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그리고 남방 불교의 예식에서는 항상 이 말을 먼저 세번 외우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북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부처님께 귀의하는 문구입니다.
그러면 단어를 하나하나 음미해보면서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모(Namo, 南無)>는 우리가 잘 알듯이 <귀의하다>라는 뜻을 가진 명사인데 이 처럼 공경을 뜻하는 감탄사로서만 쓰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 4격(여격, dative, ~에게)을지배하기 때문에 여기에 걸리는 모든 단어는 모두 여격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말도 그렇지요.
~에게(께) 귀의합니다로 표현 되니 귀의한다는 말은 모두 여격을 지배하지요. 예를 하나 더 들면 우리가 항상 외는 천수경의 제일 처음에 <나모라 다나다라야야>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 말은 다름이아닌 <나모 라뜨나-뜨라야야>를 한문으로 그대로 음역한 것을 우리식으로 말음하는 것입니다. 라뜨나는 보배, 뜨라야야는 3을 뜻하는 산스끄리뜨 뜨라이의 여격이지요. 그래서 삼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이지요.
<땃사(tassa)>는 <그것>, <그사람>을 나타나는 대명사 sa(=he, 남성) tat(=it, 중성)의 여격과 속격(6격, genitive, ~의) 인데 Namo 가 여격을 지배하므로 여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바가와또(bhagavato)> 는 바가완(bhagavan)의 여격으로 바가(bhaga, 복(福), 행운)을 가진 분이란 뜻입니다. 이 바가완이란 말은 지금도 인도에서 가장 널리 쓰여지는 말로서 인도의 모든 신들을 바가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역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세존(世尊) 이란 단어로 옮기고 있고요. 그냥 음역으로 바가범(薄袈梵?)으로도 옮기고 있습니다.
<아라하또(arahato)> 는 arahant (阿羅漢)의 여격입니다. <~할만하다, ~할 가치가 있다.>를 뜻하는 동사 <arh> (to deserve)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마땅히 공경할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중생이 올리는 <공양에 응할만한 분>이라는 뜻에서 한문에서는 응공(應供)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베다문헌이나 자이나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로서 그때당시 인도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 위대한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삼마삼붓닷사(sammaasambhddhassa)>는 한문에서 정등각(正等覺)으로 옮기고 있는 samaasambuddha 의 여격형태입니다. <Sammaa> 는 바름(正)을, <sam> 은 함께, 두루함, 평등함을 나타내는 접두어이고 붓다는 깨달은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고요한 소리에서는 이 문구를 <그분 부처님 아라한 정등각께 귀의합니다>로 옮기고 있습니다.
번 호 : 3 / 8 등록일 : 1999년 03월 23일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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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Ti-sara.na (띠사라나, 삼귀의)
[Ti-sara.na (띠사라나, 삼귀의)]
Ti 는 셋을 뜻하는 서수이고 Sara.na 는 protection, shelter, house를 뜻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삼귀의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삼은 불 법 승을 뜻합니다. 남북불교의 모든 의식이 삼귀의로 시작되고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말이므로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삼귀의의 빠알리어 원문을 적어보고 간단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영역은:
I take refuge in the Buddha!
I take refuge in the Dhamma!
I take refuge in the Sangha! 로 정착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buddham(붓담)등은 buddha등의 목적격이고 sara.nam은 sara.na의 목적격이고요, 뒤의 동사 gacchaami(갓차미)가 목적격을 지배하므로 목적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라남 갓차띠가 일종의 숙어로 쓰여서 의지한다.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구지 직역을 하자면 <부처님을 의지처로하여 갑니다>라고 옮길수 있겠습니다.
동사 갓차미는 어근 <gam> (to go) 의 현재 일인칭 단수형입니다. 우리 나라말도 간다는 동사의 어근이 <가>인데 아주 유사하여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영어와는 달리 타동사로 쓰여서 목적격을 지배합니다.
번 호 : 4 / 8 등록일 : 1999년 03월 28일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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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Cattaari ariya-saccaani (짯따리 아리야삿짜니, 四聖諦)
[Cattaari ariya-saccaani (四聖諦, 네가지 성스런 진리)]
<짯따리 아리야삿짜니>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의 빠알리어 원어입니다.
Cattaari 는 4를 의미하는 서수 catur 의 중성 주격과 목적격의 복수형태입니다. 뒤의 아리야삿짜니의 성 수 격을 따른 것입니다.
Ariya-saccaani 는 ariya(형용사) 와 sacca(중성명사) 라는 두 단어가 합성되어서 중성 주격 복수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BC 1500? 여년전후에 인도로 이주해와서 선주민을 정복하여 소위말하는 베다문화를 일으키고 정착시킨 지금 인도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아리얀 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아리야란 말의 원 의미는 단순히 <아리야족에 속하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초기에 서양 불교학자들은 이 단어를 그냥 번역않고 Ariyan 이라고 그냥 두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즉 Four Ariyan truths등으로 말입니다. 아리야족에 속한다는 말자체가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높은 신분, 고귀한 신분을 뜻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말이 불교에서는 성스러운, 고귀한, 고결한 등을 뜻하는 형용사로 쓰인 것입니다. (산스끄리뜨로는 aarya 인데 제가 머무는 이 곳에 베다 문헌들과 초기 자이나 문헌들이 없어서 이 두 문헌들에 나타나는 아리야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보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다만 자이나에서도 불교와 거의 같은 의미의 형용사로 쓰이고 있으며 베다에서는 주인이나 바라문의 뜻으로 쓰였고 그래서 후대 클라식 산스끄리뜨의 제문헌에서도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고층 베다에서 이 단어가 이방인이나 손님의 뜻으로도 쓰인 것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사실 아리야족들은 인도에서 본다면 원래 이민족들 즉 이방인들이었죠.)
우리가 베다 문헌들과 초기자이나교의 문헌들과 초기불교의 문헌들을 비교해서 읽으면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할까 그런 것 중의하나가 초기불교의 용어들이 거의 모두 기존의 베다나 사문전통에 바탕한 용어들을 재음미하고 재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많은 중요한 용어들중의 하나가 이 ariya라는 용어입니다. 부처님 당시때는 물론 불자라던지 불교신자라던지 하는 그런 통칭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부대중의 개념은 있었지요. 비구(bhikkhu), 비구니(bhikkhuni) 우바새(upaasika), 우바이(upaasakaa) 라는 용어와 개념은 잘 정착이 되었지만 통칭으로 불교인이라는 개념은 없었는데 이 불교인이라는 용어에 해당되어 초기경에 나타나는 것이 이 ariya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이리야라는 단어가 수식어로 들어가는 가르침은 불교 특유의 아주 중요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인도 당시에는 (지금도 물론 그러하지만) 순수한 아리야혈통에 대한 자부심, 아리야족의 순종 후예라는 그런 논쟁이 아주 많았던 시대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사람들이 참된 아리야냐, 누가 참된 아리야족의 후예인가하는데 대한 결론으로 이러한 진리를 따르고 실현하려 노력하는 자들이 참된 아리야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이지요. 육체적인 혈통에의해서 아리야나 바라문이 된다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시고 진리를 구현하는 자야말로 참된 아리야라고 하신 것이지요.
요즘은 Four noble truths 라고 정착이 되었는데 이 아리야를 noble이라고 정착하게 된데는 한역 聖이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제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옛 중국에서의 역경사업은 정말 경이 그 자체입니다. 그분들이 경전을 이해하는 수준이랄까요 그 깊이가 정말 깊었습니다. 요즘 서양학자들의 수준이 깊어지면서 이 분들도 중국에서 600여 년을 지속해왔던 그 역경사업을 경이롭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좀 어렵고 애매한 단어나 문장들은 오히려 서양사람들이 한역을 많이 참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뭇던 부처님께서는 참다운 아리야가 되기위해서는 성스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멧세지를 동시대인들과 온 인류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특히 부처님의 제자는 이런 아리야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는 아리야 사와까 (ariyasaavaka, 성제자) 라고 불리우고,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4제 8정도 등등의 가르침에는 항상 이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Sacca 의 산스끄리뜨 satya인데 be 동사 as 에서 유래된 중성 명사(가능태)입니다. 그래서 어원적인 의미는 <있어야만 하는 것, 존재하는 그 자체, 사실 그 자체> 라 할 수 있겠고 그래서 진리라는 뜻으로 새겨집니다.
사성제의 원어를 적어보겠습니다.
dukkham ariyasaccam (둑카 아리야삿짜, 고성제)
dukkhasamudayam ariyasaccam (둑카사무다야 아리야삿짜, 고집성제)
dukkhanirodham ariyasaccam (둑카니로다 아리야삿짜, 고멸성제)
dukkhanirodhagaaminii pa.tipadaa ariyasaccam (둑카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짜, 고멸도성제)
그럼 다음 번부터는 이 사성제 하나 하나에 대한 정의를 원어로 살펴보겠습니다.
번 호 : 5 / 8 등록일 : 1999년 04월 02일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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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Dukkham ariya-saccam (둑카 아리야삿짜, 고성제)
Dukkham ariya-saccam (둑카 아리야삿짜, 고성제)
이 둑카라는 말은 아마 초기불교 경전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단어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개념이라서 우리가 반드시 음미해보고 내 삶에서 확인하고 넘어가야할 단어입니다. (너무나 중요하고 방대하게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말이라서 어디서부터 접근을 해야할지 막막할 정도이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던 반드시 음미해보아야할 화두이기에 용기를 내어서 한번 적어보고 있습니다.)
어원: 나쁜 의미를 총칭하는 산스끄리뜨의 접두어 du.h 에다가 명사형어미인 ka 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래서 산스끄리뜨로는 du.hkha이고 빠알리어로는 dukkha 인 것입니다. 산스끄리뜨나 인도에서 쓰이는 일반적인 의미는 고통이나 괴로움입니다. 좁게는 육체적인 고통이나 괴로움, 넓게는 정신적인 고뇌, 뇌로움, 불안 등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단순히 이런 차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이 고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사유하는데서 불교는 출발하기 때문이겠지요.
먼저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학자 모든 역자들이 이 단어를 제대로 자기나라말로 옮길 적당한 역어를 찾을 수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야 겠습니다. 빠알리어 사전으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 PTS본 Pali-English 사전에서도 이 문제를 거듭호소하고 있습니다. 苦라는 한문 번역도 마찬가지이고 더군다나 이 苦를 고통, 괴로움으로 한글로 번역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학자는 고를 좁은 신체적 의미 , 좀더 넓은 심리학적 의미, 일반적인 철학적 의미으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신체적으로는 pain(아픔)으로 심리학적으로는 sufferring(고통) 으로 철학적인 면에서는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구분하면서 불교에서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불만족성을 나타낸다고 쓰고 있는데 일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간단히 초기경에 나타나는 둑카의 개념에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기초교리로 잘 알고 있듯이 둑카는 4고 8고로 정형화 되어서 초기경에서도 나타납니다. 저 유명한 초전법륜경이나 대염처경 등등 많은 경에서 둑카는 8고로 정형화되어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jaati (자띠, 태어남) pi(삐, 역시) dukkhaa (둑카요),
2.jaraa (자라, 늙음) pi (삐, 역시) dukkhaa (둑카요),
3.byaadhi pi (뱌디 삐, 늙음 역시) dukkho (둑카요),
4.mara.nam pi (마라남 삐, 죽음 역시) dukkham (둑카요),
5.appiyehi (아삐예히,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것들)과) sampayogo(삼빠요고, 만나는 것) pi(삐, 역시) dukkho(둑카요), <愛別離苦>
6.piyehi (사랑하는 사람들(것들)과) vippayogo pi (윕빠요고, 헤어지는 것 역시) dukkho(둑카요), <怨憎廻苦>
7.yampiccham (얌 삐 잇참, 원하는 것, 그것을) na labhati (나 라바띠, 얻지 못하는 것) tam pi(땀삐, 그것 역시) dukkham(둑카요), <求不得苦>
8.sankhittena(상킷떼나, 요약해서) pa~ncupaadaanakkhandhaa(빤짜 우빠다나칸다, 오온을 취착하는 것(五取蘊)이) dukkhaa(둑카이다.) <略五蔭盛苦>
앞의 7가지는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뼈시리게 느끼고 있는 문제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8번째의 오취온 자체가 고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가르침이 고성제와 사성제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으면서 찰라 찰라에 나고 멸하고를 거듭하고 있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의도들(行), 알음알이(識)를 나로 여겨 집착하는 순간 둑카는 발생하고 만다는 뜻이 오취온이 곧 둑카라는 말에는 들어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오온이 무상이요 고요 무아인줄을 바르게 알아서 취착하지 않으면 고는 해결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조견오온 개공 도일체고액, 즉 <오온을 비추어 그 실체가 없는 줄을 알면 모든 고액을 건넌다>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 오온 각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할 수 있겠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오온의 원어를 음미해볼 때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둘째, 사라뿟따(사리불) 존자는 장부 33경, 상응부 4.259에서 이 둑카의 성질을(dukkhataa, taa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임) 다음의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고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모든 괴로움을 통틀어서 말합니다. 즉 육체적 괴로움(제일 좁은 의미의dukkha), 정신적 괴로움(domanassa = du.h(나쁜)+manas(마음)의 추상명사형)을 통틀은 개념입니다.
괴고성은 변하기 마련이기에(위빠리나마=vi(분리를 나타내는 접두어) +pari(around 를 뜻하는 접두어)+nam(to bend)의 명사형) 고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행복(sukha)도 다 포함되고 맙니다. 육근이 육경을 분별해서 느끼는 세속의 행복은 영원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변하기 마련이니 넓게는 고의 테두리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육체적 즐거움(sukha), 정신적 즐거움(somanassa=su+manas에서 유래된 명사형으로 접두어 su 는 du 의 반대로 좋은 것을 나타내는 접두어입니다.)이 모두 이 괴고성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행고성은 제행무상 제행개고 제법무아의 삼법인에서 보듯이 모든 형성된 것 (sankhaara, 有爲)은 변하기 마련이기에(무상) 고일수 밖에없다는 명제와 상통하고 있습니다. (이 삼법인도 다음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것은 다시 오취온이 고라는 첫번째의 명제와 일맥상통하고 있고요. 아뭇던 오온을 나의 삶의 조건속에서 바르게 이해함이 불교 샌행의 중요한 출발점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이 고의 세가지 속성을 후대 주석서에서는 느낌(vedanaa, 受)의 세가지, 즉 괴로운 느낌(苦受, dukkha vedanaa), 즐거운 느낌(樂受, sukha vedanaa),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不苦不樂受, adukkhamasukha vedanaa) 에 배대시키고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이 고의 문제를 느낌(受)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계신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고를 느끼는 것은 철학의 문제는 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철학은 인식(想, sa~n~naa)에서부터 출발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식을 하던 우리가 감각기관(육근)을 가지고 감각대상(육경)을 접촉(觸, phassa)하는 한 느낌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분명 세가지 즉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피할 수 없는 느낌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연기법에서 말을 하자면 근-경-식-촉-수 는 생명이 있는한 피할 수 없을 것인데 문제는 이 수(受, 느낌)가 애(愛, ta~nhaa, 渴愛)로 발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즉 느낌에 대한 반응이 문제인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은 저항하고 분개하며, 즐거운 느낌은 갈망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대해서는 무지해지기 때문에 이런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이런 느낌들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이들에서 벗어남 등을 까맣게 놓아버리고 이처럼 느낌들에 반응하다가 세월을 다보내고 말며 이런 반응들은 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로 전개되어서 윤회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는 것입니다. (고요한 소리에서 번역한 念受經의 6, 7번 경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 금구의 말씀방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염수경(상응부 느낌편)은 정말 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수행의 말씀이 담겨있는 경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깊이 관찰해보면 고의 문제안에 고의 일어남(집), 고의 사라짐(멸), 고의 소멸로 이르는길(도)이 이미 다 설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느낌을 맨느낌으로 여실지견하게 되면 고는 이미 더 이상 고가 되지 않지요. 고와 낙에대한 반응을 쉬어서 평온(우뻬카)를 개발하고 마음챙김을 깊이하여서 그 힘으로 번뇌를 멸절하여 구경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 초기경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듯이 集法卽滅法(yam ki~nci samudayadhammam tampi nirodhadhammam, 일어난 그대로가 멸하는 법) 인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고성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제행 (모든 우리의 삶의 행위)은 변하기 마련이기에(무상) 불만족 스럽다(고)는 점입니다. 이런 조건지워진 상태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취착하거나 저항하는한 우리는 결코 이 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고는 취착과 저항을 가져오게 마련인 갈애에 조건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이런 갈애를 고의 원인으로 설하시는 고집성제의 원어를 살펴보겠습니다.
과욕을 부려서 주어 섬기다보니 말이 너무 길어지고 현학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저가 권하고 싶은 것은 이런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서 고요한 소리에서 출간된 여러 소책자들을 고요하게 잘 읽어보시라는 것입니다. 고요한 소리 책들이 좀무거운 감은 있겠지만 찬찬히 잘 음미해보시면 초기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집성제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먼저 samudaya라는 단어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이 단어는 sam (together) +ud (up) +i (to go) 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원의미는 함께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데 물밑에서 물방울들이 부글부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生起, 발생, 모임을 뜻하지요. 영어로는 arising, origin 으로 번역합니다. 한문에서는 그래서 모일 集으로 번역하여 집성제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둑카사무다야는 고의 일어남, 즉 고가 생기는 원인을 뜻하지요.
그럼 무엇을 두고 고의 원인이라고 하는가 경을 통해서 관찰해보겟습니다. 대념처경등의 초기경의 많은 부분에서 둑카사무다야(고의 원인)은 다음의 정형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직역을 해보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의 발생에대한 성스런 진리인가? 재생을 하게하고 (ponobbhavikaa = punar(다시)+bhava(존재함)에서 파생된 단어), 즐김과 애욕을 수반하며 (nandii(즐김)-raaga(애욕)-sahagataa(함께함)), 여기 저기서(tatra tarra) 새로운 즐길꺼리를 추구하게하는(abhinandinii) 그 갈애(tan.haa)가 그것이니 즉 이(seyyathidam) 욕애(慾愛, kaama-ta.nhaa), 유애(有愛, bhava-ta.nhaa), 무유애(無有愛, vibhava-ta.nhaa) 이다."
즉 갈애를 고의 원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빠알리어 딴하(ta.nhaa, 산스끄리뜨:뜨르스나(t.r.s.saa)) 는 가뭄과 갈증을 뜻하는 말입니다. 목이 몹씨 말라있을 때 느끼는 그 갈증에 견주어지는 이 갈애야 말로 고의 원인인 것입니다.
욕애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증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지요. 현대의 향락산업이 우리를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유애란 존재에 대한 갈증, 즉 삶에 대한 애착이지요.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는 게 이 삶에 대한 무한대의 갈증이지요.
무유애란 비존재에대한 갈증이지요. 허무주의에 탐닉하는자, 삶의 괴로움에 지친자들이 추구하는 바이지요. 의외로 우리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갈증입니다. 특히 수행자들에게 많이 나타날 수 있는 갈증이지요.
다시, 그럼 무엇을 애타게 갈애하는가? 라고 경은 묻고, 세상에서(loke) 사랑스럽고(piyaruupa), 미쁜 것(sataruupa)을 갈애한다고 답합니다. 계속하여서 그럼 무엇이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미쁜것인가고 묻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 (육근)이 그러하다, 색깔, 소리, 냄세, 맛, 감촉, 생각(육경)이 그러하다, 눈의 의식 … 마음의 의식 (육식)이 그러하다, 계속하여 육촉(감각적 접촉, phassa), 육촉에서 기인한 육수(受, 느낌, vedanaa), 육상(想, 인식, sa~n~naa), 여섯 의도(sa~ncetanaa), 여섯 거치른 생각(尋, vitakka), 여섯 미세한 생각(詞, vicaara) 들이 이 세속에서 사랑스럽고 미쁜 것이어서 이들을 반연하여서 갈애는 생겨나고 정착된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떻게 해서 갈애가 우리 내부에 또아리를 틀게 되는지 정말 적나라하게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정말 찰라 찰라에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경계와 스파크가 일어나서 생기는 제 현상에 밑도 끝도 없는 갈증을 일으키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제 현상에 맛들여 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의 원인이라는 부처님의 생생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위의 진술은 12연기로 대변되는 연기법의 순관 (즉 무명에서 생 노사 우비고뇌가 생겨나는 과정)을 다르게 표현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와 고의 집은 연기법의 순관을 나타내는 가르침이지요. 이부분은 다음에 연기법을 설명할 때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처럼 근-경-식-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의 연기의 고리에서 수(受, 느낌)가 애(愛, 갈애)로 발전되지 않도록 평온(우뻬카)과 마음챙김을 개발하는게 참선공부이고 그렇게해서 이둘이 구극의 청정을 이루어 그 힘으로 번뇌를 멸절하여 즉금에서 열반을 실현하는게 부처님이 해주시는 간절한 멧세지라는 것입니다. 마음챙김(念, sati)을 설하신 초기 경전의 여러 경들, 이를테면, 대념처경, 념신경, 출입식념경 등은 모두 이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기전에 이를 관찰하는 방법을 설하신 경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야(maayaa)라는 말을 많이쓰는데 환(幻), 환영이란 말이지요. 환은 환인데 이 환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환입니다. 그리고 요술쟁이의 속임수도 이 마야라고 부르지요. 베다문헌에서는 그래서 이 마야는 신들의 힘이고 능력이라고 하지요. 이 마야의 힘으로 신들은 세상을 창조하기도하고 세상을 유희하고 즐긴다고 하지요. 후대 대승불교에서도 이 세상을 마야라고 하지요. 이런 영향을 받은 불이일원론 베단따 (advaita-vedaanta) 철학의 창시자요 인도사상계에서 거목인 상까라도 이 세상을 마야로서 설명하고 그래서 후대의 정통파 인도철학자들로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이비라고 비판을 받기도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 느낌이 갈애로 찰라 찰라에 변해가는 이 엄청난 힘이야말로 다름아닌 마야라고 보고 싶습니다. 곰곰히 살펴보고 돌이켜보면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그 맨느낌이 일단 갈애로 변하면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여 폭풍과도 같고 노도와도 같아서 나의 모든 것을 쓸어가버리고 앗아가버리지요. 참으로 이 애욕, 분노, 무지의 마야의 엄청난 위력 앞에 자신은 맥없이 쓰러지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이런 현상을 있는 그대로 침착하게 지켜볼 것을 부처님께서는 거듭거듭말씀하고 계시고 그래서 우뻬카(평온)의 섬(디빠)를 만들고 그것을 의지처로 삼아라고 고구정녕히 참으로 간곡히 설하고 계시지요.
또 사족이 길어졌습니다. 다음에는 고멸성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번 호: 7 / 8 등록일 : 1999년 04월 10일 23:22
조 회: 23 건
제목: Dukkha-nirodham ariya-saccam (둑카니로담 아리야삿짬, 苦滅聖諦)
Dukkha-nirodham ariya-saccam (둑카니로담 아리야삿짬,
苦滅聖諦)
이제는 멸성제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먼저 멸을 뜻하는 빠알리어 nirodha라는 단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어는 ni +rudh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ni 는 아래로(down)를 뜻하는 접두어이고 동사 어근 rudh 는 방해하다 (to obstruct) 는 의미로 쓰입니다. 원의미는 그래서 아래로 내려누르거나 아래로 눌러서 사리지게 하는 것입니다. 앞의 집성제의 집(集, samudaya)이 함께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여 물밑에서 물방울들이 부글부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 니로다(멸)는 뜨거운 철판에 부어진 물이 오그라들어 사라지는 것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滅로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멸성제는 말그대로 고의 소멸, 고가 완전히 소멸된 경지 즉 열반(nibbaana)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두고 고의 소멸이라고 하는가 경을 통해서 관찰해보겟습니다. 대념처경등의 초기경의 많은 부분에서 둑카니로다(고의 사라짐)는 다음의 정형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직역을 해보면;
"무엇이 고의 소멸인가? 오직 그 (tassaa yeva) 갈애의(ta.nhaaya) 남김없는(asesa) 빛바램(viraaga, 離慾)과 소멸(nirodho), 버림(caago), 포기(pa.tinissaggo, 단념), 해탈(mutti, 벗어남), 쌓아두지 않음(anaalayo), 이것을 일러(ayam vuccati) 도반들이여(avuso), 고의 소멸이라한다."
여기서 니로다의 동의어를 버림, 가라앉음, 벗어남(해탈), 쌓아두지 않음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어원을 음미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짜가(caaga, 버림)는 동사 tyaj (to abandon, to forsake)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말그대로 버림, 내던짐을 뜻합니다. 인도 철학, 특히 헌신(박띠, bhakti)을 중요시하는 박띠요가에서는 헌신과도 같이 쓰이는 말입니다.
빠띠니삭가(pa.tinissagga, 포기, 단념)는 prati(각각)+ni(아래로)+s.rj(to let go, send forth) 에서 유래된 명사로 현상을 가게 내버려두어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을 뜻합니다.
뭇띠(mutti, 해탈)은 동사 muc(to release)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해탈을 뜻하는 목카(mokkha, SK:mok.sa, 목샤 = 해탈)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고 같이쓰이는 말입니다.
안알라야(anaalaya, 쌓아두지 않음)은 aa(around)+lii(to cling) 에다가 부정접두어 an 이 첨가되어서 된 명사입니다. 이 알라야라는 단어는 대승의 유식불교에서 제 8식을 상정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소위말하는 아뢰야식은 다름아닌 이 알라야를 음역한 것입니다. 산스끄리뜨에서는 알라야는 집, 큰 건물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힌디에서 위댜ㄹ라야라고 하면 대학을 뜻하는데 위댜(지식, 배움)+알라야(큰 집)하여서 만든 단어입니다. 중국에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하듯이 알라야를 쌓아둔다는 의미를 곁들인 큰 곳간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학자들은 이 알라야를 집착 특히 세속에 대한 집착을 뜻하는 단어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다시 경에서는 그럼 이런 갈애를 어떻게 버리고 소멸시키는가? 하고 묻고 위 집성제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눈 귀 코 혀 몸 마음 (육근); 색깔, 소리, 냄세, 맛, 감촉, 생각(육경); 눈의 알음알이 … 마음의 알음알이 (육식); 계속하여 육촉(감각적 접촉, phassa), 육촉에서 기인한 육수(受, 느낌, vedanaa), 육상(想, 인식, sa~n~naa), 여섯 의도(sa~ncetanaa), 여섯 거치른 생각(尋, vitakka), 여섯 미세한 생각(詞, vicaara) ? 이들이 세속에서 사랑스럽고 미쁜 것인데 이들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소멸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의 진술은 12연기로 대변되는 연기법의 역관을 다르게 표현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의 멸은 연기법의 역관을 나타내는 가르침이지요. 이부분은 다음에 연기법을 설명할 때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고가 완전히 소멸된 경지를 열반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열반의 어원만 간단히 음미해 보려 합니다. 열반은 빠알리어 Nibbaana(닙바나)와 산스끄리뜨어 Nirvaana(니르와나)의 음역인데 nir(without)+vaa(to blow) 의 과거분사형태입니다. 즉 불어서 꺼진 것을 뜻하지요. 탐진치의 삼독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이 열반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적멸(寂滅), 적정(寂靜)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열반이란 술어는 초기 자이나의 경전에서도 등장하는 말인데 불교에서처럼 많이 쓰이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자이나에서는 께왈라(kevala, 唯, 獨存)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요. 자이나에서는 지와(jiiva, 命)가 아지와(ajiiva, 非命, 물질 정신등의 모든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구극으로 삼는데 불어서 꺼진 열반이라는 용어보다는 독존을 뜻하는 께왈라가 더 그 가르침에 어울리는 술어이지요. 그런데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 자아라는 관념이 극복 못된 가르침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고층 우빠니샤드문헌 이전이나 정통 인도 육파철학에서는 열반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후대 우빠니샤드 (불교보다 훨씬후대) 문헌에는 많이 나타납니다. 제일 오래된 문헌은 역시 바가왓기따(Bhagavad-giita)를 들어야겠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브라흐마니르와나(brahmanirvaana)란 말로 나타납니다. 즉 그들이 말하는 궁극인 梵과 이 열반을 동일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열반에 관해서는 월폴라 라훌라 스님이 지은 <What the Buddha taught.> (스스로 찾는행복,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대원정사에서 진철승 거사님이 번역하여 출간했습니다.) 의 멸성제 편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번 호 : 8 / 8 등록일 : 1999년 04월 23일 08:47
조 회 : 36 건
제 목 : Dukkhanirodhagaaminii pa.tipadaa ariyasaccam
(고멸도성제)
이제 고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 즉 도성제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원어는;
Dukkhanirodhagaaminii pa.tipadaa ariyasaccam (둑카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짬)입니다.
먼저 원어를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Dukkhanirodha는 멸성제에서 봤듯이 고(dukkha)의 소멸(nirodha)이란 말입니다. Gaaminii(가미니) 는 동사 gam (to go) 에 행위자를 나타내는 접미어 in 을 붙여서 gamin (가민=가는 자)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다시 ii를 첨가하여서 여성형을 만든 것입니다. 뒤의 빠띠빠다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수식하는 앞의 단어도 여성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의 단어 둑카니로다가미니는 <고의 소멸로 가는> 의 뜻을 나타냅니다.
Pa.tipadaa는 길이나 방법을 나타내는 명사입니다. 접두어 prati (against, again, back, to)와 동사 pad(to go) 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원의미는 이것을 상대해서 가야만하는 것이란 뜻으로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막가(magga)와 동의어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고멸에 이르는 길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고멸에 이르는 길인지 살펴봅시다. 경에서는 거듭해서 다음의 정형구로 8정도가 바로 그것이라고 나타납니다.
직역을 해보면; 무엇이 그리고(katama~ca) 비구들이여 고의 멸로 이르는 길인 성스러운 진리인가? 이 (ayam) 오직(eva) 성스러운 여덟가지(a.t.thangiko) 도(道, maggo)이니 바로 이 (seyyathidam) 정견(sammaadh.t.thi), 정사유(sammaasankappo), 정어(sammaavaacaa), 정업
(sammaakammanto), 정명(sammaa-aajiivo), 정정진(sammaavaayaamo), 정념(sammaasati), 정정(sammaasamaadhi) 이다- 입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각 항목의 원어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팔정도의 각지에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번에 계속해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sammaa(삼마)는 바르다는 뜻인데 miccha(거짓)의 반대어로 나타납니다. 이 팔정도에서는 바르다는 말은 중(中, majjhimaa)을 나타내는데 이것에대해서는 다음번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di.t.thi (딧티)는 동사 d.r's (to see)에서 파생된 추상명사입니다. 그래서 한문에서도 견(見)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삼마딧티는 정견으로 한역되었고 바른 견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right view로 정착이 되고있습니다. 경에서는 사성제를 바로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Sankappo(상깝빠)는 접두어 sam(together) 과 동사 k.lp(to form) 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이리저리 함께 궁글려서 형성되어가는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통칭하는 말이라 볼 수 있겠는데 의도작용이 들어가는 마음 작용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사유라고 번역하는데 이런 의도의 뜻을 강조하기위해서 지(志)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습니다. 영역은
right thought 로 정착되고있습니다.
Vaacaa (와짜)는 동사 vac(to speak)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말을 뜻합니다. 그래서 삼마와짜를 정어라고 한역합니다. 영역은 right speech 입니다.
Kammanta(깜만따)는 kamma+anta로 분석해볼수 있겠는데 깜마는 동사 k.r(to do)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말그대로 까르마 (행위) 일반을 나타냅니다. Anta(안따)는 끝을나타내는 명사이고 접미어로 쓰이면 별의미없이 강조의 뜻으로 쓰인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구지 여기서 의미를 찾자면 깜마(까르마)가 신구의(몸, 말, 뜻)으로 짓는 모든 의도적 행위를 다포함하지만 깜마안따는 업이 뜻에서 시작해서 몸의 행위로 마지막으로 드러나게 되니까 그래서 끝이나 마지막을 뜻하는 안따를 붙여서 구체적으로 몸의 업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삼마깜만따는 그래서 정업(正業)으로 한역되고 right action 으로 영역됩니다.
Aajiivo(아지와)는 접두어 aa(around) 와 동사 jiiv(to live)가 합쳐져서 파생된 명사로서 생명, 수명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생계수단, 즉 삶을 영위하는 방법이나 직업을 뜻합니다. 한역에서는 삼마아지와를 정명(正命)이라 번역하고 right livlihood라고 영역합니다.
Vaayaamo(와야마)는 접두어 vi(seperately)+aa(around)와 동사 yam(to restrain) 이 합성되어서 만들어진 명사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노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삼마와야마는 정정진이라고 한역되고 right effort 로 영역되고 있습니다.
Sati (사띠)는 이 팔정도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인데 그만큼 잘못이해되고 있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동사 sm.r(to remember)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는데 그래서 한역에서는 직역하여서 념(念)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문권에 속하는 나라들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이 사띠를 념으로 번역하고 이해하는 바람에 초기불교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그 중요한 원의미를 상실해버린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아주 초기에 번역한 안반수의경이라는 경의 제목에서 보듯이 이 사띠는 수의(守意)로 번역되고 있는데 (제가 여기서 자료가 없어서 번역가가 안세고인지 구마라습인지 아니면 다른 분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 사띠의 의미를 가장잘 의역한 것이 아닌가 싶고 이렇게 번역을 시도하신 분의 견처와 수행정도를 가늠해볼수 있는 정말 멋진 번역어라 생각됩니다. 영역에서는 mindfulness 라 옮기고 있는데 좋은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고요한 소리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고요한 소리의 시도가 언젠가는 평가받을 날이 올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 사띠를 마음챙김이라 번역했는지는 다음에 소논문형식으로 발표할까 합니다.
Samaadhi(사마디)는 접두어 sam(together)+aa(around) 와 동사 dhaa(to put)가 합성되어서 만들어진 명사로 말그대로 모든 것을 다 (하나로)모아서 잘 놓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정(定)으로 번역하고 영어로는 concentration으로 번역합니다. 음역으로는 삼매라고 옮기는데 너무나 잘알려진 말이지요.
이상 8정도 각지의 의미를 원어에 준해서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이 팔정도는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불교가 도닦는 종교라는데 바로 이 8정도를 닦는 가르침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다른 종교와 불교의 차이를 이 팔정도가 있고 없느냐에 달렸다고 하실 정도로 불교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