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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필요한 여자, 정혜
무엇인가 답답하다. 나는 타인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상황이 그렇지 못해 답답하고, <여자 정혜>의 주인공 정혜는 타인과의 소통에서 스스로를 가두기 때문에 답답하다. 지금 나는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말고 멍하게 앉아있다. 저 편에 정혜도 앉아 있는 듯하나, 그녀는 내가 말붙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여자 정혜에게 소리란 자신과 세상 사이에 놓인 장막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텔레비전을,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의 장막을 드리우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구체적 소리에 귀 막아버리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정혜 같다. 쉽게 사람과 친해질 수 없는 사람, 오래되어도 편안해지기 힘든 사람.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장막이 사이에 드리워진 것만 같아, 말 많은 사람을 미치도록 갑갑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 꼭 정혜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정혜는 마음에 상처가 있는 여자다. 그 상처가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의 사이에 소리 장막을 만들게 했다. 놀랍게도 그런 그녀 주변에는 늘 소리가 있다. 아침이면 그녀의 알람시계는 큰 소리로 울린다. 옆집 여자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울린다. 하지만 알람시계가 울리기도 전부터 깨어있던 정혜는 멀뚱멀뚱 뜬 눈으로 천천히 시계를 끈다. 세상의 시•분초 따위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마냥, 자신만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그녀다.
그런 정혜가 근무하는 곳은 우체국이다. 그곳에서도 늘 라디오의 소리는 흐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정혜와 세상을 분리하는 장막임을 암시하는 소품일 뿐, 배경음악으로서의 목적은 애당초 없는 듯하다. 정혜는 저녁이면 집으로 곧장 돌아온다. 딴이 갈 곳도 없는 그녀에게 빈 집은 가장 안락한 장소이자,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다시 말해 정혜가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살 수 있던 과거의 시간들이 숨 쉬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서조차 정혜는 시끄럽게 TV의 볼륨을 높여놓는다. 그나마도 가장 말 많고 반복적인 멘트가 떠들어대는 홈쇼핑 방송이다. 이렇듯 정혜에게는 늘 소리가 필요하다.
영화 <여자 정혜> 중에서, 버려진 고양이는 세상과 정혜를 이어주는 우편배달부 같은 존재이다. 처음으로 세상 밖 존재를 집안에 들인 정혜는 고양이를 통해, 타인에게 말 걸기를 익히게 된다
바깥세상과 소통하기를 두려워하는 정혜에게 어느 날, 사건이 생긴다. 버려진 작은 고양이를 발견한 정혜가 자신의 세상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버려진 고양이는 정혜가 그러하듯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소파 밑으로 숨어버린다. 혼자만의 생활에 길들여진 정혜와 고양이가 차츰 함께 지내는 일에 익숙해진 얼마지 않아, 조금 더 큰 사건이 일어난다. 정혜가 우체국에 자주 들리던 소설가 지망생을 저녁식사에 초대를 한 것이다. 정혜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지만, 소설가는 오지 않았다. 그도 정혜만큼 ‘타인에게 말 걸기’가 서툰 존재이다. 그럼에도 정혜는 상처입지 않았다.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설명하려 애쓴다. 남자를 위해 준비해둔 음식을 혼자서도 잘 먹는 정혜이다. 그렇게 태연한 척 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이 사건이 작지 않은 충격이었음을 시사해주는 장면을 이어나간다. 세상과 통하는 문을 가까스로 열어보려던 정혜는 사랑을 받고 싶어 자신의 발바닥을 핥기 시작한 고양이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내버린다. 이제 정혜는 세상과 화해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허사였음을, 마치 자신에게 세상과의 소통이란 본디부터 허락된 권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냥, 고양이를 본래의 바깥세상으로 되돌려준다.
얼마지 않아 정혜는 맥주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다 한 남자를 알게 되고, 그로부터 ‘복수’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로 부터 훔쳐온 칼로 피의 복수를 하리라 결심하고 자신을 이 세상에서 격리시킨 가해자를 찾아간다. 그녀의 손은 한없이 떨린다. 결국 복수할 수 없는 정혜이다. 그런 정혜가 흐느낀다. 그날 저녁 정혜는 자신이 버린 고양이를 찾으려 애를 쓴다. 그 때 소설가지망생이 정혜 앞에 나타나, 초대에 응할 수 없던 상황을, 즉 그들의 어긋난 시간을 설명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치 해피엔딩을 예고하듯 끝나버리는데, 참으로 석연치 않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듯한 정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정혜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용서하고 끝내라는 이윤기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불편하다. 사실 정혜와 같은 상처가 없는 입장에서 정혜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말 없는 정혜가 그래서 한없이 갑갑하기만 하다. 시원스레 자기 이야기라도 해준다면, 어디가 어떻게 아팠고, 어떻게 극복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겠지만, 정혜는 동료들의 조심스런 참견조차 귀찮기만 한 사람이다.
나는 채널을 돌리던 라디오를 꺼버렸다. 잡음처럼 들리던 소리들이 귀에 거슬린다. 이런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듣지 않을 거라면 틀지 않고, 귀에 거슬리면 꺼버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소리를 대하는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정혜는 정말 특별하다. 그만큼 보통 사람이 그녀를 이해하기는 힘들고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봐
‘소리 없는 소리’처럼 거대한 반어를 가진 소리도 없다. 끝없이 웅성대는 고요, 스스로의 소리에 답하는 침착한 적막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무릇 아무런 소리가 없는 빈 소리(空鳴)에서 문득문득 익숙한 낯설음을 경험하게 된다. 수술실의 차가운 메스 소리, 목욕탕 천장에 맺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빈집의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30촉 꼬마전구 껌뻑이는 소리, 어둠 속에서 현관 열쇠 꾸러미 찰랑이는 소리, 한밤중에 도둑고양이 쓰레기통 뒤지는 소리, 새벽 첫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내가 플랫폼을 서성대는 발소리, 사하라 사막에 어둠이 퍼지는 소리, 봄 땅의 눈 녹으며 아지랑이 올라오는 소리, 월정사 경내에 안개 내리는 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가을 밤 귀뚜라미 ‘스르르’ 우는 소리, 자작나무 숲에 하얀 달빛이 흐르는 소리, 낚시대 드리운 물살이 바람에 떠는 소리, 승무 추는 스님의 춤사위가 바람 가르는 소리, 해거름에 산사에 흩어지는 스님 목탁 두드리는 소리, 엄마 품에 잠든 아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 어항 속 물고기 뻐끔거리는 소리, 난로 위 주전자 뚜껑이 달각거리는 소리, 시험지 돌릴 때 종이 소리, 답안을 쓰는 ‘스걱스걱’ 연필 소리, 백 미터 주자가 테이프를 끊기 직전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소리, 담임선생 욕하던 여학생들이 교실 앞 문 열리기 직전 입 다무는 소리, 새색시 신혼 서약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 첫 번째 데이트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 배부른 척 했는데 허기진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 야한 영화 장면에서 ‘꼴깍’ 침 삼키는 소리, 이별하는 연인들이 조심스레 내려놓는 찻잔 소리, 그리고 헤어진 애인이 먼저 끊은 전화기에서 울리는 ‘뚜뚜뚜’ 소리.......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다. 하긴 너무 커서(!)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들도 있다. 가령 정한수 떠놓고 조상신에게 기도드리는 어머니의 손바닥 비비는 소리, 수녀들의 묵주기도 외는 소리,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음을 누른 건반에서 손을 떼고 고개 쳐드는 소리, 마지막으로 용을 그리고 눈동자에 점찍는 붓질 소리 등등. 이 또한 마음으로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다. 이처럼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앞서의 영화 <여자 정혜>에서 소리란 정혜가 마음의 소리를 차단하는 데,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차폐하는 데 쓰였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그림책 『귀를 기울이면』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다.
뜨거운 해가 저물고 그림자가 길게 등 뒤로 외로움처럼 늘어진 이 그림 속에서는, 저물녘의 스산함이 느껴진다. 어딘지 남미풍을 연상시키는 붉은 톤의 화풍이 느껴진다. 그림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중절모를 쓴 남자의 이미지가, 분수대의 조각상으로 그 뒷모습을 모녀에게 보이고 있는 장면 또한 고즈넉이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소리는 아직 없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데,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귀를 기울이면』이란 그림책을 통해 보여준 바 있던 샬로트 졸로토와 스테파노 비탈레 콤비는,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워 외로울 때면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라며 권한다. 그리하면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귀로 직접 들을 수 없고, 팔로 직접 안아줄 수 없던 그 누군가가 보내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며 마음을 열고 그 소리를 마음의 귀로 들어보라고 권한다. 그림책에서 아이의 아빠는 오래 전에 떠났다. 아빠 없는 아이는 엄마가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는지, 어떻게 아빠의 사랑을 확신하는지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자 엄마는 침착한 어조로, 외롭고 쓸쓸할 때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던 은은한 종소리가 불현듯 허공을 뚫고 귓가에 살그머니 다가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온통 어둠뿐인 한밤에 침대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안개 낀 강에서 ‘뿌우’하고 인사하는 뱃고동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혹은 어느 것 하나 꼼짝도 않는 뜨거운 여름날, 나뭇잎 한 장, 새 한 마리, 풀잎 하나의 미세한 움직임을 바라보면, 어느새 그들이 전갈하는 사랑의 인사를 듣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아니면 혼자 거실에서 생각을 비우고 앉아 있을 때, 탁자 위 꽃병에서 사르르 꽃잎 한 장이 떨어지거나, 바깥 과수원에서 가만히 사과나무에 기대어 있는데 갑자기 사과 한 알이 풀밭으로 툭하고 떨어지거나,” 이처럼 그리움의 소리는 무심결 꽃잎처럼 가볍게 혹은 잘 익은 사과 한 알처럼 묵직하게 들려온다. 사랑의 소리는 마음을 문을 열고, 정적과 침묵과 정지에 자신을 내던질 때 비로소 마음으로 들려온다. 홀로 있다는 외로움, 홀로되었다는 쓸쓸함이 분노와 절망감을 낳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상대 역시 날 그리워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이 모든 소리들은 마음을 여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모든 마음먹기에 달린 것인 냥, 그림책 속의 엄마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 딸에게 재우쳐 당부한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개 짖는 정겨운 소리도,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도 어둠을 걷어내는 마음의 힘으로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엄마의 충고대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려고, 자연의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려고 노력하는 소녀가 들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떠다니는 구름도 아빠의 모습처럼 보일 뿐, 아직 엄마의 말처럼 멀리 있는 아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어리고, 그러기에는 아직도 따듯한 사랑이 절절히 필요한 어린애일 뿐이다.
혼자 있는 충만함을 이미 알아버린 엄마는 삶에서 그리움의 힘, 사랑에 대한 확신 모두가 살아가는 에너지임을 익히 깨친 현자이다. 그렇기에 아직 어린 딸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들은 삶을 독대하면서도 꿋꿋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내공을 은유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텅빈 충만’이란 것이 있다. ‘텅 빈 공간에 채워진 가득한 비움’은 텅 비어야만 가장 많은 비움을 담는다. 한 가지 생각에 매달리는 것이 명상이 아니듯, 선(禪) 수행이란 생각이 막힘없이 이 빈 공간을 부유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이 아직 어린 이 소녀에게도 가능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녀는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새 한 마리가 저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살핀다. 그런데도 여전히 소녀에게는 이 모든 움직임과 작은 소리들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 소녀는 엄마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귀 기울여 아빠를 느껴보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기어이 입 밖으로 말하고 만다. “하지만 아빠가 곁에 계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아직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안길 수 있는, 그런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어린애일 뿐이다.
이 그림책 그림들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지워낼 수 없었다.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체, 멕시코의 태양과 신전, 중절모 쓴 아버지의 이미지(언젠가 중절모 쓴 디에고 리베라의 이미지가 내 머리에 박혀있다는 증거임), 아치형의 문이 가득한 회벽의 흰 집. 나만의 느낌이겠지만, 이런 것들이 그림 속에 멕시코의 이미지를 드리운 것 같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이탈리아 파도바 출신의 스테파노 비탈레가 그린 이 그림책 그림들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지워낼 수 없었다.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체, 멕시코의 태양과 신전, 중절모 쓴 아버지의 이미지(언젠가 중절모 쓴 디에고 리베라의 이미지가 내 머리에 박혀있다는 증거임), 아치형의 문이 가득한 회벽 집. 이런 것들이 그림에 멕시코의 이미지를 드리운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삶처럼 소란스럽지 않고, 그의 벽화처럼 요란하지 않건만 왜 나는 멕시코와 디에고 리베라의 이름을 자꾸 덧칠하게 될까? 이 그림책에서 시처럼 유연한 글을 쓴 샬로트 졸로토는 1915년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어린이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활동한 작가이다. 무려 75편이 넘는 어린이책을 펴냈고, 1988년에는 그녀의 업적을 기려 그 해의 뛰어난 그림책 작가에게 주는 ‘샬로트 졸로토 상’까지 제정된 대단한 미 동부의 작가이다. 그런데 『잠자는 책』, 『바람이 멈출 때』에서 『귀를 기울이면』으로 이어지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철학은 비움과 기다림으로 일관된다. 게다가 스테파노 비탈레의 그림에서 살짝 묻어나는 마술적인 신비감까지 더해져 있어, 기실은 ‘남미’라는 지역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음에도, 나는 이 그림책에서 ‘멕시코’ 가 아니라면 그와 풍토가 유사한 어떤 지역과 연결 짓기 위해 텍사스에서 말년을 지냈던 마크 로스코를 비끄러맨다.
침묵의 달변자
7월의 비오는 수요일, 리움 뮤지움에 갔다. 애초에는 고미술품들이 보고 싶어서 갔었지만, 마침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전도 함께 열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에 들어갔다가, 섬뜩한 전율에 사로 잡혀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내 영혼을 강하게 감전시킨 로스코의 생애를 살피고 나서야 다시 작품을 감상할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구소련의 라트비아 출신으로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 1세대이다. 학문에 남다른 재주가 있던 그는 몇 차례 월반을 통해 예일대학 인문학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학교 장학회 측이 재정난에 봉착하자, 유대인이민자라는 이유로 학비 지원을 중단했다. 그 후 마크 로스코는 절친한 친구와 함께 <The Yale Saturday Evening Pest>지를 발행하며 예일대의 전형적인 WASP들을 비꼬다 퇴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우습게도 46년이 지나서야 그에게 명예학위가 돌아갔다. 스무 살에 처음으로 그림에 손을 댄 그는, 정물화를 가르치던 막스 베버(Marx Weber)를 통해 미술작품을 감정 표현의 수단이자, 종교적 표현 매체로 인식하게 된다. 그 후로도 꽤 오랜 동안은 비교적 형상이 사실대로 재현되는 구상화풍의 그림을 그리며, 파울 클레와 조르주 루오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보통 작가들의 후기작이 단순화가 심해지듯 그의 작풍도 후기로 갈수록 단순해지는 면모를 보여준다. 1936년에 집필을 시작한 어느 책에서(완결하지는 못함), 그는 어린이의 그림과 현대 회화간의 유사성을 단순한 원시성으로 언급한 바 있는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단순함이란 비단 형태의 단순함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과감하게 단순함 색면, 그 지독한 순도에서 숭고함과 적막을 느낄 수 있다. 차츰 미국 현대 회화가 막다른 골목에 까지 다다름을 인식한 그는 도시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을 끄고, 형상과 공간, 색체에 지극한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1940년을 전후해서 층과 면을 겹겹이 덧칠해 색면을 분할한 모호한 형태의 그림을 그리던 로스코는 30년대 집중적으로 탐구했던 신화가 반영된 작품 창작을 접고, 그 즈음 읽은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을 계기로 인간의 형상, 성격, 감정을 깊이 파고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숭고한 면을 추상을 통해 표현해 내고자, 혹은 인간 본능의 어두운 면을 표출해 내고자 노력했다.
안에서 부터 빛이 새어나오지만 또한 안으로 끝없이 침잠하는 듯한 어두운 색체의 대조를 이루는 거대한 캔버스는 얼핏 보기에는 저런 것도 작품이라니. 하며 혀를 끌끌 차게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1940년대부터 1970년 손목을 스스로 그어 자살한 주검이 제자에 의해 자신의 부엌에서 발견된 그 날까지 색면추상화를 고집해왔다. 색면추상화가로 활동하던 중기와 후기가 다른 점이라면 테두리의 검은 테를 그리느냐 마느냐 정도랄까? 그런데 극도로 단순한 로스코의 그림들은 종교적이고 신비하기까지 하다. 물론 여기서 종교적이란 의미는 기독교적이란 의미를 뛰어 넘는다. 원시성 혹은 우주성이 등을 맞붙이고 있는 것 같이, 무한 확장이 가능하면서 무한 침투가 가능할 것 같은 것, 다시 말해 깊이와 넓이의 측량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그 무엇이 그의 그림에는 담겨있다. 그것이 그의 정신성이라고 표현한다면? 하여간 그러고 싶다. 또한 비례로 구분된 면의 분할, 그 비례의 결정을 행하는 화가의 결단에서는 왠지 인간적인 고뇌를 뛰어넘는 구도자의, 아니 접신의 능력을 가진 자만의 그 무엇이 느껴진다.
리움에서 소개된 <무제>란 제목 중 일부는 본디 텍사스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에서 걸기 위해 로스코가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리움에서 마주한 거대한 크기의 <무제>들은 침착하지만 차가운 톤의 녹색과 역시 침착하지만 비통한 톤의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루었다. 전체 14점 중에서 오직 3점만이 리움 전시실 한 방의 세 벽면에 전시되었는데, 그 압도하는 정적이란! 내 발소리만이 사방 벽면을 치고, 다시 내 심장의 붉은 피를 펌프질하게 했던 그 강력한 충격이란! 나는 오한이 돋아나는 느낌으로 추위를 느끼며 지하 묘소인 카타콤에 들어와 있는 듯, 시공을 초월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정지되어 있는 색면들이 내게로 쏟아져 내 피부를 뚫고 내 안으로 흡수되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 그 다음에 벌어지는 혼란스러움과 뜨거움은 마치 원시 제례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그 연작들이 오랫동안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땅이던 텍사스의 성당에 걸려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연상된 것이겠지만, 나는 그 무시무시하게 고요하고 커다란 색 속에서 불쑥 죽은 인디언 추장의 혼령들이 되살아날 것 같은 환각을 느꼈다. 흙냄새 가득한 흙색의 거대한 캔버스 벽면화의 어두운 고요가 주는 이런 작품들을 8각형 비잔틴 양식을 기초로 설계된 ‘로스코 채플’에서 직접 감상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추상이 가끔은 구상보다 훨씬 많은 말을 걸어온다. 아니 그러라고 추상작품을 하는 것이다. 화가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야 하는 것이 추상 미술이다. 오히려 작품 감상자에게 2차 창작(상상)의 기회를 넘겨준다는 점에서 추상 회화가 더 고마운 장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가끔씩 추상화에 홀딱 빠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화의 강렬한 적막은 사실 조용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시끄럽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면을 쓰고, 제례무를 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중간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도 있다. 그 주변을 도는 의례에 도취된 사람들, 혼이 빠진 것인지, 아니면 빙의가 내린 것인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의 광무가 느껴진다. 심지어 불의 혀가 날름대기도 하다. 오래 전 미국 서부 여행 중, 어딘가에서 산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전통 음악 음반인 <The Spirit Sings>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 음반은 숲 속의 아침, 회오리치는 바람, 여름 저녁놀, 가을의 햇살, 겨울날의 꿈, 봄볕의 그림자 등등을 색으로 느끼게 해주는 매우 선적이면서도 정적인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양립하기 불가해 보이는 광란과 차분함이 동시에 전달되는 충격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까? 내가 아는 언어나 수사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시각언어는 시각언어로 그냥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문자 언어를 통해 2차로 표현되어질 때는 버려지는 부분이 너무 많아진다. 글쎄, 혹 마크 로스코의 정적, 혹은 착란, 혹은 내면화된 대단한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음악을 구태여 찾자면 뭐가 있을까? 선뜻 떠오르지 않지만,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1992년에 <14개의 검은 그림들 Fourteen Black Paintings>라는 이름의 곡을 작곡해 마크 로스코에게 헌정했다고 하고, ‘사막의 시인’이란 호칭을 갖고 있는 스티브 로치(Steve Roach)는 로스코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원시적 이미지로 충만한 다크 엠비언트(dark ambient)란 독특한 음악 영역을 개척했다고 『미술, 뉴에이지를 만나다』에서 양한수는 언급했다. 그의 안목을 믿기에 나는 그가 소개해준 스티브 로치 <정적의 구조(Structures from Silence)란 음반을 구해보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내에서 구할 방도는 없다. 그 어떤 음악이든 마크 로스코의 후기 색면추상화, 특히 ‘로스코 채플’의 거대한 검은 그림들과 어우러지려면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조용한 듯하지만 더러는 강렬하게 응고된 음의 색감이 느껴져야 하고, 그러면서도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에너지가 전달되어야 하고, 마지막까지도 그 잔음은 서늘해야만 한다.
최근 나는 ‘도이터’, ‘라일릴 리’, ‘필립 글라스’ 등의 음악을 들으며 마크 로스코의 ‘무념무상’에 접근한 음악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아주 오래전 들었던 오지브에(Ojibwe) 아메리칸 원주민 아나콰드가 연주하는 8구멍짜리 피리 소리가 그려내는 원시 자연과 인간의 심성만큼 더 어울리는 것을 여태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잠정적 결론인즉, 마크 로스코는 ‘침묵의 달변자’이다. 물론 달변자란 말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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