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상 이유로 수업참여 못해 죄송함다. 어설픈 해석본올림다. 참고하십시오.
V. 민족성, 종교와 언어(Ethnicity, Religion, and Language)
박사과정 김무철
도입(INTRODUCTION)
민족성, 종교와 언의 다양한 표시와 속성들에 대해서는 탁월하였다. 언어적 다양성과 바벨탑은 거의 보편적인 반면에, 종교는 많은 현대이전의 민족을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제공해왔다. 이것은 특히 민족선거의 신화가 진화해온 그 민족들에서 표시되고 있다. ‘민족-상징적인’접근을 사용하여, 앤소니 스미스(Anthony smith)는 국수주의의 현대이전 신기루와 현대의 기원 양쪽으로, 선택된 민족의 신화들에 대한 개념과 결과들을 연구하며 다른 민족적 신화들, 상징들과 기억들에 기초하여 다양한 유형의 국가적 동일시를 구분한다. 신씨아 엘로우(Cynthia Enloe)는 종교와 국수주의 사이에 이런 다양한 관계들의 토의를 폭넓게 하였다. 그녀는 특히 민족적 그룹에 의한 종교의 사용들과 어떤 교회종교의 전통들과 특별한 민족적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조적으로, 파스칼리스 키트로밀리데스(Paschalis Kitromilides)는 그리스 정교주의는 어떻게 같은 범위에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밀레(Millet)의 보존에 기여했지만 그리스의 독립전쟁 동안 정치적으로 화합했는지를 보이며 결과적으로 비잔틴 정교주의 에큐민(Ecumene)은 1821년 이후 각각의 민족-언어적 ‘상상한(imagined)’ 공동체들로 조각이 났다.
언어공동체는 또 다른 거대한 민족적 표시이며 동원자(mobilizer)였다. 자로슬라브 크레치와 비테즐라브 벨림스키(Jaroslave Krejci and Vitezslav Velimsky)는 다면적인 태도로 유럽에서 민족성을 조사했으며 세부적인 표들로 만든 그들의 조사는 민족에 대한 유럽의 배열에 언어 차별화의 중요성을 노출하고 있다. 1979년에 73 민족그룹들 중에 60경우는 언어로서 정의되어 분류되고 59경우는 충돌지역으로 36경우들에서만 정치적 역사가 중요하였다. 유럽에서 유대인, 그리스인과 같은 이주지역 민족과 터키와 아랍 이민자들 둘에 대해, 자콥 랜바우(Jacob Landau)에 의하면 언어 또한 중요하다. 여기서 주축사회에서 다문화교육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는 그들의 민족-언어적 문화들을 강하게 한다. 존 에드워드(John Edwards)에 의하면, 대중전달역할에 더하여, 언어는 민족그룹을 위한 중요한 사적인 상징적 자원이다. 사적이고 상징적인 표시들은 사회적 이동성을 방해하지 않고 그룹 한계들의 연속성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주장한다. 르로이 베일(LeRoy Vail)에 의하면, 문어와 역사와 같은 상징들은 선교사들과 지식인들의 중요한 구조물들이다. 다른 학자들처럼 베일(Vail)은 아프리카 부족제도와 원시주의의 생각을 거절한다. 남부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은 특히 전통을 회복시키고 민족적 한계들과 과거들을 만드는데 탁월하였다.
31. 선택된 민족(Chosen Peoples)
/앤쏘니 디. 스미스
먼저 민족적 보존의 유형들에 관한 비교분석이 출발할 수 있는 매우 다른 요소들과 가설들은 회상할만한 가치가 있다. 보통 비춰진 것들은 본성적으로 정치적이다: 공동체 자치의 정도, 보존할 그것의 정치적 의지와 그것의 지도자 능력. 때때로, 분석은 경제적이고 생태학적인 변수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특별한 모국들의 소유, 그것들의 위치, 범위와 인구, 그리고 다양한 물질자원의 존재, 공동체 부양을 위한 시설과 기술들. 하지만 다른 세트의 가설들은 민족을 의사전달의 네트워크들로 다루고 관습, 언어와 다른 상징코드들이 어떻게 세대에 걸쳐 공동체 성원들을 함께 묶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찾는다.
이 접근들의 각각과 그들로부터 나온 가설들은 민족적 보존의 연구에 가치 있는 기여들을 할 수 있고 그것들은 더 심층적인 비교조사들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민족 공동체들이 정치적 자치 없이, 그들 자신의 모국 없이, 이것은 드물지만, 스위스에서 언어적 분리가 우리를 상기하는 것처럼, 공통어조차도 없이 오랜 기간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고 남았던 것을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 경우들에서 다른 사회적이고 심리학적인 요소들은 이 부재들을 보상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는 민족적 기억들, 가치들, 상징들, 산화들, 전통들과 같은 민족적 보존에서 주관적인 요소들에서 보다 더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유는 장기적인 민족 보존은 먼저 전문가들과 집단적인 특성과 임무를 가진 높은 감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 의한 능동적인 계발에 의존한다. 민족 공동체의 성원들은 유일한 ‘상위 가족’을 형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적 공동체는 유일하다는 것, 그들은 막스 웨버(Max Weber)가 ‘대체할 수 없는 문화가치’를 가졌다는 것, 그들의 유산은 내부의 부패와 외부 통제에 반대하여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 공동체는 그것의 문화가치를 외부인들에게 보급할 신성한 의무를 가진다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몇을 제외하고 이름 붙여진,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폴란드,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 미국, 아일랜드, 영국과 프랑스민족은 모두 먼 근원, 상징들의 신화들, 전의 명예로운 황금기 기억들을 통하여 민족적 가치와 전통들을 양육함으로서 이런 유일함과 임무를 계발해왔다.
우리는 더 할 수 있다. 황금기의 평범한 선조와 기억들에 대한 신화들은 몇 세대들에 걸쳐 민족적 공동체 성원들을 하나로 묶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민족적 보존을 위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민족적 선거의 신화를 계발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간신히 형성하고 계발한 그 공동체들이 많은 세대들에 걸쳐 그들의 성원들의 특별한 집단생활을 영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이다’는 믿음을 가진 전문가들에 의한 창조와 보급은 장기적인 민족보존을 확인하는데 중요하였다.
민족적 선거의 신화는 분명한 자기민족중심주의와 같지 말아야 한다. 민족 공동체들은 꽤 평범하게 그것 자체를 우주의 도덕적 중심으로 간주되었고 가능한 한 그들 주변의 것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데 영향을 미쳐왔다. 민족적 선거의 신화는 보다 더 요구하고 있다. 선택되는 것은 도덕적 의무들 아래 놓이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도덕적, 의식적이고 법적 코드들을 관찰하고 그렇게 계속하는 동안에서만 할 조건에 선택된다. 선거의 특권은 희생되고, 그들의 생활방식이 신성한 가치들의 표현인 사람들에게만 따른다. 선거의 이점은 요구된 조사들을 충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유지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그런 믿음들의 고전적 표현은 출애굽기의 책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다(19절)
그러므로 지금 너희가 진정으로 말에 의존하고 나의 서약을 지킨다면 너희는 모든 나라로부터 나에게 특별한 보배일 것이다; 모든 땅은 나의 것이고;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의 왕궁이며 신성한 국가일 것이다(출애굽기19:5-6; 비교, 신명기 7:6-13과 10:12-21).
여기서 서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에 의해서 선택되고 다시 찾아 남는다면 지켜야 하는 신명기의 책에서 자세히 설정한, 도덕성, 법과 의식(ritual)의 코드를 말한다. 이 법들과 의식들을 지킴으로써만이 공동체와 그 성원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중동과 유럽에서 선거신화들(Election myths in the Middle East and Europe)
고대에조차도, 유대인들은 그들이 선택되었다고 믿어왔던 유일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생각들의 친밀감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백 년이 빠르게 발견되었다. 수메르와 아카드(지금 이라크 남부)의 땅에서 그들의 독립을 칭송하지만 흩어진 도시국가들은 특히 위기의 시대에 그들의 민족적 친족을 인정했다. 도시국가들의 하나나 다른 것의 왕들은 주기적으로 수메르 민족들을 단결한 반면, 니퍼의 사당에, 수메르 신전의 주신인 에닐(Enlil)의 숭배는 수메르 도시국가들을 위한 종교적 초점으로 작용했다. B.C.300 후반에 우르 3세 왕조에서 수메르의 재생동안 보편적인 민족성에 대한 더 강한 감각은 초기 수메르 황금기 동안에 향수로 표현한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민족적 선거의 감각은 조용하였고 간접적이었다. 지상에 에닐(Enlil)의 대표자로서 왕에 속했으며 신들과 공동체 사이의 어떤 서약이 중재하게 되었던 것은 왕위를 통해서였다.
자기민족 중심주의는 고대 이집트에서 보다 뚜렷하였다. 타르의 땅은 충돌하고, 단합하고 수메르와 아카드의 땅들보다 더 동종(homogeneous)이었다. 특히 튜스모시스3세, 해츠헵서트와 호렘하브(Tuthmosis III, Hatshepsut and Horemhab)와 같은 신왕국 파라오들의 정치적 선전에서, 신-왕의 신성한 선거에 보다 더 강조를 두었다. 따라서 도덕적 조건이 있든 없든, 공동체 선거에 더 강조를 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집트의) 땅’ 밖에 살았던 사람들인, 이방인들보다 문화적 우월성에서 특징적인 이집트 감각은 테반(Theban) 파라오들이 B.C. 16세기에 아시아의 힉소스 왕조로부터 벗어난 후에 두드러졌다. 그러나 한 번 더, 선거의 감각은 헬레니스틱(그리스)과 로마 신기루에 버금갈지라도, 군주와 국가와 함께 흥하고 망했다.
우리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치단체 선거의 분명한 신학은 그 관계 형식들이 근처 동양의, 특히 히타이트의, 모델들에 많이 빚져있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원했던 것처럼 보인다. 중앙 이스라엘의 믿음은 우주의 주인인, 유일신이 모든 그의 창조물들을 위해 그의 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인간성에 구원을 가져올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신의 호의는 세부적인 도덕과 의식적인 코드들의 선택에 의한 완성에 조건적이었다. ‘나는 지상의 모든 가족들에 대해서 너희만을 알아왔으며; 나는 모든 너희의 부정행위들에 대해서 너희를 벌할 것이다’. 아모스의 예언적 심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사회적이고 정치지리적인 위치에 반응하여, 후기 예언자들은 신성한 선거의 도덕적 차원에서 공을 들인,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 간섭을 했다. ‘지상의 모든 가족들은 너희 안에서 축복받을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신의 약속은 두 번째 이사야에 의해 고통 받는 종인,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 정화된다는 믿음으로 변형된다. 신은 깨끗하게 된 이스라엘과 덤으로 세계를 되찾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적들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민족들을 사용한 반면에; 이집트로부터 나온 출애굽기와 시나이에서의 서약은 전체적으로 인간성 회복에 대한 신의 계획의 일부분이다.
그런 개념은 선택된 자에게 무거운 짐을 부여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엄격한 도덕적 기준들에 맞춰 사는 것이 요구된다. 타락하는 사람들은 엄격한 벌에 처해졌다. 이것은 그들의 친족들을 경계하고 그리하여 주기적으로 공동체의 분명한 특징과 유일한 운명을 재확인하기 위해 예언자들, 판사들, 현자들, 다른 도덕적 십자군들에게 거대한 연구를 부과한다. 나중에 신과, 공동체에 그것의 도망갈 수 없는 도덕적 요구들과의 밀접한 관계는 그들의 장기적인 이주지역에서 유대교의 사회적이고 심리학적인 주요동기가 되었다.
왕조적이고 자치단체적인, 민족적 선거의 생각들은 고대의 가까운 동양의 몇몇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몇 개만을 언급할 수 있다. 페르시아사람들 사이에 민족적 선택됨의 믿음은 그들의 오랜 역사 동안에 다양한 외양으로 표면화되어왔다. 사이루스와 다이루스의 거대한 아캐메니드(Achaemenid) 왕국은 초기 제국들로부터 군주의 신성한 선거의 생각을 물러 받았고 그들 스스로 메데스(Medes)와 페르시아안의 특징적인 장점들을 보존했다: 진리, 서열과 정의(truth, order and justice). 사이루스는 마르두크가 그를 정복하게 만들었던 [바빌론의] 검은 머리 사람들을 위해 서열과 평등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찾았는지를 기록하는 반면; 베히스튠(Behistun)에 다리우스의 바위 조각들은 위대한 페르시아 신인 아후라-매즈다(Ahura-Mazda)의 교훈들에 따라 삶의 지혜를 강조하고 그의 많은 신하들에게 페르시아 왕의 특별한 임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런 주제들은 이란의 사사니드(Dassanid) 페르시안 지배자들에 의해 훨씬 더 나중에 차지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 불교는 용기를 얻었고 A.D.16세기에 초스로(Chosroes)1세는 옛날의 페르시아 상징들, 신화들과 의식들의 재생을 부추겼다. 또한 이 기간까지 우리는 투란(Tur'an) 땅에 대해 이란을 방어하는 선택된 기사들인, 위대한 페르시아 귀족들의 업적들을 기록했던 ‘군주의 책’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비록 조로아스터 국가 종교가 페르시아를 도덕적 공동체로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했을지라도, 새로운 페르시아 문화르네상스를 위한 기반을 놓았던 유일한 정체성과 운명의 감각을 세우는데 도왔다.
훨씬 더 나중에, 16세기에 사파비드 왕조 하에서 이슬람의 시이테(Shi'ite) 믿음의 채택은 페르시아 정체성에 새로운 도덕적 범위를 주었다. 현 세기는 고대 아리아 제국 전통들을 재창조하기 위해 페르시아 민족의 삐뚤어진 시도들에 반대하여 시이테(Shi'ite) 국가-종교 공동체와 선교사 운명의 열렬한 재생을 보아왔다.
더 멀리 서양으로 선거의 강력한 신화는 AD 301년에 그레고리 성자에 의한 정교주의 기독교에 합병 후에 아르메니아의 산상왕국으로 나타났다. 로마 민족과 비잔틴 민족은 아르메니아의 통치를 위해 페르시아 사사니드 군주들과 함께 몇 세기 동안 다퉈왔는데 그것은 9세기에 바그라티드(Bagratids) 하에 짧은 재생에도 불구하고, AD451년에 아바라이르(Avarayr)의 치열한 전투 후에 독립의 기회를 결국 잃었다. 이런 점에서 아르메니아는 주딘(Judean) 왕국을 닮았으며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규칙과 귀족들은 물러줄 것을 주장했다. 둘은 전쟁하는 제국들의 전략적인 교차점에 서있으며 두 민족들은 도덕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영혼적인 용어들로 그들의 역사적 운명들을 재해석하는데 정치적 혐오로 자극되었다. 특히 다빈회의(Council of Davin, AD554)후에 비잔틴 정교주의와 ‘첫 번째 기독교 국가’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자존심 사이에 늘어난 신학적 간극은 아르메니아의 성직자가 전 아르메니아 이주지역을 통괄하여 양육했던 믿음인, 민족적 선거와 신성한 임무에서 그들의 믿음을 굳게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기독교 범위인 선거의 왕조적 신화를 믿었던 그것의 합법성은 아크섬(Aksum)의 에티오피아 왕국과 그것의 후계자들이었다. 아크섬 왕들은 코프틱(Koptic) 자료로부터 4세기에 기독교의 모노피사이트(Monophysite) 형태를 채택하였으나 그것은 아마 아랍 남부 왕국들로부터 가져온 많은 쥬드Judaic)의 특징들을 유지하였다. 아비시니아 평원에 대한 이어지는 에티오피아 왕국들은 그들의 합법성을 쥬다(Judah) 사자의 상징주의와 메넬릭(Menelik)을 통과한 솔로몬과 세바(Sheba) 왕비로부터 나온 왕 후손의 주장으로부터 끌어왔다. 13세기부터 소위 ‘솔로몬’ 왕조에서 지배하는 기독교 암하라(Amhara) 귀족들은 이 선거의 왕의 신화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무슬림 침입자들과 팔라사의 저항을 위해 문화적 재생을 일으켰고 공동체를 동원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아랍 민족들과 그들의 왕국들 사이에, 특히 이슬람 정복 동안과 십자군의 기간에 표면화되었던 선거의 강력한 신화들에 오랫동안 천착할 필요 없다. 기독교처럼 이슬람은 세계종교라는 사실은 그것의 범위 안에서 더 좁아진 민족적 신화의 출현을 방해하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슬람 맹세들은 십지군 전사의 열정을 가해왔다. 특히 아랍 민족들 사이에 그들의 언어, 문화, 업적들과 오늘날까지 중동 정치에 강력한 영향을 계속 미치는 선거와 집단 운명의 감각에서 자존심을 자극하였다.
선거의 신화들은 또한 유럽에서 민족적 공동체들을 유지하는데 도왔다. 로마의 기반 신화들과 달리, 그것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공동체로 통일하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페르시아 제국과 고대 그리스의 만남은 범 그리스 이데올로기조차도, 주변 ‘야만인들(barbarians)’에게 도덕적이고 문화적 우월성의 감각인, 고조된 자기민족 중심주의를 생산했다. 헬레니즘은 동로마에 정교주의 기독교의 채택 후에만이 점차적으로 도덕적 범위를 획득하였다. 비잔틴 기독교 이상은 필수적으로 왕조적이고 우주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9세기까지 그것의 서부와 동부 지역들을 잃고 라틴어 대신에 그것의 국가 언어로 그리스어를 채택하고 고전적인 그리스 재생을 부흥한 제국의 그리스어를 말하는 주민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훨씬 더 나중에, AD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십자군 해방 후에 특히, 방어적인 비잔틴 그리스 인구는 비록 세계의 운명이 유일한 사실적인 기독교 제국에서 진정한 기독교 교리만의 정확한 전례의 준수로 매달렸을지라도 그것의 선거적인 위치와 제국의 임무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 제국이 마침내 AD1453년에 사라졌을 때 같은 꿈이 더 먼 북쪽 방에서 발견했고 무스코바이트(Muscovite) 러시아 국가의 성장하는 제국의 야망들을 키웠다. 러시의 짜르(Tsars)의 왕국은 초기 16세기에 정교주의 러시아 성직자들에 의해 주장된, 세 번째 로마인 이교도 세계에서 정교주의의 유일한 요새가 되었다. 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조셉인, 그들 지도자들 중 하나의 말에서: ‘신성으로 러시아 땅은 모든 다른 것들을 능가한다.’ 폭군 이반에 이어 짜르는 신성한 ‘어머니 러시아’에서 그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아버지’인 현신으로 칭송되었다. 19세기까지, 슬라보필레스는 러시아 농부 공동체를 진리, 순수와 지혜의 저장소로 간주하게 되었다 - 톨스토이와 인기주의자 이상을 키웠던 종교적 개념과 어떤 신 - 러시아 국수주의자들에 대한 작품들에서 오늘날까지 주장하는 것.
비슷한 신화들은 보다 더 먼 서양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8세기에 프랑크 왕국에서 나타났으며, 지배하는 바울 교황이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장소를 점령한, ‘새로운 데이비드 왕국’에게 비슷하였다. 비슷한 언어는 훨씬 더 나중 13세기의 말에 보니파스 교황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그 때 그는 ‘프랑스의 왕국은 천국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주님에 의해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다’ - 잔 다르크와 그녀를 따른 많은 프랑스 지도자들은 보존하고 수행하기 위해 싸웠던 지위와 임무 - 는 것을 말했다.
비슷한 믿음들을 현대의 스코틀랜드에서, 1932년의 아르브로아스(Arboath) 선서의 언어에서, 패배한 웨일즈와 아일랜드 사이에 1291년부터 스위스 연방의 증가하는 감각에서, 허사이트 보헤미아(Hussite Bohemia)에서 엘리자베스의 영국에서, 칼뱅주의자 네덜란드에서 그리고 대양을 건너, 미국 식민지와 가톨릭 멕시코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모든 이런 예들에서, 민족적 선거의 신화들은 긴 기간에 걸쳐 공동체를 동원하고 그들의 보존을 확실히 하는데 도와왔다. 민족적 신화가 현재를 자치단체의 과거를 연결하는 극적인 이야기이고 폭넓게 신임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원들을 ‘선택된 자의 그것’인 특별한 영광을 그들에게 부여하여 분명한 공동체로 끄는데 돕는다. 그것의 상징주의를 통하여, 그것은 전통을 보호하는 도시 중심과 전문가 계층들로부터 밖으로 민족 문화를 퍼뜨려, 보다 더 참석자 사회를 창조하여 다른 계층들과 지역들을 통합하는데 노력한다.
민족적 선거의 신화들은 또한 그것의 역사적 영역에 공동체의 애착을 강화하기도 한다. 고국을 신의 부여로 간주함으로서 그것은 특별한 영토에로 선택된 자들을 묶는다. 신성한 땅과 신화화된 흙만이 선택된 자들에게 적당하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살았고, 그들의 영웅들이 싸웠고 그들의 성자들이 기도했던 땅에서 되찾을 수만 있다. 이 신성한 산들에서 그리고 이 신성한 강둑들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온 선조들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옛날의 덕목들과 꺼려온 방식들로 되돌아가야하는가? 셈파크의 영웅주의를 회상하는 스위스 사람들과 오늘날까지 윌리엄 텔의 극을 재집행하는 프라우 중부의 나타난 순수성을 추방한 모르가르텐, 그들은 선택됨의 인류 평등주의적 신화를 그들의 계속적인 자유와 번영의 조건인 그들의 국가와 사회의 기초로 합병하지 않았는가?
결국, 민족적 선거의 신화들은 공동체를 침범과 전쟁으로 부추길 수 있다. 진실한 신념과 더 높은 도덕성과 문명만을 소유하려는 확신은 ‘어둠에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선교사 이동과 제국주의자 운동을 북돋우고 정당화해왔다 - 그것은 코카서스에서 합병을 찾은 중세 아르메니아, 정당한 지하드에 참여한 아랍 민족이나 백인 ‘문명’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부여하는 서방 국가들이다.
민족적 보존의 유형들(Patterns of ethnic survival)
현대이전의 기원에서 민족적 선택됨의 신화들은 세계의 대부분 영역들에 퍼져있다: 유럽과 중동에 뿐만 아니라 미국, 아시아 남부, 먼 동양과 아프리카까지. 하지만 민족적 선거에서 믿음은 다른 방식들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나는 민족적 지속의 네 가지 유형들과 선거의 신화들이 민족적 공동체들을 유지하는데 돕는 네 가지 유형들을 간단하게 구분할 것이다.
1. 나는 첫 번째 유형 제국주의-왕조(imprial-dynastic)를 부른다. 선거의 신화는 지배하는 가계와 왕조에게 붙어있고 그것으로부터, 공동체는 그것의 주요 상징들과 문화를 가져오는 경향이 있고 항상 그것과 함께 연관된다. 이리하여, 노르망디 안에서 노르만 신화들은 AD913부터 계속하여 롤로(Rollo) 출신 지배하는 공작들의 이용들 주변에 성직자들과 연대기 편찬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되었다. 연대기 편찬자들은 노르만 공동체는 평범한 관습과 혈통의 왕국인 레그늄으로서 그것의 지배하는 가계의 특별한 지위와 명예로 분배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왕조, 땅, 사람의 연결은 나중 서구의 프랑스, 영국, 스페인 왕국들에서 더 큰 범위로 반복되었다. 모두 셋 중에 대관식과 군주의 반골 지위를 유지하는 임명 의식들로 지배하는 가계에 집중하였다. 몇 세기에 걸쳐서 왕국과 그것의 사람들은 영국 가운트의 칭송에 대한 존처럼 이 선택의 지위에서 나눠지게 되었다, ‘이 다른 에덴, 반대-천국’은 우리를 상기시킨다; 사람들 스스로 현대 국가의 시민들로서 선택된 자가 될 시점까지. 폴란드는 분명하게 이 전이의 과정을 설명한다. 중세와 르네상스시기에, 선거의 폴란드 신화는 왕국과 그것의 가톨릭 지배자들에게 밀착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왕조의 쇠퇴, 국가의 해체와 함께,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집단적인 부활의 초점이 되었다. 19세기 폴란드 지식인들의 부분들, 특히 위대한 시인 아담 믹키위치(Adam Mickiewicz)는 곧 다시 일어날 국가들 사이에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그것처럼 폴란드의 역할을 해석했다 - 반면에 폴란드 가톨릭교회는 이 세기까지 민족적 자원을 공급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친밀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서 폴란드는 왕의 패배와 국가의 파괴가 브르고뉴나 옛 아시리아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공동체 그 자체의 서거를 이었던 그 귀족적 인종의 운명을 피하였다; 대신에 폴란드는 1918년 이후에 시민국가로 변형되었다.
2. 두 번째 유형의 민족적 보존의 유형인, 자치단체-민주주의(communal-demotic)는 그들의 신성한 땅에 사람들에게 직접 신화를 연결한다. 이 경우들에서 공동체는 보통 정복당하여왔고 그것의 성원들이 토박이 주민들이고 그들의 문화는 토속적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그것의 생명에 대한 이전 권리와 방식을 유지하는데 싸우고 있다. 그것은 웨일즈와 아일랜드에서 켈틱(Keltic) 공동체들의 주장이었다. 선거의 웨일즈 신화는 공동체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으로 그렸으며, 훗날 선택될 사람들의 기독교 원래 형태는 아라마티아 조셉에 의해 고대 영국으로 옮겨져 왔다. 웨일즈 언어, 민속 시들, 중세 서정시 경쟁들과 함께 이 믿음들은 특히 영국의 정복과 웨일즈의 합병 후에 유일한 웨일즈 정체성의 감각으로 키우는데 도왔다.
아일랜드는 이 선거신화들에서 이교도와 기독교 동기들의 비슷한 혼합을 금지했다. 아일랜드의 ‘황금기’는 타라의 고위 왕들의 이교도 켈틱과 고대 현자들의 울스터 학파의 주인공들에서 또는 5세기에 아일랜드의 패트릭 성자의 합병 후에 아일랜드의 수도원 학습, 예술, 선교사 활동의 거대한 신기루에서 다양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후기는 특히 그것의 신성한 섬 가계에서 토박이 아일랜드의 국가적 회복을 본 18, 19세기에 문학학자들, 고고학자들과 시인들의 나중 아일랜드 신화들을 위한 풍부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3. 세 번째 유형은 이주 식민주의자(emigrant colonist)의 그것이었다. 다시 신화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다. 그들은 그들의 옛 고국들을 떠나거나 도망했으며 종종 토착민들을 위한 작은 배려도 없이 새로운 고국들에 새로운 공동체들을 세우는데 기울었다. 선거는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더 안정된 공동체이며 임무이다. 그들은 오래된 질서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게 될 지역적인 운명을 위해 신에 의해 선택된 것처럼 스스로를 간주하여, 그것들과 함께 그들의 가치, 기억, 전통들을 옮긴다.
여기서 모범은 흑해를 건너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자녀들의 성경적 출애굽기이다. 그것은 로마 지역들이 철수된 후 영국의 푸른 즐거운 땅을 바꾸게 된 우유와 꿀의 땅인 영국으로 해협을 건넌 앵글로 색슨 부족을 위한 모델로서 기여하였다. 종교적 압박을 벗어난 순교자 아버지들에 의해 대양의 이 시기, 나중에 건넌 많은 세기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에 자유에 대한 그것의 약속과 함께, 새로운 미국 고국에 대한 제반도표의 일부가 되었다.
4. 최종 유형인, 이주지역-회복(diaspora-restoration)의 그것은 또한 선거신화가 이동 중 공동체에 연결되었다; 반대 방향에서, 옛 고국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이동에는 이 시기 뿐이었다. 추방되었던 것으로부터 그것의 선조 집으로 공동체의 복귀는 집단부활의 선조건(precondition)이 되었다. 시온주의는 고대의 유대주의 종교열망의 세속적인 성취와 함께 고전적인 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라라트 산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아르메시아인들 사이에, 헬라스(그리스 별칭)의 회복을 열망하는 18세기 이주지역 그리스인들 사이에, 아프리카로 돌아가려는 자유주의자와 흑인 미국인들 사이에 그리고 나중에 소련연방의 먼 부분까지 스탈린에 의해 추방된 몇 개의 공동체들 사이에서 같은 유형을 만난다. 위대한 그리스 교육자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Adamantios Korais)가 그렇게 분명하게 깨달은 것처럼 이 경우들의 각각에서 그것의 선조고향으로 이주지역의 회복은 사람들의 물리적 복귀뿐만 아니라, 교육과 정치적 동원을 통한 그것의 정신적 재건을 포함했다.
민족적 인내와 재생의 이 네 번째 유형들은 소진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민족적 보존을 위한 선택됨에서 믿음들의 중요성을 노출한다. 그것들은 또한 그런 믿음들이 운영하는 다른 방법들을 보인다. 때때로 그들은 확장에 기름을 붓는다, 때때로 대중 폭동에, 여전히 다른 시대에는 대량 이주와 회복의 움직임들에 기름을 붓는다. 그들은 또한 공동체를 다른 위험들에 폭로한다: 국가에 과잉 의존을 통한 민족적 공동체의 경직화, 대중적 불안과 극단주의, 분열이나 동화를 통한 자치단체 에너지의 소실. 이 위험들은 민족적 지도자들에게 친숙하다. 각 세대에서 신부들, 필경사들, 예언자들, 서정시인들, 실력자들, 귀족들조차도 이런 위험들의 사람들을 경계해왔고 자치단체 질병들을 위한 처방 치료들은 민족적 동일시와 운명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계발해오고 있다.
이 유형들의 각각은 또한 민족적 보존에서 어떤 주요 요소들을 노출한다. 전쟁과 군인윤리는 일반적으로 왕조-제국 유형에서 탁월하다. 선택된 자들은 그들의 되찾은-왕자들과 신임 있는 칼리프(후계자들) 하에 올바른 기사들로 구성하며 민족적 선택됨은 헝가리와 카탈로니아 귀족성과 같은 선교사 기사들의 창과 방패들에서 생겼다. 필리스틴(Philistines)과의 고대 이스라엘 전쟁처럼 승리와 패배의 기억들은 선택된 국민들과 그것의 군인신성의 신성한 역사에 합쳐지게 되었다.
대중 폭동(Popular revolt)은 자치단체-민주의 유형의 심장에 자리한다. 그것들이 소유한 것들은 어떤 단순한 피동적인 인내의 운명이 아니라 그것의 유산의 방어에 동원된, 순수한 국민들의 이상이다. 토착적인 동원은 아일랜드와 바스크, 체코슬로바키아와 저지안들, 커드족과 시크히족, 그리고 안전과 영감을 위해 그들의 토착적인 언어, 전통, 상징들과 기억들로 그려온 더 많은 공동체들 사이에 보존의 레이트모티브(leitmotiv)이다.
방황은 두 이주자와 이주지역 유형들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왔다. 전자에 대해, 토착적인 사람들과 노예들을 제외한 지역 운명들과 함께 약속된 땅으로의 이주이다. 이주지역 형태에 대한 긴 추방은 선택된 공동체에 특별한 원래의 고향을 회복하는 열렬한 바램인 강력한 향수병을 자극한다.
32. 종교와 민족성(Religion and Ethnicity)
/신씨아 엔로에
무엇이 민족성을 구성하느냐 대한 어떤 동의도 없으며 객관적이고 주관적으로 둘 다 있다는 동의가 증가하는 추세다. 민족성은 준수되어질 수 있는 문화적 속성을 포함하지만 그 속성들은 민족성에 이를 다른 사람들의 집합에 양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한계들이 상황마다 또는 시기마다 아무리 애매하고 쌍방적으로 존재할지라도, 민족성이 소유의 감각과 성원들과 성원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한계의 인식을 요구한다는 것이 학자들 사이에 동의하는 추세이다.
민족성은 속성들의 뒤얽힌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일한 문화적 특징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언어, 종교, 영역과 관습은 - 그것들 스스로 - 민족적 그룹을 동일시하거나 유지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그룹마다 단체적 가치가 분배된 속성들의 덩어리는 다양할 것이다. 평범한 언어는 민족적 덩어리의 전형적인 성분이지만 민족성을 구분하는데 필요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민족적 덩어리에서 언어적 성분은 전체적인 슬로빈(Slovene) 동원을 위한 기초로서 사용된 오스트리아의 슬로빈 인구와 정부 언어조사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영국에 이어 오랫동안 가이아나에서 살아남은 아프리카인들과 동부 인디언들 사이에 분명한 민족적 한계들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두 그룹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이 시도는 민족적 차별화들의 부분일 때 종교에 관해 특별하게 강하거나 심오한 어떤 것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두 민족적 그룹들 사이에 그룹 내부의 한계적 가능성과 유지에 대한 종교적 차이들의 효과를 탐험할 것이고 공동체들 사이에 간격은 민족 내부 접촉이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그 지역에서 민족적 한계들은 종종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완전한 물리적 거리감에 의해 드물게 유지된다. 이리하여 민족적 한계들과 그룹 통합이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조사와 그 과정에서 종교에 의해 수행된 역할은 특히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분석할 때 보상하고 있다.
종교는 또한 설명, 심판과 목표들을 형성하는 인간이상이나 제국이상의 권위에 호소한다. 실제로 종교는 분명히 다양하다. 예를 들어, 제국이상의 권위들이 분명하고 통합적으로 정의된 한계는 폭넓게 다르다. 이것은 ‘위대한’ 종교들(힌두교, 이슬람, 등등)과 가정하건데 ‘더 적은’ 종교들(애니미즘, 위대한 종교들의 절충주의 민속 번역, 등등) 사이에 전례적인 차이들의 기초이다. 분명한 조직적 구조들은 절충주의 권위를 보충하는데 사용했고 그 조직들에서 위계질서와 통합의 범위는 또한 종교들 사이에 다르다. 이리하여, 로마 가톨릭 기독교는 그것의 분명하고, 정교하고 위계질서적인 조직 때문에 견뎌내고 애니미스트 종교는 낮은 정도의 분명한 조직과 절충적 직업의식으로 구분된다. 종교는 또한 의상, 다이어트와 다른 행동들을 경정하는 그들 터부들의 한계에 따라 목록지어질 수 있다. 결국 종교들은 복음주의 개종에로의 그들 접근에서 다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열심히 개종을 추적했고 이리하여 다양한 문화적 그룹들을 흡수해왔으며, 유대교는 뚜렷이 복음적이지 않았다.
민족적 그룹의 자치공동체 포장(package)의 부분으로서 종교는 종류 - 구분의 이 계통을 따라 - 는 민족적 한계들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이며, 얼마나 능숙하게 그룹이 지탱하는 외부 압력들에 대해 동화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쉽게 그룹은 내부 결혼이나 합병을 통해 외부인들을 흡수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룹 행동자들에 의해 고백된 종교의 형태 또한 민족 내부의 역동성에 중요한 요소이다. 가장 강한 민족 내부 관계는 두 민족적 그룹들이 다른 종교들을 고백할 때, 각 종교가 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정교하고 분명할 때, 그 종교들이 일상적인 생활면들, 예를 들어 다이어트에 터부들을 운영상으로 발생시킬 때 일어난다. 집중(intensity)은 각 종교가 복음주의 전통을 가질 때 증가하게 된다. 이 상황은 현대의 레바논에서 그 상황에 근접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말라이와 중국 사이, 벨기에에서 월륜과 플레밍 사이, 또는 소련 연방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상황에 적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가 민족적 동일시와 내부-민족 관계들에 더해지는지를 평가할 때 민족성을 집합적으로 어떻게 표현할지와 유지할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견디고 있는 종교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한계 세팅 포장의 일부분인 ‘종교의 문제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의 문제이다. 하나 더 복잡성을 더하자면 한계들은 종종 주요 종교의 교파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몇몇 민족적 한계들은 사람들이 모두 무슬림들이거나, 모두 힌두교도들이거나 모두 기독교인일 때 지속하지만 수니와 시이테 사이의 구분은 이라크 민족 정치에서 두드러진 요소이고; 레바논의 기독교들 사이에는 분파들이 있다 - 마로나이트, 정교주의와 가톨릭.
민족적 자치단체주의는 그룹들이 주요 종교적 고백 설명들에 의해서보다는 종파의 차이들에 의해서 구분될 때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내부 적대성은 각 민족 그룹이 기본 신학의 자체 해석이 정확한 반면에 다른 것은 부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특히 첨예하기도 한다. 더구나 두 종교 그룹들의 종교적 믿음들이 상대적으로 밀접할 때 다른 차이들은 한계적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게 되기도 한다. 리차드 갬비노(Richard Combino)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아일랜드 가톨릭의 변이들인 것으로 감지하는 것 때문에 유대교나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해서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향하여 더한 적대감을 느꼈다는 것을 관찰한다. 이것은 민족적 한계들이 종교외적 바탕에서 확고히 세워질 때, 종교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룹 성원들은 종교적 동질성을 부정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종교가 민족성 연구에서 민족적 한계들을 운영적으로 유지하는 정도를 바꾸는 가장 일반적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민족성의 ‘바닥선’인 내부결혼(근친결혼)의 비율들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내부결혼의 비율은 계급과 인종의 요소들이 또한 내부 결혼을 줄이거나 상승시키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종교적 규칙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결혼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신성한 행위이며 종교적 분파들은 그들이 계급과 인종 요소들과 일치하여 운영할 때조차도 중요하다. 미국에서 비유대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내부결혼의 상승비율은 그것을 미국 유대교 민족 포장에서 종교적 몫을 낮추고 약화시키는 경향이라고 지적하는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왔다. 반대로 세속화는 소련 연방에서 심각하게 향상되었으며 국가는 민족을 넘고 고백을 넘는 결혼을 장려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스스로 민족적으로 다양하다는)은 무슬림들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비무슬림들과 결혼하는 경향이 적다.
종교와 민족적 동일시를 분리하는 것은 헛되고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 많은 개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합병과 공언한 종교가 하나이고 같은 것처럼 행동한다: 크로아티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가톨릭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종교와 민족성을 분석적으로 나눠 조사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미국 정치 분석가들은 (그들이 고안한 선출된 정치들을 가지는 것처럼) ‘가톨릭 투표’의 존재를 의문시해왔고 다른 한편으로 ‘민족적 투표들이’ 투표한 결과들을 결정하는지 궁금해 했다. 역사적으로 분석가들은 이민자 경험(이나 합병경험)에 관심이 있었다. 그 관심은 미국 사회에서 행동을 형성할 때 종교와 외국 국적의 상호작용에 관한 의문들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그런 의문들은 교회와 국가를 같이 한 미국의 선입관 때문에 그리고 가톨릭 그룹들은 가정하여 가장 선거의 충돌을 가졌기 때문에 가톨릭-고백하는 민족적 그룹들 쪽으로 향하게 된다. 실제로 종교와 민족성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프로테스탄트들과 다른 종교의 하부그룹들에게 바로 유용하다.
만약 민족성이 단지 속임수로 종교라면, 그 때 종교를 끊임없이 쥐고 있는 것은 민족적 그룹들 사이에 거의 중요한 차이들을 내보이지 말아야 한다. 미국 가톨릭의 정치적 태도와 가치에 대한 최근 연구는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폭넓게 퍼진 차이들을 노출했고 그 가톨릭 내부 차이들은 분명하게 민족적 유형들로 떨어졌다. 더구나 조사는 정신적 가치들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되었으며 정상적으로 그룹 차이들을 끌어낸 의문들인, 미국의 외국 정책 대 폴란드나 율스터(Ulster)와 같은 그런 차이들과 관련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 가톨릭의 76%는 혼합-세대 법들에 반대한 반면에 이탈리아계 응답자의 58%와 폴란드 가톨릭 응답자의 66%는 그 법들에 찬성했다. 비슷하게, 아일랜드 가톨릭의 32%만이 어머니가 ‘결혼하여 더 이상 자녀를 두지 않을 때’ 합법적인 낙태를 선호한 반면 이탈리아계 가톨릭의 43%는 합법적인 낙태를 선호했다. 같은 연구는 또한 민족적 태도 차이들은 전체적으로 덜 폭넓게 퍼져 있을지라도 민족적 그룹 계통을 따라 미국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지속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독일계 프로테스탄트들의 37%는 합법적인 낙태를 선호한 반면에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의 57%는 그러했다. 카쓸린 프랑코빅(Kathleen Frankovic)은 미국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종교적 충돌을 연구함으로서 가상으로 종교가 단순히 계급현상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관련 시도를 했다. 그녀는 투표행위와 문제 설명들에서, ‘어떤 타입의 계급측정들을 사용하든 - 수입, 교육, 직업이나 도시지역에 거주조차도 - 종교적 분명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남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프랑코빅은 정치적 행동에서 종교내부의 차이들이 미국에서 시간에 걸쳐 희석되고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종교는 민족적 한계들을 유지하는데 도울 요소라면 그것은 ‘민족성의 종말’ 예언들에 신임을 줄 충분한 충격을 잃지 않고 있다. 더구나 1976년에 실행된 전국적인 갤럽 투표조사는 미국 응답자들의 56%가 그들의 종교적 믿음들이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고려한 반면 5%만이 그것들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딱지를 붙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같은 조사는 또한 서독의 17%와 일본의 12%만이 그들의 종교적 믿음을 ‘매우 중요하다’는 것으로 고려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많은 국민국가들은 종교와 민족성은 분리될 수 있지만 시민들의 압도적인 다수가 모두 동일한 종교를 고백할 때 - 민족성은 요점과 기능적 가치를 잃었다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형성과 파키스탄의 식민지 후기 설립을 떠맡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지속적인, 민족적 한계들일 때조차도 남아있고 때때로 민족적 그룹 성원들이 그것들을 더 큰 평가에서 똑같이 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증가하고 있다. 유대인인 것은 이스라엘 내부의 러시아 유대교 민족적 통합의 감각을 박멸하지 못했다. 이것은 제프리 로스(Jeffrey Ross)의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최근 러시아 유대교 이민자들은 그들의 유대교 정체성을 종교적 동일시가 아니라 국가적 정체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관찰자들에게 처음 나타나는 것처럼 놀랍지 않다. 러시아의 유대교 이민자들 중 81%의 로스 샘플(Ross's sample)은 그들 스스로를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비슷하게, 내전 이전 파키스탄에 벤갈리스(Bengalis)는 그들의 이슬람 이상의 민족적 분명함에 더욱 더 많은 가치를 분배했다. 동과 서 파키스탄 무슬림들 사이에 간극이 넓어진 것처럼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넘은 무슬림과 힌두교 벤갈리스 사이에 증가하는 상호작용이 있었다. 내전은 영토적으로 민족성으로 가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파키스탄 서부는 모두 무슬림이지만 여전히 민족내부의 불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몇몇의 다민족과 다종교 국가들 사이에 종교는 민족성보다 적은 시스템을 위협하는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정교적인 설명들을 가진 정치적 파당들은 두 개 이상의 민족적 그룹들 - 적어도 선거 시기에 - 을 구성하여 형성된다. 전형적으로 벨기에에서 정치적 통합은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파당들을 민족적으로 가로로 절단한 것을 포함했다. 이 파당들 - 사회주의자와 가톨릭 - 이 자치단체의 분점들로 붕괴되고 나눠질 때, 벨기에 국가의 존재는 심각한 위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벨기에 정치체제는 종교에 기초한 정치적 동원을 껴안았으나 통합을 위한 새로운 구성상 엘리트주의 형식이 없는 민족성에 기초한 정치적 동원을 지탱할 수 없다. 네덜란드와 서독은 또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과제들에서 공식화된 종교적 간극들을 경험했으며, 그것은 과거와 잠재적인, 민족적 변화들에 의해 생긴 깊은 걱정의 원인이 되지 못했다.
결국, 종교가 얼마나 많이 민족성의 집중과 실체에 기여하는지를 보기위해 종교적 계통을 따라 내부적으로 분파된 민족적 그룹들을 시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거의 다종교적 민족 그룹들은 없으며 그들의 상대적인 희귀성은 종교는 민족적 차별화의 뿌리이거나 종교적 분명함은 민족적 요점의 열쇠라는 것을 제안한다. 해외의 인디언 민족 그룹은 종교에 의해서 종종 내부적으로 분파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가이아나, 트리니다드, 우간다와 대영제국에서 인디언 민족 공동체들은 무슬림들과 힌두교인들 사이에 구분되며 더 적은 숫자들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구분된다. 그 인디언 공동체들의 겉핥기 조사는 (1)종교적 이단성의 존재는 인디언 민족성의 자격으로 인디언을 종교적으로 동일한 그룹들을 위한 민족성보다는 그것의 성원들을 위해 덜 사실적이게 만들지 못했다, (2)종교적 다양성은 빈번하게 인디언의 관심을 쫓는 자치 단체적으로 동원한 인디언들에 의해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이리하여, 가이아나 평범한 지역에서 정치적 속설은 거대한 아프리카 여당은 무슬림 인디언들을 선출할 의도가 있는 가이아나의 인디언들 사이에 종교적 분리를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가이아나서 인디언 정치적 파당은 세속적이고 종교적 호소에 의존하지 않는다. 가이아나에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은 그들의 성원들을 효과적인 정치적 동원으로 바꾸는데 실패했다. 영국에서 인디언 인구들 사이에 분파들은 언어적, 카스트적, 이전 주거지의 지방과 종교적이고 그 분파들은 노동, 이민, 주택정책에서 인디언의 정치적 발달을 방해해왔다.
동유럽에서 가장 탁월하게 정치적으로 분파된 민족적 그룹들 중 하나는 체코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분파되어 있지만 체코민족은 민족적 한계들의 강한 감각을 유지해왔다. 비슷하게 알바니아 민족적 국수주의는 민족 내부 분파들에도 불구하고 최근 세대들에서 번창하였다.
종교적 동질성은 민족적 한계 유지의 필수조건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공동체 안에 종교적 복수주의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회에서 공동체의 운영에 진짜 결과들을 가진다.
33. 정교주의와 국수주의(Orthodoxy and Nationalism)
/파스칼리스 키트로밀리데스
그것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공동체 감각의 상상적인 구조를 통해 국가건설의 과정은 정교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 기본적이고 신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이율배반을 전면에 가져왔다. 도덕적 가치에서 계속된 분쟁은 종교의 상상된 공동체와 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사이에 필수적인 양립불가능성을 극화했다.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인종, 계급과 성별의, 자유와 노예의, 지혜와 무지의 모든 세속적인 구분들에 반대하여 형성되었던 신념의 공동체는 보편적인 교회와 정교적인 교회일치주의의 교리적 배경을 제공했다. 그러므로 정교주의 교회의 공동체는 국가의 정체성과 속세 국가의 새로운 개념들에 무관심하게 남았으며; 이 개념들이 그것의 신념을 위한 대안적 공동체들의 기반들을 형성했을 때 그것은 열린 적대감으로 도전을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 국가적 역사편찬의 전체 전통은 정교주의 기독교와 정교주의 교회는 오토만 하에서 집단적 동일시를 보존하고 독립의 도래를 준비함으로서 국가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가정에서 약속된다. 간단히 말하면, 정교주의 교회는 포획의 해(year)들에서 국가적 동일시를 굳혀왔던 것으로 가정된다. 이 가정은 특히 공식적인 수사학이 기본적인 이데올로기 교리로서 그것을 관통했던 그리스에서, 세속적이고 교회적인, 관습적인 발칸 역사편찬을 통하여 운영하고 있다. 현대 그리스 역사에서 교회의 역할은 결국 역사 기술의 관습적이고 수정주의자 학파들 사이에 반대하는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두 옹호자와 비평가는 피할 수 없이 사실적인 역사적 문제들을 획득한 이데올로기적으로 동기 부여된 질문들을 하고 있다. 정교주의와 국적 사이에 관계는 역사적 문제로 이해될 수만 있다. 분석의 어떤 수준들과 특별한 역사적 맥락들에서 ‘국적의 보호자로서 정교주의’에 관한 가정은 사실 증거에 의해 나온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이거나, 자가 증거적이거나 개념적으로 문제가 없는 문제와는 멀다.
발칸반도에서 정교주의 교회는 그들의 무슬림 지배자들로부터 기독교 주체들의 구분을 제도화하고 보호함으로서 오토만 지배하에 집합적인 동일시의 유지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구분은 내용에서 종교적이었지 국가적이지 않았다. 발칸의 가장 시대착오적인 것들 중 하나이고 그 문제에 대해 유럽적인, 역사편찬은 국가적 내용을 그 전통적인 종교구분에의 주입이었다. 더구나 정교주의 교회와 특히 그것의 수도원 제도는 적시에 국수주의에 의해 정치화 되어 있었고 역사편찬적인 시대착오들의 기반을 만들었던 유산인, 언어와 발칸 사람들의 중세 제국의 기억들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오토만 국가의 제도로서 국가이상의 조직과 그것 자체의 교리적 원리들 덕택으로 비국가적인 것들을 남겼다. 정교주의 교회에서 권력은 국수주의 시대 이전에 그것 안에서 ‘민족적’ 적대자들을 창조했던 그리스어를 말하는 위계질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동시성으로부터 일어난 혼란일 뿐이었다. 강한 국가 분쟁들을 정교주의 교회의 생활로 가져오고 정교주의와 국적 사이의 친밀함과 관련한 가정들을 길렀던 정교주의의 교회일치성과 교회들의 ‘전국화’의 최종적인 포기였다.
기본적인 이율배반은 속세적인 역사와 신학적인 원리들 사이에 더 깊은 반박들로부터 나온 원래의 관계 안에 속했다. 역사적 기록은 평신도와 교회적 측면 둘에 대한 관습적인 관점들의 옹호자들을 위해 당황의 근원인 이 이율배반의 예들로 가득 찬다. 이율배반 그 자체의 집중화와 같은 당황은 구축한 국가 공동체들의 상상적인 과정에 의해 성취된 전체적인 성공의 직접적인 산물이며 그것은 물론 근본적으로 자아-이미지들과 개념들뿐만 아니라 도덕적 코드들로 변형했다. 정교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 이율배반의 이야기를 재구축하는 것은 지난 두 세기에 유럽 동남부와 중동의 교회사를 재기록하는 것과 맘먹었으며 자연히 여기서 시도될 수 없다. 그 과정의 간단한 역사적 설명만이 국민국가의 도래를 이었던 교회들의 ‘전국화’에 포함된 국수주의 교회전통의 근본적 차단에 힌트를 주도록 아래에 제시될 것이다.
간극의 가장 초기의 예들은 계몽과 관련한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변화의 지지들과 함께 교회의 대결에서 추적될 수 있다. 분쟁은 계몽의 지식적 변화들과 자유적 원리들이 인도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명하게 되었던 1789년에 구분되었다. 특히 족장 그레고리 5세(1797-8, 1806-8과 1818-21) 지배 아래 콘스탄티노플의 족장정치에 적극적인 반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그리스 교육과 문화에서 계몽의 유포, 그리스 전국운동까지 정교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 이율배반의 가장 분명한 신호를 이루었다. 그레고리 5세는 정교주의 교리의 원리들에 호소함으로서 1798년에 리가스 벨레스티늘리스(Rhigas Velestinlis)의 급진적 공화주의와 1821년에 그리스 혁명의 발생 둘 다를 비난했다. 교회 지위의 고전적인 진술은 예루살렘의 족장 안티모스(1788-1808)에게 기여했고 그레고리 5세 스스로 쓴 군사적 보수주의 논문‘아버지 교훈’(Paternal Instruction, 1798)에서 왔으며 그것은 오토만 지배에 복종한 신성을 협의했고 신념의 영혼들을 위한 혁명적인 계획들의 유해한 결과들에 반대하여 경고했다. 정교주의 교회와 국수주의 사이에 반대의 또 다른 예는 북 카라드직(Karadzic)에 의해 지지된 문화적이고 언어적 개정에 반대하여 세르빈(Serbian) 성직자계급의 용감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그들 교회의 독립에 대한 선언을 통하여 그들의 독립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을 찾은 발칸반도에서 독립 국가들의 도래는 발칸 정치에 국수주의자 생각들의 충돌의 범위를 극화하였다. 몇 세기의 오래된 전통들을 깨고 발칸반도의 교회일치주의 과거의 국수주의자 재해석을 통하여 합법성을 찾았던 이런 몸짓들은 독립이전 이래로 만들어져 있었던 정교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 이율배반을 전면에 가져왔다. 그리스(1833), 루마니아(1865), 불가리아(1870)와 알바니아(1922-37)에서 정교주의 교회의 독립자치에 대한 통일된 선언은 콘스탄티노플의 족장정치와 함께 심각한 정전(正典)적 문제들을 만들었다. 불가리아의 경우에서 교회일치주의를 떠맡은 강력한 전국적 분쟁들은 문제를 몇 년간(즉, 1945년까지)에 걸쳐 지속한 총체적 분파로 올라가는 원인이었다. 그것의 더 강한 전통과 더 오래된 종교적 제도들을 가진 세르비아 정교주의 교회만이 콘스탄티노플 자체의 종교회의에 의해 개최된 행정적인 독립을 수용하는 정전적인 단계를 따름으로서 1879년에 독립자치로 평화롭게 동의하였다.
그리스의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지배 족장 정치로부터 발생한 첫 번째였으며 이어지는 발칸반도 북구에서 비-그리스 교회들을 위한 예를 세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미 기록한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의 족장정치로부터 교육받은 그리스의 교회에 대한 독립은 그리스 계몽의 지도적인 정치적인 철학자에 의해서 독립의 전쟁에서 훨씬 빨리 주장되었다.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Adamantios Korais)는 국가의 억압자에 의해 여전히 사로잡힌 족장의 지시를 따르고 복종하는 것은 자유 그리스의 성직자에게는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코라이스의 논쟁은 19세기 나머지 동안 정교주의 세계와 특히 유럽 동남부에서 분노하고 있었던 정교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 분쟁을 구체화시켰다. 거의 반세기 후에 그들의 노력들에서 그들 자신의 독립자치적인 전국 교회를 만드는데 루마니아인들에 의해 되울렸다.
발칸 국가들의 종교적 교회들이 이리하여 국민국가들의 현대 행정적 구조의 성분들이 됨으로서 전국화 된 반면에 오토만 제국에서 교회일치주의 족장정치는 새로운 국수주의로부터 그것의 거리를 유지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동일시의 상상적인 구조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회의 강력한 구조와 권위를 사용하기 위해 시도한 것들의 방향에 심각한 장애들을 놓았다. 유비시니(Ubicini)는 1980년대에 ‘다른 곳에서처럼 터키에 성직자들은 교회의 당과 그것만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새로운 국가주의자들에 반대했던 것은 이 당이었으며 유비시니에 따르면 여전히 거의 없지만 ‘헬레니즘의 당’ 그의 옹호자들은 ‘단순히 그리스에 추가되기를 바랬다’. 신성한 장로회의 일련의 행동과 통지들을 통하여 족장정치는 그것의 반대를 국수주의에 공식화하고 분명히 했으며 국수주의자 고려사항들에 의해 추진된 비정전적인 발의로 비난하였다.
비록 족장정치의 일부분에의 그런 반동들을 위해 첫 번째 경우가 그리스교회의 독립자치일지라도 그리스에서 전국적인 주장들과 그것은 국수주의 도구로 돌리려는 시도들의 공개적인 비난은 1870년에 불가리아 분열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 1872년 8월에 알렉산드리아, 안티오치와 예루살렘의 다른 정교주의 족장들과 사이프러스의 대주교를 따라 교회일치주의 족장은 본질적으로 국수주의를 의미했던 ‘종족주의’의 비난을 일으켰던 주요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모든 기본적인 인종주의의 질문 - 즉, 다른 민족적 기원들과 언어 그리고 한 나라나 그룹의 특별하게 사람들이나 사람들의 그룹들에 의한 예외적인 권리의 주장이나 실행에 기초하여 분리하는 것 - 은 우리의 범위를 벗어나 속세적인 국가들에서 거짓말들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영혼적인 친교가 있는, 모든 국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형제애로 포함하는 그것의 지도자와 설립자에 의해 운명 지어진 기독교 교회에서, 인종주의는 낯설고 꽤 생각할 수 없다. 사실 그것이 특별한 인종적 교회들의 형성을 의미하도록 가져왔다면, 각각은 그것의 신봉자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모든 이방인들을 제외하여 그것의 특별한 인종의 모든 성원들을 수용하고 그 자체 인종의 목사들에 의해 특별하게 지배되어, 인종주의는 들리지도 선례도 없다... 신념의 초기에 세워진 모든 기독교 교회들은 지방적이었고 인종구분 없이 특별한 읍내나 특별한 지역성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보통 그들 사람들의 민족적 근원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읍내나 시골을 따라 이름 지어졌다.
종교회의는 인종주의의 다음 비난을 일으킴으로서 결론을 냈다.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과 신성한 교회와 전체 기독교인 세계를 지원하는 우리의 축복의 아버지들의 신성한 정전들에 반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인종주의, 즉, 인종분리, 민족적 봉토싸움, 증오와 알력을 포기하고, 비난하고 나무라며,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것은 성스러운 신성으로 안내한다.
‘종족주의’의 비난은 정교주의와 국수주의 이율배반을 구체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와 정교주의 전통들의 호소는 세계역사에서 새로운 힘의 조류에 따를 수 없다. 지역적 정교주의 교회들의 전국화는 급히 진행했다. 불가리아 교회는 19세기 후반에 마세도니아에서 불가리아 국가적인 주장들의 진행을 위한 주요 도구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그 영역에서 그리스 교구들은 마세도니아(Macedonia)에 국가적 싸움들이 우선 교회들과 교회 사법권의 통제를 넘어 싸우게 되었던 그 점까지 군사적인 전국주의자 자세들을 증가시켰다. 알바니아의 고위성직자들은 이어서 알바니아 전국주의자 운동의 지도력을 생각하는 것처럼 곧 복잡한 그림으로 더해지는 것이었다. 발칸반도에서 전국주의자 싸움과 교회주의 정치는 신념의 왕권들에 대해 강력한, 종종 격렬한 대항으로 꼬이게 되었다. 그리스의 교회는 국가에 교회의 전적인 복종으로 끝나는 독립의 첫 번째 20년에 그것의 위기를 경험했다. 루마니아 교회는 국가와의 국내 분쟁과 교회일치주의 족장정치와의 외부적 분쟁을 포함하여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기간에 동등한 경험을 겪었다. 국가와의 분쟁들은 교회업무에서 교회행정과 시민 사법권의 문제들을 포함했다. 루마니아 교회의 독립은 국가적 독립에 필요한 보충으로 고려되었다.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자치독립을 주장할 때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반세기 전 그리스 국가주의자들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한 논쟁을 사용했다. 교회일치주의 족장정치에 대한 그들 정교주의 교회의 의존은 그들의 이전 목사들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족장이 오토만 국가의 죄수로 남은 이래로 국가적 수치로 고려되었다. 일단 교회의 독립을 위한 열망은 1885년에 족장 조아침(Joachim) 4세에 의해 루마니아 자치독립의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정전적으로 해결되었다면, 놀라운 시도는 그것의 분명한 국가적 과거와 함께 루마니아 교회를 기부하도록 만들어졌다. 루마니아 정교주의 역사에서 이런 관심은 1908-9년에 리콜라 이오르가(Nicolae Ioraga)의 두 권의 책 ‘루마니아 교회의 역사와 루마니아인들의 종교생활’의 출판으로 절정에 달았다.
루마니아 교회의 완전한 전국화는 세계 1차 대전 후 ‘더 위대한 루마니아’ 창조의 맥락에서 족장정치에의 그것의 단독 상승으로 왔다. 한 쪽에서 1925년에 루마니아 족장정치의 창조는 몇 십 년에 걸쳐 루마니아 국가의 상상했던 공동체를 만들었던 과정에서 마지막 상징적인 행위였다. 교회에 국가는 특히 트란실바니아에서 정교주의 직계제와 국가주의 지식인들 사이에 초기 분쟁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었다. 국수주의와의 원래적인 분쟁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교활함을 통하여 족장정치들에 발칸반도들의 지역적 정교주의 교회들의 상승은 국가적 정체성과 자치의 확인에서 마지막 행동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1920년에 이것을 성취했고 불가리아는 종교분열의 결말 후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 1953년에 이것을 성취했다. 또한 이 경우에 세르비아가 정전적이고 평화적으로 진행했을지라도 불가리아는 그것의 족장정치를 단독으로 선언했고 1961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종족주의’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교회일치주의 족장정치는 국수주의 도전으로부터 면역으로 남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에서 범슬라브주의와 그것의 더 특별한 교회의 외양에 반대한 싸움, 마케도니아와 트레이스에서 족장정치의 행정적 사법권에 관한 불가리아 족장의 침입에 반대한 싸움은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 국가의 국가주의 주장들과 정전적인 권리의 방어에 대한 족장의 고집 사이에 공유권이 발생했다. 점차적인 차별화의 결과로서 족장의 확장을 반대하는 명령과 함께 군사적 국가주의자들의 더 젊은 세대가 가진 전교구감독단(episcopate)의 향상을 포함하여 족장정치의 직계제 지위 안에서 발생했다. 싸움의 긴급성은 그리스 방어의 우선권과 방어 그리고 마세도니아에서 족장의 관심에서처럼 이 교구들에게 그리스 정책입안자들과 함께 날마다 보도록 인도했다. 이리하여 20세기 전환으로 국수주의 가치에 의해 형성된 전체적인 새로운 정신성은 점차적으로 몇 년 전의 ‘족장주의’의 비난인, 교회일치주의에 대한 족장주의의 정책들로 올라갔다. 새로운 교구들은 직계제에서 가장 잘 훈련받고 능력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고 아테네에 전국센터의 지배자들에게 오토만 제국에 정교주의 교회의 정책들에 복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카스토리아의 게르마노스와 드라마의 크리소스톰과 같은 그런 헌신된 국가주의자들을 포함하였다.
이 단계는 족장정치의 전통에서 급진적인 발생을 표현했으며, 그것은 오토만 국가와 함께 변통의 정책을 따라, 서블라임 포르테의 왕권이 제국에 교회와 그것의 무리의 보존의 열쇠이며 족장의 전통적 특권들의 보증이었다는 것을 수 세기의 긴 경험으로 충분히 잘 안다. 이것은 교회일치주의 족장 조아침 3세(1878-84과 1901-12)의 관점이었으며, 그는 새로운 교구의 군사력에 반대하여 견고하게 버텼으며 아테네로부터 족장정치의 독립을 주장했다. 족장과 국가주의 교구들 사이에 이어졌던 격렬한 싸움은 발칸의 국수주의 살육 아래 국가이상의 정교주의 센터조차도 ‘전국화’하려는 시도의 징후였다. 거의 같은 시간에 직계제에서 국가주의와 전통적 파당들 사이에 분쟁들은 중동의 정교주의 교회들에서 발생하였다. 1897년에 몇 해의 러시아 선전에 의해 그리고 오래 끈 싸움 후에 주장한 그것의 아랍 교구들이 안티오치의 그리스 정교주의 족장들의 긴 계보에서 마지막인, 그들의 사이프리오트에서 태어난 족장 스파이리돈의 사임을 강요했을 때 그런 위기를 경험했다. 정교주의 교회들 중 가장 작은 것인, 사이프러스 섬나라 교회조차도 국수주의 압력에 복종하였다. 1900년에 대주교 소프로니오스의 죽음부터 1909년까지 지속한 대교구 감독단의 후계에 대한 오랜 분쟁은 국가주의자 사이일 2세(Cyril II, 1909-1916)의 선거로 끝을 맺었다. 이 지점부터 사이프로스의 교회는 그리스와의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지배에 반대했던 사이프리어트 국가주의 운동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 복음의 싸움과 지역 정교주의 교회들의 점차적인 전국화의 결과로서 거의 10세기 동안 동유럽과 중동의 전체에 퍼졌던 ‘정교주의 공화국’의 통일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이래로 정복이 술탄(이슬람교국 군주)의 정교주의 기독교 주인들의 평범한 정체성을 확인했던 정교주의 기독교의 상상된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그것은 국민국가들에 의해 계발된 공동체의 새로운 감각에 의해 점차적으로 교체되었으며, 그것은 행정적으로 언어적으로 그들의 사회를 균질화한 후에, 종교에서 그들의 국가적 통일과 외부적 열망들을 위한 강력한 추가 지원을 발견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종교는 새로운 국가적 정체성을 위조하는데 마지막에 왔고 국민국가들이 그들의 교회들을 전국화하기까지는 전국적 정의에서 기능적 요소가 되지 못했다. 언어가 바라던 국가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벗어나게 하는데 초기 기준을 제공한 반면에 정교주의는 국가들이 창조했던 새로운 국가들의 통일을 굳게 하는데 돕는 그것의 강력한 심리학적이고 상징적인 힘은 마지막에 등록되었다.
34. 유럽에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국가들
(Ethnic and Political Nations in Europe)
/조로슬라브 크레즈치와 비테즈스라브 벨림스키
국가로서 그룹의 동일시에 기여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객관적인 요소들이 먼저 있다: 영역, 국가(또는 비슷한 정치적 위치), 언어, 문화와 역사. 모든 이 기준들에 긍정적인 대답들이 동시에 발생할 때 각각의 공동체나 인구가 국가라는 것은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고 나서 보통 여섯 번째 주관적인 기준인 국가적 의식(consciousness)이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준들의 몇 개나 대부분은 빠지는 상황들이 있으며 여전히 공동체는 그 자체를 국가인 것으로 느낀다. 세계의 나머지, 특히 이해관계가 있는 이웃들이 분리 국가로서 그 그룹을 의문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결국은 무관하다. 의식의 주관적인 요소는 결국 국가적 정체성의 문제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요소이다.
국가적 의식이 하나의 요소인 것처럼 그것의 존재는 항상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잘 세워진 많은 경우의 국가들(그 스스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웃들에 의해 당연시 되는)과 몇 가지 객관적인 특징들 외에 분명한 방법으로 분리 민족적 정체성을 위한 그들의 주장을 방어할 수 있는 문화를 만끽한 엘리트를 소유하는 그 민족적 그룹들에서 단순히 생각할 것이다.
언어, 문화, 역사, 영역과 정치적 지위와 같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들이 존재하고 결국 국가적 정체성과 그것의 인식에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이 기준들에 따라서 유럽의 민족적 그룹들을 목록으로 하여 시도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개별 기준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도울 것이다.
특별한 기준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때때로 충분하지 않은, 많은 면의 사실성에 더 깊은 성찰을 위해서 ; 우리는 또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에 질문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민족적 그룹이 그가 소유한 한 영역에 사는지; 그것은 다소 충돌 방법에서 해결되는지; 그것은 그것이 소유하는 다소 주권 국가인지 연방이나 자치적인 단위일 뿐인지; 그것은 모든 다른 민족 그룹들로부터 그것을 구분하는 그 자체의 언어를 말하는지, 등등과 같은 질문들에 관해서 특별히 유용하였다.
우리의 분류를 위해 관련한 모든 그런 환경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분류학이나 계획에 도달하며 거기서 여섯 가지의 분명한 특징들(영역, 정치적 지위, 역사, 문화, 언어와 의식)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20가지 형태로 확장된다:
(1)영역: 지리학적인 영역까지 민족적 그룹의 세 가지 기본 형태의 관계가 있다:
(a) 민족적 그룹의 본체는 영역에서 충돌정착지에 산다;
(b) 그룹은 영역에 다른 그룹과 혼합하여 산다;
(c) 그룹은 그가 소유하는 어떤 지방도 갖지 않으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다(이주지역).
(2)정치적 지위에 관하여 다음 대안들이 보여진다:
(a) 주권국가
(b) 한 국가나 연방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동등 위치의 국적; 두 이 경우들은 우리의 계획에서 연방지위 즉 민족적 문제들에 관해서 연방으로 꼬리표를 단다;
(c) 한 국가나 연방 안에서 자치적인 지위
(d) 전혀 자기-정부의 위치도 없다
(3)우리의 계획에서 역사는 주로 정치적인 용어들로 감지된다; 그것의 형태는 각각의 민족적 그룹에 관련될 수 있는지, 즉, 역사의 더 긴 기간에 걸쳐 민족적 그룹이 그가 소유하는 한 국가나 비슷한 정치적 형성을 가졌는지에 관해서 평가하게 된다. 만약 그것이 역사의, 적어도 어떤 실체적인 부분 동안 그가 소유한 영역적 정치골조를 가졌다면 우리는 정치역사의 이 경우를 관련된 것으로 분류할 것이다. 만약 민족적 그룹이 예를 들어 아라곤의 왕국에서 스페인사람들과 카탈로니아인들 또는 헝가리 왕국에서 마자르 사람들과 슬로바키아인들처럼, 그것의 정치적 역사를 다른 그룹에 공유한다면 그 때 위치는 무관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선택도 경우가 아니라며, 그러면 이 계획에 기록된 어떤 정치적 역사도 없었다.
지속적이건 제지되었건, 관련된 정치역사는 또한 각각 국적의 영역에서 국가들의 복수(複數)성이 있는 경우에 나타났으며, 그것의 대부분은 중세 독일이나 이탈리아 또는 왈라시아(Wallachia)와 몰다비아의 쌍둥이 루마니아 공국들에서처럼 국가적 전통과/이나 의식의 향상이나 고수에 기여했다.
(4) 문화에 관해서 의문은 특별한 문화의 초기 기반은 과거든 현재든 상관없이 (a)언어, (b)종교, (c)정치적 상황 또는 가능하면 (d) 삶의 가능한 방식이다.
(5)그 자체의 소유 언어의 존재가 국가적 정체성을 위한 필요한 조건이 아닌 것처럼 기본적인 의문은 그룹이 그것 소유 언어를 가지는지 또는 그것을 다른 그룹과 공유하는지이다. 만약 그 소유의 언어를 가진다면, 그 때 국가적 의식의 강도는 그 언어가 문학적 형태로 발전해왔는지 또는 그것이 다소 구어적 지방언어(방어)로 남았는지에 따라 다양할지도 모른다.
이 선택들은 한 세트의 결합을 위해서 허용한다. 한 민족적 그룹은 둘이나 하나만이 문학적 언어가 되는 두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나머지는 단지 구어적인 지방언어(특별한 사투리)였다.
그러면 우리의 분류에서 선택은 (a) 자신 소유(문학 언어); (b)공유(다른 그룹과 공통의 문학과 구어); (c) 자신 소유와 공유; 이 마지막 경우에서 토박이 언어는 문학적인 것이거나 어떻게든 또한 작문을 위해 부분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지 사투리일지도 모른다.
개별 경우들에서 특별한 언어가 진짜 문학 언어로 고려될 수 잇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때때로 어렵기도 하다. 이것은 특히 정치적 분위기(민족적 그룹이 친족 민족 그룹의 국민국가에 또는 이방인 민족그룹이 강력한 통일 언어정책으로 합병할 때) 때문에 그들의 문학 형태를 완전히 개발시킬 수 없는 언어를 가진 경우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개 국어 민족 그룹에 의해 사용된 언어들 중 하나가 단지 사투리 이상의 어떤 것으로 거의 고려될 수 없는 경우들(이것은 보통 우연히 토박이 언어이다)에서, ‘사투리’란 기록은 우리의 분류에서 ‘소유’ 대신에 사용된다.
(6) 국가적 의식이 국적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의 활자학은 이 특징들에 관해서 그려질 수 있다. 우리의 계획에서 다른 선택들은 (a)만약 기초가 언어와 관련 문화라면, 민족적, (b) 만약 기초가 그것의 중요성은 역사적 전통이나 특별한 사회경제적 체제에 의해 지지되는 분리 정치적 단위(국가)라면, 정치적이고 (c) 만약 민족적이고 정치적 요소들이 너무 밀접하게 뒤엉켜져 있어 그들 중 하나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이 애매하다면, 둘 다로 표시된다.
종교는 국가적 의식을 위한 중요한 원인이나 이유로 고려되지 않는다. 친족인 것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들 사이에 차별화의 주요 표시의 역할을 떠맡는 곳마다, 사실 다른 결정자를 위한 대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언어(유대인과 두 명령을 가진 울스터 사람들)와 같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보다 적절한 표현을 포기하거나, 종교적 공동체에서 수평적으로 계층화되었던 제국 안에서 지배그룹에 속하는 그들의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잃어, 그들 스스로 다르게 형성된 골조 안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모으는 지점이다(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보-크로아트를 말하는Serbo-Corat-speaking 무슬림들).
비록 유럽이 보다 더 좁은 지리적 한계(우랄 산맥과 마니치 습지에 동부 국경지역과 함께)에서 감지될지라도, 73개 민족 그룹들은 확인될 수 있다. 이 그룹들은 물론 몇 만부터 몇 억까지 매우 다른 양을 가지고 있다; 이 다양성은 또한 사회학적 관계의 특별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표들에서 각 국적의 수적인 힘의 표시는 3개의 특징들에 더해진다. 데이터는 1970년이나 1971년 조사들에 기초하거나 평가들은 그 기간에 관련된다.
표1. 서유럽
표2. 북유럽
표3. 유럽 중서부와 남부
표4. 유럽 중동부
표5. 동유럽
표6. 유럽 국적들(민족)의 분류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유럽은 다섯 개의 지리학적 영역들로 구분되며 그것의 각각은 표시들과 그것의 형태들을 정의하는 다른 강조나 유형의 개별을 나타낸다. 이 영역들은 (1)서부); (2)북구; (3)중서부와 남부; (4)중동부와; (5) 동부이다. 중앙은 정치적 기준에 따라서 한쪽에 동부와 다른 쪽에 서부와 남부 사이로 나뉜다. 그것들의 정부가 그들의 국가 독트린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언하는 나라들에서 사는 국적들은 표4에 요약된 반면에 표3은 유럽 중남부의 모든 다른 국가들을 포함한다. 동부는 그들의 본체가 USSR의 유럽부분에서 사는 국적들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인구의 많은 숫자들은 대체로 USSR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 우리는 그것의 총 인구가 10만이 넘지 않는 다섯 개의 작은 국가들을 고려하지 않는다(안도라, 리에츠텐스타인, 모나코,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
그러나 표들이 조각된 민족 그룹들의 형태와 양을 표시하지 않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국민국가들에서 그들의 본체로부터 분리하여 다른 국적들에 의해서 지배하는 국가들에 사는 국가들의 부분들(조각들)이다. 소수 민족의 이 특별한 경우는 나중에 고려될 것이다(특히 6장, 파트 2에서).
표6은 73개 유럽 민족적 그룹들이나 국적들의 지역적 분포에 곤한 요약된 정보를 준다(두 번 계산되어 있는 독일들과 프랑스와 함께 총괄된 오시탄들Ocitans). 개별 특징들의 가장 빈번한 요소들은 (a)충돌 해결의 영역)과 (b)문화의 기반으로 언어이다; 56과 60개 그룹들은 이 각각의 목록들에 분류되었다. 종교는 다섯 경우들에서 민족 그룹 對 그것의 이웃들의 기본적인 동일시를 그리고 하나나 두 경우들(표에서 언어로 특징화된 랍족은 집시족들과 함께 포함된다면)에서 특별한 형태의 생활(다소 유목민적인)을 제공한다. 나머지 일곱 경우들에서 언어를 공유한 민족적 본체로부터 어떤 문화적 차별화를 위한 기반은 정치적 조건, 즉 분리 국가의 존재와 관련한다.
53개 민족 그룹들은 그들 소유의 문학 언어에 대한 독점적 사용으로 확인될 수 있다. 13개 민족 그룹들은 어떤 의미에서 2개 국어 국가이다: 그들은 두 개의 그들 소유하는 특별한 언어와 그들이 다른 민족 그룹과 공유하는 언어를 말한다. 물론 8개의 경우들에서 본토언어는 다소 문학적인 것인 반면에 나머지 5개 경우들에서 그것은 사투리 수준에 남았다. 또 다른 13개 경우들에서 각각 그룹의 두 구어와 문어는 또 다른, 보통 이웃 국가에 친족 사람들의 그것과 같다.
정치적 각도에서 그것을 봄으로, 1979년에 24개 민족 그룹만이 그들 소유하는 국가를 가졌다. 만약 적어도 공식적으로 동등 용어들(연방 지위에 대한 우리의 목록)에 대해 다른 국적들과 국가를 공유하는 국적들이 포함된다면, 숫자는 43까지 증가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에 5는 그들이 그들의 문학적 언어를 공유하고 그들로부터 그들의 분리 국가로서의 지위 때문에 거의 유일하게 다른 보다 넓은 언어 공동체들(플레밍, 왈륜, 알레마니, 로마와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스위스)의 분점들이다.
정치적 역사에 관해서 위치 또한 얼룩덜룩하게 된다. 36개 경우에서만 19세기 전 정치적 역사가 각각의 민족적 그룹에 관련될 수 있다. 27경우들에서 정치적 역사는 다행히 보통 왕조였던 통일한 요소인, 다국가적이었던 본체에 관련되었다.
10개의 경우들에서 어떤 정치역사도 20세기 전의 적절한 감각으로 추적될 수가 없다.
국가적 의식은 두 민족적이고 정치적 동일시에 기초한 것처럼 42 경우들에서 분류될 수 있다. 24경우들에서 국가적 의식으로 민족성의 확산이 확인될 수 있다; 7개의 경우에서만 국가적 의식이 정치적 분위기와 발전 때문에 우선적이었다. 스위스와 벨기에의 경우에서 의식의 민족적인 면들은 외부적인 관계에서보다는 내부적인 관계에서 강조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유럽에서 두 개의 민족 그룹들(유대인과 집시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들은 유럽의 맥락 안에서 적어도 어떤 정치적이고 영역적인 기반(즉, 자기 정기의 어떤 형태도 어떤 정치적 역사도 없는)도 갖지 않으며 그들의 집단의식은 전적으로 특별한 형태의 문화에 기초하고 있다. 유대인의 경우에서 우선 종교적인 전통에 기초한다, 집시의 경우에는 다소 유목민적인, 특별한 생활방식에 기초한다.
유럽 국적들의 본성에서 차이는 만약 그들이 지역적 붕괴에서 세밀히 조사된다면 더욱 중요하게 된다. 대부분의 정치국가들(그들 문화의 정치적 기반에 의해 우리의 표들에서 확인된)은 유럽 중서부에 있다. 어떤 자기 정부의 지위도 없는 12개의 민족 그룹들 중에 다섯 개는 서부에, 하나는 북부에, 세 개는 유럽 중서부에 두 개는 유럽 중동에 그리고 하나는 동부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세 개의 서쪽 부분들은 그들 소유의 정치적 역사를 가진 상당히 많은 민족 그룹들을 가진다.
35. 이주지역과 언어(Diaspora and Language)
/자콥 랜도우
각각의 주인 나라, 그것의 고국과 이주지역의 관계를 결정하는데 언어요소의 관련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주 지역인, 서유럽의 터키족의 경우에서 잘 설명된다. 스페인,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이주 노동자들의 그런 이주 장소와 대비하여, 터키족들은 1960년대 초반 이래로만 유럽 서부와 북부 - 적어도 우리에게 그들은 이주 지역을 고려하도록 허락하는 상당한 숫자들로 - 로 일을 찾아 이주하여왔다. 연방 독일(공간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 곳)에서, 터키 노동자들의 숫자는 1961년 10월에 70,00명부터 1962년 7월에 18,500까지 올랐고 1974년 중반에 615,827명으로 피크에 닿았으며 그 후에 약한 안정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가족과 몇몇은 불법(그리고 통계적으로 잡히지 않은)으로 들어온 사실을 고려하여, 양적인 문제의 규모는 분명하다: 연방 독일 만에 2천만 명의 터키인들에 가깝다. 그들은 14% 유고슬라브, 13%이탈리아, 6%그리스, 5% 아시아, 4% 스페인과 25%의 다른 국적들과 비교하여 거기서 외국인들 사이에 33%의 많은 의존성을 보인다(1982년 5월 4일 프랑크루프트 알레메인 제이튱에 따르면). 다른 문제들은 도시화, 고도로 산업화 된 사회로서 시골의 산업화 이전 공동체보다 인구의 더 큰 집중으로 사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주 지역들과 마찰하는 경향이 더 있게 나타나는 실업(unemployment)이 모든 유럽의 서부에서 증가하고 있는 것처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 서부에서 터키의 이주지역에 대한 현재 연구의 많은 것은 그들의 노동관계, 주거형태와 문화변동 어려움들을 강조하여,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터키의 정부와 서유럽의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부과된 혈통들은 주로 연방독일의 그것인데, 간과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노동자들의 큰 이주지역의 존재로부터 결과한 생활의 사실들은 이미 유럽 공동시장에 참여하는 터키 움직임들에 반응하도록 영향을 미쳐왔다; 몇몇의 유럽 대표들은 그들이 터키 노동자들의 ‘홍수 되(flooded)’ 도록 포괄했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거의 모든 공식적인 수준의 협상들에서 충돌로 남은 터키 정부와 몇 개의 다른 정부들 사이에 긴장은 이 동전의 한 면일 뿐이다. 다른 것은 개별 반동들이다; 하나는 터키의 가스타르베이터와 그들의 가족(때때로 즐겁지 않은 농담으로 표현된)을 향해 독일 개인의 악의에 관해 상당히 많지만 터키 신문에 반영되고 아마 그들의 정부가 점점 더 유럽 서부에 의존하게 되고 있다는 감정에 의해 생긴, 터키의 지식인들에 의한 분노에 관해서는 훨씬 덜 듣는다.
더구나 이 맥락에서 언어요소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에서 전혀 언급이 없다. 분명히 터키는 독일과 다르지만 포르투갈과 세르보-크로아티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차이는 포르투갈과 세르보-크로아티아와 함께처럼 단어나 발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터키는 그것의 구문론에서 다른 세계들이며 그것은 특별한 정신성의 표현인 것은 당연하다. 터키는 대서양 알타이 그룹의 교착 언어이며 그곳에서 단어순서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단어형성은 수많은 사전적 접미사의 첨가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외국인들에게 터키어를 배우고 터키인들에게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이유이다. 오른 손으로 육체적 기능을 마스터 한 사람이 왼손을 쓰는 사람과 이것을 비교한다; 그것은 거대한 노력과 그것의 결과로 완성될 수 있으며 끝마쳤으며 그것은 좀처럼 자랑할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가능하면 대부분 교육받은 터키인들은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해냈다. 그러나 이것들은 유럽 서부에 가르타르베아터(Gartarbeiter)들 사이에서 거의 표현을 하지 못하며 그들의 많은 수는 그들 고국에 실업의 덜 교육받은 중하층에 속한다. 비록 전망 있는 고용주들이 직업을 구하는 인구 중에 최상을 고를지라도, 대부분은 여전히 유럽 서부에서 그들의 새로운 방식으로 문화변동의 심각한 문화적이고 언어적 어려움들을 가지고 농부나 더 가난한 도시그룹들에 속한다. 같은 해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매우 이른 나이에 이주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가족들에 적용한다. 주인 국가에서 그들의 동료들과의 터키 아이들의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접촉은 끊임없는 마찰의 근원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잘 문서화되었다.
여기서 유럽 서부에서 터키의 이주 장소들은 그들의 모국과 긴밀한 연결을 유지한다. 이것은 유럽 서부에서 몇 년 만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의도하는 터키인들과 관련하여 가장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이것들은 특별하게 이주 장소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조차도 규칙적으로 터키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터키 신문은 날마다 모체언어로 유포되고 연방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지방마다 인쇄된다; 터키 정치인들은 그들 사이에 선거운동하고 터키 가르타르베이터는 유럽의 서부 정치보다 터키에 관해서 훨씬 더 많이 관계되고; 그들 자신의 이맘(지도자)은 그들을 기도로 안내한다. 이런 유형들이 그들의 아이들, 즉 2세대들과 함께 계속한다는 것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며 그들 모두는 집과 ‘구역’에서 터키어를 하며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또한 그것을 공부한다. 이런 점에서 유럽에서 터키인들은 2세대가 적응하고 3세대가 병합하는 다른 이주 장소와 다르다. 마음에 와 닿는 후자 종류의 한 예는 미국에서 시리아-레바논 이주 장소이며 그것은 거기에 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아랍인들은 그 자신의 아랍신문과 문헌으로 이주 장소(아랍어로 마흐자르)를 형성했지만 그들의 고국과 어떤 의미심장한 정치적 연결은 없다. 그들의 고국과의 아랍 이주 장소의 정치적 연결이 눈에 띄게 되었던 요즘(주로 레바논에서 1975년 내전이래로)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합병된 이주자들의 합병의 특징처럼 구역에서 매우 억제하고 자제한다. 그러나 사람은 마흐자르의 첫 번째 세대는 쥬브란 카릴 쥬르반(Jubran Khalil Jubran)과 그의 동료들과 같은 그런 인물들에 의해 지성적으로 인도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그들은 기독교인들이고 보통 적어도 하나의 언어, 대개 프랑스어나 영어를 습득하게 되었다. 또한 세기의 전환에서 미국은 오늘날 유럽의 몇 개 부분들보다 더 복합사회였다. 현 세대에서 유럽 서부에 터키 이주 장소의 특별한 경우는 그것들의 몇 개는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고려하는 해외에 그들의 머무르는 본성에서 뿐만 아니라 언어, 문화와 종교에서 그들 주인 나라들로부터 그들의 전체적인 분리이다.
비록 서유럽에서 터키 이주 장소가 너무 최근이어서 우리에게 포괄적인 비교를 하는데 허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두 경우들 사이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이 이주 장소에 터키 어린이들은 물론 집에서 터키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은 그것을 특별한 정부 조직 계층들, 적어도 연방독일에서 그것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폭넓은 규모의 실험들은 이 외국 아이들에게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데 착수하였다. 우리는 지금과 예측할 수 있는 장래에 두 번째 세대는 거의 적응하지도 확실히 그들의 주인 나라들에 합병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랍의 마르자르의 아이들은 19세기 후반 이래로 그들의 채택 주인 국가들, 특히 미국에서 빠르게 사회의 부분이 되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2세대 - 그리고 3세대 전부 - 가 비록 그들이 집에서 그것을 말할지라도, 학교(몇 몇의 예외적인 경우들을 방해하여)에서 아랍어를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해 크게 일어났다. 몇 몇의 보다 더 부자 모국들에 의해 제공된 아랍어의 공부를 위한 인정들은 우선 대학 학생들에게 보답되었고 아직까지 전체적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의 모국과 아랍 이민자들의 후손들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두 중요 수준들; 감각적(가족연대)과 경제적(사업관계)에서 유지되었다. 모국들과의 정치적 관계들은 일반적으로 드물고 산발적이었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린든 베인즈 존슨 업적의 포괄적인 시험은 중동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노비(Lobby)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백악관은 아랍 혈통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였다(몇 몇의 그런 시도들은 실제적으로 같은 개인들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놀랄만하게 고국을 위한 아랍 마흐자르 자금모금은 보통 내전에 의해 황폐화 된 레바논을 재정적으로 도울 필요가 일어났던 지난 10년 동안만 조직화되고 제도화 되어 산발적이었다.
상황은 사이프러스 경우에서 그들의 노비(Lobby)와 그들의 자금모금 둘에서 그리스계 미국인들 사이에 뚜렷하게 다양하다. 아랍계 미국인들은 그리스계 미국인들보다 수적으로 적었으며 그리스는 몇 개의 아랍 국가들보다 더 가난하다는 사실은 이 차이들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만을 제공한다. 사람이 위의 예들에서 언어 요소의 역할을 확신할 수 없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계 미국인 아이들은 그들의 모국어의 공부에 아랍계 미국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한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흥미롭다. 196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현대 그리스어는 외국에서 태어난 173,031을 위해 모국어였다. 전체적인 수치는 사람이 또한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에 대한 지식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더 많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실행했던, 미국에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조사로부터 미국 남부와 북부의 그리스 정교주의 대교구는 미국에서 16일 학교들을 운영했으며 그곳에서 그리스어 공부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종교 같은 과목들에서 수업은 보통 그리스어로 실행되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공동체 교회들은 또한 그리스 역사와 종교공부들이 그리스어로 제공되었다는 약 450개 오후 학교들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중요한 것에도 불구하고 지난 60년 동안 그리스계 미국 공동체를 내부적으로 구분하는 기본적인 논쟁에서 하나의 국면일 뿐이다. 본성에서 본질적으로 반박적인, 두 개의 주요 경향들은 미국과 그의 아이들에게 그리스 이민자들 사이에 헬레닉(그리스) 문화의 유지를 위해 분투한 그리스-미국 진보학회(Greek-American Progressive Association, GAPA)와 보다 더 부드럽고 보다 더 빠른 미국화를 위해 운동하는 미국 헬레닉 교육 진보학회(American Hellenic Educational Progressive Association, AHEPA)에 의해 1920년대 이래로 대표되었다. 1960년대에 GAPA는 약 10,000명 회원들로 이루어졌고 AHEPA는 약 25,000명으로 이루어졌다. 이것들은 분명히 각각 고국과 주인 국가를 향한 언어적이고 문화적 수준들에 관한 기본적으로 다른 설명들을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아마 AHEPA보다 작을지라도 GAPA는 일반적으로 터키와 사이프러스에서 그리스와 그리스 이주 장소들의 이익을 위해 로비(Lobby)하는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동일할 수는 없을지라도 비교상황은 현재 연방독일에서 그리스 이주 장소의 부분들 사이에 퍼져있다; 그리스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문제는 두 정부들 사이에 관계를 복잡하게 했다. 간단히 진술하자면, 많은 그리스 가스타르베이터가 사는 라인강/주 영역에서 부모들의 두 그룹들은 미국에서 그리스인들의 논쟁을 반복하지만 훨씬 더 치열하게만 그렇다. 프랑크프루트와 그것의 근처에 그리스 부모들의 통합에 기반한 협회는 독일학교들에서 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선택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요 논쟁: 많은 아이들은 연방공화국에서 남을 것이며 여기서 그들은 독일어에 숙달하여야 한다. 부모들의 더 많은 모국에 기반한 그룹인, 아테네는 그들의 자녀들이 그리스 학교들에서 그리스어와 문화를 공부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주요 논쟁: 많은 그리스 아이들은 언젠가 그리스로 돌아가기를 원할 것이고 그리스어의 좋은 지식이 거기서 그들의 경력을 위해 극도로 중요하였다; 그러는 사이 당국은 싼 노동으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독일학교들에서 그들을 통합하기를 바란다. 이리하여 아테네는 무료 교육 초등학교와 두 번째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82년에 약 34,500 젊은이들은 전자에 등록되었고 또 다른 2,500명은 후자에 등록되었다. 학생들이 때때로 시대에 뒤떨어진 교과서들을 종종 사용하여 떼 지어 모여 있는 60명 학생까지 있는 과밀학급들에서, 그것들에 출석하기 위해 날마다 50킬로까지 통학하였던 것은 그 그리스 학교들이 인기 있다는 신호이다. 그리스 체육관이나 1977년에 착수한, 스투트가르트에 두 번째 학교는 열중에 하나의 그런 예이다. 모두 그리스인이며, 17에서 18세인, 그것의 450명 학생들은 17개 학급에서 세 개 수준들으로 오후마다 공부한다. 모든 학생들의 목적은 독일대학에서 등록을 위해 요구되는 갈망한 졸업증서인 아비투르(abitur)를 얻는 것이다. 독일대학들이 몇 몇의 이 학교들 증서의 유효성을 인정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그리스 영사는 이 학교들의 유지를 위해 매년 14만 마르크들을 기부하고 있었다. 두 정부들 사이에 협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오우의 정부는 최근에 그리스에 있는 대학들에 허가권뿐만 아니라 해외의 그리스 학교들(연방 독일에서 약 40개를 포함하여)에 공식적인 인정을 동의했다. 두 국가들 사이에 이전의 동의하에 이것은 또한 무니치와 프랑크프루트의 대학들에 자동적인 허가권을 인정한다.
이 맥락에서 유대인 이주 장소 학교아동들은 또한 언급되어야만 한다. 이 그룹은 분명히 교육적 추구에 관해서 몇 개의 다른 이민 그룹들보다 훨씬 더 큰 정도까지 조사되었다. 비록 내가 헤브루(Hebrew, 이스라엘)에서 그들의 최근 교육과 관련한 세부적인 전체 데이터를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데이터는 기꺼이 유대교 공부들에 관해서 유용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매우 빈번하게 약간의 헤브루를 구성한다. 세계적인 기반에 대해 수행했던 최근 연구는 6-17세의 1,325,500 유대 아동들(이스라엘 밖의) 전체의 37%는 1970년대 후반 동안에 유대교 학교들에 등록되었다. 이 37%의 붕괴는 13%만이 낮 학교들에 등록되었고 24%는 파트타임 유대교육에 등록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다지 말하면, 약간의 유대교 교육을 받은 아이들 중에 약 3분의 1은 낮 학교들에 등록되었고 3분의 2는 파트타임 유대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다. 데이터는 물론 미국 북부에 대한 숫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지배되어 있다. 그들은 1960년대 이래로 거의 3분의 1의 전체적인 하강을 기적하며 그것은 많은 유대인 이주 장소들에서 일반적인 경향들이다. 어떤 분명한 대답도 우리의 지식에 대한 현재 국가에 의해 제공될 수 있는 열렬한 질문들: 한편으로는 다양한 이주 지역들에서 유대교 과목들과 헤브루의 연구와 다른 한편에서는 이스라엘 업무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포함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헤브루의 이 연구는 그들의 주인 국가들을 향하여 유대인 이주 장소들의 태도들에 어떤 충돌을 가지는가?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이 특별한 경우에서 세대 간극은 모국의 정치적 로비와 자발적인 재정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많은 해외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그들의 모국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대답은 실질적으로 어떤 유대인 이주 장소도(1983년에 세계적으로 약 39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이주자들의 예외와 함께)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이 예에서 특별히 위험하다 - 반면에 대부분의 이탈리아 이주 장소들은 이탈리아 출신이다 등등.
36. 상징적 민족성과 언어(Symbolic Ethnicity and Language)
/존 에드워드
첫 번째 장에서 나는 언어의 의사소통적이고 상징적인 면들 사이의 구분을 언급했고 전 책에 걸쳐 나는 일반적으로 민족성의 공적이고 사적인 표현들 사이에 차이들을 언급해왔다. 언어에 관해서 주안점은 보통 의사소통적이고 상징적인 면들이 공존하는 반면에 그들은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류 인구들 사이에 일상적인 사용의 언어는 또한 보통 그룹 문화와 전통을 옮기고 반영하는 다양성이 있다. 소수 그룹들이나 언어변화가 합리적으로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던 그룹들 사이에, 상징으로서 언어의 가치는 의사소통적 기능의 부재로 남는다. 아일랜드의 예는 더 이상 넓게 말해지지 않은 언어를 위한 지속하는 애착을 증명하며 그들의 의사소통적 재생은 약하지도 일반적으로 바라지도 않는다. 이스트만(Eastman)은 비슷하게 그룹 정체성과 연관되나 규칙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나 사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관련된’ 언어의 개념에 대해 논의했다.
의사소통적-상징적 구분의 무지는 명료성의 부족과 방향을 잃은 노력으로 인도할 수 있다. 만약 부흥자들이 그들의 캠페인을 할 때 의사소통적 용어들에서 주로 언어를 강조하고 그들의 호소가 변화가 일어났던 그룹들을 향하였다면, 그 때 그들은: (a) 언어사용의 추진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b) 일종의 아노미인 복합주의의 덮개 아래 재도입될지도 모르며 (c) 그룹 정체성을 대신하여 약간이나 모든 노력에 대한 조소적인 관점을 추진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1976년에 나는 버몬트에서 프랑스 아이들을 위해 2개 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설명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결과들에 대한 연구의 부분으로서 부모들(프랑스어를 말했던)은 그들 스스로 언어적 계통을 따라 비율 내도록 요청되었다. 약 55%는 스스로를 주로 영어로서 보았다; 또 다른 13%는 그들은 프랑스어와 영어 사이의 어떤 변동적인 기간에 있었다고 느꼈다. 전혀 프랑스어를 말하는 기준에 맞추지 못하는 프로그램에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획은 분명히 의사소통적인 프랑스어 사용을 지원하기 위해 선의의 외부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 영역의 가장 조잡한 조사는 대부분의 가족들이 잘 정착되었고 - 본질적으로 퀘벡 출신으로, 그들은 새로운 이민자들이 아니었다 - 그들 스스로를 미국인들로 생각했고 프랑스어를 사적인 목적들을 위해 유지했다는 것을 보였다. 그것의 무지에서 프로그램은 아이들을 경유하여, 공적인 언어를 통해 변화하는 정체성을 지키려고 시도했다. 연방적인 자금 대리인으로부터 재정적인 고삐를 잡으려는 지역적인 내키지 않음 때문에 그것이 끝났을 때 그것은 그것의 일깨움에서 정체성의 방어로 모든 형태의 능동적인 간섭으로 확장했던 조소주의를 남겼다. 그것은 또한 그룹지음에 대한 공적인 표시에 영향 미치는데 이런 실패는 실제로 사적인 요소들 - 특히 아이들 사이에 욕망을 약화시켰으며 언어에서 그의 늘어나는 결핍은 그 자체를 그들의 프랑스어 배경의 다른 특징들로 바꾸었다.
의사소통적이고 상징적인 언어 사이에 구별은 공적이고 사적인 민족적 표시들 사이에 하나 더 일반적인 것을 비춘다. 실용적인 이유로 우리는 합병적인 보충적인 복합적 맥락들에서 상대적으로 초기 우연성이었던 공적이고 상징적이지 않은 특징들을 기대하는 것은 지금까지 논쟁의 힘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적이고 상징적인 표시들은 사회적인 가동성이나 접근을 방해하지 않고 그룹 한계들의 연속성을 추진하기 때문에 계속 존재한다. 몇 개의 공적인 표시들은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것을 기록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이 공적이고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의상, 장식, 춤, 노래 - 이것들은 공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징적인 표시들로서 지속하(거나 재출현하)는 동안 그룹 생활의 일반적인 표시들로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그들의 외형은 종종 특별한 축제들, ‘날들’ 등등으로 한정되며, 상업적인 이해들에 연결될지도 모르며 그룹성원이건 아니건, 이해관계가 있는 어떤 사람에게 유용하게 될 수 있다.
내가 이미 간단하게 언급했던 상징적 민족성의 매우 유용한 토의는 간즈(Gans)에 의해 제공되었다. 그는 새로운 민족성은 문화변동과 합병의 기본적인 과정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뿌리들’에서 새로운 이익이 있다는 것을 진술한다. 이것은 어떤 재생으로 안내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으나 그것은 다시 새롭게 된 민족적 상징주의로 일어난다. 간즈의 말에서 이것은 ‘마지막 리조트의 민족성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몇 세대 동안 지속한다’(1쪽). 그러나 간즈에 의하면 결국, 이것마저도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소위 ‘직선적인 이론’의 어떤 본질적인 방해도 없었으며, 즉, 그것은 점차적인 소수민족의 흡수를 예고한다. 그러나 위쪽의 가동성 때문에 민족적 그룹들은 보다 더 볼 수 있고 민족적 상징들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민족적 재생’의 생각을 제안하는데 크게 책임이 있었던 ‘기자들과 논문가들’로부터 주의를 끌었다. 모든 이것은 민족성에로 3번째 세대 ‘복귀’에 대한 한센(Hansen)의 유명한 개념은 사실이라며 상징적인 표현들에 한정된다, 즉, 복귀하는 손자들은 종종 선조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약 상징적인 민족성과 사적인 표시들이 남은 면들이라면, 그것은 소수민족 정체성을 대신하여 능동적인 간섭이 비생산적이거나 사실 생산에 반대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따른다. 민족성의 의미있는 면들이 그런 행동에 의해서 어떤 합리적인 시간의 길이 동안 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할 어떤 증거도 없으며 보통 다루어지는 것들(언어처럼)도 마찬가지이며, 그것은 변화에 고도로 민감한 볼 수 있고 공적인 표시들이다. 분명하게 민족적 지속의 편에서, 그릴리(Geeley)는 ‘민족적 주거의 핵심’은 민족적 유산에 관한 자기 - 의식이 요구된다면 적기 때문이며 행동의 유형들이 친밀하고 개인 간이기 때문에 분명히 참고, 나머지의 특징들이 사회적 벌칙들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남으며 그룹들은 ‘미국 업적에 장애물인 민족적 특징들을 훨씬 더 빨리 양보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서 고려하는 것은 교훈적이다.
물론 공공과 개인, 상징과 비-상징적 민족성 사이에 균형은 그룹에 남은 모든 것이 어떤 상징적 ‘나머지’이라면 나쁘다는 것을 논의될 수 있다. 이리하여 스몰리츠(Smolitcz)는 ‘나머지 민족성은 민족적 문화퇴화의 사실을 흐리게 한다... 민족적 문화들은 지속적으로 얇아지게 된다는 것을 관찰한다. 하지만 변화는 퇴화인가? 스몰리츠는 피할 수 없는 것을 슬퍼하는가? 역사의 힘은 나머지의 민족성의 변동은 폭넓게 발생하고 가장 평범한 그룹 성원들에 의해 반대로 싸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단순히 제안한다. 공적인, 볼 수 있는 표시들의 보류는 공적인 지원이나 용기가 있든 없든, 달갑지 않게 다수-소수, 관계-예외에 가진 사회적 사실성이 주어지며, 물론 그곳에서 그룹 인종차별은 선호되(드물게)거나 강요된(옹호할 수 없게)다.
37. 남아프리카에서 민족성의 창조
(The Creation of Ethnicity in South Africa)
/레로이 베일
남아프리카에서 심오한 사회적,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변화의 맥락에서 대중적인 호소의 이데올로기적 진술처럼 민족성의 창조는 다양한 역사적 힘과 현상들의 차별적인 결속의 결과였다. 그것은 지역에서 민족적 의식의 평탄하지 않음(unevenness)을 설명하는 그들의 상호-출현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그 평탄하지 않음이다. 사람은 민족적인 메시지의 창조와 주입에서 세 가지의 그런 변수들을 구분하기도 한다. 먼저 다른 지역, 예를 들어 19세기 유럽 국수주의에서 그런 이데올로기들의 창조에서의 경우처럼, 그것을 공식화하는데 포함된 한 그룹의 지식인들 - 한 그룹의 문화 중개자들 - 을 갖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두 번째, 보통 ‘간접적인 규칙’이라는 구절에 요약된 시스템인, 하위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아프리카 조정관들의 폭넓은 사용이 있었고 이것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의 한계들과 조직을 정의하는데 기여했다. 세 번째 평범한 사람들은 빠른 사회 변화의 시기에 ‘전통적인 가치’라 불리는 것에 대해 실질적인 부족(real need)을 가졌으며 이리하여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폭넓은 수용을 위한 길을 연다.
이 연구들로부터 아마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지식인들이 많은 다양한 민족적 그룹들의 문화적 특징들을 정의하기 위해서 그들의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을 주의깊게 만들었다. 이 지식인들은 해리스, 레인저, 베일과 화이트(Harries, Ranger, Vail and White)에 의한 연구들처럼 유럽 선교사들일 수 있었으며 로버츠(Roberts)는 분명히 하고 있다. 또는 해리스, 베일과 하이트, 쥬시에위키와 팝스타인(Harries, Ranger, Vail and White, Jewsiewicki and Papstein)이 보인 것처럼 그들은 유럽 인류학자들이고 역사가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경우들에서, 지역 지식인들 - ‘유색인’ 아프리카너(남아프리카 태생의 백인, 특히 네덜란드계의)이건 아프리카인이건 - 그 과정에 친밀하게 포함되었으며 그것이 가능한 곳에서 그들은 그들의 유럽 대응물들과 손을 맞잡고 기꺼이 일하였다.
선교사들의 역할은 세 방법들 중 적어도 하나 - 와 때대로 모두에 특히 중요하였으며 20세기에 아프리카 역사의 발전에 그들의 영향은 그들이 과거 20년이 넘는 동안 신임을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이 분명하다. 먼저 선교사들 스스로는 종종 문화적 정체성, 특히 기록 언어와 조사된 기록 역사로 조직될 수 있는 문화적 상징들을 제공하는데 도구적이었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 오래 전에 ‘언어는 국가들의 계통이라’는 것과 선교사들은 전심으로 이 공식견해를 수용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여기서 기록 언어를 기록 형태들로 줄이는 기술들을 가졌으며, 이리하여 새로운 ‘부족들’이 수용을 위해 요구했던 계통을 전달한다. 반복해서 길리오미, 버틀러, 해리스, 레인저, 베일과 화이트, 그리고 벤핀이(Giliomee, Butler, Harries, Ranger, Vail and White and Penvenne) 쓴 章들에서 약간만을 언급하여, 언어는 문화적 포장의 집합에서 중심적인 항목으로 서 있다. 이 언어들이 아프리카언어였던 곳에서 언의 ‘적절한’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를 골랐던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리하여 보다 더한 통일로 이용하고 완고한 한계들을 세움으로서 구분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기록 언어들을 창조하는 외에 선교사들은 ‘습관’과 ‘전통’에 대한 그들의 상술을 통하여 문화적 정체성을 창조하는데 도구적이었고 ‘부족의’ 역사들을 기록하여 과정은 레인저, 베일과 화이트 그리고 쥬시에위키가 쓴 장들에서 토의하였다. 일단 이런 문화의 요소들이 제 자리에 있고 뚜렷하게 새로운, 탓으로 돌리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화적 기반으로서 사용되는데 유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피보호자의 지위와 왕권에 의존했던 더 오래된 조직하는 원리들을 대체할 수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거대한 가소성을 보였다. 이리하여 완고한, 통기성이 없고 상대적으로 탄력이 없는 민족적 한계들, 그것의 많은 것은 크게 임의적으로, 구축되게 되었으며 시겔과 팝스타인(Siegel and Papstein)의 논문들이 보이는 것처럼, ‘타자’의 전형의 성장에 의해 강화되었다.
두 번째와 상당히 실제적인 중요성이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부족들’에 적절하게 속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유럽의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학교들의 교육과정들에 학생들은 언어와 지방언어에서 ‘부족의 습관’의 연구들과 함께 이 과목을 후원하여, 학생들은 분명한 민족적 정체성들을 가졌다는 과목을 넣었다. 그런 교육의 중요성은 레인저, 베일과 화이트, 그리고 쥬시에위키가 쓴 장들에서 분명하게 된다. 이리하여, 선교교육은 젊은이를 부족의 성원으로 사회화했으며 ‘부족’의 성원이 되는 것은 교육과의 밀접한 관련을 통하여 ‘현대적’이고 유행적이게 되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은 새로운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힘으로서 그 때 스스로 봉사했던 지방 아프리카인들을 교육했다. 이 사람들 - 보통 남자들 - 은 그들을 다르게 당기고 있었던 힘들을 예리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들 앞에서 그들 자신의 선교교육으로부터 나온 유럽에서의 국수주의 예들로, 그들은 이 문제들을 대적하는 수단으로 비슷한 지방이동들을 만드는데 찾았다. 그들 자신의 서구식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구축이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될 수 있는 문화적 관용구로 놓인다면 최상으로 이해되고 수용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을 공식화할 때,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지식인 브리콜라주(bricolage, 남은 아무 것이나 이용하여 만드는 것)를 위한 가능한 원료로 지방 영역의 과거를 봤다. 19세기 국수주의의 초기 단계들 동안 그들의 유럽 전임자들처럼, 그들은 그들의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했고 마찬가지로 ‘민족적 영혼’을 정의했다. 그들의 문화적 금고(strongbox)는 그들이 식민주의의 도전과 산업화의 충격을 직면했던 것처럼 ‘그들의’ 사람들에게 자동적인, 탓으로 돌리는 문화적 통일성을 줌으로서 봤던 정체성인, 사람들의 ‘관습’과 ‘전통’이었다. 다행히 이 책에서 모든 연구는 그런 이데올로기의 창조에서 중요 배우들처럼 교육받은 사람들의 역할을 보증한다.
선교사들이 일하지 않거나 그들이 일하지만 서구의 계통을 따라 교육을 소개하지 않거나 아프리카의 지식인들이 늦은 시기에만 나타나거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 그런 사회들에서, 민족적 이데올로기의 발달은 칸막이를 하거나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에서 교육의 평탄하지 않음은 대개 베일과 화이트, 맥밀란, 시겔 그리고 팝스타인(Vail and White, Macmillan, Siegel and Papstein))에 의해 쓴 논문들에서 가져온 것처럼 민족적 의식의 발달에 평탄하지 않음을 결정했다. 많은 지역들에서 그런 민족적 이데올로기들과 ‘서서히 나아가는 전통들’을 창조하는 과정은 다른 사회들에서 초기에 일어났던 모든 것과 다투었던 것은 교육의 후기 독립 팽창과 지방 지식인들의 출현 후인 오늘날만이다.
그러나 민족적 과거의 회복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지방 지식인들 - 백인이든 흑인이든 - 이어야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번째, 더 도구적인 요소가 또한 요구되고 이것은 해리스, 베일과 화이트, 마크, 쥬시에위키 그리고 팝스타인에 의해 쓴 장들에서 가장 완전하게 조사되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모든 것은 다양한 형태의 직접적인 유럽 행정 하에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기간까지, 다행히 모든 행정들은 흑인 행정과 지배받는 자 사이에 중개자로서 아프리카 ‘전통의’ 권위들을 사용하여, 간접적인 규칙들의 시스템들을 보충하는데 고용되었다. 이리하여, 만약 기록적인 담론의 형태로 언어가 문화의 형태들을 특화하는데 중심이라면, 간접적인 규칙은 이 형태들을 명확히 하기 위한 제도적 골조를 제공했다. 유럽 행정과 하위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의사소통은 그것의 음색과 내용에서 분명히 부족적(tribal)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적절하다고 생각된 용어들로 대화했고 이 용어들은 민족적이었다. ‘유색인 케이프’ 와 모잠비크의 루소-아프리카인들과 어느 정도로 간접적인 규칙의 관례들이 적절하지 않았던 아프리카너들의 경우들에서, 그것들은 골딘, 펜빈, 질리오미와 버틀러(Goldin, Penvenne, Giliomee and Butler)의 연구들이 지적한 것처럼, 단순하게 거절된 표현이었다.
간접적인 규칙들에 대한 유럽정책을 위해서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먼저, 소위 ‘전통적인’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사용은 비싼 유럽 공무원들의 고용보다 뚜렷하게 덜 비쌀 수 있었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두 번째, 행정가들은 아프리카인들은 천성적으로 ‘부족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만약 천성적인 민족적 단위들이 강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족적’ 그룹들을 구분하고 백인들이 깊게 의심했던 ‘부족 고유의 의식을 없앤’ 아프리카인들의 출현을 막는 것처럼 그들의 연속을 보증하는데 도왔다. 차례로, 이것은 발달했던 어떤 잠재적으로 위험한 영역 넓이의 정치적 의식의 출현을 더디게 하였다. 1917년에 영국 전쟁 공무원의 주의들은 이 분할통치 전술들을 비추고 있다:
국적의 영혼은 또는 아마 그것은 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였는데, 계발되어야 하고 어디에도 이것은 영국의 동아프리카나 우간다에서 보다 성공의 더 좋은 기회로 행해질 수 있는 곳은 없으며, 그곳에서 서로로부터 민족지학적으로 꽤 분명한 수많은 부족들이 있다. 각 민족지학적으로 분명한 구획에서 학교들은, 가능한 한 멀리 부족의 통합부분들과 민속과 전통의 중심들을 형성해야한다는 것을 제안하게 된다.
... 방법은 또한 발견될지도 모르며 그곳으로 인해 선교사들의 노력은 또한 국가적 영혼의 계발에 도우기도 한다. 그것이 보이는 이것은 각 인구통계학적 영역에서 일하는 하나의 명령만을 허용하고 두 인접 영역에서 일하는 같은 명령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서 행하여졌다.
세 번째,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시골 사회로부터 사람들의 만성적 부재는 거대한 사회적 스트레스들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증가하게 되었다. 행정가들은 그들의 눈들로부터 일어나는 시골의 분열은 멈추지 않는다면 사회적 부패의 힘들에 대적할 시골 영역들에 대한 통제를 행할 때 ‘전통적인 인가들’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권위들’의 용기에 의해 느려질 수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유럽 행정들에 의한 간접적인 규칙의 수용은 분명히 그들의 개인적 권력을 증대시킬 아프리카 정치적 권위들에게 기회들을 주었다. 더욱 중요하게 나는 그것이 새롭게 인정된 우두머리들과의 동맹들을 통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프로그램들을 보충하기 위해 관련된 영역들의 지식인들 - 유럽의 선교사들과 교육받은 소시민계급의 아프리카 성원들 둘 다 - 에게 기회들을 주었다고 제안한다. 이 과정은 베일과 화이트, 마크, 쥬시에위키 그리고 팝스타인이 쓴 것을 포함하여, 이 책에 몇 편 논문들의 주제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에 포함된 문화적 이상들은 간접적인 규칙 하에 아프리카 행정들의 날마다 작업들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실현되어질 수 있었다. 이리하여 민족적 정체성은 기록 역사, 문법과 지방 문화 중개인들에 의해 생산된 ‘전통적인 관습들’의 설명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훨씬 더 중요한, 간접적인 규칙의 행정적인 메커니즘들의 실질적인 운영에 의해서 특화되었다. 민족적 정체성 발달의 이런 면은 유럽 행정가들의 기대들과 적극적인 선교사들과 함께 아프리카 발의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그러나 하위 사람들은 보이지 않거나 위험하게 생각된 발의들을 점검하는데 조심하였던 인종주의 행정가들에 의해 부과된 심각한 압박 안에서 운영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의 작업에서 자유로운 손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기억되어야만 하며, 다른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마크, 맥밀란, 쥬시에위키와 시갈이 쓴 장들에서 분명히 나왔다.
그러나 ‘부족적(tribal)’ 규칙을 강화하는 간접적인 규칙 아래서 지식인들의 존재, 선교학교들을 통하고 행정시스템의 실질적인 운영을 통한 민족적 아이디어들의 사회화는 그들 스스로 민족적 이데올로기의 폭넓은 수용을 생산하기에 불충분하였다. 이데올로기 그 자체는 존재이유(raison d'etre)와 호소가 필요했고 남아프리카에서 민족성의 성장에 대한 우리의 모델에서 세 번째 요소를 구성하는 것은 이 호소였다.
국수주의의 이데올로기들은 종종 ‘야누스 같은(Janus-like)’으로 설명되어왔다. 그들은 한 면에서 황금의 과거를 되돌아보아, 심오하게 반동적이다: 그들은 그것의 주인공들, 그것의 역사적 성공들과 그것의 결백한 문화적 순수성에 집중하고 그 과거의 신화적 ‘재발견된’ 사회적 가치들로 장식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위치를 종종 과거에 완고하게 뿌리를 둔 추장들과 우두머리들(chiefs and headmen)과의 그런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의 분명한 연관은 민족성의 되돌아보는 면을 강조하는데 추가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또한 현재 조건과 관련하여, 현재의 분명한 산물이었으며 그들은 전형적으로 미래를 위한 내다보는 관련도 비췄다. 국수주의 - 그리고 부족주의 - 는 이리하여 많은 관찰자들에게 불분명하고 애매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사람이 남아프리카에서 상황을 면밀히 볼 때, 사람은 민족적 메시지의 되돌아보는 면들과 그것의 내다보는 관련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순되지 않았다. 과거가치에 강조는 전통을 ‘재발견 했’고 주요한 권위는 진정으로 보존되었다 - 즉, 그것들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빠르게 침식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던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해 계산되었다. 소시민계급(petty bourgeouisie)과 노동자들의 앞을 내다보는 성원들은 비슷하게 민족성을 껴안고 부족적 정체성을 수용함으로서 그것들에서 그들의 사회와 그들 자신의 위치들을 경제적으로 지지하려고 시도했다.
베일과 화이트, 마크 그리고 쥬시에위키가 쓴 장들이 보이는 것처럼, 민족성은 그것의 내다보는 면들이 ‘부족 전통’의 잘 알려진 해석자들로서 새롭게 정의된 ‘부족’에서 지도력 역할로 그것들을 확신했다. 추장들의 동맹들로서 그들의 위치는 지방 사회들에서 그 때 나타나고 있었던 계급구분의 의식을 무디게 하여, 그들의 역할을 더 합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또한 ‘부족의 선의를 위해서’ 그들 자신의 사회적이고 경제적 위치들을 향상시킬 의무를 가졌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훨씬 더 중요하게, 민족성은 우선 원시인 해석이 논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심리학적 안정의 감각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발견했던 어려운 상황들에 통제의 수치를 가져와 그들을 도왔기 때문에 평번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강하게 호소했다. ‘통제’라는 단어는 중요하다. 그것은 그들의 땅과 가족으로부터 벗어났고 아주 먼 곳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특히 호소했던 부족 이데올로기들에 끼워 넣은 통제의 요소였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은 부족과 그의 땅의 통일성의 역사적 통합과 특히 가족과 땅의 권리에 대한 인정을 강조했다.
부인들의 장소는 또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에서 다루었던 중심 문제들이었다. 세기의 초기 십년들에서 신부재산은 지속적으로 가치에서 부풀었고 이리하여 여자들은 소나 돈으로 남자들에 의한 더 큰 ‘투자’를 표시했다. 이주노동자들로서 대부분의 남자들의 부재로, 여자들은 또한 땅에서 그들의 일을 통한 가족의 일상적인 보존에 더 중요하게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치있는 여자들은 자연히 이혼을 하거나 산업적이고 도시적인 영역들로 이동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시골 영역들을 떠나는 정도까지 종종 독립적으로 행동하려고 했다. 이것은 성별사이에 예민한 분쟁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여자를 통제할 필요에 강조와 가족통합의 보호에 주안점을 두는 것은 민족적 이데올로기들과 간접적인 규칙의 실질적인 제도의 실행들 둘에 본질적으로 되었다. 베일과 화이트, 마크 그리고 쥬시에위키의 연구들은 특별한 명료성으로 이것을 보인다. 민족성의 호소는 남자들에게 더 강하며 ‘여자들은 어떤 부족도 갖지 않는다’는 결과에 쫘와나(Tswana) 속담은 의도되지 않았다면, 그것에서 진리의 실질적인 요소이다.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은 집에서 일어났던 것에 관한 이주자들의 천성적인 걱정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통제를 제공하는데 도왔다. 간접적인 규칙의 시스템에서, 추장들은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 남자의 부재에서 여자들과 땅에 대한 크게 늘어난 정도의 감독을 지금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새로운 공식적인 역사, 그들의 새로운 인구조사와 목록들, 그들의 새로운 법정과 이 모든 것은 처음으로 그 가장 본질적으로 강력한 발명을 고용했던, 기록들 작성과 함께 그것들이었다.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를 강조했던 그 ‘재발견된 전통들’을 일상적인 실행으로 가져왔던 것은 그것들이었다. ‘모든 정치는 지방적이’라는 옛날의 교리는 남아프리카 전체에 특히 유용하였다. 아프리카 사람들과 직계들은 추장들, 그들의 법정들과 그들의 교육받은 소시민계급 대변인들과 대리인들의 새로운 구조들을 지지하는 그들의 필수적인 관심에 있었다는 것을 수용했다. 또한 광산이나 농장이나 농원으로부터 그들의 계약 만료에서 돌아왔을 때 남자들은 추장들에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들의 하나를 구성했던 선물들을 주었던 것은 이 이유 때문이었다. 좋은 추장은 이주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했던 대리인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열심히는 아니지만 그에게 물질적으로 보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결과적으로, 새롭게 구성된 ‘부족’의 귀족화 된 추장은 초기 시대의 직계 우두머리나 독립적인 보호자를 대신했으며 친척의 옛 언어는 새로운, 분명히 친척이 아닌 관계를 유지하고 합법화하기 위한 은유로서 사용되게 되었다.
아프리카 남자들이 빠른 사회적 부패의 상황에서 추장들의 권력을 늘리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을 환영했던 것은 땅과 여자에 대한 통제의 수치를 적어도 연습하고, 그리하여 그들 마음에 평화의 수치를 적어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그 진짜 이유들이었다. 그런 통제의 메커니즘인 한에서 민족성은 남아프리카 전체에서 아프리카 삶을 재형성하고 있었던 힘들에 대중적인 남성 저항의 형태로서 해석될 지도 모른다. 또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들의 호소가 이주노동자들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강하였다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시골변두리의 사실성들에 뿌리를 둔 민족적 정체성은 꽤 우연적으로 작업장에서 강화되었고, 그곳에서 이주자들은 크게 부정적인 민족적 원형들의 세트들을 생산했던 상황인, 다른 문화그룹들로부터 온 노동자들의 동료와 종종 경쟁으로 스스로를 발견했으며 쥬시에위키, 시겔과 팝스타인이 쓴 장들에서 탐구된다.
남자들은 특히 그들 동료 노동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룹의 성원인 것은 그들에게 기분이 좋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시골영역의 민족적 장치들 - 추장들, ‘전통적’ 법정, 소시민계급 지식인들과 민족적 이데올로기에서 구체화된 것처럼 ‘부족’의 제도화된 ‘전통적’ 가치들 - 모두는 이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가졌던 바로 그 실체적인 이익들을 지키기 위해 일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특별한 민족적 그룹들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민족성 - 또는 부족주의 - 없이, 이주자들은 시골사회에서 그들의 위치와 그들의 고향에서 그들의 결정적인 은퇴의 지속을 보증하는 것이 필요하였던 통제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노동이주가 절박한 사실성이 아니었던 그 상황들(아프리카나들, ‘유색인 케이프’, 모잠비크의 루소-아프리카인들과 더 적은 정도에서 현대의 스와질란드와 시스케이 - 각각 질리오미, 버틀러, 골딘, 펜벤, 맥밀란과 익명을 참고하라)이나 남자들이 잠비아 남부와 중앙 말라위와 같이 많은 수로 이주하지 않았던 지역들에서 민족적 메시지는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소시민계급보다 더 멀리 가지 않아, 분명히 대중적인 호소가 되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경우에서 사회의 귀족 요소들과 ‘가난한 백인’ 사이에 효과적인 계층동맹은 1940년 이후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유색인 케이프’와 모잠비크의 루소-아프리카인들의 경우에 - 그리고 가능하다면 스와질란드와 시스케이 -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간극은 너무 커서 골딘, 펜벤, 맥밀란과 익명이 쓴 장들에서 제안된 것처럼 민족성에 호소로 쉽게 극복될 수 없다. 이 상황들에서, 계층 정체성 - 또는 적어도 계층 긴장 - 은 민족성에 그늘지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