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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부산 지역 나들이..(처용암,옥련선원,정묘사) ~~~~~
* 2003년 8월 28일 22시 ~ 2003년 8월 29일 23시까지
1.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의 마지막 주인 8월 29일에 무박 2일의
일정으로 울산과 부산지역을 갔다왔다.
2달여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름방학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 좀더 발전적인 2학기의 새출발을 다지는 뜻에서
알바 쉬는 날인 29일에 남동임해(울산,부산)지역으로
훌쩍 떠난 것이다.
그렇다고
여름방학 동안 그냥 수도권(首都圈)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7월초에는 4일 동안 단양(丹陽)시골집에
머물러 있었고, 7월 말에는 월악산(月岳山)의
송계계곡과 미륵리 절터를 답사했으며, 8월 9일에는 동해(東海)지역으로
놀러갔었고(자세한
내용은 동해지역 후기 참조), 8월
16일에는 서해안의 변산반도(邊山半島)지역(자세한
내용은 변산반도,
내소사 후기 참조)으로
놀러가서 간만에
바다와 갯뻘에서 시원하게 뛰어놀고 등등, 남부럽지 않은
여름을 즐겼다.
그러나 어느덧 방학 마지막 주에 이르렀고, 2학기 때는 1학기
때 보다 더 힘들꺼라는 생각에 방학의 마지막을
장식할겸 해서 어디론가 가고 싶어졌고, 그 가고 싶은
지역으로 한반도의 남동임해(南東臨海)지역인 부산과
울산이
자연스럽게 결정되면서(8월 28일에 결정),
바로 그날 밤 22:30분에(8월
28일) 간단히 여행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울산,부산 지역까지 타고 갈 교통편은 경주,울산 경유
부전역으로 가는 23:30분발(發) 무궁화호 열차인데,
시간이 좀 촉박하군..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이르니 밤 23:20분. 서둘러서 서울역사(驛舍,
사적 284호)로
들어가서 울산까지 입석표를 구입하고, 부전행 열차에
탑승하였다.
이번에 내가
타는 열차는 서울역을 23:30분에 출발하여
부산의 부전역(釜田驛)으로 가는 무궁화호 제261열차인데,
나는 울산역(서울역에서 1110리)까지
타고 간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좌석이 남아있지
않은지라, 심야 열차로
울산까지 입석으로 가야 된다. 입석요금은
주중 할인(15%)과 학생할인(20%), 입석할인 적용하여 11200원..
2. 23:30분이
되자 열차는 서울역을 출발..
나는 우선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제발 자리 주인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다.
내가 탄 열차는 한?漢江)을 건너 23:40분에 영등포역에
도착.. 다행히 자리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역인 수원역에서 자리주인이 나타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서가게 되고..
나는 간혹 보이는 빈자리에 앉기도 하고, 물론 얼마못가서
떨려났지만..
객실 제일 뒤쪽 공간에 앉거나 서 있기도 하고, 객실 밖
복도에 앉아서 잠도 청해보고, (그
날따라 입석 승객이 대개
많았다. 그래서 서로를 위안삼아..) 베개용으로
가져온 책을 읽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니
어느덧 대전의
관문인 대전역(새벽 1:40분경)에 이르렀다.
대전역에서 사람들이 은근히 많이 내리는지라 이제부터
편안히 앉아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으나, 내린
숫자
만큼의 사람들이 타는 지라, 결국 자리에서 떨려났다.
그래서 다시 입석의 고행(苦行)은 시작되고...
영동역에서 자리가 하나 생겨서 앉았더니만(심야의
영동역에서 타는 승객은 거의 0)
예상치도 못했던 복병(영동역에서
탄 승객)에게 떨려나고... 다시
입석의 고행은 시작...
다행히 김천역에서 자리가 서너개 생긴지라,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서 잠을 청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앉은
자리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 2시)
3. 울산역은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예상외로 내린 승객은 별로
없었다.
나는 밀려오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열나게 하여, 졸음을 쫓아낸 다음, 맞이방에
들어가서
오늘 일정을 다시 한번 살펴볼 겸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일정 검토와 휴식을 그런데로 끝내고 5:50분에 울산역을
나왔다.
울산역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용연동의 처용암을 갈려면
공업탑까지 나와서 버스를 타야 되는데, 울산역에서 공업탑
(工業塔)까지 거리는 약 4.5km,
걸어가기에는 약간 부담이 되는 거리이다. 그래서 아침산책을 할 겸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울산역에서 공업탑까지는 '삼산로'라는
대로(大路)를 따라 쭉 걸어가면 된다.
울산역전 광장에서 남북으로 직선으로 뻗은 산업로(産業路)를
건너 '삼산로'로 진입.
농수산물시장,울산고속터미널,롯데백화점,현대백화점,올림푸스백화점,달동,롯데마그넷을
지나 50분 만인 6:40분에
공업탑 정류장에 도착했다.
공업탑은 울산의 주요 번화가 겸 교통의 요충지로
울산고속도로와 부산, 기장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울산 외곽지역과 부산,양산 등의 시외지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와 직행버스가 많이 정차하는 요충지이다.
공업탑 정류장에서 용연동 방면으로 갈려면 울산시내버스
266번(연암↔공업탑↔용연동)을
타야 되는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266번 버스가 내 앞에 나타난다. (7시)
성인 요금인 700원을 내고, 버스에 오르긴 했으나, 자리가
없군.. 11리 정도를 걸어왔더니만 이것도 은근히
피곤한데..
다행히도 야음동에서 자리가 무더기로 생겨난 지라,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야음동과 변전소를 지나 '처용로'로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석유화학공단,중공업단지를 비롯한 공장들 뿐..
그 외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완전 공업단지 내부 도로를
가는 듯하군..
역시 울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화학 공업 도시 겸
남동임해공업지역의 핵심이라 할만 하다.
여러 개의 공업단지를 지나 개운포성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고,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으니 오른쪽으로 육지
쪽으로 약간 들어온 바다(灣)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이제 다 온
듯 싶은데..
4-1.
처용암(處容岩)은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만 섬으로, 섬이 보이는 황성동 바닷가에
도선장과 아담한 공원이 꾸며져 있다.
처용암입구 정류장에서 처용암이 보이는 바닷가까지는 도보
2분 거리로, 바닷가에는 처용암에 대한 안내문과 처용가
(處容歌) 가사가 적힌 석비, 그리고 별로 넓지 않은 아담한
공원과 벤치가 전부이다.
공원 앞바다에 떠 있는 처용암은 그냥 조그만 섬으로, 섬의
왼쪽 부분은 바위로 되어 있고, 오른쪽은 약간의 수풀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손길이 거의 없는지,
이름 모를 새들이 그 섬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 조그만 섬은 처음에는 무명(無名)의 서러움을 간직한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나, 9세기 후반, 헌강왕과 처용의
설화로 인해, 일약 유명한 섬으로 뜨기 시작. 지금은 울산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달랑 섬 1개와 바닷가에 만들어진 조그만 공원,
처용암 관련 석비와 안내판이 전부라서 분위기가 좀 썰렁하다.
거기에 한적한 아침시간에 왔으니, 더욱 그렇다. 휴일에
왔으면 사람들이 좀 있을텐데...
공원에는 낚시 나온 어부 1명만 있을 뿐, 대체적으로
조용하다.
그렇지만 처용암과 주변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처용암을 떠 받들고 있는 동해바다(청량천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부분)와 바다건너 서쪽에 산과
시골풍경, 그리고
바닷가에 아담하게 꾸며진 공원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바다 건너
동쪽에 자리잡은 거대한 온산공단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들이 그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망치고 있었다.
거기에 마침 공단 직원들의 아침체조시간인지
국민체조구령이 크게 들려오고, 공단에서 나오는 요란한
소리들이
조용한 분위기의 처용암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군..
그것도 모잘라서, 상류 부분에 세워진 거대한 다리까지,
수채화 같은 처용암 주변 풍경이 산업화에 밀려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듯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유명한 설화를 간직한 곳이라고 해도 산업화라는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수 없나 보다.
산업화가 되기전 처용암 주변의 경관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산업화에 밀려 초라한 존재가 되어
버린듯..
이 처용암은 울산광역시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로 보는 것보다는 그냥 처용설화와
관련된
기념물로 보면 될 듯 싶다.
◀ 헌강왕과 처용의 설화가 서려 있는 처용암.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섬이 처용암이다)
바다 건너에 자리잡은 온산공단의 웅장함으로 인해 천년의
설화를
간직한 처용암이 좀 초라하게 보인다.
처용암은 1100여년전 신라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이었던
울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념물이요, 온산공단은 20~21세기 세계
최대의
공업도시 울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처용암과 온산공단
모두
울산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처용암
찾아가기 :
① 승용차로 갈 경우 : (처용암 주차
가능)
* 경부고속도로 -> 언양분기점 -> 울산고속도로 ->
신복로터리 -> 공업탑로터리 -> 수암로(야음동,신정동) ->
변전소로터리 -> 처용로 직진 -> 개운포성터입구 ->
처용암 (주차 가능)
* 부산 -> 기장 -> 좌천 -> 남창 -> 덕하 -> 울산역
방면 산업로 -> 변전소로터리에서 우회전 -> 처용로 경유
->
개운포성터입구 -> 처용암
②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 : (2003년 9월 현재)
* 태화교,울산시청.공업탑에서 울산시내버스 266번 이용,
처용암입구 하차,
* 울산역과 울산시외,고속터미널,방어진에서 공업탑,울산시청,병영4거리,연암
방면 울산시내,좌석버스 이용,
율산시청,공업탑,연암에서 울산 266번 이용
♣ 울산시내버스 266번 노선 :
연암↔병영동↔학성공원↔태화교↔시청↔공업탑↔변전소↔성암동↔처용암↔용연동
4-2.
처용암과 처용설화..
처용암의 주인공인 처용은 신라
향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처용가를
지은 인물로 그와 관련된 설화와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해오고
있다.
처용암에는 처용(處容)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 이 설화는 신라가 서서히 망해가던 9세기 후반, 신라 제49대 군주인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5년)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날 헌강왕은 신하들과 함께 개운포(開雲浦)로 놀러갔다. 그 당시 개운포(지금의
울산)는 국제무역항으로
발해,
당나라,일본,동남아,인도,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로 항상 넘쳐나던
곳이었다. 이 곳은 그들이 가져온
물건(비단,
금,은,상아,향신료,기타 토산품들)들을 언제든지
구입할 수 있었으며(물론 주
고객층은 진골귀족을 포함한 귀족들이지만)
이들 외국 상인들은 그들이 가져온 토산품?신라에 팔고, 신라의
토산품을 수입해 갔을 것이고, 어떤 외국 상인들은
신라의 아름다운 산천에 반한 나머지 그냥 신라 땅에 눌러앉은
사람도 꽤 있었을 것이다.
헌강왕이 이
곳으로 놀러왔다는 것은 단순히 놀러온 것이 아니라,
국제무역항인 개운포 지역을 시찰하러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개운포를
통해 외국의 물건이 들어오고, 신라의 물건들이 해외로
수출되고, 이런
활발한 상거래를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이 그 당시 신라 정부의 주요
재정수입원중 하나였다.
그래서 국제무역항 개운포를 가끔씩 둘러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서해지역의
국제무역항인 당항성은
경주에서 약 900리
거리가 되므로, 가기가 쉽지 않으며, 지방 세력(호족)들이
신라정부에 대항하면서 각 연고지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지방에
대한 조세 징수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신라
정부의 재정은 계속 악화되어갔다. 거기에 진골 귀족들의
호화사치로 그나마
있는 재정도 바닥난 상태)개운포에 가서 현지 상인들과
외국상인들을 격려도 하고, 좋은 물건 있으면 얻어오고.
등등..
어쨌든 개운포에서 볼 일을 마치고 경주로 환궁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에 헌강왕이 깜짝 놀라 일관(日官)들에게 물어보니,
일관들이 "이는 동해 용왕의 조화로
생각되오니, 폐하(陛下)
께서 용왕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면 해결이 될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 헌강왕이
환궁하려고 하자 갑자기 안개와 구름이 자욱히 끼었다는
것은, 개운포 지역에서 헌강왕을 상대로한 무슨 사건이 발생
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동해용왕은 불만세력이나 헌강왕을 노린
반대파들을 대표하는 단어로 쓰였으며, 조화는 이들이 무슨
난동
이나 반란을 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이에 헌강왕이 신하들에게
대책을 물어보니, 일관들이 '용왕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해결이 된다'
라고 말을 했는데 이는 불만세력 또는 반대파들과 싸우지 말고
평화적으로 타협(유화책)하는
것이 최선책임을 의미하는 듯.]
이에 헌강왕은 일관들의 건의에 따라 개운포 근처에
동해용왕을 위한 사찰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이 사찰이 바로 망해사(望海寺,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이다.
현재 절터만 남아있음>
그러자 삽시간에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개이면서,(개운포開雲浦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고 함) 동해용왕이 아들 7명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이 때 동해용왕이 아들을
데리고 나타난
곳이 '돌섬'이란
섬인데, 이 섬이 바로 처용암이다. 그러니까 처용암의 원래 이름은 '돌섬'이다.
헌강왕은 용왕 부자와 함꼐 즐겁게 놀다가 용왕의 아들 1명을
데리고 경주로 돌아왔다. 왕은 그(경주로
데리고 온 용왕
의 아들)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고, 그에게 미녀를 골라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이라는
벼슬과 집을 하사하였다.
[* 헌강왕이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불만세력들을 위해 사찰을 세우는 등,
유화책을 쓰자, 불만세력들은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기리고, 노래를 불렀다. 이는 불만세력들이 헌강왕의
유화책에 만족하여, 스스로 왕 앞에 나가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헌강왕은 그들을 달래고자 크게 연회를 베풀며
놀았는데, 그 장소가 처용암 주변 지역인 모양이다. 그리고
용왕의 아들 1명을
데리고 ?다는 것은 헌강왕에게 항복한 불만,반대세력들이
헌강왕의 유화책에 따라 신라조정에 진출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그들 세력의 난동이나 반란을 막기 위해 그들 세력의 주요
멤버 1명을 볼모 격으로 데리고 와서 벼슬자리와 아리따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잡아뒀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운지라, 병을 몰고 다니는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하루는 역신이 인간으로
변하여 밤에 몰래 처용의 집에 들어가서 처용의 아내와
동침을 하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던 처용은 궁중에서 국정(國政)을 돌보다가 밤 늦게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고 보니 아내가 외간 남자
와 동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처용은 화를 내는 대신, 그대로 물러나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처용가이다.
* 처용가 * 兮隱吾下於叱古
서울
달밝은 밤에 밤들어 놀다가
서울의 밝은 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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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이 이렇게 노래를 부르자, 역신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처용 앞에 무릎을 끓고 "앞으로
당신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봐도 가까이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멩세를 하고 사라졌다.
그 이후부터 신라 사람들은 정초가 되면 처용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문에 붙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병을
몰고 다니는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처용이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 부른 '처용가'는 신라 향가(鄕歌)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으며, 처용가를 부르면서
추던 춤은 처용무(處容舞) 또는 처용희(處容嬉)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처용무는 처용의 형상을 한 탈을 쓰고, 처용가를 부르면서
추는 탈춤 겸 무용으로, 조선 성종 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하였다.
[*
여茱?역신은 처용을 싫어하는 반대세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반대세력이 처용과 그 주변에게 덤벼들자,
처용은 맞서기는 커녕,
이들에게 관용을 베푼다. 그러자 반대세력들은 그의 관용의
크게 감동하여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처용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여기서 그 반대세력을 역신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처용가와 처용무를 남기고,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하는 등, 대인(大人)의 풍모가 느껴지는 이
처용의 정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거의 없는지라(처용설화의
신비한 내용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된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은 이런
설화들을 기록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과 역사단체에서 내놓은 의견에
따르면 처용은 신라의 화랑, 또는 울산지역의 무당,
또는
울산지역의 호족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어떤 이는
처용의 외모와 의관(衣冠)이 특이하다는 역사적 기록을
예로 들면서, 그가 아라비아에서 온
이슬람상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그
당시 울산지역은
국제무역항이었고, 이슬람 세력에서 온 상인들이 많이
들락거렸으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듯 싶다.
그리고 최근에 처용이 울산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북방계 중간형의 얼굴로, 울산사람이라는
의견을 내놓아서
흥미를 끈다.
그렇지만 어느 것이 진짜 정답이라고 확실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지 않는 한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닌 후대에서
꾸며낸 가상의 인물일 확률도 있다.
어쨌든 처용설화와 처용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는
처용에게 관심이 많은 역사학자나 사학과 출신 학생들이
장차
해결해 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처용설화를 다루면서, 작은 가로 안에 조그만 글씨로 된
문장은 필자가 처용설화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 설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설화의 내용 속에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필자 나름대로의 해석일 뿐이다.
이로써 처용암과 처용설화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5. 처용암이
보이는 바닷가 공원에서 약 30분 동안 머물면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아침바람도 맞아보고, 바다 건너
온산공단에서 들려오는 국민체조구령과 공장 돌아가는
소리도 들어보고, 섬(처용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새들도 바라보고, 수면 위에 얼굴을 내민 물고기들도..
간만에 아침 산책을 해보는군..
어느덧 8시가 되자, 나는 처용암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처용암 앞 바다를 떠났다.
기분같아서는 잠이나 한숨 자고 싶었으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관계로, 그렇게 떠났다.
처용암 입구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니 시내로 나가려는 승객 4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8:20분이 되자 시뻔?나가는 울산시내버스
266번(연암◀공업탑,야음동▶용연)이
와서 잡아타고..
버스가 야음동을 지날 무렵, 나는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보니 어느덧 태화강을
건너 복산동에 이르렀다.
나는 병영동까지 갈까 하다가, 그냥 구역전시장(옛
울산역이 있던 곳)에서
내렸다.
6.
나는 구역전시장을 지나 학성공원 쪽으로 걸어갈려고
했는데, 마침 시장 입구에 국밥을 파는 노점식당이
있군.. 그 식당에는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국밥을 먹고
있었는데, 국밥의 가격을 보니 달랑 2000원이다.
마침 아침 시간이고, 배도 고픈지라 그 아저씨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국밥을 시켰다.
그러자 국밥 아줌마가 내장탕과 씨레기국 어느 것을 먹을
것인지 물어보는군.. 나는 내장탕은 별로 즐기지 않는지라
씨레기국을 먹었다.
씨레기 국밥은 그런데로 먹을 만 했다. 내가 왕성하게 먹어
대자, 국밥 아줌마는 밥과 김치, 국을 더 제공해 준다.
거기에 후식으로 커피까지, 커피 같은 경우 식당 왼쪽에
정수기가 있는데 그 위에 종이컵 수십 잔이 놓여져 있다.
그 종이컵 안에 프림,설탕 등이 들어가 있어서, 그냥 뜨거운
물만 받아서 살살 저어서 먹으면 된다.
그래서 2000원이란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본전을 뽑고,
시장을 나왔는데, 어디가 학성공원
쪽인지 모르겠군.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직진하라고
그러는 지라, 계속 직진하니 학성공원의 서쪽 부분이
나온다.
기왕 여기까지 온거 오랜만에 학성공원을 둘러볼까 했지만,
예전에 2번이나 공원 경내를 둘러보았고, 시간도 상당히
경과한지라, 그냥 통과...
다음 목적지인 부산으로 가기로 하고, 태화강 강변에
자리잡은 옥교동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교동에서 노포동으로 가는 버스는 울산좌석버스 1127번(울산역↔부산노포동)이
있는데, 그 버스로 노포동까지
요금은 무려 1800원(동일
구간 직행버스 요금 3000원)이다. 허걱~
그래서 그냥 1200원 짜리 시내좌석 승차권을 구입,, 태화강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10분 뒤에 울산좌석버스 1127번(울산역◀울산대,웅촌,서창▶부산
노포동전철역)이
온다.
그래서 1200원짜리 승차권만 달랑 내고 탑승.. 쩝.. 돈이
없는 지라..
7.
내가 탄 버스는 태화강을 건너 울산시청,달동을 지나 공업탑에
이른다.
공업탑은 아침 6시경에 왔던 곳으로, 다시 오게 되었군...
공업탑 주변은 언제나 사람과 차량으로 미어터진다.
공업탑로터리, 울주군청을 지나 월드컵경기장이 보이는 4거리에서
우회전, 신복로터리에서 다시 좌회전,
울산대학교와 무거동을 지나니 이제부터는 시골풍경이
펼쳐지고, 버스와 차량 역시 시속 100km를 내면서 날라가기
시작.....
무거동,울산구치소입구를 지나니 율리(栗里)라는
동네가 나온다.
율리는 말그대로 밤나무 마을인데, 마을 뒷산에 아까 전에
언급했던 망해사(望海寺)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절터에는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신라 후기 부도(浮屠) 2기가
남아 있는데, 가보지 않은 관계로 자세한
언급은 생략..
율리를 통과하여 대복리,웅촌,곡천리를 지나 다리를 하나
건너니 이제부터는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이제 경남 땅으로 들어선 것이다.
용당를 지나 웅상읍내(서창)에 이를 무렵, 갑자기 다가온
졸음을 이기지 못해 다시 꾸벅~
잠에서 깨보니 버스 승객들이 모두 차에서 내리고 있는지라,
창 밖을 바라보니 부산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노포동종합터미널과 노포동전철역이
건너편에 보인다.
노포동전철역이 이 버스(울산좌석
1127번)의 종점인지라, 모두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울산 옥교동에서 노포동(老圃洞)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25분..
대체로 빨리 온듯 싶다.
8.
노포동 전철역으로 들어가서 부산지하철
1호선을 탔다.
6개월만에 타본 부산 지하철,, 별로 변한것도 없고, 하도
많이 타서 그런지 별로 새로운 느낌은 없다.
지하철을 타고 범어사,부산대학,동래,연산동,부전을 지나 서면역에서
해운대,장산 방면으로 가는 부산지하철 2호선
으로 갈아타고, 전포,대연,금련산,광안,수영역을 지나 민락역(民樂驛)에서
내렸다.
민락역에서 수영만 방면으로 3분 정도 걸어가면 수영교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 수영교를 건너가면 해운대와
센텀시티가 나오고, 직진하면 수영만 방면으로 가는 백산
산복도로로 나온다.
나는 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옥련선원에
볼 일이 있는지라, 산복도로로 들어선다.
이 도로는 진행 방향 오른쪽으로 나무로 뒤덮힌 백산(百山)자락이,
왼쪽은 수영강(水營江)이 흐르고
있는데. 거의
낭떠러지이다.
도로는 2차선 도로로, 산과 강, 그리고 가까이에 남해바다의
수영만(水營灣)과 광안대교가 보이고, 이 길을 통해
요트경기장과 민락수변공원,
민락동횟타운, 광안해수욕장 등으로 갈 수 있어,
드라이브 하기에 아주 좋은 코스이다.
나무로 울창한 백산 산복도로를 넘어가니 수영2교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동방5거리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5분 정도 가면
민락초등학교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민락초교 쪽으로
들어가면 민락초교 정문 왼쪽에 옥련선원으로
들어가는 약간 가파른 길이 나온다.
9.
그 길로 들어서면 바로 옥련선원의 일주문(一柱門)이
나오는데,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이다.
일주문은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으며, 2개의 나무기둥에는
용이 1마리씩 그려져 있는데, 그 용의 모습을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로 올라갈 듯한 기세이다. 그만큼
용이 잘 그려졌다는 뜻...
밤에 보면 왠지 무서울 듯 싶다.
일주문을 지나면, 길 양쪽으로 무수히 많은 석등(石燈)들이
시립(侍立)하듯 서 있는데, 이 석등들이 일주문부터
정상 부분에 세워진 미륵대불(彌勒大佛)까지 계속 일정
간격을 유지하면서 양쪽이 마주보도록 세워져 있다.
물론 석등의 조성연대는 20세기 후반이다.
옥련선원 처럼 이렇게 석등이 많은 절은 처음이다.
내가 대충 석등의 수를 세보니(물론
세다 말았지만) 50기는 넘는 듯
싶군..
석등은 말 그대로 불을 밝히는 석조물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가로등 이나 전등, 형광등 정도로 보면 될 듯 싶다.
이 석등은 주로 심야시간에 화사석(火舍石)에 불을
밝히는데, 불이 켜진 석등은 작년 8월, 새벽 3~4시에 찾아갔던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본 것이
전부이다. 그 때 대웅전 앞에 불이 켜진 석등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군..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올라가면 옥련선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 나온다. 유치원에는 어린애들이 유치원 교사와
함께 놀고 있군.. 그 때가 좋은 시절이지... 세상물정
모르고 놀 수 있으니..
유치원 입구를 지나면 바로 옥련선원 경내로 들어서는 길이
나오고, 앞쪽에는 미륵대불로 올라가는 넓은 길이
있는데, 이 길목에 약수터가 자리잡고 있다. 마침 날씨도
덥고, 목도 마른지라 물을 몇모금 마셔주고,
다시 미륵대불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 5분 정도 올라가니,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미륵대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10.
미륵대불은 1992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약 1500톤에 달한다.
이 대불(大佛)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약 15m이다.
높이나 무게, 불상의 조각미를 봤을 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미륵불, 천안 태조산(太祖山)의 미륵불,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거대한 대불 등에 버금가는
불상이다.
대불은 앉아 있는
좌상(坐像)을 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어깨높이만큼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
시무외인(여원인과 함께 통인<通印>)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귀(耳)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으며,
꼽슬머리인 나발 위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좌상의 형태는 결가부좌인데,
오른쪽 발이 왼쪽
다리 위에 놓인 길상좌이다. 반대로 왼발이 오른쪽 다리
위에 놓인 것은 항마좌라고 한다.
무거운 대불을 떠받들고 있는 연화대좌(蓮花大座) 주위에는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고, 양쪽에 석등 2기가 세워져
있다.
이들 석등의 용도는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석등
자체가 석가의 광명(光明)을 상징한다고 한다.
대불 앞에?예불을 드리는 넓직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마침 예불을 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 모두 구석에 자리잡은 건물 그늘에
앉아있었다.
대불은 동쪽, 정확하게 해운대 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쪽 광안리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진짜 멋있을 텐데..
좀 아쉽군.. 미륵불은 원래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정석(定石)인가? 잘 모르겠군..
미륵대불은 이정도로 마무리를 짓고(이거
보러 온게 아니거든), 다시 내려와서 옥련선원 경내로
들어섰다.
여기서 잠깐 옥련선원의 내력(內歷)을
살펴보면
◀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옥련선원 미륵대불
* 동쪽(해운대 지역)을 바라보고 있는 이 좌불상은 총 무게
1500톤, 높이는 15m에 이른다.
11. 옥련선원(玉蓮禪院)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이 절은 미륵부처의 용화세계를 지향하는 호국사찰로, 신라와 당나라가 죽기살기로
맞짱을 뜨던 시기인 670년
(문무왕 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글쎄..? 원효대사가 과연 부산 바닷가까지 왔을까??
어쨌든 신라시대 때 창건되어, 절 이름을 '백산사'라
하였다. 그 이후 10세기 초반에 그 유명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은둔하여 참선을 했다고 전한다. 글쎄 이것도 그리
신뢰할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다.
민락동에서 가까운 해운대 동백섬에 최치원이 새겼다고
전하는 각자(刻字)가 남아 있어서, 어느정도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 각자의 주인공이 과연 최치원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 이후 뚜렷한 사적(寺跡)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임진왜란 때 쪽발이들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파괴된 채 흔적만 남아있다가 1604년에 중건하였다.
1635년(인조 11년)에 해운선사가 절 이름을 옥련암(玉蓮庵)으로
고쳤으며, 1976년에 주지승인 현진(玄眞)이 대웅전
을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옥련선원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1998년에 부산광역시 전통사찰 28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보현전, 대웅전, 심우전, 수련정,
범종각 등의
건물과 우리나라 최대급 불상 중 하나인 미륵대불, 그리고
조선 후기에 새겨진 마애불이 삼성각 뒷쪽 바위에
남아 있어, 옥련선원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외에 임진왜란 때
쪽발이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좌수영(左水營,
현재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망미동 지역) 소속 군사들과
백성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좌수영
무주망령천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석가의 진신사리 5과를
모신 사리탑 등이
있다.
옥련선원도 부산의 주요 고찰(古刹)중 하나로, 비록 오래된
티는 나지 않지만, 부산 최대의 미륵대불이 있고,
부산에서 거의 유일한 조선시대 마애불을 가지고 있으며, 절
앞쪽으로 수영만, 광안해수욕장, 민락수변공원,
해운대 바닷가와 세계 최대급을 자랑하는 광안대교(廣安大橋)가
한눈에 보이는 등, 관망(觀望)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
옥련선원
찾아가기 :
① 지하철로 갈 경우 : (2003년 9월 현재) 부산 지하철 2호선 민락역에서 하차, 수영2교,민락동
방면 산복도로를
지나면 수영2교가 있는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에서 동방5거리,광안동 방면 도로로 조금만 가다보면
'민락초등학교'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는데,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옥련선원이 나온다. 민락역에서 도보 20분.
② 시내버스로 갈 경우 : (2003년 9월 현재)
* 부산시내버스 62번(민락동◀서면▶신라대학교),
83번(민락동◀서면▶부전역),83-1번(민락동◀대연동▶초읍),
106번(서면◀황령산터널▶민락동),108번(민락동◀서면▶엄궁농수산센터),108-1번(민락동◀개금동▶엄궁아파트단지),
181번(광안1동◀해운대역▶기장읍
교리)을 타고 'MBC앞'에서 하차,
수영2교 방면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민락초등학교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도보 10분 거리
12.
옥련선원 경내로 들어서니 길 왼쪽에 요사채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한옥식 건물인데,
승려와 신도들로 부지런히 들락날락 하는군..
큰 건물을 지나면 잔디와 꽃들로 꾸며진 대웅전(大雄殿)
앞뜰이 나온다.
뜰에는 이름 모를 주황색 계통의 화사한 꽃들이 수십 송이
피어있었는데, 꽃 향기에 취할 것 같군..
뜰에서 동쪽(해운대가 보이는 방향)
방향에 범종이 달려 있는 범종각이 있고, 북쪽(수영동,반여동
방면)방향에는 보현당
(普賢堂)이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뜰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옥련선원의 금당(金堂)격인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총 9칸짜리
맞배지?건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향(東向)이다. 전각 내
불단(佛壇)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왼쪽 석축 위에는 삼성각(三聖閣)이란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이 건물은 산신,독성(나반존자),칠성(치성광여래)을
모시고 있다.
산신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숭배하던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물이며, 칠성신과 독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 3성은 불교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석가모니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들로, 4세기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가 우리나라에 정착, 한국 특유의 한국식 불교로
발전하면서, 이들 3성을 사찰 내에 모시게 된 것이다.
삼성각 내부를 살펴보니 왼쪽에 독성(獨聖,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도가 걸려 있고, 가운데에는 산신상(像)이
세워져 있는데, 그 옆에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다. 산신상 오른쪽에는 칠성신
(七星神,치성광여래)이 그려진 칠성도가 걸려 있다.
삼성각을 둘러보고, 대웅전 뒤쪽으로 가니 뒤쪽 언덕 위에
조그만 크기의 석불입상 2기가 세워져 있다.
이들 석불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군..
석불입상 오른쪽에는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3층석탑이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며 세워져 있다. 물론 20세기 후반에
세워진 석탑이다.
그런데 내가 보고싶어 하는 마애불이 보이질 않는군.. 절
경내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건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문득 삼성각 뒷쪽 언덕 구석을 바라보니, 무슨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바위가 자리잡고 있군..
그래서 그 바위에 마애불이 있는 듯 싶어 올라갔는데, 길은
수풀에 묻혀 있어,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의 손길이
거의 없는 듯 싶군..
어쨌든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바위 앞으로 가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그 바위에 그 마애불이 주무시고 있다는군..
허걱~ 그런데 안내판에 쓰여진 내용은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인 2000년 이전 것이다.
그리고 마애불과 그 주변은 옥련선원에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지, 수풀만 무성하고, 마애불로 들어서는 길도
거의 없다 싶이 하고, 마애불을 찾는 이들도 없고..
옥련선원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이 마애불이
천덕꾸러기 인양 한쪽 구석에 쓸쓸이 있는 모습이 참
안쓰러워
보인다.
사람들의 접근도 거의 없는지, 촛대나 예불을 드린 흔적도
없고, 마애불로 들어서는 길도 수풀에 가려 안보이고,
옥련선원 절 자체는 크고 화려한데, 정작 마애불은 푸대접을
받고 있는 듯 싶다.
13. 삼성각 뒤쪽 언덕에 자리잡은 이
마애불의 정식 명칭은 '마애지장보살좌상'이다.
이 마애불은 20001년에 부산
지방문화재자료 7호로 지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비지정문화재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21세기 들어와서 문화재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마애불의 조성연대는 신라시대 때 세워진 백산사 시절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맞다면
이 마애불은
신라시대(신라 후기)마애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애불의 양식과 기타 자료를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닌 거의
억지에 가까우며, 정확한 조성연대는 조선
후기(17~18세기)이다.
이 마애불은 선으로 처리된 선각(線刻) 마애불로, 얼굴과
머리 부분은 선으로 처리했으며, 다른 부분은 저부조
(低浮彫)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현재 마멸이 심하여
마애불의 대체적인 모습은 보기 힘들고, 선각 일부분만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마애불이 벌써 이 지경이 되버리다니.. 그 동안
마애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 불상이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해마다 불어오는 태풍
등의 바람으로 인해 저렇게 되버린 건지...
이 마애불은 부산지역에 거의 유일한 마애불로, 조선시대
수군기지가 있던 경상좌수영 부근에 자리잡고 있어,
좌수영 소속 군인들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이 그들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고, 좌수영 부근 어민들이 풍어와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이 불상은 정확하게
해운대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이 마애불이
광안동,민락동 바닷가를 바라보며
서 있고 그 모습이 제대로 남아 있는 마애불로 기대를 하고
왔으나. 실상 와보니, 바닷가 대신 해운대,재송동을
바라보고 있고, 마애불도 겨우 선부분이 보일랑 말랑하고,
마애불로 들어서는 길 역시 아예 없다 싶이하고 참
실망이다.
내가 본 마애불 중 보존상태가 제일 안좋은 편인데, 탁본을
해야 마애불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을 듯 싶군..
어쨌든 마애불의 보존 상태가 너무 안좋아서,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다리인지 분간 할 수가 없다.
◀ 옥련선원 마애지장보살좌상 (예전 사진)
* 마멸이 심하여 마애불의 본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겨우 선각 부분만 간신히 볼 수 있을 뿐이다.
14.
마애불을 둘러보고 삼성각으로 내려왔다.
대웅전과 삼성각은 신도들이 수시로 찾아오는데, 마애불은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이로써 옥련선원과 조선후기 마애불 관람은 이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다시 민락동(민락초교,MBC)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 다음 목적지인 정묘사로 가기 위해 광안해수욕장
부근 동방5거리에서 부산시내버스 62번(신라대↔민락동)
을 타고 광안동,수영동,연제구청을 지나 양정전철역에서
내렸다.
양정역에서 초읍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하마정 4거리가 나오는데, 하마정은 예전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던
곳이다. 하마비는 보통 향교나 왕릉, 사당 앞에 세웠는데,
하마비가 있는 곳은 무조건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신성시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이 곳에 하마비를 세운 이유는 정묘사가 있는 화지산 경내에
해당되므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하마비는
정묘사 입구로 옮겼으며, 그 비석이 있던 자리는 계속 하마정으로
불리우고 있다.
하마정를 지나 초읍 방면으로 10분 가량 걸어가면 도로
오른쪽에 정묘사 경내로 들어서는 삼문(三門)이 나온다.
삼문 앞에는 동래정씨 문중에서 세운 무슨 교육관 건물?
주차장 등이 있다.
나는 원경문이라 쓰인 삼문을 통해 동래정씨의 영원한 성역 정묘사
경내로 들어선다.
15. 정묘사(鄭墓祠)는
동래정씨의 시조인 호장공(戶長公) 정문도(鄭文道)의
묘와 사당이 있는 곳으로, 화지산
(華池山)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문도의 묘를 흔히
정묘(鄭墓)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정씨의 무덤이란 뜻.
이 정묘는 풍수지리 관련 서적과 연구서에서 많이 언급될
정도로 묘자리가 좋은 곳이다.
그 덕분인지 동래정씨 문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가요의 대표적인
노래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을 남긴 정서(鄭敍),
조선 성종 때 명신(名臣)인 정난종(鄭蘭宗), 조선 중종 때
활동했던 정광필
(鄭光弼), 조선 세종~세조때 활동하던 정창손(鄭昌孫)등이
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생략...
정묘사를 껴안듯 자리잡고 있는 화지산은
북쪽에 초읍고개를 통해 금정산과 연결이 되는 산인데,
지금의 연지동
지역에 화지연(華池淵)이란 연못이 있어서, 화지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화지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이 정묘사는 동래정씨의
영원히 성역지(聖域地)로써, 시조에게 제사지내는 사당과
시조의 묘인 정묘가 있으며, 지금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경내에는 울창한 나무들과 조그만 계곡이 있으며, 정묘
오른쪽에 약수터가 있고, 정묘 왼쪽에
천연기념물 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가 정묘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정묘사와 정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그 외에 정묘에 얽힌 풍수지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생략한다.
현재 정묘를 포함한 화지산 일대는 화지공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
정묘사,배롱나무
찾아가기 :
① 지하철로 갈 경우 : (2003년 9월 현재)
* 부산 지하철 1호선 양정역에서 하차, 하마정,초읍
방면으로 도보 15분. 또는 부산시내버스
33,44,63,112,179번을
타고, 정묘사 앞에서 하차.
② 시내버스로 갈 경우 : (2003년 9월 현재)
* 부산시내버스 33번(초읍동◀구포역▶만덕동),44번(당감동◀연산동▶반여3동),63번(부산진시장◀초읍▶해운대역),
112번(전포동◀안락동▶반송),179번(회동동◀안락동▶국제백양아파트)을
타고 정묘사 앞에서 苟?
16. 정묘사(鄭墓祠)
경내로 들어서니 시원한 숲과 숲길이 나를 맞이한다.
숲길 오른쪽에는 조그만 개울도 졸졸졸 흐르고, 울창한
숲으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져 시원하다.
술길을 따라 3분 정도 올라가면, 동래정씨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 나온다. 현재 사당은 보수공사중..
여러 명의 목수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군.
◀ 정묘사 경내
* 왼쪽에 사당, 오른쪽에 동래정씨 시조인 정문도의 묘
사당 오른쪽에는
정묘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배롱나무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다.
이 배롱나무는 보통 '부산진 배롱나무'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행정구역상 부산진구(釜山鎭區)에
속해서 그러나.. 아니면 부산진과 가까워서 그런가..?
이 나무는
수령(樹齡)이 약 800년 된 나무로써, 정문도의 아들이
정문도의 묘를 봉분할 때, 심었다고 전한다.
그 때가 대략 고려초기인 12세기 경이다.
이 나무는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원 줄기는 고사하여
수간만 남아 있으나, 나무의 뜨거운 생명력으로 인해,
새로운
움이 여러 갈래로 나와 뿌리에서부터 측간을 이루고 있다.
동쪽의 나무는 4개의 측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높이
8.3m에 두레는 약 0.3m에 이르고, 서쪽의 것은 3개의 측간에
높이 0.8m에 이른다. 나무에서 피는 꽃의
색깔은
분홍색 꽃으로 일명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배롱나무란
이름보다는 백일홍으로 더 알려져 있다.
배롱나무는 부처 꽃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꽃이 100일
동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
부르는데,
이 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자생해온 나무 중 하나이다.
이 배롱나무는 천연기념물 1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여름에 찾아와서 그런지, 나무에는
화사한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봄을 상징하는 꽃 중에 하나인 벚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벚꽃놀이 장소의 대명사인 여의도 윤중제에도 벚꽃대신
백일홍을 심었으면 좋지 않을까 싶군..
어쨌든 이 나무는 동래정씨 시조묘를 800년 이상 지켜온
영원한 보디가드로 앞으로도 계속 정묘와 함께 할 것이다.
◀ 천연기념물 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백일홍)
◀ 배롱나무(백일홍)에 화사하게 핀 분홍색 꽃들.
17. 배롱나무
오른쪽에는 넓은 묘역이 있는데, 이 묘역이 바로 정묘이다.
묘역 주변은 철책이 쳐져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정묘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니 약수터가 나오는군.
약수터에는 물을 뜨러 온 사람 서너명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마침 목이 마른지라, 물을 몇모금 마시고.. 아 시원하다..
약수터에서 삼문까지 조그만 개울이흐르고 있는데, 요즘
계속되는 비로 인해, 수량이 제법 많다.
그리고 약수터 오른쪽으로 거제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군,
공원 곳곳에 마련된 벤치와 휴식장소에는 부근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낮잠을 자거나, 또는
산책을 즐기고 있다. 이런 풍경은 다른 공원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들인데, 동래정씨의 성역이나 다름 없는 정묘사가
이렇게 시민들과 가까웠다니, 보통 이런 곳은 개방을 잘
안하는 편인데, 놀랍군..
이로써 정묘사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15시)
18.
정묘사를 나오면서, 이제 어디로 갈까 생각을 해본다.
부산을 뜰 시간이 아직 4시간 정도 남아있는지라.
이리저리 생각을 한 끝에 그냥 서울로 가기로 했다.
서울로 갈려면 부산역이나 구포역으로 가야 되는데,
열차표를 구포역 출발로 예약을 한지라, 구포역으로 가기로
하고, 정묘사 정류장에서 부산시내버스 33번(만덕1동◀하마정,서면,서부터미널,구포역▶초읍동)을
타고, 하마정,
서면,개금동,서부터미널,모라동을 지나 구포역(龜浦驛)에서
하차, 구포역사(驛舍)내로 들어가서 기존에 예약한
것을 취소하고, 17:27분에 서울 가는 열차표를 구입했다. (16시)
열차시간까지 아직 1시간에 여유가 있는지라, 부근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고, 역사에서 어유롭게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덧 개표시간, 표확인을 받고 타는 곳으로 나간다.
17:27분이 되자 서울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246열차가
역내로 들어서고, 나는 지정 좌석인 8호차
44번에 앉았다.
운임은 16800원,
이제부터 할일은 자는 것밖에 없다. 그 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구포역을 출발한지 얼마안되서 나는 서서히 잠이 들고..
5시간에 수면 끝에, 22:31분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열차가 지정시간보다 3분 일찍 도착하는 이변이 발생..
요즘 열차를 십중팔구 지연을 일삼는데, 지연의 단골 구간인
경부선에서 지연은 커녕 3분씩이나 일찍 도착을 하다니,
?이런날도 있구나.. 제국주의로 이리저리 설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칭찬할만한 일이로다..
서울역에서 서울좌석버스 2번(도봉산◀고려대,종로▶서울역)을
타고 도봉동 집에 들어가니
23:40분...
-> 이로써 울산,부산 지역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19. 마무리
이번
여행은 길고도 짧은 여름방학이 끝난 아쉬움을 달래고, 힘찬
2학기의 시작을 다짐하는 뜻에서 간만에 울산과
부산지역으로 갔다.
이번 여행에서 둘러본 곳은, 처용암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소해
할
듯 싶다. 특히 부산의 옥련선원 마애불과 정묘사의
배롱나무는 부산에 사는 사람들 조차 잘 모르는
존재들인지라,
더욱 그럴 듯 싶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곳, 혹은 알고 있어도 관심을 안가져
주는 이름 없는 문화재와 명소를 찾아다니는 것이 내
답사여행의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리고 그런 곳을 찾아
열심히 다니는 것은 나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그런 명소와 문화유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지역의 역사와 전설, 기타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느낌을 가져볼 수 있다.
울산 황성동 앞바다에 떠 있는 처용암을 통해 처용설화를
살펴보았다. 처용은 신라향가의 대표적인 노래인 '처용가'
를 만든 신비의 인물로, 그의 대한 수수께끼는 역사학계에서
풀어야 할 주요 숙제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필자는 처용설화를 언급하면서, 나름대로 그 설화를
해석해 보았다. 설화는 있는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그 속에 숨겨진 내용을 찾아야 된다. 즉 해석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설화들 대부분은 약간 신이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는데, 그 것들을 잘 살펴보면 그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해석한 내용이 100% 맞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설화의 전례를 참조하여, 나름대로 시도해 본 것이다.
처용가와 처용설화를 통해 처용의 대인다운 풍모를
느꼈는데.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역신에게 관용을 베푸는 그 정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너죽고 나살자 할텐데..
처용암을 통해서 신라시대 국제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렸던
개운포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지금은 처용암과 성터만
남았지만, 지금의 부산항처럼 북적거리지 않았을까
싶다.
부산으로 넘어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옥련선원은 수영만이
보이는 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사찰인데, 규모도 상당하고,
특히 정상 부분에 자리잡은 거대한 미륵대불은 위엄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중생들을 맞이하여
어루만져주는
인자한 미륵불로, 오늘도 신도들의 소원을 접수하고 있을
것이다. 이 불상에서 아쉬운 것은 넓은 광안리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으면 아주 멋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군..
옥련선원 뒤쪽 구석에 자리한 마애불은 조선후기 마애불로
비록 부산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마멸이 심하여
어디가 손이고, 발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 훼손이 심하고,
거기에 인적도 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고, 신도들도
거의 안찾아오고, 마애불의 한숨이 들리우는 듯 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정묘사는 동래정씨의 성역으로써, 정묘
왼쪽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배롱나무(백일홍)이 정묘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마침 주황색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피어 있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 이 후기는 2003년 9월
23일에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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