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 명문거족 묘역 · 집성촌 즐비
동족 촌락을 이루며 번성한 것으로 알려진 해주 오씨의 묘역.
한남정맥의 첫 번째 답사지 안성에서 양지를 거쳐 용인에 이르면 길은 다시 다섯 갈래로 나뉘어진다. 오던 그대로 곧장 큰길을 따라가면 판교를 거쳐 서울 서빙고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양근(楊根)이 나오며 그 사이로는 광주와 이천으로 통하는 길이 나있다. 또 서쪽으로는 수원으로, 서남쪽으로는 진위로 갈 수 있다. 이렇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점이 되는 곳이 바로 용인시 김량장동에 있는 김량장터인데 과거에는 그 큰길을 '김량대로(金良大路)'라고 하였다. 개성에 착임방(着任房)이라는 총본부가 있었고, 이곳 김량장에는 부본부인 차임방(次任房)을 두었다고 하니 이 장이 가지고 있었던 상 권의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이래 소위 거족(巨族)들에게 사후 안식처로서 각광을 받아온 곳이기 때문이다. 전조인 고려 때는 개성을 중심으로 파주 등 그 주변지역에 귀족들의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바뀌어 그 중심축이 한강 이남으로 옮겨지면서 서울로부터 하루거리인 이곳이 풍수상의 이유와 함께 최적의 장지(葬地)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서울의 벼슬살이에서 밀려나면 복직이 될 때까지 잠시 머무는 집인 별서, 즉 별장을 마련하고 있던 곳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경기지역에도 이들 중 일부의 자손들이 누대에 걸쳐 인근에 주거지를 확대해감에 따라 임시로 거주하던 별서가 향제(鄕第), 즉 지속적인 거주지로 변화해 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경저(京邸)로의 귀경이나 향제로의 낙향이 모두 어려워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지배층들이 앞서 언급한 이유로 별서보다는 분묘와 종토(宗土)를 주로 두었고 그 결과 다른 지역보다 늦은 조선후기, 또는 말기에 와서야 동족들로 구성된 촌락이 등장하였다. 가장 오래된 성씨는 죽산 박씨이고, 가장 번성한 성씨는 해주 오씨다. 조선 태종 때 포은 정몽주의 묘가 이곳으로 옮겨진 배경에는 포은의 아들 종성(宗誠)의 처가인 죽산 박씨 집안, 특히 장인인 박중용(朴仲容)의 주선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죽산을 본관으로 하는 박씨가 이 일대에 세거한 것은 조선 이전으로 올라간다. 죽산 박씨의 경우와 같이 지역적 연원이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곳의 중심세력인 중인파(中仁派)의 중인(中仁)은 여말 선초 때 경기도 양주에서 이곳으로 입향하여 그 자손이 퍼졌다. 처가인 죽산 박씨와의 인연으로 조선 초에 이곳에 입향한 연일 정씨 후손들은 모현면 왕산리와 능원리 등지에 80여호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실제 집성촌을 구성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중반 이후로 추적된다.
연안 이씨는 여말 선초의 인물인 이원발(李元發)의 묘가 고산현(高山縣, 완주군 고산면)에서 세종 21년(1439)에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그 일을 주관하였을 아들 귀령(貴齡 · 1345~1439)의 묘가 연안 이씨 선산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때쯤 용인 입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중반 이후로 조온(趙溫)의 아들인 육(育)이 용인 이씨의 사위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육의 증손이 정암 조광조인데 묘는 수지읍 상현리에 있다. 이곳 한산 이씨는 이색(李穡)의 아들 인재공(麟齋公) 종학(種學 · 1361~1392)을 파시조로 하는 인재공파(麟齋公派)로 손자인 형증(亨增) 이후 용인으로 이거해 왔다. 이윤형(李允泂)의 누이는 조광조의 부인이고 형증의 손자 이자(李자 · 1480∼1533)는 조광조와 함께 사은정(四隱亭)이라고 칭하였다.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吳希文 · 1539~1613)은 연안 이씨 이정수(李廷秀)의 사위가 되면서 입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들 추탄공 오윤겸(吳允謙 · 1559~1636)이 경기도 광주에서 용인 모현 지역으로 옮겨 오산리 본동에서 터를 잡은 이후 자손 일부는 서천리로 옮겼고, 이후 또 그 일부가 수원 영통리로 옮겼는데 그 시기는 대략 18세기 말경이다. 입향조 이유겸(李有謙 · 1586~1663)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쳐 호조참의까지 이르고 아들 숙(숙)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증손인 도암 이재 (李縡 · 1680~1746)는 인현왕후와 민진원의 조카로서, 송준길의 사위인 민유중의 외손으로서, 오두인의 사위로서, 그리고 김창협과 오두인이 사돈이라는 인연 등 노론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고 이후 용인에서는 노루실, 구시울, 통적굴 등에 그 후손들이 세거해왔다. 서울과 지방에 거주하는 종중 성원들을 잇는 거점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용인지역의 많은 무덤들은 지금도 그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을 하는 곳은 비단 무덤뿐이 아니다. 심곡서원과 충렬서원도 제향행사를 통해 같은 기능을 하고 용인의 많은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용인 지역에서 이와같은 분묘나 서원이나 박물관처럼 우리를 과거와 만나게 해주는 또 다른 매개물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일기(日記)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은 기록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이를 증명하듯 숱한 일기자료들이 발굴되어 중요한 역사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 시대가 조선중기까지 올라가는 대표적인 일기로서 이자의 '음애일기(陰崖日記)', 이문건(李文楗· 1495∼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유희춘(柳希春·1512∼1577)의 '미암 일기(眉巖日記)', 그리고 오희문의 '쇄미록'을 든다.
그런데 이 네 일기의 저자 중에 조광조와 어울렸던 음애 이자와 해주 오씨 용인 입향조인 오희문이 이곳 용인 사람이다. 서울 노원에서 살았던 이문건의 경우도 그의 형 이충건의 묘가 이곳에 있어 용인과 인연이 없지 않다. 일기와 용인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얼마 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관란재일기(觀瀾 齋日記)'라는 두툼한 책을 사료총서로 간행하였다. 정관해(鄭觀海· 1873~1949)가 쓴 이 일기는 1912년부터 1947년까지 용인과 서울 및 경기도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과 일상생활을 매우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원삼면 문촌리에 전통건조물 3호로 지정된 '정영대고가'가 있는데 건물주인인 정영대씨의 부친이 바로 이 일기의 저자여서 앞으로 그가 이 일기를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생생한 과거를 전해주리라 기대한다.
- 경기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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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원문보기 글쓴이: Gijuzzang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