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금말의 전원추억
홍순근
황토벽에 용마루 축 늘어진 초가지붕은 세찬 풍우 막아주고,
앞 마당가 돌감나무 여름 날 그늘 지어주며, 뒤뜰에 돌담우물엔 도룡뇽 알을 낳고.
뾰쪽간산 시야에 장평들 펼쳐진 곳! 토금말!
추운 겨울날이면 빙판 위 썰매지치고 팽이 돌리며 어쩌다 물에 빠져 바짓가랑이 다 젖으면
어머니 야단 두려워 모닥불에 말리던 어린 시절이 아스란히 뇌리를 스쳐간다.
길고 긴 겨울 밤 불어대는 차디찬 북풍은 모른 갱이 푸른 잎 홀로 지키는 소나무 잎세 흔들며, 처마 끝 한 바퀴 돌아 문풍지 울질 때, 장작개비 군불은 아직도 따뜻한데, 때묻은 이불자락 끌어올리며, 단꿈을 청한다.
눈오는 날이면 또 어떤가?
잿빛하늘에서 뿌려지는 하얀 눈의 들녘을 바라볼 때면 순백색의 하얀 마음이 가득했었지!
먹이 찾아 날아든 참새 잡고자 마당 끝에 산테미 엎어놓고, 바라보는 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만 심술 궂은 백구놈 훼방은 왜 그리 미웠던지!
눈그쳐 휘영청 밝은 달빛에 어두움은 고즈넉이 물러가고 반짝이는 은빛의 눈덮인 산야엔 동화속의 요정이 유희 나올 법도 하던 때를 기억나게 한다.
사랑방 가마니틀, 몇 날을 울려대던 아버지, 어머니, 2박자 바듸 소리, 바늘대 소리, 볏닢 걸어주던 우리들, 그렇게 겨울은 지나가는데.
긴동면에서 깬 개구리 울음소리가 봄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던가!
하늬 바람타고 온 제비들의 봄소식에 도랑가 복사꽃 만발하고, 때 이른 유혹이라 벌 나비 오지 않지만 화사한 봄 향기는 마음을 불러 모은다. 뒷산의 분홍빛 진달래는 소월을 부르듯 미소 지으며,
냇가의 버들강아지 아직은 추운 듯 눈만 떠 하늘 바라볼 때, 높이 떠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
겨우내 차가운 얼음장 속에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던 시냇물 소리, 졸졸졸. 아이들의 동요 소리던가?
아지랑이 속으로 새싹 돋으면 농부들의 바쁜 손놀림, 이랴! 어려려! 소모는 소리.
논 고르며 밭 갈아 곡식 심어 마음 속 깊이 풍년을 기원한다.
무우장다리 들꽃에 나비 앉으며 어머니의 산나물 된장국과 누나의 논 고동 요리가 미각을 잃어갈 때쯤이면, 초록이 푸르름으로 바뀌며 여름을 맞는다.
무더위와 싱그러움, 녹음방초 풀 향기 그윽한 여름날은 어떤가!
흔히들 여름은 남만의 계절이라고 일러대지만 만물이 성장하는 여름은 나태와 근면이 상반된 계절인 것을.
뙤약볕 속에 한나절의 일손 멈추고, 오이냉국 배추쌈에 배불러 오수를 즐기고 나면, 작렬하는 태양은 아직도 중천!
어쩌다 한줄기 소나기에 등어리 흐른 땀 식혀주며 저 멀리 무지개 언덕 넘어엔 동심들의 꿈이 있었지!
뉘엿뉘엿 해 기울어 방수골 골짜기에 어두움이 깃들 때면 소 풀 뜯기고 돌아오는 아이들, 날 저물어 허기져 집을 찾는 어른들의 삼베 적삼이 더위에 지쳐 허늘 거린다.
마당가 모깃불에 눈시그리며 온 가족 둘러않은 저녁상 물릴라치면, 아버지 부채살에 더위날리고, 멍석 위에 팔 베게치고 바라본 하늘, 은하수 가로질러 별도 총총한데, 그토록 울어대던 매미들은 잠을 청했나?
이명에 들려오는 벌레들의 울음소리, 논두렁의 뜸부기 울음소리는 한여름 밤의 악보 없는 합주곡이었더라.
섭섭 촘촘 곡식 열매 달려가고 조석의 시원한 바람이 가을을 예고한다.
그토록 뜨겁던 태양의 위용은 저만치 물러서면서 한낮의 따사로움만이 여름의 끝자락을 남긴 채 여름의 끝이 오고.
텃밭의 고추 열매 빨갛게 익어갈 새 산등성이 넘어 들녘을 스치는 가을바람에 황금물결 넘실댄다.
파란하늘에 조각구름, 그 아래 춤추는 고추잠자리, 꿀 먹은 허수아비야 짹짹대는 참새 때를 잘도 쫓는다.
천고마비의 고사어에 빗댄 가을이 주는 그 풍성함은 일 년의 수고함에 자연이 주는 보답이었더라!
오곡 거둬 소달구지 등지게 한 아름 가득가득, 앞마당에 쌓여 가는 노적가리.
탈곡기 도리깨에 구슬땀 흘리며 뜨락의 곡식더미에 가슴 가득 풍성한 수확의 희열을 느꼈었지.
한밤중에 내리는 서릿발과 써늘한 바람은 시선모아 오색빛깔 자랑하던 활엽수들의 채색 옷도. 그 여름에 무성했던 시냇가 방초들의 짙푸름도, 퇴색되어 갈색의 메마름으로 변해 갈세.
풍요와 감사의 가을도 잠시, 낫스쳐간 곡식들의 그루터기만이 쓸쓸이 가을의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두레의 정은 옥수수 볏짚 썰어 소 양식 만들고 아랫집 옆집 이영 엮어 지붕 덮으면, 한해의 수고함은 끝을 맺는다.
어스름한 초생달빛 속에 기러기 나래 치며, 그 울음소리만이 가을의 아듀를 고한 채 다시 또 겨울을 맞는다.
첫댓글 토금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눈에 선하게 잘 쓰셨어요. 너무 멋지세요. 진작에 글 쓰는 길을 택하시지 그러셨어요...
시골에서 자란사람들의 아득한 그리움이겠지요? 옛 토금말 살던때가 생각나네요~~~~~~작은아버지! 글 잘쓰시네요.. 지금이라도 한번 글쓰기를 시작을 해보심이................
<☆,·´″″°³ * 우리들의 이야기>에 담아야 할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