아내, 아이, 직업, 취미가 없이 살았던 그는 생전에 작은 가방에 노트 몇 권만 넣어가지고 다닐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다. 항상 ‘나의 두뇌는 열려 있다’며 수학자들을 불쑥불쑥 찾아가 어려운 문제를 함께 푸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일생을 살았다.

에르되시 팔은 레온하르트 오일러(1707∼1783)를 제외하면 역사상 가장 많은 책과 논문을 남긴 수학자로 꼽힌다. 그의 사후 에르되시 팔과 얼마나 가까웠는지에 따라 수학자들을 분류하는 번호까지 등장했다. 예를 들어 ‘에르되시 번호 1호’는 그와 함께 책이나 논문을 쓴 사람으로 485명이다. ‘에르되시 번호 2호’는 ‘번호 1호’와의 공저자다. 번호는 7호까지만 세며 수학 논문을 한 편도 써보지 않은 일반인은 익살스럽게 ‘에르되시 번호 무한대(∞)’로 부른다. 네 살에 음수의 개념을 깨칠 정도로 신동이어서 ‘에르되시가 못 풀면 풀 사람이 없다’는 말도 나왔다(책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은 미친 겁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내시(1928∼ )는 미 프린스턴대 교수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어린 가우스’라고도 불릴 정도로 수학 문제 푸는 속도가 빨랐던 인물이었으나 한때 정신분열증에 걸려 30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내시처럼 수학에 몰두하다 ‘정신적 문제’가 나타난 사람은 여럿이다. 정수나 소수 분수를 가리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이른바 ‘무한수’에 대한 많은 통찰력을 제시했던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1845∼1918)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쳤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종종 자신의 연구 결과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꿈을 꾸기도 할 정도로 강박관념을 갖기도 했으며 심할 때는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수학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명사들이 아름다운 학문으로 칭송한 바 있다. 지동설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자연의 커다란 책은 그 책에 쓰여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 그 언어는 수학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수학은 조각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다. 차갑지만 간결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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