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아저씨, 제발!
김 채석
1979년 제10호 태풍 어빙(Irving)호는 8월 9일에 발생해 8월 17일 한반도 서해상으로 진입 중심기압 970 Hpa을 유지하며 내륙을 관통 후 8월 18일 원산으로 빠져나가면서 온대성 저기압으로 변질, 소멸되었으나 12명의 사망과 실종으로 기록되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에 가장 강렬한 태풍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당시 조국의 부름을 받아 전북 익산 금마의 부대에서 ‘유신과업 이룩하자!’라는 슬로건을 겉으로만 외치는 가운데 거짓 충성으로 국방부 시계가 고장 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염원하는 병사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하절기 해상침투 훈련에 임하라는 명에 따라 호남선 이리 역에서 정읍까지 열차로 이동 후, 한여름 밤 완전군장에 50여 km의 행군은 사람을 참으로 지치고 힘들게 했다.
그리해서 도착한 곳은 변산반도의 고사포해수욕장으로 넓은 백사장 건너에는 원불교 수양 시설이 있는 하섬이 지척인 가운데 수영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첫날 고무보트 승선 후 전복으로 600여 m를 온몸으로 팔과 다리를 저어가며 어떻게 뭍으로 나왔는지 기억이 아슴아슴할 정도로 기진맥진했고, 남은 훈련 일정은 험로를 예고했다.
그런데 웬걸, 부대는 태풍 어빙호의 진로 관계로 모든 천막을 철거한 후에 인근 마포 분교로 철수가 아닌 피난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방학 중인 초등학교 교실로 대피해서 하루 밤이 지나고 다음날 여단으로부터 한통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내용인즉슨 “하사 김채석은 CPX 요원으로 개인 복귀 조치 바람.” 아! 참말이지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사실이지 두 주간의 훈련도 훈련이지만 다시 정읍까지 완전군장에 50여 km의 행군이 꿈만 같았다. 여하튼 개인 복귀야말로 행운 중에 행운으로 달려오는 직행버스를 정면에서 무단으로 정차시키고 무임승차했다. 빈 좌석은 맨 뒷자리의 가운데인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옆 자리에 아리따운 아가씨는 시종 뭔가 마뜩찮은 모습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베레모에 얼룩무늬의 복장도 거시기한데 완전군장으로 무장한데다 무임승차까지 한, 한마디로 무식해 뵈는 작자가 자신의 옆에 있으니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장난 끼가 발동한 나는 며칠 바닷가에서 부식된 개인화기를 수입할 요량으로 M16A1 소총의 총구를 아가씨의 목 가까이에 향하게 하고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키는 등 차마 해서는 알 될 짓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장면을 담은 직행 버스는 “여름 해수욕이면/쏘내기 퍼붓는 해 어스럼,/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 같은/변산 격포로나 한번 와 보게.”라는 미당의 시 ❮격포우중格浦雨中❯에서의 그 격포를 출발하자 무 정차해야 할 마포에서 뜻밖의 정차를 한 후, 신석정 시인의 시비 ❮파도❯가 서있는 해창 마을, 뭇사람들이 새만금 전시관 정도로나 알고 있으나 달리 최기인의 소설 『똠방각하』의 배경이 되는 해창 마을을 지나면,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를 노래한 이매창의 고장 부안을 지나 지금의 익산에 이르렀다.
익산에서 다시 옛 마한의 도읍지라 말하는 금마면에서 미륵산(일명 용화산) 자락 아래 사적 150호의 미륵사지와의 사이에 있는 부대에 도착 CPX 훈련에 필요한 장비 일체를 점검한 다음날 요원들은 군용 트럭에 올라 목적지 1군 사령부가 있는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호남고속도를 달리면서 우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추월해 가는 고속버스 안내원에 두고 있었다. “야! 한진고속보다 광주고속 안내양이 더 예쁘다. 아니다. 삼화고속이 더 예쁘다.”라며 무료한 시간을 시답잖은 소리로 떠들어대며 달리던 중 수원 인근 신갈에 이르러서 문제가 생겼다.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있던 병사 윤 일병은 신임 중에 신임으로 여단에서 희귀병과 인 암호 병인데 홍당무처럼 붉게 상기된 얼굴로 갑자기 달리던 트럭에서 뛰어내리려는 실제상황이 발생했다. 우리 모두는 윤 일병의 팔과 다리 등을 붙잡고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윤 일병! 인마, 왜 그래 응. 갑자기.” “저기 우리 집이 보여요. 그런데, 그런데 홀어머니 혼자 저 집에 있어요. 저 엄마에게 가야 해요. 가봐야 해요.”
홀어머니 홀로 계시는 고향집을 그리는 무녀 독남 아들의 심경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선 안전과 안정이 필요했다. 아마도 윤 일병은 차량이 출발하는 부대에서부터 지나치게 될 집과 어머니를 마음에 품으며 수많은 생각에 이르다가 막상 집이 보이는 순간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 신갈이 점점 멀어지자 진정이 되는 듯싶었다. 차량은 영동고속도로로 방향을 바꿔 경기도 여주 가남 휴게소에 도착, 그리스 군 참전 기념비에 예의를 갖췄다.
이어 문막을 지나 목적지 원주에 도착, 1군 사령부 인근에 부대 지휘소 등 주둔할 막사를 구축하고 나서야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생전 처음으로 밟아보는 강원도 땅, 둘러보는 산야는 푸른 옥수수 밭이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치악산도 지척인 가운데 밤이면 독한 경월소주에 취하다 보니 모든 기간의 훈련이 종료되고 부대로 복귀 하루 전 괜한 옥수수가 탐났다. 단지 부대에 가지고가 구워 먹으면 맛있으리란 생각뿐이었다.
그리해서 더블 백을 가지고 내 키보다 웃자라 푸르름으로 넘실대는 옥수수 밭으로 향했다. 오직 탐스런 옥수수 알을 더블 백에 가득 채우리라는 일념 하나로 들어선 옥수수 밭 입구에 내 눈길을 붙드는 엉성하고 초라한 팻말 하나, 누런 골판지의 라면 상자 뒤에 비틀비틀 크레용으로 쓴 글씨는 누가 보아도 초등학생의 글씨라는 것이 분명했고 읽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군인 아저씨, 제발 옥수수 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 어린것이 부모가 애써 땀으로 지은 농작물 옥수수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분노에 앞서 읍소 하듯 애원이 담겨 있었다. 탐스럽게 영근 옥수수를 수확해서 생활비나 학비 등 가용에 큰 보탬이 될 옥수수, 수확 철마다 부모의 한숨짓는 모습을 보다 못한 아이의 마음이 녹여있는 것을 보고 부끄러운 마음에 그냥 돌아서 왔다. 그런 내 모습을 아이가 어디선가 숨어 보면서 “히히 헤헤 내 그럴 줄 알았어!”하며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부대로 복귀하면서 신갈이 가까워지자 또 윤 일병이 어찌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를 하면서도 “군인 아저씨, 제발”이라는 꼬맹이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고, 변산 마포에서 개인 복귀할 때 옆 좌석의 아가씨는 자신의 목을 향한 총구에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얼마나 많이 “군인 아저씨, 제발”을 되뇌었을까. 를 생각하니 부끄러움은 배가 되었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깊게 깨달았다. 나만 편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만 한다면 태풍이 비와 바람을 동반하듯 주변엔 반듯이 불편과 아픔이 따른 다는 것을······,
첫댓글 저는 1979. 그 시기에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하는 보병 12사단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GOP근무를 마치고, 개구리복을 입고 전역 했답니다. 그 때는 하도 심들고 징글징글 해서 강원도에다 데고 오줌도 안눈다고 다짐했는디, 이제 추억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