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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여름, 산 따라 길 따라
- ①영월 외곽까지 -
해마다 여름 휴가 때가되면 가족들에게 불쑥 내뱉는 나의 일방적 휴가일정 발표. 에에~ 이번 휴가는 2박3일 예정으로 산 좋고 물 맑은 000 곳 일대로 간다. 자아! 내일 아침 출발이닷. 이러한 비민주적이고 가부장적인 결정에 아내와 두 자식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해하곤 한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나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따르면서도 군말 없이 순응하는 가족들이 사랑스럽다. 아내는 그렇다 치더라도 고3 딸아이와 고1 아들녀석의 순순한 동참이 더욱 마음을 편하게 한다.
면면히 굴곡 없이 이어지는 직장생활에서 최근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정신적으로 피로한 업무를 맡다보니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게 심신에 엉겨붙어 있다. 휴식이란 게 무언가.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마음껏 풀어놓는 것이 아닌가. 단 며칠이라도 산수간(山水間)에 의탁하여 만사를 잊고 싶은 것이다. 내 경우 최근 사오 년 간의 여름휴가 양태를 보면, 확실히 남에게 구속받지 아니하고 혼자만의 자유을 구가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집안 형제들이나 주위에 있는 친구가족들, 처가댁의 처남과 동서들의 휴가여행 동행제의도 있었지만 이러저러한 핑계로 결국 같이 동행하지 않았다. 내 식솔들만의 오붓한 여행을 고집하고 언젠가부터 형성된 타인에게 간섭받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내 성격 탓이다. 휴가나 여행에 있어서 이러한 흐름은 여럿이 어울려 질박하게 며칠을 왁자하게 보내기보다는, 내 자신만의 눈에 특별히 들어오는 산하 곳곳의 비경을 홀로 만끽하는 남들이 이해 못할 나만의 괴벽이다.
그렇다고 홀로 독야청청한 문사의 기질로 소요하며 세외고인(世外古人)처럼 행세하는 것은 아니다. 번잡한 누항에 스며들어 왁자지껄 떠들며, 인생의 수다스러움에 흠뻑 젖는 바도 동경한다. 다만 휴식을 위한 휴가여행 때의 여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차 중에서 가급적 가족들끼리 모처럼 격의 없는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가장으로서의 허세를 버리고 수다스러움을 내보이려 애썼다. 간헐적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견비통인지, 오십견인지 모를 통증을 잊기 위해서도 말이다.
네 명의 식구들을 안전하게 실어 나를 애마(愛馬)를 소개해 보면, 이놈의 혈통은 평범하지만 젊고 힘이 좋은 편이다. 이름은 인천33누 3602. 2003년형 아반테XD. 하얀 몸통에 날렵한 것이 믿음직스럽다. 2년 전 9년 동안이나 나를 위해 시봉하다가 퇴임한 애기(愛騎) 프라이드 보다 근골이 좋을 뿐만 아니라 안장도 널찍하다. 이미 이놈은 작년에 전남 땅끝 마을을 거쳐 보길도까지 원정한바 있는 든든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승무원의 인적사항과 제원을 일별하여 보면, 기수 한기홍 당년 48세 58킬로그램, 조수 아내 이영숙 당년 44세 54킬로그램, 간호요원 딸 한우리 고교3년 방년 18세 53킬로그램, 보디가드요원 아들 한만리 고교1년 당년 16세 95킬로그램이다. 승무원 중에서 애마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는 단연 보디가드요원이다. 신장 183쎈티미터에 체중이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가 흔들어대는 차내의 진동이 만만치 않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2년 전 퇴역한 프라이드가 가련하고 그리운 모습으로 삼삼히 떠오른다. 가냘픈 몸매에 강하지 못한 근력으로 무지막지한 보디가드요원을 비롯한 승무원들을 다년간 싣고 다닌 그 안타까운 노력과 눈물겨운 봉사가 가슴을 쳐온다. 그 녀석… 토종 노새 같더니만. 만에 하나라도 기구한 운명으로 이어져 중고차량 수출라인을 통해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팔려가 제2의 신산한 고초나 겪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거야. 암!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푹 쉬고 있어야지….
최근 몇 년 동안 남편의 일방적인 ‘길 따라 산 따라’ 휴가 노정에 대하여 묵묵히 수긍하고 있는 아내에게, 다음날 새벽 세시쯤 떠나자고 했다. 자명종 시계를 맞추어놓고 일찌감치 취침에 들었다. 아주 개운하게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이른바 숙면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눈을 떠보니, 어이없게도 아침나절이다. 자명종 시계를 보니 여섯시 반이다. 문득 요즈음 우울한 표정의 아내 얼굴이 눈에 잡혔다. 왜 새벽에 깨우지 않았어? 짜증 섞인 어투가 새어 나왔다. 아내는 한사코 새벽에 깨웠었노라고 우겼다.
아이들과 남편의 곤하게 자는 모습을 보고 그냥 두었다며, 자명종은 이상이 없노라고 했다. 그래… 좀 늦게 출발하면 또 어떤가. 아내는 이른바 비정규직으로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있다. 요즘 불경기 탓으로 일감이 없어 며칠 쉬고 있는 중이다. 마침 휴가중인 내게 있어서는 가족이 오붓하게 어울릴 수 있는 절호의 짬을 얻은 셈인데, 아내의 얼굴은 밝지가 않다. 빠듯한 남편의 경제력에 도움이 되고자 또는 건전한 부업활동으로 중년의 삶에 활력소를 가져보고자 하는 아내의 선택이다. 그러나 언제나 아이들 교육비마저도 제대로 충당치 못하는 현실에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 적지 않은 비용이 새어나가는 휴가여행이 아내로서는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보, 돈이라는 것은 악착스럽게 덤빈다고 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중 어쩌다 한번 가게되는 휴가여행 며칠을 접는다고 얼마나 살림살이가 늘어나겠소? 오히려 한 이삼일이라도 복잡하고 짜증나는 현실에서 벗어나 산천경개와 벗한다면 그 개운함이 천만금보다 더 소중한 게 아니겠소…. 하면서 아내를 달랬다. 결국 밝은 표정이 된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나서야 애마에 전원 탑승할 수 있었다.
7월26일 월요일 오전 아홉시 반. 해마다 여름휴가기간 중에서 황금주일로 치는 첫날이다.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피서차량의 러쉬 행렬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도로는 한산했다. 요즘의 경기침체와 서민경제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았다. 내수부진으로 기업들은 투자를 하지 않고 있고, 재력 있는 큰손들은 해외로 투자방향을 전환했다하니 큰일이다. 개미같이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작은 꿈이나마 소중히 보듬으며 행복의 과실을 따려고 주어진 일을 군말 없이 꾸려나가는 다수의 서민들이 9할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
이 나라에 개미들의 희망과 꿈이 삭아들고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회색의 현실뿐이라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모름지기 정치가들이나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피부에 시원스레 와 닿는 위민(爲民)의 철학부터 가져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통치철학이 있을 것 아닌가. 답답하고 암울한 기운이 눈가를 맴돌았다. 서해안고속도로를 거쳐 신갈 인터체인지의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할 때까지 순풍에 돛단 듯 거침없이 주파했다. 어? 한십분이 왠 일이야? 보다드 아들녀석에게 농을 걸었다. ‘한십분’이란 차에만 타면 10분도 안되어 끄덕끄덕 졸기 시작하는 아들에게 붙인 별명이다.
녀석이 씨익 웃으면서, 에이~ 내가 졸면 아빠도 졸음이 올까봐 그래요 한다. 대견스럽고 원하던 대답이다. 그래 아빠의 이 길 따라 산 따라 여행은 차창밖에 펼쳐지는 우리 대한민국의 골짜기 하나 하나 나무 한 그루마다 스며있는 멋과 비의(秘義)를 관상하고, 그곳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들을 흡입하는 여행이란다. 뇌까리면서 이정표를 보니 어느덧 문막을 지나 원주에 가까워져 있다. 그야말로 여름날의 시원한 질주였다. 내친김에 제천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승무원들에게 일렀다. 뒷좌석에서는 아내와 딸녀석의 도란도란 나누는 일상사에 대한 정담이 정겨웁다.
일년 내내 입시준비에 지쳐 있어야하는, 고3이라는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난 듯한 딸내미의 활기찬 목소리도 그윽한 평온을 더해준다. 아내의 표정도 가끔씩 딸에 대한 핀잔을 건네면서도 환하다. 모녀가 깔깔 웃는 모습이 너무도 좋아 보인다. 아! 이것이 행복이다. 가족 모두가 좁은 공간에서 평화롭고 유쾌한 호흡을 나누는 시간의 면면한 흐름. 간간이 합창하듯 터지는 네 사람 모두의 웃음소리. 행복이란 결코 아득한 단애에 걸려있는 희귀한 석청(石淸)이나, 천애를 휘돌아 간 구중심처 어느 곳의 비경에 숨어있는 신선초(神仙草)가 아니다. 행복은 비바람과 서리가 교차하여 흩뿌리는 누항의 번잡 속에서도 순간순간 그 해맑은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당초 제천에서 점심을 하기로 하였으나, 애마의 빠른 질주로 영월로 향하였다. 고속도로를 나와 녹녹치 않은 고개를 넘으니 유장한 적송(赤松)들이 준령에 시립해 있다. 단종애사의 고장 영월이다. 특유의 붉은 몸체를 드러내고 있는 적송들. 사실 나의 여행길에서 적송군(群)을 만나는 것은 고향에 온 것 같은 평화요, 도락(道樂)의 발견이다. 심산유곡이나 국립공원 같은 대자연의 보호구역에서 볼 수 있는 적송의 즐비한 출현은 곧 내 심신의 카타르시스를 충일하게 발흥시킨다. 풍진을 털어 버린 가뿐한 상태로 선계(仙界)에 진입하는 내 의식의 버팀목들이다.
영월 시내에 진입하면서 감회가 피어올랐다. 십이 년 전쯤일까. 당시 경기도 군포에서 거주하면서 교유하던 친한 벗들과 함께 가족단위로 영월에 와서 단종 유배지 청령포 앞에서 텐트를 치고, 2박3일 동안 야영한 추억이 있다. 그 추억이 아직껏 뇌리에 선명한 것은 한여름 밤 강변에서 지인들과 모기를 쫓으며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을 가졌었다는 회포다. 각박한 인생사에서 서로 흉금을 터놓고 각기 살아가는 삶의 진한 페이소스를 피력한다는 것은 너무도 인상에 남는 개운한 추억인 것이다.
그 당시 함께 한 세 가족의 오늘날 근황은 어떠할까? 그들은 아직도 경기도 안양 권에서 살고 있을까. 그리움이 솟구쳐 올랐다. 건설업을 하는 김형과 가족들, 광고업을 하는 박형과 그 가족. 그리고 나와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호형호제하면서 우의를 다지던 이선배와 가족들 하며…. 그 후로 내가 인천으로 이주함에 따라 어느덧 연락이 끊어져 버린 잊혀져 가는 얼굴들. 그들의 소탈한 면모가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며 동고동락했던 일들이 삼삼하게 어른거린다.
영월읍내를 거쳐 청령포(淸泠浦)에 도착하였다. 점심나절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강 건너 울창한 송림 사이로 조선 제6대 단종 임금이 한을 되씹으며 유배생활을 하던 어소(御所)가 언뜻 보였다. 동강 푸른 물은 유배지를 절해고도로 유리시키듯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대저 역사란 무엇인가. 영광을 일구었든 비통을 주었든 인간의 명석한 사고와 우매함, 간교한 이상이 겹쳐 구불구불 풍상맞은 고목의 나이테처럼 시대의 질곡을 새기며, 무한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 역사가 아닌가. 후세에 깨어있는 혹자들이 경탄과 비탄의 염(念)을 끌로 새기듯 조각해 내는 것을 대중들은 사가(史家)의 활연대오로 받들며 춘추필법을 논하는 것이리라.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다는 말도 있지만, 500여 년 전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世祖)의 처사는 자못 역사에 대한 씁쓸한 비감을 주고 있다. 인근 식당을 기웃거리며 아이들에게 무얼 먹고 싶냐고 물으니,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원한 것을 먹고 싶다고 한다. 마침 수석들이 그럴듯하게 진열되어 있는 토속 음식점이 있어 들어갔다. 옥외에 마련된 시원한 간이 평상에 앉아 강원도 냉면에 감자부침 한 접시를 시켰다. 동강 푸른 물을 내려다보며 평상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채로 시원한 냉면을 즐기니, 이 또한 부러울 것 없는 잔잔한 행복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감자부침개의 맛에 몰두하고 있다. 한 접시를 더 시키면서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음미한다. 강심(江心)에 빛나는 작은 파랑들이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강변 수초 더미 속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민 이름 모를 꽃송이를 유혹하는 한낮…. 푸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산모롱이 솜틀 집을 아예 파묻어 버린 듯 하다. 나는 호접몽(胡蝶夢)에라도 빠져든 것일까. 눈두덩이 나른하게 나르시즘에 빠져든다. 녹수청산에 화홍유록(花紅柳綠)이라…. 이쯤 되면 두자미(杜子美.두보)의 곡강시(曲江詩)라도 봄을 여름으로 고쳐 읊조려 볼 요량이다.
一片花飛減却夏
風飄萬点正愁人
且看欲盡花經眼
莫厭傷多酒入唇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을 볼 때마다
여름이 줄어드는 것 같아 마음이 서글픈데
마지막 꽃송이 떨어질 때는
찌꺼기 술이라도 마시며
사라지는 여름에 취하고 싶네
포만감은 없으나 맛있게 요기를 끝내고 강변 선착장으로 나갔다. 단종의 유배지 어소를 보기 위해서다. 승선표를 끊은 다음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통통배를 기다리면서, 12년 전 텐트를 치고 벗들과 야영하였던 모래사장을 살펴보았다. 관광지 정비사업 탓인지 그 때에 피서했던 부근의 모래사장은 없어지고 강물이 언덕까지 밀려와 있다. 다만 약 20여 평 될까말까한 모래톱만이 남아있다. 그 당시 야영 이틀째 날인 가에 익사사고가 있었다. 점심 무렵 일행과 같이 부근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동네아이들로 보이는 소년들 대여섯 명이 뛰어들었다. 물가에서 자란 탓인지 깊은 곳까지 헤엄쳐 오고 가면서 노는 아이들의 물장난을 재미있게 보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한 아이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일행과 같이 주변을 안타깝게 찾아보고 있는데, 연락이 되었는지 해병전우회 소속 잠수부 2인이 출동하여 인근 물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모래사장에서 점심을 지어먹을 때까지 수색작업만 계속될 뿐이었다. 점심 후 당시 네 살바기 아들녀석이 갑자기 슬리퍼 한 짝이 물에 떠내려갔다며 찾아달라고 아우성이다. 잠수부들이 수면 위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와중에 조심스럽게 물 속을 몇 번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아들녀석은 더욱 성화를 부렸다.
이틀 전 사준 새것으로서 모양마저 예쁜 슬리퍼인 탓인지 녀석의 집착은 대단했다. 미련을 갖고 또 물에 들어 가려하니, 아내가 말렸다. 실종된 소년 때문에 난리인데 무슨 망발이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 속 깊은 곳 용궁에 있는 별주부라는 거대한 거북이가 가져갔다고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오후 내내 소년을 찾던 잠수부원들은 결국 찾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년이 빠진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별로 깊지도 않고 물살도 완만한 곳이었다. 다만 물 속 곳곳에 모래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그곳이 의심스러웠으나, 결국 안타깝게도 찾지 못하고 만 것이었다.
그 소년의 비통한 운명이려니 하면서 일행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왔다. 소년의 할머니로 보이는 분과 여러 사람들이 강변을 오르내렸다. 할머니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밭일을 하다 왔는지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로 허름한 치마를 펄럭이며 넋 나간 얼굴로 물가를 오갔다. 저녁나절에는 동네사람들로부터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 물에 빠진 소년의 바로 위에 형도 작년에 이곳에서 익사했다는 딱한 말이었다. 참으로 비운의 형제요, 집안이었다. 그 날 밤은 일행과 밤새 술을 마시면서 운명과 삶을 논하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회상에서 깨어날 즈음 통통배가 손바닥만한 선착장에 당도했다. 가족과 함께 배에 올랐다. 검표를 끝내자마자 배는 통통거리며 선수를 틀었다. 강폭은 70여 미터 정도 될까. 비록 짧은 거리지만 배에는 구명용 부의(浮衣)가 비치되어 있었다. 뱃전에 기대어 난간을 잡고 있으니 통통배의 힘찬 동력이 손바닥에 전해져 왔다. 아마도 영월군청에서 운영하는 배일 것이다. 왕복 승선요금은 어른이 1,300원 학생이 1,000원인데 관광 철이나 주말에는 이용객이 많아 영월군의 세외수입(稅外收入) 확충에 제법 기여할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어소가 있는 방향의 백사장 자갈길을 걸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크고 작은 강석(江石)들이 보였다. 큰 것은 빨래판 만한 것부터 작은 것은 손바닥만한 것까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한때는 유명 경승지나 깊은 산으로 유람을 떠나면 그곳에서 반드시 기형의 돌 한 점을 들고 오는 버릇이 있었다. 그곳에 갔다왔다는 징표로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어리석은 소치였다. 그러나 그렇게 가져온 돌들은 그냥 돌일 뿐이어서 잠시 시간이 지나면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그 타의에 의하여 고향을 떠난 돌들은 연로하신 어머니가 옥상의 장독 뚜껑을 눌러놓는 돌로 쓰이거나, 보일러실의 삐꺽대는 문짝을 받쳐두는 용도로서 기능하는 그야말로 잡석의 쓰임새였을 뿐이었다.
물론 내겐 수석을 식별할 줄 아는 안목도 없었거니와, 본격적으로 탐석(探石)에 심취하여 수석동호회에라도 들어가 심미안을 기르는 노력을 기울일 만한 집착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선배와의 주석에서 우연히 수석 얘기가 나왔는데, 그 선배의 수석관(壽石觀)은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 놓았다. 선배의 신조는 일생일석(一生一石). 자신은 평생동안 딱 한 개의 돌만을 얻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오매불망하는 수석은 죽을 때까지 습득하지 못한다는 그의 부연설명은 더욱 기가 막혔다. 살아 생전에 한 개의 돌이니, 그 돌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곧 임종직전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수석이란 심안(心眼)에 영구히 담아두는 이상향의 돌일 뿐, 생전에는 탐석을 할 망정 절대로 한사람의 호사취미를 위하여 불쑥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수석의 오의(奧義)도 아닐뿐더러 대자연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석은 목숨 수(壽)자를 쓴다는 해석이었다. 참으로 오묘하고 깊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 후로 일품석일 망정 산수간에서 몰래 집으로 가져오는 얌체 짓은 삼가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언덕배기 위의 식당 정원에 즐비하게 진열해놓은 기암괴석들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분명 석부수석 분재를 염두에 둔 듯한 산수형 석회암 돌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밑둥을 전기톱으로 잘라서 좌대에 앉히기 쉽게 손질된 것들이었다. 그 많은 수석들이 만일 이곳 동강일대 구석구석 비경에서 잘라온 것이라면 개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이다.
방송에서는 연일 10년만의 폭염(暴炎)이라는 멘트가 나오고 있을 만큼 백사장 길도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뒤에 쳐져서 따라오고 있는 아내와 달의 모습이 폭염 속에서도 다정해 보였다. 모녀가 길 위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무척 흐뭇해 보였다. 옆에는 저벅저벅 보폭을 맞춰 걸어가는 듬직한 보디가드 아들의 널찍한 어깨가 있다. '인생길'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부모자식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야말로 인생 길인 것이리라. 가족만의 오붓한 여행은 이래서 얻는 것이 많을뿐더러 혈육의 정에 대한 확인과 유대를 더욱 두텁게 하는 유익한 시간인 것이다.
단종 임금은 세종23년(1441년)에 태어나 12세인 1452년에 조선의 제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즉위 3년 만에 옥좌에서 물러났다. 1457년 세조에 의해 이곳 청령포로 위리안치 되었고, 그 해 10월24일 홍수를 피해 머물던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울창한 송림 속으로 들어가자 유달리 눈에 띄는 노송이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는 관음송(觀音松)인데, 수령은 600년이 되었고 단종 임금이 나뭇가지 위에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소나무야말로 550년 전 단종의 용안을 뵙고 이 21세기까지 살아 남아 있는 유일한 생물인 것이다.
어허라! 인간은 100년도 못살면서 온 우주를 통찰하려는 미망에 허덕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데, 묵묵한 소나무는 느긋하게 천년을 기약하며 의연하고나.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단종이 기거하던 곳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당시 건축양식으로 어소를 재현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각 방마다 시종하는 인물들의 형상을 인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관심이 가는 방은 역시 임금이 거처하던 방이었는데 작은 서탁에 책을 펴놓고 좌정해 있는 어린 임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색 도포에 선비 갓을 쓰고 있었는데, 시선은 책에서 떠나 질곡 속에서도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문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격동하는 정란(靖亂) 속에서 짧은 세상을 살아야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임금의 방 맞은편에 있는 방에는 한 노년의 백의 선비가 부복하고서 오열을 터트리는 모습의 인형이 있었다.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현장이련가. 엎드려 비탄에 젖은 채 폐주를 위로하고 있는 노선비의 울음소리가 단장의 메아리처럼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오는 아들녀석에게 계유정란(癸酉靖難)에 대하여 짧게 얘기했으나 목소리에 흥을 묻히지는 못했다.
[①영월 외곽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