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28(목) 평소보다 이른 5시 45분 알람 소리에 깨어 부지런히 준비를 하는데 김홍배 회장님의 전화가 온다.
오늘 답사 함께 갈려했는데 감기 몸살로 도저히 가시기 힘드시다고 하신다. 6시 50분 쯤 김점한 사장님의 전화가 왔다. 벌써 탑리역에서 기다리신다고 7시 10분까지 천천히 나오라고....준비해서 버스에 오르니 몇몇 분이 타고 계신다. 곧 도리원에 도착 20~30분쯤 기다리다 8시에 출발했다.
기다리는 동안 신두칠 사무국장이 밖에 구경하러 나오라해 가보니...
봉양 버스정류장 옆 새로 난 다리와 옛 다리 사이에 전에 없던 큼지막한 시비 2기가 서 있다. 와! 정말 멋진데...
왼쪽 시비는 조지훈 선생이 6.25 전쟁 직후 도리원을 지나면서 어느 부서진 민가를 보고 느낀 시상을 표현한 '도리원에서'란 시였다.
지난 해 우리 의성향토사연구회의 영양답사 때 영양 주실 마을(조지훈 선생의 생가 마을) 앞에 세워진 여러 기의 시비 중 '도리원에서'라는 시를 김종우 작은 도서관 관장께서 제일 먼저 발견하시고 "우리 봉양 도리원에 이 시비가 있어야 하는데 어찌 여기에 세워져 있느냐."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멋진 시비를 이렇게 세운 봉양면민들에게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의성의 문화 수준이 한 결 높아진 듯...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함께 보던 김점한 사장과 김난옥 시인께서는 새로운 부분을 지적하신다. 시비가 있어 멋지기는 한데... 뭔가 공사가 덜 된 듯...시비의 주변 환경이 시멘트와 보도블럭으로만 채워진 것에 아쉬움을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왕 멋진 시비를 세우는데... 작은 공간이지만 벤치 한 개 정도를 놓고... 파란 잔디를 깔든지 색의 배합을 적절히 하여 회색 일변도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멀리서도 눈에 좀 띄도록 했으면 더욱 좋겠다는 의견이다.
이것이 사람의 불필요한 욕심에 속할 까 아니면 문화의 안목들 더욱 키우는 일이 될까...
드디어 서울로 출발...안동 휴게소에서 교수님 한 분을 태우고 바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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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휴게소로 들어갔다. 휴게소 뒤에 단양 적성 산성에 있는 '단양 신라 적성비'를 보기 위해서다.
이 비는 위 부분의 폭 107cm, 이랫 부분의 폭 53cm, 높이 93cm에 평탄한 앞 면에 22행에 걸처 예서풍의 해서문자가 음각되어 있다. 원래 450자가 있었다고 보여지나 비의 윗 부분이 많이 파괴되어 현재 280자 정도의 문자만 읽을 수 있다.
이 비는 아마 단양 적성이 축조될 시기인 545년(진흥왕 6년)~550년(진흥왕 11년) 사이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그동안 영남 지방에만 머물러 있던 신라가 드디어 소백 산맥을 넘어 고구려 땅인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이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함께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이토록 중요한 곳인 이 곳 단양 지역을 장악하는데 기여한 인물들에 대한 포상과 왕의 명령(교시)과 관련된 내용을 새긴 비다(아래 사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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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문에는 진흥왕 때 활약하던 몇 명의 장군들 이름이 보인다. 울릉도를 정복하는 주역이었던 이사부,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무력이 그들이었고...또한 이 비에는 이 지역을 점령하고 산성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추문촌(의성 ?)', '물사벌성(상주 ?)', '고두임성(안동 ?)'이 그곳이다.
추문촌이란 지명은 이 지역에서도 나오지만 경남 함안 고분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이 주변 지역의 지역 명이라 보아도 무방할텐데 '추문'은 '조문'과도 발음이 비슷하다 하여 추문이 곧 '조문'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지명은 대부분 순수한 우리말로 불리워졌으리라. 그러나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어느 하나의 한자로 통일되지 못하고 발음이 비슷한 한자말을 빌려서 쓰다 보니, 어떤 지명의 이름이 다양한 형태로 표기되면서, 극히 제한된 자료에서 추정해야 하는 후대의 사람들이 더욱 어려움에 빠져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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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보다 유물이 적어 실감스럽네요. 조문국 박물관이 개원할 때 이 유물도 반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