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김학수(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2. 김성일의 인간상 : ‘직도(直道)’와 ‘충의(忠義)’의 관점에서
3. 학자․관료적 자취와 그 평가
1) 학자적 삶 : 계문적전론(溪門嫡傳論)을 중심으로
2) 관료적 삶 : 동서분당론(東西分黨論)을 중심으로
4. 통신사 복명과 임란 당시 활동상에 대한 정파별 인식의 차이
1) 통신사행보고 개관
2) 서인계의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
3) 남인계의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
5. 맺음말
1. 머리말
김성일은 명종-선조대에 활동했던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시간은 56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시대에는 이황․조식․서경덕․이이 등에 의해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와 더불어 학파의 시대가 열렸고, 비록 당쟁으로 인해 그 빛이 조금 바래기는 했지만 이른바 사림정치를 통해 조선의 정계는 인적자산를 새로이 수혈하며 새 판을 짜게 되었다. 김성일은 바로 이러한 학문․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몸소 주도했고, 그 자취는 다양한 사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중후기 역사상에서 김성일의 인간상[학자․관료상]은 크게 학인적 면모와 정치가적인 모습으로 포착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퇴계학을 올곧게 수용한 학자, 특히 영남학통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반해 후자에 있어서는 학파와 정파 등 논자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그 인식과 평가가 매우 상반된다. 한 켠에서는 김성일을 당파(黨派)를 초월한 직도(直道)와 애민(愛民)의 경세가(經世家)로 일컫는 반면 다른 한 켠에서는 당론에 매몰되어 나라를 그르친 오국(誤國)의 주범으로 극론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1591년에 있었던 통신사 복명에 뒤이은 임진왜란의 여파가 강하게 투영된 반영된 평론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비단 김성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더러 상반되는 경우가 많으며, 당쟁의 시대에는 그런 속성이 더욱 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쟁의 여파는 개인에 대한 인식은 물론 한 나라의 역사정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존재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 글은 김성일에 대한 평가를 사료에 입각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물론 김성일에 대한 연구는 정치․사상․예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김성일이 살았던 사림시대가 추구하던 가치와 인식의 구조 속에서 김성일의 말[言]과 행동[행]을 분석하고, 또 그것을 당대 내지는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를 가늠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특히 사신 복명과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에 있어서는 그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는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신 복명 및 임진왜란과 관련된 문제는 김성일 개인 차원을 넘어 선조대의 정치․외교적 상황 및 임진왜란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2. 김성일의 인간상 : ‘직도’(直道)와 ‘충의(忠義)’의 관점에서
김성일은 1538년(중종33) 12월 6일 안동부 임하현 천전리에서 김진의 4자로 태어났다.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이다. 어려서부터 담대하고, 기상이 곧았다고 한다. 김성일의 소년기 일화는 『학봉연보』의 곳곳에서 산견된다. 역사적 인물의 연보치고 유소년기의 예사롭지 않았던 일화가 빠지는 법이 없지만 『학봉연보』의 경우 애민(愛民)․직도(直道)의 경세가적 성격을 부각하는 한편으로 후술할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에 대한 해명적 차원에서 이런 일화들을 특서한 것으로 해석된다.
① 어려서부터 이미 세상 사람들을 구제할 뜻이 있어 떠돌아다니는 거지를 보면 쌀을 얻어다 주었다. 또 여러 아이들과 층층의 바위 낭떠러지 위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밑으로 떨어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으나, 선생께서는 곧 달려가 알리어 살려냈다.248)
② 여러 아이들과 장난을 하는데도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냈으며, 뜻이 맞지 않으면 결연히 떠나가서 조금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이에 판서공(判書公)이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후일에 반드시 시세(時勢)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249)
③ 일찍이 “벌로 맞을 매를 자진하여 가져오라.” 하였더니, 선생은 굵은 것을 갖다 바쳤다. 누군가가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매가 아프지 않으면 징계가 되지 않아서이다.” 하였다250)
④ 겨울에 홍원(洪原)으로 부임하는 큰 형 약봉공(藥峯公)을 따라 갔다. 하루는 성 안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 아문의 불을 끄고 있었는데, 선생만은 홀로 책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전패(殿牌)를 손에 받들고서 조용한 곳으로 피하였으므로, 약봉공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기이하다. 내 동생은 반드시 학문을 독실히 하고 충애하는 마음이 두터운 선비가 되겠구나.” 하였다
위 인용문의 기저에 흐르는 정서는 세상을 구제할 경세가(經世家的)적 자질, 시세(時勢)에 영합하지 않는 강인한 기상, 위기와 시련을 자처 또는 회피하지 않는 당당한 선비적 자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용문①은 일반적인 애인지심(愛人之心)에 골자가 있지만 인용문②③은 위험한 통신사행을 자처했던 김성일의 솔선적 자세, 나아가 법도와 원칙에 어긋나면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사행 당시 김성일의 꼿꼿한 태도를 암시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인용문④는 독실한 학문과 충애의 마음을 겸비한 바람직한 선비상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영남사림 내지는 학봉학파에서 설정했던 ‘김성일상’과 일치한다. 물론 『학봉연보』의 이런 기사들은 실사인 동시에 김성일의 삶과 정신세계를 옹호․해명하기 위한 고도의 편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김성일은 19세 되던 1556년(명종11)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김성일은 이황의 가르침 속에 학문의 깊이를 더하는 한편으로 국사 및 시사에 대한 입장 표명을 통해 강개(慷慨)한 이미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런 면모는 종생토록 지속되었다.
그 단초가 된 것은 1562년(명종17)의 희릉 천장 건이었는데, 이 때 김성일은 유생 신분으로서 상소를 올려 그 부당성을 논하고자 했다. 물론 이 상소는 부형의 만류로 봉진되지는 않았으나 사기가 항직(伉直)하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희릉천장의 주체가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문정왕후․보우 그리고 윤원형이라는 점은 김성일의 상소[擬疏]가 지니는 감언성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251)
한편 김성일은 1564년 진사를 거쳐 1568년 문과에 합격했고, 이후 1573년까지 대교․봉교․전적, 형조․병조좌랑, 정언․부수찬 등 주로 사관 및 언관직에 종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했고, 때로는 그 언사가 매우 거침이 없었었고 기휘스런 사안에 대해서도 입론을 서슴지 않았다. 연산군 및 노산군과 관련한 주장은 단적인 사례가 된다. 1571년 연산군의 봉사를 구씨 집안에서 받드는 것으로 정해졌다. 당시 조론은 ‘연산군은 종사에 죄를 얻어 스스로 천륜(天倫)을 끊었으니 후사를 세워서는 안 된다.’다는 입장이 우세하였지만 김성일은 이른바 후사론(後嗣論)으로서 그것을 반박했다.
홍섬(洪暹)이 말하기를, “연산군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어 스스로 천륜(天倫)을 끊었으니 후사(後嗣)를 세워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아아, 어쩜 그리도 생각이 짧단 말인가.연산군이 이미 죄를 얻어서 스스로 천륜을 끊었으므로 임금의 자리를 바꾸는 일이 있었으니, 그 벌이 죄에 합당하다. 그러나 강등시켜 군(君)이라고 칭하였으니 속적(屬籍)은 오히려 있는 것이다. 속적이 있어서 중묘(中廟)에게 있어서는 연을 끊을 만한 도리가 없다. 그러니 후사를 세우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죄가 있어서 폐하는 것은 의(義)이고, 후사가 없는 것을 이어 주는 것은 인(仁)이다. 인과 의를 아울러 극진하게 한 다음에야 일이 마땅함을 얻는 법으로, 나는 후사를 세우는 것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권철(權轍)이 인용한 진(晉) 나라의 거(莒) 땅 사람인 가충(賈充)의 일은 참으로 잘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구씨(具氏)로써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식견인가. 아아, 대신의 불학무식(不學無識)하기가 이와 같으니, 이보다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야 어찌 잘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252)
즉 김성일은 연산군이 비록 종사(宗社)에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후사 단절의 사유가 될 수 없고, 조정의 결정 또한 인정과 왕도의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대안으로서 김성일은 종성(宗姓)우로 후사를 세우거나 혹 묘소에 묘우(廟宇)를 지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연산군을 바르게 대우하는 것으로 인식했는데, 그의 이런 인식과 주장은 이황과의 조율을 통해 가다듬어진 것이었다.253) 물론 김성일의 주장은 취택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연산군을 군주로 대우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음에 반해 김성일은 인정(仁政)․왕도론(王道論)에 바탕하여 조론의 폄박성을 신랄하게 질타했던 것이다.
김성일의 이런 인식은 1571년 예문관 봉교 재직시 노릉(魯陵) 복위 및 사육신을 복작, 종친의 서용을 주장한 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한 층 강도를 더하게 된다. 여기서 거론한 세가지 사안은 김성일 스스로의 표현처럼 모두 국가적 기휘였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기탄없이 개진했던 것이다.
아아, 지금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일은 바로 현재 꺼리고 있는 일들로, 신하로서는 말하기가 어려운 일들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일에 천하의 공적인 큰 의리가 있으면 임금이 신하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할 수 없는 법이고, 신하 역시 임금에게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노산군의 직위는 당시의 큰 권도(權道)에 있어서는 폐위시켜야 하고, 만대의 큰 의리에 있어서는 복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은 역모를 도모한 죄를 가지고 논하면 삭직하여야 하고, 절개에 죽은 마음을 가지고 따져 본다면 권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성 친족들의 일에 이르러서는, 한때의 지나친 염려를 위해서는 금고시켜야 하고, 역대의 득실을 가지고 살펴보면 등용시켜야 합니다. 당시의 큰 권도를 쓴 것을 가지고 기휘하여야 한다고 한다면 탕무(湯武)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왕명을 거역한 죄를 가지고 주벌해야 한다고 한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개를 아는 것이 아니며, 한때의 견해를 가지고 본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254)
목숨을 담보로 한 이 상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고금의 통의(通義)’로 표현한 것에서 보듯 김성일에 있어 노산군의 복위와 사육신의 복권은 상도와 통의의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더욱이 이 상소는 단종의 복위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한 첫 번째 사례였고, 후일 숙종조에 단종이 복위되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컸다.255) 그리고 이 상소는 후일 이가환으로부터 감언의 전범(典範)으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일에는 천만 사람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한 사람이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러 ‘공언(公言)’이라고 하고, 천만 사람이 말하려고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한 사람이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러 ‘감언(敢言)’이라고 한다. 무릇 천만 사람이 말하려고 해도 능히 말하지 못한 것을 한 사람이 말한다면, 이 사람은 천만 사람의 한 사람인 셈인데, 학봉 선생이 올린 이 상소가 그런 것이다. 그 뒤에 단종(端宗)이 복위(復位)되고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잇달아 신원(伸冤)된 것은 모두 이 상소에서 발단된 것이다.256)
김성일의 담대한 언론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관의 부정과 폐단에 대해서도 엄정한 태로도 일관했다. 그리하여 김성일은 ‘철면어사(鐵面御使)’, ‘담이 군세고 혀가 곧은 사람[膽强舌直]’이란 칭호와 함께 경외시되었고,257) 1573년 7월 부수찬 재직시 검토관 자격으로 경연에 입시해서는 그 유명한 ‘요순걸주설화(堯舜桀紂說話)’를 남기게 된다. 군왕의 자질과 태도에 따라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다는 표현은258) 군신간 대화로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대목이다. 일견 오활해 보일 수도 있는 김성일의 언설은 군왕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신하로서의 직언을 넘어 군왕의 독단를 경계하며 군신공치를 추구했던 사림정치의 틀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군왕 선조에 대한 충의 또 다른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조정의 기강확립과 이도쇄신에 초점이 있었던 김성일은 언관활동은 정승 및 왕실 등 그 지위를 불문하고 적용되었다. 1579년 하원군 이정에 대한 치죄와 정승 노수신에 대한 탄핵은 단적인 사례였고, 그 결과 김성일은 전상호(殿上虎)라는 또 다른 별칭을 얻게 되었다.259)
한편 김성일은 1589년 기축옥사 때 죽임을 당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영경의 죽음은 무고에 의한 원사(寃死)라는 것이 통념이었지만 기축옥사 자체가 워낙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당시만해도 이 문제를 제기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1591년 5월 부제학에 임명되자마자 최영경의 신원을 강력하게 요청했고, 선조의 거듭된 힐문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260) 최영경의 죽음은 정철과의 사적인 원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김성일은 동년 8월 8일 조강에서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고,261) 마침내 선조는 동월 11일 최영경에게 직첩을 환급할 것을 명했다.262) 『선조실록』의 찬자는 최영경의 신원을 위한 김성일의 노력상을 ‘청론(淸論)을 부식하는 행위’라는 특별한 평가를 내렸다.
간신 정철이 기축역옥(己丑逆獄)으로 인하여 처사 최영경(崔永慶)을 터무니없는 죄로 얽어 죽이니, 사람들은 모두 최영경의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김성일이 어전에서 항언으로 변명하여 설원과 복관이 되게 하였으니, 청론(淸論)의 한 맥이 이를 힘입어 이어졌다.263)
김성일과 최영경은 같은 영남출신으로 동인에 속했지만 최영경에 대한 김성일의 신원요청을 지역적, 정파적 연고의 결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두 사람이 각기 이황과 조식의 고제였고, 기축옥사가 남인[퇴계학파]과 북인[남명학파]의 분립을 재촉한 측면이 있음을 고려할 때 김성일의 ‘최영경신원론’에 당파․학파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김성일은 충역과 시비의 엄정한 가림의 차원에서 이 사안에 착목했던 것이고, 후술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최영경신원론’은 임재왜란 당시 김성일이 초유사 또는 경상우감사로서 곽재우․정인홍․김면․조종도․이로 등 강우 남명학파권 인사들을 규합하여 국난을 타개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상에서 김성일의 인간상을 직도와 충의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연산군의 후사론 및 노산군 복위론에서는 변용과 융통보다는 상경과 통의를 강조하는 입장을, 이정의 치죄와 노수신의 탄핵에서는 지위를 물문하는 엄정성을, ‘요순걸주론’으로 요약되는 어전설화에서는 사림계 관료로서의 감언성을, ‘최영경신원론’에서는 초당파․학파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사료나 타인의 문집 등에 수록된 것이라는 점에서 김성일 초년의 담대(膽大)․의기성(義氣性) 및 시세부종론(時勢不從論)을 강조한 『학봉연보』의 기록을 결코 자가(自家)의 주관이 반영된 사찬(私撰)으로 치부하여 그 가치를 절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김성일의 졸기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성일은 성품이 강직 방정하고 재질이 매우 뛰어났는데, 이황(李滉)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젊어서부터 격앙하고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기탄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264)
3. 학자․관료적 자취와 그 평가
1) 학자적 삶 : 계문적전론(溪門嫡傳論)을 중심으로
김성일은 조목․류성룡․정구와 함께 퇴계문하 4고제의 한 사람으로서 영남학파[퇴계학파] 내에서는 학통상의 지위가 매우 확고했다. 퇴계학파 내 여러 갈래의 학통 중에서 조선후기 영남학계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점한 것이 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류치명⇒김흥락으로 이어지는 학통이었음을 고려할 때, 김성일을 퇴계학파의 적통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숙종연간 서울에서 상주로 이거한 이만부는 자신의 눈에 비친 퇴계학파의 판도를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 이만부의 견해를 빌자면, 적어도 17세기 후반에는 퇴계학파가 조목․류성룡․김성일․정구 등의 4대문파로 확립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 김성일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강우(江右) 상류의 논의는 류성룡(柳成龍)을 위주로 하여 정경세(鄭經世)에 미치며, 성주 아래의 논의는 정구(鄭逑)를 위주로 하여 장현광(張顯光)에 미치고 있다. 안동 일대는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이 함께 칭송되고, 예안 사람들은 조목(趙穆)을 가장 존경하는 까닭에 도산서원에 제향된 이는 조목 뿐인 것이다.265)
김성일이 이황의 문하에 입문한 것은 19세 되던 1556년이었다. 당시 김성일은 풍기 소수서원에서 과업에 종사하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이황과 사제관계를 맺었고, 1558년(명종13)부터는 도산에서『서전(書傳)』,『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독하는 한편『심경(心經)』,『대학(大學)』 등의 의문처를 이황에게 질의하는 등 학문의 깊이와 외연을 심화․확충했다. 김성일의 향학열을 눈여겨 본 이황은 아래와 같은 논평을 통해 깊이 신뢰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사순(士純) 김성일이 도산에 와 있는데, 무더위를 무릅쓰고 산을 넘어 왕래하면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한다.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몹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였다.266)
이후에도 김성일은 1561년(명종16) 이황의 회갑에 즈음하여 도산을 찾아『대학』,『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읽었으며, 1562년에는 이황을 배종하여 천연대(天淵臺)에 오르는 등 사제간의 학연을 더욱 굳건하게 다졌다.
한편 김성일은 1564년(명종19)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이듬해인 1565년에는 성균관에서 유학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과업을 포기하고 도학에 전념코자 하는 뜻을 피력하는 등 학자로서의 자세와 포부, 장래 문제 등을 일일이 이황에게 품의하였으며,267) 이 해 여름에는 도산의 농운정사(隴雲精舍)에 머물며 더욱 학문에 진력하였다. 또한 김성일은 서간을 통해 이황과 끊임없이 학문을 토론했는데, 1565년부터 1570년까지 약 5년 동안 예학을 주제로 사제간에 주고받은 문답은 김성일이 예학의 대가로 인정받는 밑거름이 되었다.268) 아울러 1570년 예문관 검열 재직시에는 사관(史官)의 법도와 직분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등 관료로서의 식견과 자질 배양에 있어서도 이황을 크게 의지했다.269)
이런 흐름 속에서 이황은 1566년(명종21) 29세의 김성일에게 요순(堯舜) 이래 성현(聖賢)들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을 차례로 적은 「병명(屛銘)」을 써 주었는데, 「제김사순병명(題金士純屛銘)」270)이 바로 그것이다. ‘요흠순일(堯欽舜一)’에서 ‘연원정맥(淵源正脈)’까지 모두 80자로 구성된 이 병명은 제(弟)에 대한 사(師)의 강렬한 신뢰감의 표현으로서 김성일이 퇴계문하의 고제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후일 김용(金涌), 이현일(李玄逸), 이상정(李象靖) 등은 병명의 전수를 심법(心法)과 학통(學統) 전수의 의미로 해석한271)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에 김성일은 조정에서도 이황 대표적인 문인으로 일컬어졌고, 이황은 김성일의 학자적 완성은 물론 관료적 성장에 있어서도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상이 경연에서 이황의 문인 중에 조정에서 벼슬한 자가 몇 명이 있는가를 물으니, 유희춘(柳希春)이 정유일(鄭惟一)과 구봉령(具鳳齡)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김성일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고 했다.272)
성일은 젊어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황이 죽을 무렵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조정에 벼슬함에 미쳐서는 준엄․강직하다는 말이 있었다.273)
한편 김성일은 이황의 사후인 1571년 봉교 재직시에는『당후일기(堂後日記)』에 수록된 이황 관련 기록을 정밀히 채록하여 「퇴계선생사전(退溪先生史傳)」을 지었는데,274) 이것은 후일『퇴계연보(退溪年譜)』 편찬의 기본 문헌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김성일은 이황에게 시호를 내리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75) 법제상 시호행정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시장[행장]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만해도 미처 행장이 준비되지 못했다. 이에 선조가 난색을 표명하자 김성일은 노진․김우옹․이이 등과 함께 ‘대현(大賢)을 대우하는 것은 일상적인 규례에 구애받아서는 안된다’고 하며 선조를 설득하여 시장없이 시호를 내리게 했던 것인데,276)이는 부대장시의(不待狀諡議)의 효시가 되었다.277)
이 과정에서 김성일은 이이와 약간의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이가 격식에 구애되지 말고 이황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건의 하면서 ‘이황 같은 사람은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를 들으면 옛 사람의 학문을 참으로 안 사람으로서 진실로 이와 비견될 사람이 없었습니다.’고 하자 김성일은 ‘이 사람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어찌 언론·풍지의 한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이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고 하며 되받아쳤던 것이다.278) 이 점에서 김성일은 ‘퇴계절대론자’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일 수도 있었다.
한편 김성일은 동문의 조목․금난수․이덕홍 등과 함께 이황의 묘지 및 묘갈의 찬술, 도산서원의 건립 및 퇴계집의 편찬 등 이황의 현양사업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279) 그리고 1583년 7월에서 1586년 12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나주목사 재임시에는 대곡서원(大谷書院:景賢書院)의 건립,『성학십도(聖學十圖)』,『계산잡영(溪山雜詠)』,『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퇴계선생자성록(退溪先生自省錄)』의 간행, 퇴계유묵(退溪遺墨)의 모각 등 ‘퇴계현양사업’을 사실상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런 사실은 김성일이 퇴계문하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김성일은 1580년 윤4월 부친상을 당했고, 그후 1582년 6월까지 거상(居喪)하게 된다. 문과 급제 이후 내내 사환에 묶여 있었던 김성일에 있어 이 기간은 저술과 강학에 매진하며 학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상례고증(喪禮考證)』280)을 비롯한 주요 저술을 탈고한 것도 이때였고, 후학을 양성하며 이른바 ‘학봉문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원근에서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또한 억지로 막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주자가 어머니의 상중에도 한천에서 강학하던 일을 따른 것이다.281)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김성일은 제자 교육에 힘썼고, 그의 문하에는 김용(金涌), 유복기(柳復起) ․장흥효(張興孝), 최현(崔晛), 황여일(黃汝一), 신지제(申之悌) 등 우뚝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282) 특히, 선산 출신 최현의 입문은 ‘학봉문하(鶴峯門下)’가 팽창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신지제(義城), 황여일(平海), 조정(尙州) 등도 급문하여 문인의 외연도 점차 확대되었지만283) 류성룡․정구․조호익 등 여타 퇴계문인에 비해서는 문인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표1> 영남지역 주요 學派[門派]의 문인현황
구분 | 문인수 | 전거 | 비고 |
退溪門人 | 309 | 『陶山及門諸賢錄』 | 『退溪全書』 |
南明門人 | 30 | 『山海師友淵源錄』 | 朴絪(編) |
來庵門人 | 115 | 『南冥學派의 形成과 展開』 | 李相弼(著) |
月川門人 | 19 | 「月川先生門人錄」 | 光山金氏 後彫堂 所藏 |
西厓門人 | 117 | 「西厓先生門賢錄」 | 『西厓全書』 |
鶴峯門人 | 40 | 「鶴峯先生門人錄」 | 金龍洙(編) |
寒岡門人 | 342 | 『檜淵及門錄』 | 『寒岡全書』 |
芝山門人 | 94 | 「芝山先生師友錄」 | 道岑書院 所藏本 |
旅軒門人 | 355 | 『旅軒先生及門錄』(1916) | 單行本(木版本) |
「旅軒先生及門諸賢錄」(1919) | 『旅軒全書』 | ||
愚伏門人 | 107 | 「愚伏門人錄」 | 「愚伏先祖別集營刊時文蹟」 |
敬堂門人 | 221 | 「敬堂先生及門諸賢錄」 | 『敬堂集』別集 |
葛菴門人 | 358 | 「錦陽及門錄」 | 『葛庵全書』 |
大山門人 | 273 | 「高山及門錄」 | 『大山全書』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성일은 이른 나이에 퇴계문하에 입문하여 이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스승 사후에는 현양사업을 주도하는 등 퇴계문하에서의 위상이 매우 높아 마침내 류성룡․조목과 함께 퇴계문하의 영수[ 3고제]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 풍산현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예(禮)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성룡은 조목·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해마지 않았는데 지난해에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로 삼는다.284)
이들 세 사람의 학통상의 지위는 원향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었다. 이황의 여러 제향처 가운데 단연 수원에 해당하는 것은 예안의 도산서원, 안동의 여강서원인데, 조목은 1615년에 도산서원에 종향되었고,285) 류성룡․김성일은 1620년에 여강서원에 배향되었다.
물론 퇴문고제들은 ‘주화오국(主和誤國)’ 논쟁과 『퇴계집』 편간을 둘러싼 조목(1524~1606)과 류성룡(1542~1607) 사이의 갈등,286) 1615년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에 대한 논란,287) 1620년 유성룡과 金誠一(1538~1593)의 여강서원(廬江書院) 합향에 따른 서애계와 학봉계의 대립 등 내부적 진통이 적지 않았지만 288)도산․여강서원의 원향 체계는 퇴계학파가 조목․류성룡․김성일학통, 특히 류성룡․김성일의 양대 학통구도로 정립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퇴계학파에 대한 서인계의 시각은 조금 달랐다. 앞에서 인용한 『광해군일기』의 편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식(李植)289)은 퇴계학파의 판도와 그 학적 계승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평한 바 있다.
영남의 경우는 퇴계와 남명의 문파(門派)가 자못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퇴계의 문하로는 서애․ 학봉․백담이 가장 유명한데, 그들은 벼슬길을 왕래하였을 뿐 다시 강학을 일삼지는 않았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학행 면에서 가장 우수한 면모를 보이면서 두 분 선생의 문하에 모두 나아가 종유(從遊)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후세에 전해지는 바가 없고, 조월천(趙月川)은 한가로이 물러나 수명을 오래 누렸으나 사림의 마음이 귀부하지 않아 역시 제자를 두지 못하였다.290)
즉, 이식은 류성룡․김성일구봉령을 3고제로 칭하면서도 ‘강학부재론’으로서 학적 계승성을 사실상 부정했고, 조목에 ‘사론불합론’으로서 그 존재성을 절하했던 것이다. 결국 서인들은 류성룡․김성일은 학자보다는 관료로 인식하고 있었던 셈인데, 바로 여기에 양측의 인식상의 괴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식은 ‘해사록발문[金鶴峯海槎錄跋]’에서 김성일의 충절, 학문의 연원성과 통효성을 크게 천양하면서도 자신의 본심을 담은 것으로 이해되는 가전문헌에서 적어도 학자적 영역에서는 김성일에 대한 폄론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291)
세상에서 학봉 김공에 대해서는 강직하고 충의로운 절조를 지녔다고 일컫고 있고, 그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의 그 혁혁한 명성이 더욱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려서부터 그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얻어듣고서는 마음속으로 흠모해 왔다.…생각건대, 공은 학문상으로 연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서에 통효(通曉)하고 고사(古事)를 두루 살펴 이를 행업(行業)으로 실천하여 드러내신 분이니, 공에게 있어서는 문장 따위야 그저 여흥(餘興)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텐데, 나와 같은 자가 또 어떻게 감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지고 그 뒤에다 쓸데없이 덧붙일 수가 있겠는가.292)
이식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학자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서인계의 ‘학봉인식’의 주요한 가늠자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술할 사행 복명 및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에 대한 평가 역시도 이런 측면에 유의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관료적 삶 : 동서분당론(東西分黨論)을 중심으로
김성일은 선조의 치세가 본격화 된 1568년(선조1)에 관계에 입문했고,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 사망했다. 정치사적인 흐름에서 볼 때 이 기간은 사림정치의 정착과 동시에 그 여파로서 동서분당․계미3찬․기축옥사․남북분당 등 큼직큼직한 정치적 사건들로 점철되던 시기였다. 김성일은 이런 정치적 변화와 변동의 중심에 위치하였고, 이 시기에 활동한 여느 정치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평가도 당론적 시각에 크게 좌우되었다.
김성일은 동서분당 때는 동인을, 남북분당 때는 남인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이황․조식․서경덕의 문인들이 동일을 표방했고, 동인 중에서도 이황의 문인들이 남인에 속한 일반론과 궤를 같이한다. 즉, 김성일은 영남 출신으로서 이황의 고제에 속했고, 동인․남인의 영수로 인식된 류성룡과의 친분을 고려할 때, 동인․남인을 표방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환경에서는 매우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대개 갑술년(1574) 무렵부터 사림이 당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들을 지목하여 동인이라 하고, 서인이라고 하였다. 동인은 오건(吳健)ㆍ정탁(鄭琢)ㆍ유성룡(柳成龍)ㆍ김우옹(金宇顒)ㆍ김효원(金孝元)ㆍ김성일(金誠一)이 영수가 되고, 서인은 심의겸(沈義謙)ㆍ정철(鄭澈)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박순(朴淳)ㆍ이이(李珥)가 영수가 되었다.293)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김성일이 동서분당 때 류성룡․김효원 등과 함께 동인의 영수로 지목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김성일이 철저히 당론에 함몰되어 있었고, 그의 정치적 언동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는가의 문제이다.
예컨대, 1574년 7월 김성일이 정언 재직시에 노수신의 인사 부정을 탄핵한 것이라든지294) 1579년(선조12) 5월 장령 재직시 역시 노수신의 수뢰 사실을 어전에서 폭로한 것은 당론적 차원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노수신은 상주 출신으로서 김성일과는 퇴계문하의 동문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1584년 노수신은 선조의 명에 따라 인재를 천거했는데, 그 중에 김성일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의정 이덕형이 아뢰기를, “갑신년 겨울에 선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지금 재주가 있는 자를 내가 앞으로 크게 쓰겠으니, 대신들은 각각 추천하도록 하라.’ 하자, 노수신이 김우옹(金宇)·김성일(金誠一)·백유양(白惟讓)·이발(李潑)·정여립(鄭汝立) 등 다섯 사람을 추천하였습니다.295)
즉, 제 신료에 대한 김성일의 탄핵활동은 조정의 기강확립과 이도쇄신을 위한 언관으로서의 책무의 수행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에 당론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당론적 사안과 관련하여 김성일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1578년(선조11) 전랑 재직 때였다. 당시는 동인․서인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정국의 주도권은 동인이 잡고 있었지만 윤두수․근수 형제를 중심으로 결집된 서인들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윤두수․근수는 자연히 동인들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578년 11월 김성일이 경연에서 윤현 · 윤두수 · 윤근수의 수뢰 사실을 보고함으로써296) 조정에 일대 회오리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당시 동인의 종주였던 허엽이 탐욕스런 풍속의 징계 차원에서 3윤의 치죄를 계청하자 서인 김계휘가 오히려 3윤을 비호함으로써 양측의 대립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급기야 동인이었던 대사헌 박대립(朴大立), 대사간 이산해(李山海)가 나서 3윤의 죄상을 들추어내어 공격함으로써 선조는 이를 수용하여 3윤의 파직을 명했다.
선조수정실록의 찬자는 김성일이 3윤의 수뢰 사실을 폭로한 것을 동료 전랑이었던 윤현과의 불화와 간극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고, 3윤에 대한 탄핵과 논죄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은 빙탄이 되어 더 이상 화합할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으로 특서하였다. 물론 김성일의 주장에 당론적 요소가 전연 배제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로부터 6개월 뒤인 1579년(선조12) 5월 김성일이 하원군 이정의 폐단을 단호하게 다스리고 노수신의 수뢰를 강도 높게 비판한 점을 고려할 때, 오로지 당파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도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의 보고에서 비롯된 3윤의 파직이 동서 대립을 가열시킨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고, 이이의 이른바 ‘동서조정론’도 이 사건을 계기로 대두되었다. 특히 이이는 이를 계기로 김성일에 대해 극도의 악평을 가하게 된다.
지금 선비들의 싸움은 모두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첫 번에 이해하지 못한 것은 김성일(金誠一)이 그 일을 발단한 것이요, 두 번째 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김계휘가 선비들의 노여움을 격동시켜놓은 것이요, 세 번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발(李潑)이 3 윤(尹)씨 일가의 숨은 죄를 허실도 알아보지 않고 추하게 헐뜯은 것이요, 네 번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정철과 이발이 틀어져서 동ㆍ서가 합할 가망이 영영 끊어져버린 것이다. …서인은 아무리 착한 선비라도 모두 쓰이지 못하고 청명(淸名)있는 선비들이 도리어 속류(俗流)와 하나가 되어 청탁이 혼잡해지니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 김성일은 진실로 괴이한 귀신 같은 무리니 그리 책망을 할 것도 못 되나, 소통(疏通)한 김계휘와 중망(重望)있는 이발과 강정(剛正)한 정철들마저도 모두 함께 일을 그르치게 했다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운명이 아닐까.297)
비록 이이는 동서조정론을 통해 한 때 조야의 신망을 얻었지만 1579년(선조 12) 7월 백인걸의 상소문을 계기로 그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지게 되었다. 백인걸의 상소는 동․서인의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동인을 비난한 구절이 많았다. 이 상소문의 초고를 수정한 사람은 바로 이이였다. 이에 동인들은 이이가 백인걸을 사주한 것으로 여겨 심하게 공격했다. 당론의 조정자가 도리어 당론을 격화시킨 사람으로 공격 받게 된 것이다.298) 이에 정언 송응형 등 동인들은 상소 대필을 빌미로 하여 이이의 체직을 강력하게 건의했다.299) 그러나 홍문관에서 이이의 대필을 부정함으로써 도리어 송응형이 체직되자 김성일은 차자를 올려 송응형을 적극 신구하였다.
가령 이이가 아무런 잘못한 바가 없는데 송응형이 저와 같이 공격하였다면, 이는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이가 잘못이 없지 않아서 언관이 논계한 것이라면, 이는 단연코 이이의 잘못을 비호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배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릇 이이가 백인걸(白仁傑)을 대신해서 시사(時事)에 대해 진술한 것은 참으로 떠도는 말을 주워 모은 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백인걸(白仁傑)이 이미 말하였고, 경악(經幄)의 신하가 또 발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언론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만 유독 논하는 바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내용을 작성할 즈음에 비록 지나치게 해서 마땅함을 잃은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이유로 언관을 죄주어서는 안 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옥당의 뜻은 그렇지가 않아서, 대신 기초(起草)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과 언관을 배척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이이를 애석해하는 마음에 가려져서 온 힘을 다해 언관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이를 허물이 없는 자리에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300)
이이에 대한 김성일의 신랄한 비판은 1583년 이이를 비판한 동인 송응개․박근원․허봉을 회령․강계․갑산으로 유배시킨 ‘계미3찬’ 이후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 왔다. 동년 12월 해주 유생 박추(朴樞)의 상소가 바로 그것이었다. 박추는 이 상소에서 김성일을 동서당쟁의 주범으로 규정하며 중벌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김성일에 대한 서인계의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당시 김성일은 이미 나주목사로 출보됨으로써 화망을 간신히 피해갈 수 있었고, 1586년 나주목사 해임 이후 1588년(선조21) 8월 종부시정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기까지 한동안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다. 특히 종부시정으로 입조할 때는 남북분당의 조짐이 있었지만 일각의 예상을 무색케하는 초당론적 주장을 펼쳐 조정의 여론을 일신시키도 했다.
김성일은 강직 개결한 사람이어서 혹 치우치게 배척하는 논의를 주장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와 의논이 다른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소인은 아니고 자기와 의논이 같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군자는 아니다. 피차를 논하지 말고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옳다.”301)
그러나 이런 면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인들은 그를 ‘이이를 공척한 동인의 주론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런 인식은 김성일에 대한 학자적 평가에까지 혼효되어 나타났다.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17세기 중후반 기호학파의 대표적 학자였던 박세채는 자신의 저술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가운데 이황의 「퇴계선생문인편(退溪先生門人篇)」(72명)과 조식의 「조문정문인편(曺文貞門人篇)」(45인) 입록 순서 관련하여 1681년(숙종7) 윤증(尹拯)에게 아래와 같은 서한을 보냈다.
퇴계․남명 양문은 당론 이후의 인물들이 많이 연관되어 있어 조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퇴계문하는 반드시 서애(류성룡)․학봉(김성일)을 수문으로 치고, 남명문하는 수우당(최영경)․동강(김우옹)을 으뜸으로 삼는데, 이는 저들의 정론일뿐이므로 굳이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김(김성일)과 최(최영경)는 또 두 선생(이이․성혼)과 크게 배치된 혐의도 있으므로 강등하여 다른 사람의 뒤에 끼워 두면 대략 짐작하여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302)
즉, 박세채는 학자적 평가에 있어 정치적 고려를 전제하고 있고, 김성일이 ‘퇴문고제설’은 영남 사람들의 주장일 뿐이므로 굳이 취용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303) 더욱 주목할 것은 이런 평가와 판단에 김성일과 이이와의 정치적 혐의관계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304) 학(學)의 영역에 대한 입론이 당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당대의 실상이라고 할 때, 김성일의 사신 복명과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상에 대한 평가 역시 이런 추세와 전연 무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4. 통신사 복명과 임란 당시 활동상에 대한 정파별 인식의 차이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검토함에 있어 가장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지점은 통신사행의 보고와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상이다. 김성일은 1590년 3월부터 1591년 2월까지 통신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왔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4월 11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김성일은 약 13개월에 걸친 사행 기간 동안 정사 황윤길 및 서장관 허성과 크고 작은 마찰을 수반했고, 1591년 2월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왜적이 반드시 침략할 정상은 볼 수 없었다’는 취지의 사행보고를 마쳤다. 이는 ‘왜적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황윤길․허성의 보고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김성일은 사행보고 이후 안민론(安民論)에 바탕하여 선조와 조정의 군비 강화책도 비판함으로써305) 전란의 책임론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김성일은 당론에 함몰되어 나라를 그르친 인물로 치부되었고, 그런 인식은 당연히 서인계 인사들에게서 두드러졌다. 선조 역시 임란의 책임을 김성일에게 돌리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김성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선조 및 서인계의 이른바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은 이런 맥락을 통해 대두되었다. 이에 반해 남인계는 초유사 및 경상우감사로서 보여준 전란 타개책에 근거하여 그의 역할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을 보였는데,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이 그것이다.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과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은 각기 기호 서인계와 영남 남인계의 인식을 대변하는 성격이 크고 학파 및 정파적 이해 관계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이른바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의 조선적 성격과 그것의 와전 또는 굴절적 인식의 수용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는 동인의 당론을 고수하려고 일본의 조선침략 가능성을 부인하는 허위보고를 했던 김성일은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다”306)
임진왜란 때 나라가 초토화된 것은 김성일의 허위보고 때문이고 그것은 당론에서 말미암은 것인 만큼 당쟁은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약화를 초래한 망국의 정치술이므로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김성일은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라는 것이다.307) 당인(黨人) 김성일이 과연 역사의 죄인인가도 그렇지만, 당론 때문에 외침에 효과적인 대비를 못해서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부정적 당쟁론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라도 이 문제는 새롭게 검증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김성일에 대한 평가는 임진왜란 전후의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져야지 임진왜란이라는 결과만 놓고 진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더욱 유념할 것은 ‘학봉인식’에 있어 김성일과는 동시대에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서인계 관료 및 그 후학들의 입장보다 지금의 주장들이 훨씬 더 각박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대의 실상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이고, 일부 기록 및 문헌의 오류 또는 왜곡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에 이 장에서는 김성일에 대한 사림계의 인식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그 의미를 진단해 보기로 한다.
1) 통신사행보고 개관
황윤길․김성일․허성 등 통신사 일행이 귀국한 것은 1591년 2월이었고, 이들의 복명 기사는 『선조수정실록』 3월 1일자에 수록되어 있다.308)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복명한 뒤에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전쟁을 일으킬)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하고, 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하였다.309)
김성일이 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은 분명하고,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므로 사신으로서의 임무가 실패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310) 그러나 이것이 당론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아래 인용문 역시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자 기사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조수정실록』은 북인정권에 의해 편찬된 『선조실록』이 편파적이라 하여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에서 당론적 이해가 엇갈린 부분을 보완 및 수정하여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서인과는 대립했던 동인을 옹호하는 기술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이 화의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옳다하는 자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려 한다’고 하여 구별해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311)
그럼에도 위 인용문에는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가 정사 황윤길의 사신으로서의 체모에 대한 실망․분개감 때문으로 적고 있을 뿐 당론적 이해에 바탕하여 ‘왜군불침설’을 보고했다는 근거 및 정황은 찾아볼 수 없다.
위의 인용문에서 당론적 이해가 반영된 부분이라면 황윤길의 말을 옳다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서인으로 몰았기에 조정의 분위기가 김성일 보고의 잘못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관의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사료를 곱씹어 보면, 황윤길의 말을 옳다한 쪽이 서인을 직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인이 전쟁론으로 인심을 소란시킨다는 것은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구호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김성일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종래의 전쟁 대비책을 그대로 추진하였는데, 이런 정황은 산성 수축과 군사훈련의 강행으로 민심이 불안하고 민원이 일고 있다는 보고라든가, 비변사의 밀계에 따라 방어를 감당할만한 장수의 추천과 교체 사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 시기 조정의 일본에 대한 대책은 공론수렴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고, 여기에 당론이 개입할 여지는 그만큼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행 당시 김성일이 위엄과 절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왜인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동시에 도리어 그것 때문에 평의지 등 일부 요로에 있는 인사들로부터 정보가 차단되어 왜국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오보의 원인으로 보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김성일 또한 병란의 조짐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312) 그렇다면 그의 사행보고는 인심안정론에 주안점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데, 아래 류성룡과의 대화 기사가 당시의 정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① 왜인들은 황(黃)과 허(許)를 비루하게 여기고 성일의 처신에 감복하여 갈수록 더욱 칭송하였다. 그러나 평의지(平義智)만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겨 매우 엄격하게 대우하였기 때문에 성일이 그곳의 사정을 잘 듣지 못하였다. 그후 의지는 우리 사신에게 ‘성일은 절의(節義)만을 숭상하여 사단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다.313)
② 류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314)
즉, 김성일은 이황의 고제로서 그의 정치론과 가치관은 사림적 기준에 충실하였다. 대체로 보아 사림의 정치관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훈구파의 패도보다는 인화와 덕정을 기본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중시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것은 사림정치의 전성기인 효종·현종 때 북벌을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서 임금이 군사력의 강화와 국가 재정의 확보에 주력한 데 비해 송시열을 위시한 사림은 민심의 수습과 안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던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김성일의 사행보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서인계의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
김성일의 잘못된 사행보고가 왜의 침입을 초래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입장의 ‘실보오국론’은 적어도 임진왜란에 관한한 선조 및 서인계가 김성일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었다.
김성일은 임란이 발발하기 한 달 여 전인 1592년 3월 1일에 특지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1년 11월 김성일이 차자를 올려 축성의 불합리성을 논하면서315) 당시 조정에서 추진하던 전란대비책의 시정을 촉구하자 일종의 문책성 인사로서 그를 경상우병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김성일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당시 조대곤(曺大坤)이 노병으로 체직되자 특지(特旨)로 김성일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성일은 항상 말하기를 ‘왜노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며, 또 차자(箚子)를 올려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가 장계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에 대해 도내(道內)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 하였으므로, 상이 이 때문에 성일이 논한 것을 곧지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런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비변사가 ‘성일은 유신(儒臣)이라서 이러한 때에 변방 장수의 직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316)
이에 따르면, 김성일은 사신 복명의 실보(失報)는 물론이고 향후의 전란대비책까지 가로막은 인물로 기술되어 있는데, 선조 및 서인계의 기본적인 생각을 잘 반영한 기사라 하겠다. 이런 성격의 기사는 실록의 곳곳에서 산견되는데, 통신사행의 일원이었던 황진(黃進)이 왜란을 예견하고 공무 후에 열심히 궁마를 익혔다는 기사도317) 그 중의 하나이다.
김성일이 부임 도중인 4월 15일 충주 객관에서 왜군의 침략 사실을 비로소 인지했고,318)그 길로 황급하게 임지로 갔다. 이후 그는 압송의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에 초유사로 임명되어 영남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류성룡․최황 그리고 왕세자(광해군)의 구원의 힘이 컸다.319)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招諭使)로 삼고,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은 전에 성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적이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일이 장차 측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얼마 있다가 성일이 적을 만나 교전한 상황을 아뢰었는데, 유성룡이 성일의 충절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풀려 이와 같은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후 김성일은 초유사로서 그리고 경상우병사로서 전란의 극복을 위해 분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592년 10월에는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320) 사신 복명과는 대조적으로 김성일의 초유사 및 경상우병사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매우 긍정적인 것이 사실인데, 전란 초기 왜적의 척후와 직면했을 때의 담대한 대응력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한 점,321) 탁월한 지휘력으로 영남의 인심을 수습하고, 의병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킨 점,322) 이를 바탕으로 이순신과 함께 호남과 영남을 잘 수호한 공로323)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선조의 의중과 입장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선조는 김성일의 전공을 인정하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책성 발언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이런 추세는 김성일의 사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는데, 여기에는 전란의 책임을 덜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내재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토대로 선조의 김성일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상이 이르기를, “황윤길은 평의지(平義智)가 간사하여 염려된다고 하였고 김성일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수길(秀吉)이 중국을 병탄할 수 있다고 보는가?”324)
② 상은 ‘성일은 타고난 성품이 편벽되고 강퍅하며 용심이 거칠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왜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극력 주장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소홀케 하여 결국 이 난리가 터지게 하였다.’ 하고서 금오랑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325)
③ 상이 이르기를, “김성일이 수길(秀吉)에게 속임을 받은 것은 많다. 수길이 전립(氈笠)을 쓴 데다 애를 안고 맨발까지 한 자세로 접견하자, 김성일은 장담하기를 ‘수길은 대수롭지 않으니 일본은 염려할 것이 못 된다. 부견(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찌 이 적을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이것이 수길에게 속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326)
④ 김성일은 추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에 이미 말하였거니와, 설령 혹 증직하더라도 서서히 의논하여도 늦지 않다.”하였다.327)
⑤ 지난 임진년에는 김성일 등이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노는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내가 너무 염려한다고 비난하면서 변방의 방비에 뜻을 둔 자를 서로 배척하여 순변사 이일(李鎰)을 보내자는 것을 파기하기까지 하였다.328)
⑥ 예전에 류성룡이 정승이었을 때 김성일 등과 앞장서서 사설(邪說)을 말하여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싸우고 지킬 대비를 하지 않았고, 체찰사가 되어서도 탈이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는데, 대신의 도리로는 삼가서 이런 짓을 본뜨지 말아야 한다. 329)
즉, 선조에 있어 김성일은 풍신수길에게 속임을 당해 사설[倭軍不來說]을 주장했고, 거기에 더해 전란대비책까지 가로막아 국난을 키운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성일의 사망시에 예외적으로 사제(賜祭)조차 하지 않고, 1595년(선조28) 김우옹 등의 적극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에 대한 증직을 수락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히려 선조는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김성일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더욱 심화하였는데, 위 인용문 ⑤와 ⑥에서 보듯 1601년(선조34)과 1603년(선조34)에 내린 비망기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선조의 이러한 인식과 조처는 서인계 관료 및 그 후학들의 ‘학봉인식’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서인계라고 해서 모두 김성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심충겸의 경우 임란 초기 김성일을 경상우감사의 적임자로 적극 추천한 바 있었고,330) 이항복은 사행보고와 관련하여 김성일의 ‘인심안정론’에 일부 공감한 바도 있기 때문이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은 성일과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처지인데 그때 함께 정원에 있으면서 물어보았더니, 성일도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다만 ‘남쪽 지방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비록 장담해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이를 염려한 것이니, 어전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잘못 계달한 것일 것입니다.”331)
그러나 서인계의 대체적 인식은 ‘실보오국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17-18세기 서인 기호학파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했던 신흠․안방준․박동량․조익․윤선거․한원진․황경원 등을 들 수 있다.
신흠은 ‘물리침’이 아니라 ‘감싸안음’을 지향했고, 배척이 아니라 대화와 회통의 면모를 강조했던332) 문신관료로 잘 알려져 있지만 ‘비왜설(備倭說)’에 드러난 필설은 자못 색다르다.
① 통신사 황윤길이 돌아왔을 때 그들의 반역심이 이미 확연히 드러났는데도 부사 김성일은 반드시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조정이 이 말을 믿고 고식적으로 안일 속에서 세월만 헛되게 보내면서 한 명의 장수도 선발하지 않고 한 명의 병사도 훈련하지 않았는데 적은 이미 바다를 건넜다.333)
② 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우순찰사 김성일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
인용문① 가운데 ‘왜군불래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정이 김성일의 보고에 따라 방비를 소홀히 했다는 내용은 억견으로 밖에 볼 수 없고, 인용문②는 역사적 사실과도 크게 위배된다. 특히 후자는 이미 김시양으로부터 두찬의 의혹이 제기된 바 있지만334) 여전히 『상촌고(象村稿)』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이 것이 신흠의 글이든 아니든 『상촌고(象村稿)』에 수록된 사실 자체가 김성일에 대한 폄박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한편 신흠은 ‘신여로전(申汝櫓傳)’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것 자체가 잘못 되었고, 선조가 명을 잘 섬겨 원군을 확보함으로써 간신히 국난을 극복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335) 이는 선조 및 조헌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 글 중에는 ‘왜적이 반드시 군대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설(倭賊必不動兵說)’을 주장한 오사자[誤事者:나랏일을 그르친 자]에 대한 극언이 포함되어 있는데,336) 그 대상이 김성일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실보오국론’에 바탕한 김성일에 대한 폄하적 기술은 성혼․조헌의 문인 안방준에 이르면 좀 더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선조조 동서당쟁에서 차지하는 성혼의 정치적 비중, 통신사의 파견 자체를 비판했던 조헌의 입장을 고려할 때, 안방준의 인식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안방준의 <임진기사(壬辰記事)>,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통해 김성일 관련 기술은 ① 한흥․이산보 등의 반대와 윤두수의 ‘명나라에 먼저 보고한 뒤에 통신사를 파견하자(先奏聞後派遣)’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성룡의 주론하에 통신사 파견이 전격적으로 단행되었고, ② 각하․방물영납 등 서계의 6자를 고친 것은 황윤길․허성의 공로이고, ③ 김성일이 사행보고 때 왜군이 ‘절대로 올 리 없다(萬無來理)’고 했고, ④ 의정부에서 김성일의 사행을 높이 평가하여 승진시킴은 물론 기존의 전란대비책을 사실상 중지하였고, ⑤ 임란이 발생하자 선조가 김성일을 보내 왜적을 막게 했고, 김성일이 압송의 명을 받았을 때 경상․전라도를 배회하며 왕명에 신속히 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337) ①과 ④는 동인의 횡포를 드러내기 위한 다분히 당론적 기술이고, ②③⑤는 사실과 배치된다. 서계 가운데 ‘각하’ 및 ‘방물영납’ 6자를 고친 것은 김성일의 요청의 결과였고,338) 왜군의 침략 가능성에 있어서도 『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김성일의 공식 견해는 ‘그러한(왜군이 침략할) 정형은 보지 못했다(不見如許情形)’였을 뿐 ‘침략할 가능성이 만무하다(萬無來理)’[안방준의 주장] 또는 ‘반드시 군대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必不動兵)’[신흠의 주장]는 아니었다. 김성일의 보고 때문에 전란대비를 중단했다는 주장의 불합리성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김성일이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것은 1592년 3월 1일이므로 전란이 발발하자 그 책임을 물어 영남으로 보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압송 당시의 정황도 무리한 서술이 많다. 아래는 안방준의 기술을 변론하는 『학봉연보』의 한 대목이다.
안방준의 『임진록(壬辰錄)』에 이르기를 …상이 분노를 참지 못하여 그로부터 며칠 뒤에 금부도사 이통(李通)을 시켜 김성일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때 김성일은 호남으로부터 전주, 남원을 경유하여 영우(嶺右)로 돌아 내려갔고, 이통은 곧바로 내려가 영남 경계에 이르렀다가 길이 막혀 내려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하였다. 아, 선생이 처음에 우도 절도사의 명을 받고 충주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없이 쉬지 않고 길을 달려 곧바로 본영으로 갔다. 이것은 같은 때의 기록 가운데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에는 영남의 도로가 이미 막혔으므로 사잇길을 따라 가느라고 호남을 경유하여 올라갔으니, 용기 있게 곧장 앞으로 나가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은 의리는 지금까지도 그 늠름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안방준의 말은 이처럼 사실을 변환시켜서 마치 선생이 왜적을 피하기 위하여 길을 돌아 내려가면서 머뭇거리며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처럼 말하였다. 어찌해서 자신과 같은 자를 편들고 다른 자를 치기에 급급하여, 자신이 말을 날조해 낸 죄에 빠지는 것은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 선생은 금오랑(金吾郞)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날로 즉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그러니 안방준이 말한 ‘금부도사가 길이 막혀서 내려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339)
안방준의 기술이야말로 ‘같은 자는 편들고 다른 자는 치는(黨同伐異)’ 전형적인 당론적 행태로 규정하는 것이 『학봉연보』 편찬자의 주장인데, 타당한 견해라 하겠다.
사실 관계의 여부를 떠나 ‘실보오국론’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서인 기호학파 내에서 중요한 화두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논의를 이끈 사람은 성혼의 외손으로 우계학통의 계승자였던 윤선거였다.
윤선거는 정구의 『한강집』에 실린 ‘김학봉의 무덤에 올린 제문(祭金鶴峯誠一墓文)’ 가운데 ‘외국으로 사신 가서는 큰 절개 더욱 드러내니’340)라는 표현과 ‘김학봉의 묘표(金鶴峯墓表)’ 가운데 ‘일본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는 바르고 곧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341)는 표현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강이 김성일을 위해 명[銘: 묘표의 잘못]을 지으면서 ‘외국으로 사신 가서는 큰 절개 더욱 드러낸’ 것으로 인정했는데, 일찍이 ‘한번 뛰어 대명국에 들어가서 400여 주를 우리 풍속으로 바꾸고…’라는 내용의 글을 받아온 자를 과연 대절(大節)이라 할 수 있겠는가342)
결과론적으로 볼 때, 윤선거의 비판은 타당하지만 국서를 고치기 위한 김성일의 노력상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윤선거는 김성일이 이산해의 사주를 받아 ‘왜적이 침략해 올 뜻이 없다(賊無來意)’는 설을 주창함으로써 왕명을 욕되게 하고 나랏일을 그르친 것이 극심한데 도리어 찬미를 받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이런 폐단이 발생한 것은 양현[우율] 문하의 인사들이 사도(師道)를 강명(講明)하지 않은 탓이며, 그나마 조헌(趙憲)이 있어 우율의 도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하여 철저히 서인적인 시각에서 김성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343)
신흠이 숙종조 소론의 영수 박세채의 외조부이고, 안방준이 우계․중봉문인이고, 윤선거가 성혼⇒윤황으로 이어지는 우계학통의 계승자임을 고려할 때, 지금까지 살펴 본 신흠․안방준․윤선거의 ‘학봉인식’은 서인 중에서도 대체로 소론계의 인식과 평가를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344) 소론계가 김성일에 대해 강경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한편 ‘실보오국론’이 17세기까지 소론계가 주도하였다면 18세기에 접어들면 노론계의 주도 현상이 두드러졌다. 또 다른 특징은 류성룡과의 관계 속에서 김성일을 비판하는 경향성을 지녔는데, 이런 주장을 이끈 사람은 권상하의 문인 한원진(韓元震:1682-1751)과 이재(李縡)의 문인 황경원(黃景源:1709-1787)이었다.
먼저 한원진은 김성일은 사신으로 가서 나라를 그르친 만큼 죽어야 마땅했고, 죄를 사면받아 직무에 임해서도 기록할만한 공이 없는데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김성일을 ‘참된 충(眞忠)’으로 평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감을 토로했다.345) 물론 이 글은 류성룡의 당인적 처세와 저술의 태도 등을 비판하는데 주안점이 있지만 한원진이 가지는 학문적 지위를 고려할 때, 18세기 노론 호론계의 ‘학봉인식’의 단면으로 보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황경원 역시 비판의 주된 대상은 류성룡이었다. 그는 화의론을 주창한 류성룡이 죄를 입기는커녕 중흥명상으로 일컬어지는 세태에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고346) 그 일환에서 류성룡의 비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성일을 싸잡아 폄하했던 것이다. 황경원 또한 김성일의 허위 보고로 중외의 무비가 중단되었고, 기군망상의 죄인 김성일을 사죄로 다스려야 했다는347) 점에서는 기존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김성일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실정(失政)을 넘어 인심 이반의 빌미가 되었고, 그 부담을 선조가 고스란히 떠앉게 되었다고 한 점에서는 선조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성일을 겨냥한 ‘실보오국론’은 선조의 인식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었고, 신흠․인방준․박동량․조익․윤선거․한원진․황경원에 이르기까지 서인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부 인사들 중에는 사실 관계의 오류 또는 왜곡의 구조 위에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그 객관성을 상실한 측면도 컸다. 여기서 한가지 유념할 것은 김성일의 오보가 당론 때문에 빚어진 의도적 결과로 단정하는 예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실보오국론’은 비단 서인계에 국한된 논리는 아니었다. 18세기 근기남인계의 대표적 학자였던 이익의 경우 김성일이 일본 사행시에 보여준 위엄과 체모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도348) 사행보고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이와 관련하여 흔히 남인계가 주장하던 ‘인심안정론’도 사실상 부정했다.
대개 이때에 왜인은 바른 대로 말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도리어 허망한 공갈이라 여기고 하나도 조치가 없었다. 김학봉(金鶴峯)같은 이는 걱정 없다고 말을 퍼뜨렸는데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인심을 진정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학봉은 실지로 소견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349)
이익은 왜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본 김성일의 사행보고를 소견의 부족으로 보았고, 이른바 ‘인심안정론’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억설로 규정하고 있다. 이익의 이런 견해가 근기남인 전반의 입장으로 볼 수는 없더라도 이수광․허목 등 근기남인의 선배 그룹과는 일정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3) 남인계의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
‘실보오국론’이 통신사로서의 활동과 사행보고에 초점이 있다면 여기서 다룰 ‘영남재조론’은 초유사 및 경상우감사로서의 활동과 공로에 주안점을 둔 평가와 인식이라 하겠다. 그리고 전자가 선조 및 서인계의 관점이 크게 반영되었다면 후자는 광해군 및 동인[특히 남인]의 시각에서 도출된 인식체계이다.
영남재조론은 영남을 잘 전수하여 호남의 보장이 되게 했고, 그것은 곧 국가중흥론으로 연결된다는 논리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기저에 깔린 의식은 충의대절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서인들은 실보를 빌미로 사행 당시의 위엄․체모론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지만 남인계에서는 일본에서의 꼿꼿한 처신과 강인한 면모가 곧 국가의 체모와 왕의 권위를 살리는 충의 또 다른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4월부터 1593년 4월 29일 진주 공관에서 사망할 때까지 만 1년 동안 경상우도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근무지를 비운 것은 1592년 9월 4일부터 9월 19일까지 약 보름에 불과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사행보고를 문제삼아 김성일의 압송을 명했던 선조가 그의 죄를 사면하고 초유사로 임명한 데에는 류성룡․최황의 구호에 힙입은 바 크지만 왕세자(광해군)의 건의도 매우 주효했다.350)
무엇보다 김성일이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강우지역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정인홍․김면․조종도․이로․이정 등 남명문인들의 협조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남인[퇴계학파]과 북인[남명학파]의 분열이 표면화되었고, 특히 이황의 고제로서 남인의 우익으로 지목된 김성일이351) 남명학파의 거점에서 사론을 흡수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성일이 강우사림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있었던 것은 기축옥사 때 죽임을 당한 남명문인 최영경의 신원 및 복관에 기여한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그가 초유문에서 이황과 조식의 유풍을 함께 거론한 것도 매우 주효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간신 정철이 기축 역옥(己丑逆獄)으로 인하여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을 터무니없는 죄로 얽어 죽이니, 사람들은 모두 최영경의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김성일이 어전에서 항언으로 변명하여 설원과 복관이 되게 하였으니, 청론(淸論)의 한 맥이 이를 힘입어 이어졌다.… 특별히 이를 용서하고 이내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하자, 그는 도로 영남 지방으로 들어가서 동지를 불러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니, 원근에서 모두 향응하였으므로 함락되었다가 도로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 16∼17읍이나 되었다.352)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강명(講明)하면서 인심을 순화시키고 윤기(倫紀)를 바로잡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에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에 많은 성현들의 글을 읽었으니, 이들의 자부심이 어떠하였겠는가.353)
김성일이 경상우감사로서 발휘한 지휘력과 전공은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에 매우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므로354) 여기서는 일일이 거론치 않기로 한다. 그보다는 강우사림들이 김성일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함양 출신으로 정인홍의 문인이었던 정경운은 초모유사 자격으로 김성일을 가까이서 보좌했는데, 그의 일기 고대일록을 통해 김성일에 대한 강우사림들의 인식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경운의 눈에 비친 김성일은 말의 논리가 바르고 절실한 사람이었고,355) 군무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김성일은 5월 8일 도내에 초유문을 반포하는 한편으로 곽재우에게 의병활동을 권면하는 편지를 보냈다.356) 이 두 글은 영남 사림들의 충분을 격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오희문(吳希文)은 『쇄미록(瑣眉錄)』에서 이 글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이 두 글을 보니 말뜻이 간절하여 충의(忠義)를 권장하고 격려하였는바, 영남의 선비들이 모두 떨쳐 일어난 것이 어찌 이로 말미암아서 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부여받은 직임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족히 볼 수가 있겠다357)
한편 김성일은 정인홍․김면 등 남명문인들과 직접 회동하며 의병활동을 조율․지원함으로써358) 승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나갔다.
6
월 22일 경술(庚戌) 대장(大將) 정내암(鄭來庵)과 대장(大將) 김송암(金松庵)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와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만나 적을 토벌할 방안을 의논하니, 신기한 지모(智謀)와 기발한 계책(計策)이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359)
물론 정인홍․김면․곽재우 등 의병장들이 지휘 체계에 불복하는 난관이 있었고, 의병진 상호간의 불화도 적지 않게 야기되었지만 김성일은 위엄으로서 이를 통제하였다.
김성일에 대한 우도 사림들의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경상좌감사 임명시였다. 김성일이 좌감사에 임명된 것은 1592년 6월 1일이었으나 이 명이 현지에 도착한 것은 동년 8월 초순이었다. 이에 김성일은 명을 받은 다음날 좌도 감영을 향해 출발했는데, 이로․곽재우는 군사를 파하고 따라갈 것을 청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도 사림들은 김성일의 전직을 만류하기 위한 대대적인 운동이 펼쳐졌다. 김성일의 충의에 감격했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김성일을 유임시켜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였다.
초유사(招諭使)가 경상 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에 제수되어 장차 강을 건너 좌도로 향해 가려고 할 때, 여러 고을의 사자(士子)들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마침 우리 초유사(招諭使) 김 상공(金相公)께서 애통한 교지를 받들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눈물을 뿌리며, 이들 적과는 한 하늘을 머리에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는 의리(義理)를 갖고서 창의(倡義)하여 회복(恢復)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우리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통문을 발송하여, 각 고을에 군신(君臣)의 본분을 밝히고 복수의 의리를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언사(言辭)가 절실하게 와 닿았기에 충의(忠義)에 감격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자는 팔을 걷어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를 본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목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원근(遠近)이 메아리처럼 일어나니, 피로에 지쳐 있고 흩어졌던 수천 명의 군졸들이 돌격해 오는 흉측한 무리의 칼끝에 대항하여 전략적 요지를 차단하고, 그 기세를 저지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장차 회복(恢復)의 희망이 있게 된 것은 누구의 힘이었겠습니까.360)
이에 사림들은 정유명(鄭惟明)을 소두로 하여 만류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김성일을 다시 경상우감사에 임명하는 조처를 내리게 되었다. 이 상소문에서 주목할 것은 곽재우․정인홍․김면 등이 중심이 된 강우지역 의병활동의 실질적 지휘자로서의 김성일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고, 이는 이른바 영남재조론의 근간을 이루는 설명 구조이다.
이보다 앞서 또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는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우뚝하게 일어났으며,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좌랑(佐郞) 김면(金沔)도 앞장 서서 의병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는데, 모든 일이 엉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김성일이 와서 친히 진영을 순찰하였으므로 사기는 백 배나 충천하였습니다. 또 병졸은 많으나 통솔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면과 손인갑(孫仁甲)으로 좌우 대장을 삼았습니다. 이에 각 고을의 의병도 절로 통솔하는 데가 있게 되어, 여러 차례 크게 이긴 공을 아뢰었으며, 점점 수복하는 형세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시행한 일의 성과를 따져 보면 옛사람보다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일은 그 어느 것이나 의병이 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의병들로 하여금 종시토록 그만큼 성취하게 한 것은 김성일의 공입니다.361)
5. 맺음말 [구두 설명 및 보론]
주-------
248) 金誠一, 『鶴峯年譜』 <癸卯>(1543)
249) 金誠一, 『鶴峯年譜』 <乙巳>(1545)
250) 金誠一, 『鶴峯年譜』 <丁未>(1547)
251) 1565년 영남유생들은 文定王后의 사망을 기화로 보우를 참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추진했는데, ‘請斬普雨疏’가 그것이다. 이 때 김성일은 참여 여부를 이황에게 품의했고, 이황으로부터 구차하게 동조해서는 안된다는 지침을 받고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른바 ‘청참보우소’는 1565년 8월 金宇宏을 소두로 하여 봉진된 바 있다.(『명종실록』 권31, 명종 20년 8월 4일(무진) ; 이수건, 「朝鮮後期 嶺南儒疏에 대하여」,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論叢』, 1985.)
252)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5, <書燕山奉祀議得下辛未> “洪暹以爲燕山得罪宗社 自絶于天 非當立後云 嗚呼 何不思之甚也 燕山旣得罪自絶 故有易置之事 其罰可以當罪也 然降稱爲君 則其屬籍猶存也 屬籍猶存 而於中廟無可絶之道 則其不可立後乎 有罪而廢之 義也 無後而繼之 仁也 仁義兼盡 然後事得其宜 吾未見立後非其禮也 且所引舜不立象後者 亦甚無稽 象雖不肖 其罪止欲害舜而已 則封之有庳 所以不藏怒宿怨也 生盡親愛之道 而死不立後者 是豈聖人之心乎 漢人無據之說 固不足徵信 而又從而爲之辭 亦多見其鑿也 若權轍之引莒人賈充之事則善矣 而終請以具氏因祀 此何等見識也 噫 大臣之不學無術如此 況事有大於此者 其可望耶”
253)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4, <上退溪先生>
254)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2, <請魯陵復位六臣復爵宗親敍用疏(辛未)>
255) 『숙종실록』 권32, 숙종 24년 12월 4일(갑진).
256) 李家煥, 『錦帶詩文抄』[下] <鶴峯金先生辛未疏元藁跋> “事有千萬人之所欲言者 一人言之 謂之公言 千萬人欲言而不能言者 一人言之 謂之敢言 夫千萬人欲言而不能言 一人言之 斯人千萬人之一人也 若鶴峯金先生此疏是已 其後端廟復位 六臣及錦城大君 相繼伸理褒贈 皆此疏啓之也”
257) 金誠一, 『鶴峰年譜』 <癸酉>(1573)
258) 『선조수정실록』 권7, 선조 6년 7월 1일(기묘).
259) 『선조수정실록』 권13, 선조 12년 5월 1일(을사).
260) 『선조수정실록』 권25, 선조 24년 5월 1일(을축).
261) 『선조실록』 권25, 선조 24년 8월 8일(경자).
262) 『선조실록』 권25, 선조 24년 8월 11일(계묘).
263) 『선조실록』 권60, 선조 28년 2월 6일(기유).
264) 『선조수정실록』 권27, 선조 26년 4월 1일(을유).
265) 李萬敷, 『息山集』 卷18, <退陶淵源筆帖跋> “今江右上遊之論 主西厓而及于愚伏 星山以下之論 主寒岡而及于旅軒 永嘉一帶 並稱厓鶴 而宣城人最尊月川 故陶山配食 惟月川一人而已”
266) 金誠一, 『鶴峯年譜』 <戊午>(1558)
267) 金誠一, 『鶴峯年譜』 <乙丑>(1565)
268)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4, <上退溪先生問目乙丑> <上退溪先生問目> <上退溪先生丙寅> <上退溪先生問目戊辰> <上退溪先生問目> <上退溪先生問目庚午> ; 김성일의 예학에 대해서는 金彦鍾, 「鶴峯先生의 禮學」, 『鶴峯의 學問과 救國活動』, 학봉김선생기념사업회, 1993. 참조.
269)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4, <上退溪先生問目>, <上退溪先生>.
270) 李滉,『退溪集』 卷44, <題金士純屛銘> “堯欽舜一 禹祗湯慄 翼翼文心 蕩蕩武極 周稱乾惕 孔云憤樂 曾省戰兢 顔事克復 戒懼愼獨 明誠凝道 操存事天 直義養浩 主靜無欲 光風霽月 吟弄歸來 揚休山立 整齊嚴肅 主一無適 博約兩至 淵源正脈”
271) 권오영,「鶴峯 金誠一과 安東地域의 退溪學脈」,『한국의철학』 28,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0, 52-54쪽.
272) 『선조수정실록』 권7, 선조 6년 9월 1일(무인).
273) 『선조실록』 권31, 선조 25년 10월 27일(계축).
274)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5, <退溪先生史傳>.
275) 김성일이 이황의 증시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퇴문고제라는 개인적 관계를 넘어 퇴계학파의 대표자격으로 시호 논의에 참여한 성격이 짙다. 이에 대해서는 동문의 金富倫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4, <與金惇敍(丙子)>)
276) 『선조실록』 권7, 선조 6년 11월 26일(임인).
277) 조선시대 시호행정에 대해서는 김학수,「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증시행정」,『고문서연구』23, 한국고문서학회, 2003, 참조.
278) 『선조실록』 권7, 선조 6년 11월 26일(임인).
279) 金誠一, 『鶴峯集』 續集 卷4, <與趙月川琴聞遠(辛未)> ; <與趙月川琴聞遠(壬申)> ; <與趙月川(甲戌)> ; <答趙月川> ; <與趙月川(甲申)> ; <與趙月川> ; <與趙月川(丙戌)> ; <答趙月川> ; <答趙月川(丁亥)> ; <與趙月川(戊子)> ; <答趙月川(己丑)> ; <答李宏仲(壬辰)>.
280) 金誠一, 『鶴峯逸稿』 卷4, <喪禮考證> ; 이현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예학(禮學)과 『상례고증(喪禮考證)』」, 『역사문화논총』 4, 역사문화연구소, 2008.
281) 金誠一, 『鶴峯年譜』 <庚辰>(1580).
282) 權五榮, 「鶴峯 金誠一과 安東地域의 退溪學脈」, 『韓國의哲學』28,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0. 참조.
283) 김성일의 후손(金龍洙)이 각종 기록에 바탕하여 초록한 문인록에 따르면, 김성일의 문인은 李介立, 權紀, 閔宗孝, 權暐, 權行可, 李庭柏, 柳復起, 趙靖, 金垓, 裵龍吉, 黃汝一, 權旭, 權晅, 金涌, 任屹, 鄭思信, 柳復立, 金潗, 金瀹, 金允安, 洪禮約, 黃有一, 申之悌, 權益昌, 洪守約, 崔晛, 張興孝, 權誌, 權山立, 權泰一, 鄭佺, 鄭榮後, 李民宬, 金浤, 李民寏, 權直養, 金榮祖, 洪好約 등 총 40명에 이른다.(金龍洙編, 「鶴峰門人錄」)
284) 『선조실록』 권211, 선조 40년 5월 13일(을해).
285) 朴賢淳, 「16~17세기 禮安縣 士族社會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6.
286) 徐廷文, 「『退溪集』의 初刊과 月川·西厓是非」, 『北岳史論』 3, 國民大 國史學科, 1993.
287) 이상현, 「月川 趙穆의 陶山書院 從享論議」, 『北岳史論』8, 北岳史學會, 2001. ; 정만조, 「月川 趙穆과 禮安地域의 退溪學脈」, 『韓國의哲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0, 참조.
288) 김학수, 「廬江書院과 嶺南學統-17세기 초반의 廟享論議를 중심으로-」, 『朝鮮時代의 社會와 思想』, 朝鮮社會硏究會, 1998.
289) 『인조실록』 권28, 인조 11년 8월 10일(기사).
290) 李植, 『澤堂別集』 卷15, <示兒代筆> “嶺南則退溪南冥門脈頗異 退溪門下 西厓鶴峯栢潭最有名 而仕宦出入 不復講學 吳德溪健 學行最高 遊於兩先生門 早卒無傳 趙月川閑退老壽 而士心不附 亦無弟子”
291) 학자적 영역에서의 김성일에 대한 폄박적 견해는 서인계 뿐만 아니라 남인계에서도 표출된 바 있다. 예컨대 허목은 조목의 『월천집』 서문에서 조목․기대승․유성룡․정구를 ‘퇴문4고제’로 거론하며 김성일을 제외시켰고, 장현광의 문인 조임도가 우리나라의 유현 16인[정몽주․정여창․김굉필․남효온․조광조․서경덕․이언적․성수침․성운․이황․조식․조목․기대승․유성룡․정구․장현광]을 노래한 ‘東賢16詠’에도 김성일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許穆, 『記言』 「別集」 卷8, <月川文集序>(癸卯) “國家文明之化 盛於明宣之際 如月川․高峰․西厓․寒岡數賢者 輩出於陶山門下” ; 趙任道, 『澗松集』 卷2, <東賢16詠>)
292) 李植, 『澤堂別集』 卷5, <金鶴峯海槎錄跋>
293) 『厚光世帖』 卷2, 文靖公事蹟 <東西黨禍錄>.
294) 『선조실록』 권8, 선조 7년 12월 22일(임진).
295) 『광해군일기』 권67, 광해군 5년 6월 15일(임인).
296) 『선조수정실록』 권12, 선조 11년 10월 1일(무인)
297) 이이, 『석담일기』(下), <萬曆六年戊寅>
298)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 동방미디어, 2000.
299) 『선조실록』 권13, 선조 12년 6월 28일(임인).
300) 金誠一, 『鶴峯集』 卷3, <申救宋應浻箚己卯>.
301) 『선조수정실록』권 22, 선조 21년 8월 1일(임오).
302) 朴世采, 『南溪集』 卷29, <再答尹子仁(辛酉十二月七日)> “退溪南冥兩門 多係黨論以後人物 極難稱停 蓋溪門則必以西厓鶴峯爲首 冥門則以守愚東岡爲首 乃彼一邊之定論 然此則不可從矣…金崔又有與二先生大段背馳之嫌 故降而間置他人之次 自謂粗得斟量也”
303) 박세채는 각 인물의 學問․隱逸․節義 그리고 사업에 기준하여 『東儒師友錄』의 입록 순서를 정했다. 「退溪先生門人篇」의 경우 ‘嶺南士論에 따른다면 西厓는 마땅히 月川의 앞 뒤에 위치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위의 기준을 적용하여 鄭逑․奇大升․趙穆․南致利․黃俊良․權好文․李德弘․柳成龍․金誠一 순으로 수록했다. 南致利는 학문에 전념했고, 황준량은 학문으로서 이황의 추장을 받았고, 권호문은 은일의 선비이고, 이덕홍은 이황의 언행록 가운데 가장 이른 『溪山記善錄』을 저술했다는 것이 류성룡․김성일보다 이들을 앞에 입록한 사유로 제시했다. 결국 박세채는 류성룡․김성일을 학자보다는 관료로 인식했고, 학문보다는 사업으로서 이들을 평가했던 것이다. 특히, 류성룡에 대해서는 ‘학문에 긴요함이 없고, 사업을 위주로 했다’고 欠評했다. (朴世采, 『南溪集』 卷12, <答李君輔問 東儒師友錄(壬申七月)> “此書等第之例 以學問隱逸節義爲次 事業最在其下 以嶺南士論言之 西厓當在月川上下 而不然者 賁趾乃專於學者也 錦溪以學被先生推奬者也 松溪隱逸之徒也 艮齋平叔平生問學最緊 且有記善錄心經質疑也 先鶴峯以有語錄也 後西厓以於學無甚緊要 而事業爲主也 然以平日文章見 識言之 則雖寒岡月川亦多不及處 宜乎有左右之論矣 今不獲已以西厓鶴峯次於艮齋之下”
304) 남명문하인 「曺文貞門人篇」의 경우 최영경은 淸介한 高士의 풍모를 지녔음에도 이이․성혼을 공척했다는 이유로 ‘평범한 선비(平士)’로 격하되었고, 金宇顒도 李珥․成渾에 득죄했다는 이유로 수록 순위가 조정되었다.(朴世采, 『南溪集』 卷12, <答李君輔問 東儒師友錄(壬申七月)> “守愚供辭以栗谷爲主 殊所未解 蓋平日每謂與牛溪矛盾爲敵 而今忽如此故也 大抵守愚孝友淸介 豈不爲高世之士哉 但晩年學荒意偏 至與牛栗爲讎怨 此魯西所以有衮貞潑慶之說也 愚則常以此爲過重 故量置中間 欲以平士待之…東岡初謂並得罪於牛栗 故雖知其學問見識非西厓鶴峯之比 而不免退置此間矣”) 참고하자면, 朴世采의 『東儒師友錄』「曺文貞門人篇」(45인)은 吳健을 首題로 하여 河沆․柳宗智․盧欽․趙宗道․金宇顒․崔永慶․郭율․李濟臣 등이 首門그룹에 편차되었다.
305) 金誠一, 『鶴峯集』 卷3, <請停築城仍陳時弊箚>
306) 정만조, 「김성일, 과연 당심(黨心) 때문에 나라 일을 그르쳤는가?」, 당인열전(黨人列傳) 에서 재인용.
307) 김성일이 나라를 그르친 장본인이라고 할 때 그의 사망 직후부터 전개된 국가․사회적 추양사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추증론의 경우 1594년 김응남․김우옹․이항복의 주청, 1595년에는 김우옹․정구의 건의에 힙입어 선조치세인 1605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후 1609년(광해군1)에는 광해군이 예관을 보내 사제하는 조처가 있었고, 1618년에는 그의 주향처인 임천서원이 공식 출범했다. 특히, 1620년에는 이황의 제향처인 여강서원에 류성룡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이 서원은 숙종 연간에 호계서원으로 사액되어 국가의 공적 관리 대상이 되었다. 한편 1649년(인조27)에는 『鶴峯集』(初刊本)이 간행되었고, 1664년(현종5)에는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추양론에 보다 탄력을 받았다. 그리하여 1676년(숙종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679년에는 文忠의 시호까지 내리게 되는데, 이런 추세는 다른 학자․관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호의 경우 숙종조 남인정권기에 실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김성일을 ‘오국의 장본인’으로 전제할 때 ‘文忠’이란 시호가 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08) 『鶴峯年譜』 <辛卯>(1591) “還朝復命 有書啓” ; 柳元之, 『拙齋集』 卷5 <與金監司別紙(又別紙)> “嘗觀先生復命時書啓”에 따르면, 복명시에 작성한 서계가 있었으나 『鶴峯集』이나 실록에서는 그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309) 『宣祖修正實錄』 卷25, 宣祖 24年 3月 1日(丁酉) “回泊釜山 允吉馳啓情形以爲 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 上問秀吉何狀 允吉言 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310) 이하 본 절의 서술은 국민대 정만조 교수의 앞의 글 및 해당 주제에 대한 질의 과정에서 제시된 가르침에 바탕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추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밀한 각주 처리를 통해 인용 현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자 한다)
311)『宣祖修正實錄』 卷25, 宣祖 24年 3月 1日(丁酉) “蓋誠一憤允吉等到彼恇怯失體 故言言相左如此 時 趙憲力攻和議策倭必來 故凡主允吉之言者 皆以爲西人失勢 搖亂人心 區別麾斥 以此廷中不敢言”
312) 류성룡의 경우 김성일의 복명 이후에도 왜군의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보고 대비책을 강구한 바 있다. (柳成龍, 『西厓集』 卷16, <書壬辰事始末示兒輩> “嘗與首台在政府 同坐議倭變之有無 余曰 吾則以爲倭兵必來 今國家昇平日久 邊患之作 不可不慮 且以一事言之 東海産魚 近日移於西海 以至漢江亦有之 此亦恐海氣遷移而然也”
313) 『宣祖修正實錄』 卷25, 宣祖 24年 3月 1日(丁酉) “倭人鄙黃許 而服誠一 久益稱之 惟平義智大憾 待之嚴截 故誠一不得聞事情 其後義智謂我使臣曰 金誠一徒尙節義 以致生事云”
314) 『宣祖修正實錄』 卷25, 宣祖 24年 3月 1日(丁酉) “柳成龍謂誠一曰 君言故與黃異 萬一有兵禍 將奈何 誠一曰 吾亦豈能必倭不來 但恐中外驚惑 故解之耳”
315) 『선조수정실록』 권25, 선조 24년 11월 1일(계해).
316)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3월 1일(신유).
317) 『선조수정실록』 권25, 선조 24년 12월 1일(계사).
318) 閔仁伯, 『苔泉集』 卷2, <龍蛇日錄(任忠州時)> “壬辰四月 十五日夕 金誠一以左道兵使入忠州 留於客館 其日子夜 烽軍來告 倭船幾隻 指向釜山浦云 卽告于兵使 兵使曰 如此來朝之倭 朝廷過慮云 俄而釜山陷城之報至 東萊陷城之報又至 兵使舍駕轎 單騎馳赴”
319) 金誠一, 『鶴峯集』 附錄 卷2, <行狀>(鄭逑撰) “上問入侍宰臣曰 金誠一狀啓中有一死報國之語 誠一果能一死報國乎 柳成龍 崔滉對曰 誠一所見 雖或有蔽 其平生方寸 只是愛君憂國 其一死報國 臣等亦知之矣 王世子侍坐 亦極諫 上乃霽怒 公行到稷山 聞宣傳官疾驅而來 從者皆號哭遑遑 公顔色不變 從容指畫後事 宣傳官至 則乃齎宥命來也 且授公招諭使”
320) 『선조실록』 권31, 선조 25년 10월 27일(계축).
321)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일(경인).
322)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6월 1일(기축).
323)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8월 1일(무자).
324) 『선조실록』조 권26, 선조 25년 5월 3일(임술).
325) 『선조실록』 권3, 선조 25년 10월 27일(계축).
326) 『선조실록』 권60, 선조 28년 2월 6일(기유).
327) 『선조실록』 권64, 선조 28년 6월 10일(신해).
328) 『선조실록』 권134, 선조 34년 2월 16일(을유).
329) 『선조실록』 권165, 선조 36년 8월 19일9(임인).
330)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3일(임술).
331) 『선조실록』 권60, 선조 28년 2월 6일(기유).
332) 박희병, 『한국의 생태사상』, 돌베개, 1999, 185-186쪽.
333) 申欽, 『象村稿』 卷34, <備倭說>.
334) 『鶴峯年譜』 <壬辰>(1592) “金尙書時讓 荷潭破寂錄曰 東陽尉申翊聖 辛未年間 印布其父象村集 其東征錄 有壬辰 倭賊從竹嶺上來之語 余謂東陽曰 壬辰倭賊 從鳥嶺,秋風嶺上來 竹嶺一路 賊蹤不到 而錄云然者 何也 東陽色變而去 丙子年間 又刊象村集以行。東征錄削賊從竹嶺之語 更添賊兵初至 右巡察使金某以爲 賊艘不滿四百 一艘不過載數十人 摠之不滿萬人 某之論 聞于朝廷朝廷 亦以爲然等語 壬辰夏 宣廟以某倡賊不來之說 特除嶺南右兵使 未及到鎭 而賊已至 宣廟命拿鞫 及西幸 更以某爲招諭使 某到稷山聞命 更就嶺南 秋間 監司金睟罪罷 以某爲右監司 以此推之 象村集中雜錄 非其所錄者多矣云云 夫以一己之好惡 撰出無根之語 塗改先集 隨意增減者 非但白沙集晉州本己丑錄爲然也 如安邦俊鬼蜮輩 又何足言哉 尙幸金公覰破其贋 有此記錄 獨恨有闕者 賊艘多少之說 元無出處 而不幷爲之辨破也 象村集東征錄 今作諸將士難初陷敗志”
335) 申欽, 『象村稿』 卷30, <申汝櫓傳> “余於寅卯年間 以左史得侍前席 與聞朝廷講倭賊事首尾甚悉 蓋玄蘇之來也 朝廷不深知其故 至許遣使 使廻 副价金誠一謂賊必不動兵 廟堂恃以無憂 如以賊爲狡獪難測者 則至曰 待外夷當以誠信 何乃爾耶 於是人莫敢言 唯宣祖大王睿智有臨 灼見厥狀 據義斥絶 聞于天朝 曁壬辰 寇勢不可遏矣 非宣祖大王事大之誠有以格天 而致六師張皇之擧 則國將何賴焉”
336) 申欽, 『象村稿』 卷30, <申汝櫓傳> “使廻 副价金誠一謂賊必不動兵 廟堂恃以無憂…非宣祖大王事大之誠有以格天 而致六師張皇之擧 則國將何賴焉 誤事者之肉其可食乎”
337) 安邦俊, 『隱峯全書』 卷6, <壬辰記事> ; 卷35, <抗義新編> ‘第三封事(己丑)’ ; 卷36, <抗義新編> ‘嶺湖備倭之策’.
338) 鄭逑, 『寒岡集』 續集 卷6, <鶴峯行狀> “留半月 而書契始至 辭甚悖慢 至以殿下爲閣下 以所送禮幣 爲方物領納 又有一超直入大明國 貴國先驅入朝等語 公見之大駭 據義却之 作書與玄蘇曰 若不改此等語 使臣有死而已 義不敢還 玄蘇辭屈 許改閣下方物領納六字”
339) 金誠一, 『鶴峯年譜』 <壬辰>(1592).
340) 鄭逑, 『寒岡集』 卷12, <祭金鶴峯誠一墓文> “嗚呼惟公 資稟粹美 剛毅子良 德襲春蘭 標揭秋霜 孝成于家 行著于鄕 早就有道 得聞大方 立朝事君 謇諤堂堂 奉使異國 大節彌彰 死生在前 神色陽陽”
341) 鄭逑, 『寒岡集』 卷13, <金鶴峯墓表> “其奉使日本 則正直不撓 而王靈遠暢 受命招諭 則至誠感動 而控制一方”
342) 尹宣擧, 『魯西遺稿』 別集 日記 <壬辰八月十六日> “寒岡…且爲金誠一作銘 許以奉使異國 大節冞彰 曾受一超大明之書以來者 其可謂之大節乎”
343) 尹宣擧, 『魯西遺稿』 卷7, <上仲兄> “且其祭金鶴峯文 爲金誠一也 至曰奉使異國 大節彌彰云云 誠一使倭 受其悖書 一超大明之書也 而還奏朝廷 則倡言賊無來意 蓋承山海旨也 辱命誤事之罪 有甚於羅德憲輩 宣廟之只一拿問 亦末減之科也 懲毖錄中 曲爲掩覆 已極謬矣 而反稱美之如此 據此一論 可斷其見之訛矣 大槩世道交喪 士論分披 好議論者 率多混白黑 執子莫以爲之公 故自癸亥至于今 迄未成一模樣 而嶺南中巨擘如鄭張 筆而牖後 若是顯然 後生之詿誤頗僻 烏能免乎 兩賢門下諸賢 不能講明師道 以定是非之責 將有不可勝言者矣 若無一趙重峯 則兩賢之道 幾乎熄矣 豈不大可懼哉 此可與知者道 不可與不知者道 孝思外勿掛他眼 幸甚”
344) 趙翼․朴東亮 또한 신흠․안방준의 인식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김성일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윤근수의 외손자였던 조익은 황진의 행장에서 ‘유독 부사인 김성일이 탑전에서 왜적이 침범해 올 리가 절대로 없다고 호언장담하자, 묘당이 그 말을 전적으로 믿고는 전쟁에 대한 방비를 모두 중단하고 말았다’고 기술했고(趙翼, 『浦渚集』 卷35, <忠淸道兵馬節度使黃公行狀>), 朴東亮의 『寄齋史草』에도 임란에 대한 ‘김성일책임론’이 곳곳에 기술되어 있다.(朴東亮, 『寄齋史草』(上) <辛卯年5月4日> ; 『寄齋史草』(下) <壬辰年6月21日>). 김상헌은 조헌의 신도비명에서 통신사 파견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한편 梁應鼎의 사우 ‘貞忠祠碑’에서는 김성일의 실보 및 거기에 따른 참수론을 언급하였는데, 신흠․안방준․박동량․조익 등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견해라 하겠다(金尙憲, 『淸陰集』 卷28, <重峯神道碑銘> ; 卷29, <南原貞忠祠碑>)
345) 韓元震, 『南塘集』 卷31, <書西涯柳相懲毖錄後> “金誠一之恠鬼 栗谷之所斥 則其爲人可知也 奉使誤國 當伏前使十輩之罪 而曲爲分解 貸罪授任 又無功績可記 而錄其一言之善 褒之以眞忠者 亦何哉 此余之所竊疑而未得其說也 大抵柳相之平生 顧余後生 未得其詳 今於是錄 備見之矣 王安石自作日記 以記其事 朱子以爲自然不易之公論 余於是錄亦云 壬戌仲夏日 暘谷老夫書”
346) 정조조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은 柳成龍․李元翼․李恒福․李德馨을 中興賢相으로 꼽은 바 있다.(蔡濟恭, 『樊巖集』 卷44, <大匡輔國宗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贈原城府院君忠靖公斗巖金公神道碑銘> “嗚呼 世之數中興賢相 必曰西厓完平鰲城漢陰”)
347) 黃景源, 『江漢集』 卷26, <革主事丁應泰職爲民勑> “先是 秀吉弑其君 遣平義智請和親 禮曹判書柳成龍 建議通使 於是 乃命黃允吉充使者 而金誠一爲之副 及使者歸自日本 秀吉謀反 而誠一啓言秀吉 必不反 王以爲然 遂不修中外武備…是時 誠一爲節度使 王命使者 卽軍中斬誠一頭 成龍論救 得不斬 乃反擢授觀察使 國人皆憤…金誠一欺君罔上 將斬之 成龍建言收還之 不惟不罪 至超授爲觀察使 政令如此 何以服四方人心 而反以人心怨叛 歸罪上躬 後魏學曾箚本出 而成龍難容覆載矣”
348) 李瀷, 『星湖集』 卷25, <答安百順問目> “昔金鶴峯之使倭也 不拜庭下 倭人不敢強 金公卒於癸巳四月 未及講和 若使此公在者 恐有以處之也”
349) 李瀷, 『星湖僿說』 卷25, 經史門 <平秀吉>.
350) 각주 70) 참조
351) 이긍익, 『연려실기술』 권18, <동서남북론(東西南北論)의 분열>.
352) 『선조실록』 권60, 선조 28년 2월 6일(기유)
353) 金誠一, 『鶴峯集』 卷13, <招諭一道士民文壬辰>.
354) 『선조실록』 권31, 선조 25년 10월 27일(계축) ; 권33, 선조 25년 12월 5일(신묘) ; 권34, 선조 26년 1월 22일(정축) ; 권60, 선조 28년 2월 6일(기유) ; 권72, 선조 29년 2월 16일 ;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일(경인) ; 권26, 선조 25년 6월 1일(기축) ; 권26, 선조 25년 8월 1일(무자) ; 권26, 선조 25년 10월 1일(정해) ; 권27, 선조 26년 4월 1일(을유).
355) 鄭慶雲, 『孤臺日錄』 <壬辰 5月 10日>.
356) 鄭慶雲, 『孤臺日錄』 <壬辰 5月 5日>.
357) 吳希文, 『瑣眉錄』 <壬辰 9月 2日>.
358) 의병활동의 지원 및 조율상에 대해서는 허선도, 「鶴峯先生과 壬辰義兵活動』, 학봉김선생기념사업회, 1993, 참조.
359) 鄭慶雲, 『孤臺日錄』 <壬辰 6月 22日>.
360) 鄭慶雲, 『孤臺日錄』 <壬辰 8月 9日>
361) 金誠一, 『鶴峯集』 附錄 卷4, <慶尙右道儒生願留疏進士鄭惟明等>
박현순 (서울대 규장각)-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사림계의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 토론문
박현순(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본 발표는 庚寅通信使行의 副使로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한 학봉 김성일에 대한 사림계의 인식과 평가를 다루고 있다. 김성일은 퇴계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이자 忠義를 실천한 관료로 존숭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한 중대한 오판을 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발표자는 김성일에 대한 평가 가운데 왜곡이나 와전된 부분이 있다고 파악하고 사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조명한다는 입장에서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검토하였다. 아래에서는 논의를 위하여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1. 본 발표에서는 김성일에 대한 평가를 학자, 관료, 통신사 복명[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 임란 당시의 활동[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 등의 문제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리고 각기 다른 평가가 나타나는 양상을 당파 간의 인식 차이로 파악하고 있다. 이식의 ‘강학부재론’, 박세채의 ‘퇴문고제설’ 부정, 서인계의 ‘실보오국론(失報誤國論)’과 영남 남인계의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중 서인계의 부정적 인식으로 제시된 사례들이 서인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본문에 제시된 인용문에서도 李植이 김성일의 충절과 학문을 흠모하였다고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보다 일반적인 평가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당파간의 인식 차이에 주안점을 두면서 서인계의 부정적인 인식이 지나치게 부각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당파를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평가는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2. 발표자는 김성일에 대한 책임론[‘실보오국론’]이 선조 및 서인계가 김성일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발표자도 일부 왜곡된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나 서인들도 김성일의 오판을 당론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오판에 대해 비판하고 비난한 것이 보다 본질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은 남인계인 이익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서인계의 문제로만 파악할 수 있을까? 오히려 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도출될 수 있는 일반적인 비판은 아니었을까? 아울러 서인들도 책임론을 전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서인들이 김성일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오판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으로 선조의 강고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으로 책임론을 제기하지 않은 배경과 논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3. 발표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김성일의 사후에는 追增, 贈諡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부조묘의 특별한 은전이 내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김성일의 오판 문제가 정치적으로 사면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유성룡, 정탁, 정구 등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이 인조대에 증시를 받은 것에 비하면 김성일의 증시는 늦은 감이 있다. 이 과정에서 책임론이 영향을 미쳤는지 또 김성일을 증시하는 근거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필자의 의견을 청한다.
4. 책임론의 제기 여부와 별개로 영남 남인이나 제자, 후손의 입장에서는 김성일의 오판이 치명적인 오점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김성일의 주변에서는 오판의 문제를 어떻게 합리화하고 있었는지 필자의 설명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