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네 계영배
수도사들을 위한 성배처럼 레페잔
바텐더는 바에 앉은 미모의 중년 여성에게 차갑게 식힌 샴페인을 내놓는다.
술에 해박한 바텐더답게 샴페인을 담아내는 잔은 가늘고 긴 모양의 플루트 글라스다.
샴페인 기포가 솟아오르는 것을 감상하기에도 좋고 긴 다리(스템) 덕분에
손의 체온이 술의 냉기를 빼앗는 것도 막아주는 적합한 잔이다.
하지만 손님은 이런 것은 마실 수 없다면서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바텐더에게 선배 바텐더는 잔이 문제였다는 지적을 한다.
플루트 글라스는 샴페인의 기포 감상이나 온도 유지에는 그만이지만
술잔을 비우려면 길쭉한 잔의 모양 때문에 목을 많이 젖힐 수밖에 없고
그러면 여성의 목에 난 주름(나이를 감출 수 없는 대표적인 신체 부위)이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
1990년대 일본의 와인 붐 조성에 일조한 만화 스토리 작가 아라키 조의 작품 바텐더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 원산지에선 외면 받는 샴페인 잔
술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술잔 중에는 재미있는 사연을 간직한 잔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플루트 글라스와 함께 결혼식이나 리셉션 등에서
샴페인을 따라 건배할 때 쓰이는 납작한 와인잔인 쿠프 글라스다.
납작한 사발을 연상시키는 모양 때문에 호사가들 사이에선
그리스 신화 속 미녀 헬레나의 가슴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 모양을 본떴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쿠프 글라스는 그 납작한 모양 때문에 샴페인의 기포를 감상하기에 적절치 않은 데다
온도 변화에 민감하고 결정적으로 잔에 따를 수 있는 와인 양이 너무 적어 와인의 맛과 향을 살리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샴페인의 원산지인 프랑스 샹파뉴 지방 사람들조차 쿠프 글라스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샹파뉴 사람들이 선호하는 와인잔은 작은 튤립 모양의 화이트와인잔이다.
술을 처음 빚은 장소가 잔의 모양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벨기에 남부도시 디낭에 위치한 레페 수도원에서 순례자와 수도사를 위해 빚었던 것이 기원인
레페 맥주의 전용잔은 성배(가톨릭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 모양을 하고 있다.
애초 성배 모양의 전용잔은 봉헌의 의미와 신성함을 상징했었다.
이 잔은 입구가 넓은 특유의 모양 덕분에 맥주 향의 발산을 도와 미세한 향까지 깊이 들이마실 수 있어
오랜 시간 특유의 향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 과하지 않게, 탈나지 않게
잔이 넘치도록 술을 가득 부어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애주가들의 애를 태우는 술잔도 있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의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은
술을 7분 이상 따르면 따르는 대로 모두 술잔 밑으로 흘러내려가 버린다.
고대 중국에서 과욕과 과음을 경계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잔은
술을 줄이게 만드는 잔이라고 해서 절주배(節酒杯)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실학자 하백원 등이 이 잔을 만들었다고 하며
몇 년 전 국내 요업계에서도 계영배 재현에 성공했다. 절주의 미덕이 요구되는 애주가용 선물로 권할 만하다.
소리가 나는 소주잔도 있다.
우리나라 3대 도자기업체 중 하나인 광주요는 몇 년 전 화요라는 증류식 소주를 만들면서
잔을 받치는 높은 굽 속에 방울을 넣어 잔을 흔들면 딸랑딸랑 맑은 소리가 나는 전용잔을 함께 선보였다.
백제나 가야 등 고대 왕국의 무덤에서 발견된 영부배(鈴付杯)란 이름의 토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잔이라는 설명이다.
고대 왕국에서는 방울 소리로 귀신을 쫓으려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 술잔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술을 마시는 흥취를 돋워주는 목적으로 쓰인다.
때로는 술잔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식기가 술잔으로 쓰이기도 한다.
경북 안동시에서는 종종 밥그룻 뚜껑이 안동소주잔으로 변신한다. 그 이유도 그럴싸하다.
소주, 특히 증류 방식으로 빚는 안동소주는 다른 술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데
자칫 차게 마셨다가는 독한 술기운에 탈이 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밥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밥그릇 뚜껑에 소주를 따라 마시면
차가운 소주의 한기가 밥그릇 뚜껑 위에서 중화되는 이른바 거냉(去冷) 효과를 볼 수 있다.
큰 술잔이나 별 안주 없이 큰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는 일을 뜻하는 대포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뜻도 흥미롭다.
대포에는 크게(大) 베풀다(布)는 의미가 있는데,
조선왕조 세종 치세 당시 유생들이 상소문에 천하가 대평하니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 삼아
대소 관료들이 크게 베풀어 마음껏 마시고 즐기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술의 종류에 따른 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술 사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세계 최고급 와인잔 메이커인 리델사는 와인잔 모양의 사케 시음잔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잔은 일본 전역의 유명 사케 양조가 및 전문가 등과 함께 30여 차례에 이르는 글라스 테이스팅을 거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통상적으로 사케를 마실 때 쓰이는 도자기나 나무로 만든 잔에 비해 사케 향을 잘 피어나게 하고
사케의 종류에 따른 미묘한 투명도와 색감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 적합해서
기키사케시(일본술 전문가)가 사케의 맛과 향을 구별하는 훈련을 할 때 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