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196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신 앞에서' 입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대운동회의 만세소리' 당선.
1967년 공보부 신인예술상에 시조 '임진강' 당선.
1982년 제5회 전남문학상 수상
시집
'이상기후', '불꽃', '전라도 시인',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등
시선집
'어린 신에게' 등
"산수유꽃 피기 전"
산수유꽃 피기 전
해야 할 일 못다한 것이
바람 속에 왜 이제사 생각나는지
아프다
아픔을 견디다 견디다
혼자 눈떠보는 밤이 있다
어떤 나무의 죽은 가지에
새 속잎이 돋는 걸까
아프게 아프게
연초록의 어린 사랑이 피어나는 걸까
오래 잊었던 일
새록새록 죄다짐으로 살아나서
아픔의 잎잎이
내 안에서 돋아난다
사금파리처럼
때로는 붉은 번개로
창자를 긋는 밤이 있어
눈뜨는 홑겹의 외로움이 슬프다.
"출발은 일단입니다"
출발은 일단입니다
알 없는 안경을 끼고 노래하는 가수가
전방에 있습니다
좌회전할 때 주의하십시오
그놈의 엉터리 같은 고음에
걸리면 안됩니다
십팔 평이나 이십이 평에서
갑자기 사십팔 평으로 추월하는 자를
항상 주의하십시오
그가 펑펑 내뿜는 시커먼 욕망의 배기가스가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차창을 닫으십시오
빨강에서 노랑으로 바뀔 때
날쌔게 반칙하는 자는 용서합시다
먼저 가려고 덤비는
그들을 먼저 가게 합시다
뻔뻔한 타성이 큰골의 외곽을 때릴 때까지
용서하고 용서하는 것은
이 시대의 미덕입니다
사랑과 야망
동시 신호가 떨어졌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순간의 선택이 폭락으로 직진할 수도 있음을.
"거리에 가을비를 세워두고"
시월은 안사돈들이 나란히 나와서
혼례의 촛불을 밝히는 달,
우리나라의 단풍은 이 한 달을
북에서 남으로 걸어서 내려오느니
휴일에는 한줄금 비를 데리고
빗속에 우산을 들고
플라타너스 잎 지는 거리에 나서면
우중충한 소문들도 잠시 귓전에서 멀어진다
우산 하나로
헛되고 욕된 세상을 비껴갈 수야 없지만
새벽마다 길섶 찬 이슬로
더욱 맑아지던 풀벌레의 울음소리
이 차가운 빗속에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리
거리에 가을비를 세워두고
찻집에 들러 혼자라도 좋으니
잘 끓인 커피 한잔을 천천히 맛보며
월명 시인의 제망매가
몇 구절을 떠올리고 싶느니.
"황홀한 물살"
― 떠도는 이를 위하여 3
큰비 그친 뒤
개울가에 귀를 적실 듯 귀를 적실 듯
흘러가는 물살을 본다
친구여,
넌출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흔들려선 마침내 드러누워버리는
물풀의 기나긴 몸짓을 본다.
이른봄에 환하게 피어나서는
웃음 반 울음 반으로 반짝이다가
흔적 없이 지고 마는 풀꽃,
친구여, 세상이란
우리가 풀꽃으로 한철을 누리다간
훌훌 떠밀려가는 언덕이거니.
먹빛 아픔을 벗고
짐 지기 차마 어려운 사랑마저 벗어버리고
허공에 살을 섞는 茶毘의 고운 연기
그 끝을 따르고 따르는 시선에
황홀한 물살이 어린다
친구여.
" 금강굴 가는 길 "
신록이 향기로웠다
비선대의 너럭바위에 토끼처럼 앉아
시린 여울에 발을 씻고 나선 길
엎어지고 포개진
바윗돌을 톺아 가는데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굽이에서
아내는 자꾸만 뒤에 처진다
계면쩍은 은혼의 여행길
느지막한 오후 참에
금강굴로 오르는 길
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마
늙은 느티나무의 작은 구멍을 향해
발밤발밤 기어오르는
불쌍한 개미들처럼
여보, 차라리 애기 하나
더 낳는 게 낫지
못 올라가겠어요
힘들고 가파른 길이
어디 금강굴 가는 길뿐이랴 싶어
숨찬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데
아내의 살쩍머리
저 아래 비선대 흰 물소리가
한두 올 슬펐다
금강굴 예까지 오는데
이십오 년이라니.
"돌과 시"
햇빛이 부서져서 그물눈으로
일렁거리는 물 속
고운 빛깔로 눈 깜박이는 돌빛
건져올리면
마르면서 마르면서
버짐꽃이 피고
내가 쓰는 글도
물 속 깊은 생각
치렁한 사념의 물빛에서 건져올리면
햇빛에 닿아 푸석푸석
마른 돌꽃이 피고.
"봄의 열쇠"
겨우내 자고 있던 기억의 밀실에
불이 켜진다
일곱시부터 수선스레 산허리에 올라선
오늘 아침의 해는
하낫둘, 하낫둘 맨손체조를 마친 다음
장난꾸러기의 밀린 방학숙제도 들춰보고
물만 먹고 자라는 유리병의 히아신스
포름한 꽃대도 살짝 뽑아올린다
아이들을 놀래줘야지
눈이 커진 개나리
그 노오란 입술이 잿빛 하늘 아래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대학 캠퍼스의 벤치 위에서 정구장 너머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E장조
연둣빛 강물이 흐른다
안녕하셔요, 안녕하셨어요
빨강머리 안토니오 비발디 선생이
멋지게 모자를 쓰고 나온다
비발디 선생은 공연히 이른봄의 해를
한번 치어다보곤 에취, 에취, 엣취 재채기를 한다
짤깍, 잠겨 있던 책상 서랍이 열리고
열쇠는 힘이 세구나
겨우내 자고 있던 기억의 밀실에
불이 켜진다
" 보랏빛 남쪽 "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싱싱한 초록이다
보랏빛 남쪽
하늘을 끌어다 토란잎에 앉은
청개구리
한 소쿠리 감자를 쪄 내온
아내 곁에
졸음이 나비처럼 곱다.
"흑인 영가를 들으며"
유리창 밖에
어둠 한 장이 셀로판지처럼 깨끗하다.
보랏빛 등꽃이 진다.
찻잔 둘레로
흑인 여자의 영혼이 서성거리고,
한 덩이 상념은 풀리어
등꽃으로 맺혔다가 지고 맺혔다가
진다.
밤이 너무 깊어서
물 끓는 소리는 차마 넘치지 않는다.
넘치지 않는 당신의 외로움이
고요하고 투명하다.
물 끓는 소리는 방안 가득
마하리아 잭슨의 저음으로
글썽거리고
도회의 밤은
진한 앙금으로 내린다.
이 밤에 홀로 드는 차
찻잔 속으로 수런수런 등꽃이 지고
차 빛깔이 깊어진다.
"센티멘털 자니"
돌아가리
냇물에 떠 흐르는 흰 꽃잎이듯
창마다 노오란 등불을 켠
밤차를 타고
흘러가리
검은 유리창에 이마를 비쳐보며
그대 아득한 꿈속으로
돌아가리
여름날의 잎새에 후둑이는 은실
은실의 빗발이 되어
아 돌아가고 말리
뒤돌아보면 호젓하기만 한
삶의 외길이
흐린 별빛에 씻기우는데
의심 없이 살아오고 또 살아감이여
내 이제
그대 잠 속의
남 모를 뒤척임이 되어도
어린날의 고운 나팔 소리 담은
채색된 한 잎 가을이 되어도
이만 좋으리
돌아가리
낮은 데로 불어가는 저 바람처럼
"시네라리아"
흐린 날에도 거리에서
낯익은 여인들과 문득 마주치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던
젊은 화가 이준성씨,
그녀들에게 행여
흐르는 눈물을 들킬까봐 그런다 했다.
어느 날이던가
흐린 날에 핀 붉은 시네라리아.
대낮에도
우체국 네거리를 건너는 그이는
그이가 그린 달밤의 사슴이었다.
공보관 육층으로 오르는
길고도 우울한 나선의 층계
그 작은 아틀리에의 슬픈 각혈.
어디로 갔을까
붉은 시네라리아.
ㅁ ㅗ ㄱ ㅜ ㄴ, ㅁ ㅗ ㄱ ㅜ ㄴ......
캔버스 위에는 비가 내리고
사랑하는 이의 초상을 그리던
젊은 화가 이준성씨,
집으로 돌아가는 진북동 길은 질척거리고
부우연 가로등 하나 없이
흐린 날에도
붉은 시네라리아.
" 해변을 달리는 개 "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한 필의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두 필의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세 필의 말이 뛴다.
장 루이 듀록*의 차는 밤새도록 짖으며 달린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네 필의 말이 뛴다.
아이들이 소리치며 해변을 달린다. 파도처럼.
파도가 짖으며 해변을 달린다. 개처럼.
유리창에 흐르는 새벽의 배기음.
저녁의 해변을 달리는 개.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나무가 사랑한 나무"
어둠 속에서 최초의 혼란이 찾아왔다
형성층이 터지고, 땅속을 헤매는 뿌리에 바다가 걸렸다.
터진 자리에는 색색 빛깔의 바다가 모여들었다.
우리는 우연히 서로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꽃잎처럼 붉은 대지의 황혼 속에서
새를 이야기하고, 멀리 사라져간 구름을 이야기했다.
아픈 생채기 위에 수액이 흐르고
어느 날 그것은 숨어서 빛났다
남풍이 잎새 사이를 가로지를 때,
바람의 향기가 그 사랑의 고요함을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냥 만나기만 하였다.
가버린 날이 문득 그리워지고
시간이 오래오래 우리 곁을 흘러간 뒤
눈동자 안에 한 점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겨울 밤의 시"
누가 부르는 것일까.
히스클리프*……
이 추운 골목길
어디에도 소리의 임자는 없이
울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인 양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아니면 저만큼에서
히스클리프……
휘적휘적 어둠발이
옷깃을 적시고
여울가
미루나무 가지엔
떨어질 잎새 하나 없는데
히스클리프……
글썽한 눈빛
멀리 슬리이는 밤 별.
*히스클리프 : 『폭풍의 언덕』의 남자 주인공
"영원한 바다"
율리, 바다에서는
모래알이 모래알끼리 부둥켜안고
한 소절씩 떠나가고 있느냐.
파도는
네 더운 영혼을 식혀주고,
더러는 옛날의 하늘로 올라가선
숨찬 만남의 불빛 노을 속을, 파도는
백설로 떨어지고 있느냐.
율리, 듣고 있느냐.
내 슬픈 잠 위에 쏟아지는 하얀 나뭇잎의 사태를.
어둠 속에서
뿌리에다 힘을 내리는 나무의 잠을,
세계의 영원한 빛을 거기서도 보느냐.
율리, 그 바다에 있느냐.
어쩔 것이냐
북향받이 골목 어귀 측백나무 아랜
눈이 채 녹지 않았는데
저녁 밥상에 나온
쑥국이 철없이 맛나다.
바다 건너 따뜻한 남쪽
서귀포엔 뚜욱뚝 동백꽃 지고
두런두런 개나리도
진달래도
꽃망울을 터친다던가.
영하의 혹독한 추위에 집집마다
난방 보일러가 얼어 터지고
어쩔 것이냐
이 한겨울 전라도만 꽝꽝 얼어붙고
취직 길도 얼어붙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양담배가 제일 잘 팔리는
쓸개 빠진 도시에 살면서
아아 어쩔 것이냐
묵은 된장으로 간맞춰
상큼한 쑥국으로 입맛을 달랠 수밖에는.
"삼겹살을 먹는 법"
나이 들어
삼겹살도 새록새록
맛있구나
마늘에
양념 된장 찍어
들깻잎으로 싸서
세상 미운 놈들
용서하라 용서하라
잘못도 곱게 씹어 용서하라
제깟놈들이 천 년을 살리라고
어렵사리 덜그덕거리는 틀니로
씹어먹어도
새록새록 맛이 있구나.
"세월은 간다"
피켓을 손에 들고
그는 외친다 우렁찬 소리로
일천 구백 구십 이 년(바로 내년 아닌가!)
세계에 종말이 온다
탈출하라 탈출하라 탈출하라고
그의 눈은 천기를 본 탓에
당달봉사처럼 누르께하지만
아무도 그를 소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교통 순경도 오지 않는다
일찍이 M16이 불을 뿜던 거리
지하도 입구
어둠 속에서 꾸역꾸역 솟아나오는 사람들과
어둠 속으로 꾸역꾸역 잦아드는 사람들을 향해
30% 바겐 세일의 입구에서
줄줄이 방패를 내려놓고 앉아
전경들이 현실의 담배를 피우던 곳
그는 외친다 우렁찬 소리로
일천 구백 구십 이 년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거울 속으로"
젊은 전투경찰들이 짝을 지어
안개꽃 그늘 아래로
사라진다
사월의
현대자동차판매영업소 앞
버스를 타고 지나치는데도
목젖이 아프다
유리창을 뚫고 피어나는
한낮의 안개*
모호한 지나치게 모호한
슬픔의
파편
밤이면 밤마다
인신매매단의 시뻘건 눈을 피해
거울 속으로
가로등이 구부러진다
여고 삼학년 우리 아들 딸들이
책가방에 매달려 시들시들
돌아오는
이승의 길 자욱한
안개꽃 꽃잎을 밟고.
* 정권 유지를 위해 남발된 폭동 진압용의 최루가스.
"가을 저녁의 햇살에 기대어"
날 저무는 산 앞에
내 그리움 서 있다.
빗장을 열고 기다리는
내 스무 살 적 그리움
눈물보다 먼저
나뭇잎이 떨어지고
홍차 빛깔로 바알갛게
물이 드는 근심.
빈손으로 터벅터벅
수염 꺼칠한 햇살이
걸어온다.
" 철쭉 "
사랑이여
땅속의 멍든 바윗돌을 그러잡는
미련도 긴 실뿌리를 거두고 태워선
천지 사방에
후여어 날려본들
손을 뻗어
목마른 손을 뻗어
너훌너훌 춤을 추고 오른들
저 아득한 구름 너머로 넘어가는
놀빛으로 타오르리야
늦은 봄 노랗게 흘러가는
산과 산의 부드러운 어깨에 대고
뻐꾸기는 제 울음에 겨워
꿈 같은 하늘 길을
열어 가는데
칼금을 그어대는 바람결에
맨살을 드러내인 채
어찌하면 서러운 저승불로
우리가 타오를 수 있으리야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