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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원 - 남도적 감성의 원형을 찾아서 2005 / 원동석(미술평론)
2005, 제 3회 개인전 팜플릿
흔히 '남도적 감성' 이라는 말을 누구나 즐겨 수도 없이 써먹으면서도 누구도 그 실체를 정확히 규명해본 사람이 아직 없다. 있으면서도 정확히 표현해 낼 길이 없는 남도적 감성의 실체에 대하여 솔직히 나 역시 미학강의를 해온 교수로서 수십 년간 헤매고 다니었다.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말은 전라도 방언의 특성에서 온 걸뚝한 판소리나, 남도 산세의 섬세한 해안과 다도해, 갯벌의 풍요로움이 안겨주는 미각, 역사적으로 백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소외지역으로서 유배문화의 특성 등등 흔히들 자연환경, 문화환경의 현상을 나열하는 수준을 되풀이 하는데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우리의 원시 고대예술의 원형이 무엇인가 오래고 긴 탐색의 시간 속에서 번개처럼 홀연히 오는 것이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 오랜 세월을 헤맨 미학의 화두에서 내 머리를 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진리의 명제이었다. 즉 내가 자연이며 자연이 내 자신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 아득한 태고적 신화의 믿음, 상상력을 드러내는 것이다는 사실이며 남도 작가는 이같은 상상력의 원형 - 감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만 서울이라는 큰 도시 환경에서 서양적 근대교육으로 학습받고 도시적 예술의 첨단 유행을 좇는 일부 작가들이 보기에는 남도 땅 구석진 곳에서 촌티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볼지 모른다.
그러나 김호원의 촌티나는 그림 속에 원초적 감성의 원형이 숨어있다. 오랜 세월을 자연과 함께 숨 쉬고 살아온 이들의 감성, 그 상상력이 내밀하고 애잔하게 남도가락같은 선율로 그려지고 있다.
해묵은 당산목의 주름진 표피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의 풍상이 새겨져 있으며 그 가지의 뻗힘 속에 전봉준의 숨은 얼굴이 있고 나무들은 잃어버린 영산강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돌출한 월출산은 작가 자신의 공간을 숨가쁘게 에워싸며 사는 의미를 묻고 있다. 아예 자연은 인간의 모습, 얼굴은 닮은 것이다고 노골적 상징그림(천,지,수,인)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물水을 첨가한 것은 작가의 출신 고향은 완도 보길도이기 때문에 바다의 이미지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기밀한 남도적 감성의 원천이다.
그의 풍경화는 단순히 보이는 시선의 재현이 아니라 남도적 서정시와 같은 울림, 이야기가 담겼다. ...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도는 상여의 '마지막 길'은 누구나 슬픈 추억의 토막이지만, 이승과 저승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나는 아늑한 돌아감(회귀)의 길임을 바다는 말하고 있으며 그가 즐겨 잡는 계절의 공간은 추수한 뒤끝의 논두렁,밭두렁,길옆, 잡풀의 잔해와 억새가 무성한, 한마디로 썰렁한 늦가을 이나 겨울 풍경이다. 그리고 주된 색조는 겨울해의 잔광이 빛나는 노란색, 일몰한 노을빛으로 일관한다. 대상의 자연물은 갈색이거나 침침한 암색으로 대비적 효과를 높이면서 그 안의 인간은 귀가하는 농부, 해녀, 노동자들 모습이다. 거기에는 쓸쓸함과 외로움의 분위기가 배어있다. 일찍이 불우한 작가 환경이 터득해버린 고아의식이 숨어 있다.
그의 그림은 한마디로 고적함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고 사색으로 잠겨드는 것을 종용하고 있으며 자연과의 대화, 그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영산강 겨울 들판에 혼자 남은 계집애는 따라나온 강아지와 함께 앉아서 억새를 움직이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다. 텅 빈 자연의 적막감에서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게 그의 화두이다.
김호원
전남 완도생
6인의 방향전, 오늘의 작업전, 일터의 모습전, 아, 영산강전, 광주미술제, 목포뱃길 600년 그 역사의 숨결따라 전, 목포개항 100주년 기념전, 황해미술제, 바다미술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전...
epilogue
전남 해남군 화원면에는 미술촌 '화원'(구 화원초 동분교)이 있다. 한 오년 되어가나? 목포지역을 생활근거지로 하는 몇 몇 화가들이 칸칸을 자리잡고 아틀리에를 꾸몄다. 이곳의 일은 또 일찍이 목포대로 내려온 철학자이자 우리의 원로 미술평론가인 원동 석선생님이 바닷가에다 집을 짓고 아내와 고양이와 단 셋이서 살게된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원선생님은 정년퇴임에 즈음하여 목포문화예술회관에서 그분의 첫 저서의 제목을 빈 '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기념미술전을 열었는데 그날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대낮부터 취한 서울의 단짝 손장섭화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연단에 섰지만 도통 식순과 하례의 아 무관심으로 시종 두런거린 통에 각양각처의 손님들의 웃음을 대신하여 식을 마쳤다. 내가 정태석선생의 제안을 받아 비올라와 올겐 등으로 무장한 축하음악이 없었으면 '식혜한그릇행사'가 될 뻔했다. 사람들은 제각각 시끌시끌하고 무대의 '중앙' 이라는 주인공 늙다리들은 뒤돌아 어깨동무로 두런거리고 바로 그 틈에 흘러나오는 비올라(정샘의 설명에 의하면 가장 사람의 음색과 닮았다는)의 선율은 좌중의 침묵을 압박하며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고 마침내 연단의 두 사람도 돌아서게 하였으니... 그나마 식은 식이 되었던 것. 김호원은 그 행사를 주도했다. 그림처럼 착하고 치밀하며 깡말랐다. 오랜 민족진영의 작가이면서 조용히 중앙에 서서는 뒤돌아 두런두런거리는 것이 원선생의 '행사'를 닮았다. 그와 원선생의 스타일은 이쪽 저쪽의 월출산 봉우리 같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바라보고 아끼기로는 댕그런 월출산의 달이다. 나는 그날 귀기스런 월출산의 달빛 그림을 그려 출품하였다. "거 귀기스럽고 좋은데 말이야, 근데 얼마 받어?" 팔아주실 것처럼 원선생께서 물어왔다. 내 그날 선물로 한 점 남겼어야했는데 뒈지게 후회스럽다.(난 그 '물건'으로 친구를 시켜 내 이층 작업실의 조립판넬을 샀다.) 어쩐지 김호원에게도 그만한 분량의 미안함이 내게 남아있다. 2008. 4. 26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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