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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러 나라의 생활풍속
글: lmgeun0414
<영국>
영국의 정식명칭은 Great Britain 및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United Kingdom이다. Great Britain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세 나라가 포함되며, 여기에 북아일랜드를 합쳐 United Kingdom이라고 불린다. 인구는 잉글랜드가 가장 많은 4천6백50만 명, 다음으로는 스코틀랜드가 5백20만 명, 웨일즈가 2백80만 명 그리고 북아일랜드가 150만 명으로 되어있고, 전체 인구는 약 5천6백만 명이다. 그들 대부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지만, 잉글랜드 이외는 각 나라 독자의 언어가 존재하며, 현재도 영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는 게이릭이라는 언어가 있다.
그러나 이 언어는 학교 교육에서 자취를 감춘 곳도 있고, 현재는 그렇게 많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웨일즈에서는 웨릇슈라는 언어가 현재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와 함께 국어로 교육되고 있다. 웨일즈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0만 명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언어의 슈마이, 슈마이는 안녕하세요를 뜻한다.
영어
영국인이 자랑하는 Queens English라는 것은 엘리자베드 여왕이 사용하는 우아하고 올바른 영어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표준어는 아니다. BBC English라고 불리는 영어, 즉 BBC아나운서가 뉴스 때 사용하는 액센트가 약한 영어가 일반적인 표준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그와 같은 영어를 접할 기회는 흔치 않다. 각 지방에는 제각기 다른 액센트가 있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영국의 상류사회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Oxford English인데, 이 것 역시 독특한 액센트를 갖고 있다. 이 언어를 가정에서 배울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Public School에서 특별훈련을 받아 비로소 익히게 된다. 영국인은 액센트에 따라 그 사람의 출신지에서 계층까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액센트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국 각자의 액센트를 갖고 있는 사람이 모여 사는 런던에서 자신과 같은 액센트의 영어를 이야기하는 비서나 고객 혹은 친구를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식생활
영국 비즈니스맨의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둘러싸고 와인을 맛보며, 느긋하게 풀코스를 즐기는 경우도 있지만, 친구들과 Pub에서 간단히 먹는 때가 많다. 펍에서는 샌드위치나 파이 등 스낵류를 팔고 있는데 그들이 많이 찾는 것은 맥주로 친구들과 1~2시간 정도 서서 이야기하면서 점심을 즐긴다. 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맥주만 마실까? 왜 앉아서 먹지 않고 계속 서서 먹을까? 펍에는 의자도 있고, 몇 개의 빈자리도 있는데, 이런 점심 스타일이 유행처럼 퍼져있어 이 같은 이질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주재원에게는 매우 낯선 문화로 비춰진다.
교통사정
좌측통행이 실시되고 있는 영국에서 국제면허를 가진 주재원 A씨는 부임하자마자 핸들을 잡았고 이국문화의 차이점을 바로 경험하게 되었다. 교통 문화가 매우 달랐다. 좁은 길에서는 특히 차이점이 많았다. 상대편 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접근해 올 경우 이 곳에서는 나는 여기서 기다리니까 먼저 가라라는 의미이다.(이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위로하고 자기부터 전진하면 정면충돌할 우려가 있다. 또한 경적의 사용도 엄격히 규제된다. 야간에도 위급한 경우 이외에는 사용이 금지되며, 점심시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경적을 함부로 울리거나 헤드라이트를 위로 켜면서도 길을 양보하지 않는 드라이버는 공격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영국의 보행자는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매우 공격적이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 불이라도 보행자는 당연한 것처럼 좁은 차 주위를 헤집고 들어간다. 런던에서는 관광객까지도 이 규칙을 따라 신호를 종종 무시한다. 이렇게 때문에 영국에서 운전 시 특히 보행자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즈니스 관습
한국식 인사방문을 싫어하는 수가 많으므로 반드시 사전에 약속을 하고, 방문 목적을 상대방에게 확실히 알려야 한다. 상대편 경영진과의 약속은 본인이 자신의 스케줄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반드시 비서를 경유해야 한다. 이 경우 이쪽 참석자의 직함, 인원수 등에 따라서 상대편 참석자의 명단을 정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쪽에서 사전에 상세하게 연락해 두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수수하고 겸손한 영국인에 대해 신중함, 조심스런 말씨, 세련된 태도가 필요하다. 명함은 악수한 뒤에 주어야 한다. 점심약속은 받기 쉽지만 저녁 약속은 상대방 부인의 양해가 필요하므로 적어도 1개월 전에 신청해야 한다. 영국에서 가정에 초대하거나 초대받는 경우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가정으로 초대받는 경우 영국민들의 문화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동양식 레스토랑이나 주재원의 가정에 초대할 경우 상대가 구두를 벗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전에 배려해야 한다. 상대방의 가정에 초대받아을 경우 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작은 선물(값이 싸도 무방. 정성이 중요)을 준비하면 기뻐한다. 영국인은 라틴계 민족과 달리 비교적 시간을 잘 지킨다. 그러므로 약속시간에 늦는다거나, 갑자기 약속을 취소할 경우 그 뜻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공공의식
영국인들은 걷기를 좋아한다. 산행(Hill Walking). 들이나 목장을 누비듯이 걷는 하이킹 그리고 공원 산책 등을 즐긴다. 시골에 가면 흔히 눈에 띄는 것이 Public Foot Path(공공 산책로)의 표지이다. 그러나 종종 보리밭의 경계선이 오랜 기간 밟혀서 산책용 길이 되고, 이를 당국이 하이킹 코스로 권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이킹 코스는 때때로 보리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의 구획 둘레에 철사가 쳐져 있어도 코스가 이어지는 곳에서는 스타일(stile)이라고 하는 3단 정도의 스텝이 설비되어 있어, 스타일을 넘어서 하이킹을 계속할 수 있다. 푸름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고요함이라는 자연은 만인의 공유재산이기 때문에 보리밭이라는 사유재산 중 일부의 통행권을 인정하면서 그 소유권은 주인에게 주는 형태로 Public Path를 이용하고 있다
<프랑스>
-결혼풍습-
프랑스의 결혼 풍습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즐거운 축제날이다.
그야말로 프랑스인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법적인 인정을 받기위해 구청이나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참가인은 신랑, 신부 그리고 각각 두명씩의 증인이 모두이고, 구청장 앞에서 결혼선서, 반지 교환, 혼인 신고서에 사인만 하면 법으로 인정한 부부예식은 끝이 난다.
카톨릭 신자인 경우에는 다시 성당으로 옮겨가서 신부님과 많은 하객들앞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데, 결혼예복을 입고 절차를 밟는다. 이는 우리네 결혼순서와 같다.
성당에서 나올때는 하객들이 신랑,신부를 향해 다산을 기원하며 쌀을 던져준다.
이제부터 프랑스 결혼식의 하이라이트인 피로연이 벌어진다.
먼저 시간이 없는 손님이나 친분 정도가 낮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간단한 음료 피로연이 1차로 행해진다.
친분이 있는 손님이나 가족, 친지들은 식사를 포함한 디너에 초대된다. 디너는 보통 저녁 9시가 넘어 시작되어 새벽 4~5시까지 계속 되는데, 신랑, 신부와 돌아가며 춤을 추는 등 밤을 새워 이날을 즐긴다. 그래서 보통 두 장소를 미리 예약하여 피로연 음식을 예약해 놓는데, 자국의 요리를 예술이라고 극찬하는 프랑스인들의 자부심만큼이나 피로연의 음식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고 한다.
주 요리는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경우와 풀 코스로 정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고급요리인 바닷가재 요리가 가장 많이 선호되고 어린 양고기나 송아지, 오리 요리도 주 요리로 많이 나온다. 여기에는 주로 화이트 와인이나 레드 와인이 곁들여진다. 후식으로는 반드시 5~10개의 다양한 치즈가 있으며(참고로 프랑스에는 300개가 넘는 다양한 치즈가 있다.), ‘초콜렛 무스’라는 달고 부드러운 후식이나 과일을 이용한 파이, 아이스크림등이 있다. 그 다음으로 커피나 차가 준비된다.
음식은 순서대로 조금씩 나오며, 후식은 자유로운 뷔페 식이 많은데 이는 식후 댄스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결혼식은 주체인 신랑, 신부뿐만아니라 모든 하객들마저도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할수 있는 축제이다. 우리나라의 갈비탕 피로연을 생각하면 조금은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의상-
프랑스의 전통의상은 축제나 종교적인 행사가 있을 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데,예를 들어 알자스 지방 여성의 전통의상은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블라우스에 짙은 색의 소매 없는 조끼를 입고,화려한 꽃무늬가 들어간 앞치마를 두르며,검은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쓰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은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서구 스타일의 옷이 다.가장 전형적인 프랑스인 복장의 하나로 검은 베레모를 들 수 있는데,도시보다는 시 골에서,주로 남성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프랑스 여성들은 세계 패션을 리드해 가는 우아한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유명한 프랑스의 맞춤복집은 1858년에 처음 만 들어졌다.오늘날 프랑스는 코코샤넬(Coco Chanel)이나 이브생로랑(Yves Saint Laurant), 그리고 크리스티앙디오르(Christian Dior)같은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들로 잘 알려져 있 으며,1960년 이래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기성복은 전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음식문화-
프랑스 요리가 최고라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프랑스 요리 의 맛의 섬세함,혀끝을 녹이는 소스의 감칠맛,데코레이션의 아름다움 등은 실로 예술 적이라고 할 수 있다.대서양과 지중해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해산물과 비옥한 토양 에서 재배한 다양한 채소들은 프랑스 요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프랑스인의 아침식사는 버터를 곁들인 빵이나 크로와상에 커피뿐이지만 점심과 저 녁은 포도주를 곁들인 다양한 요리를 즐긴다.점심식사의 경우 애피타이저와 고기나 생 선 또는 채소를 곁들인 주요리,샐러드,그리고 과일 또는 페이스트리 등 서너 가지 코스 로 된 음식을 먹는다.저녁식사 역시 수프와 샐러드 ·치즈
주요리 등으로 갖춰 먹는 다.프랑스산 와인은 유명하며,와인은 프랑스인의 생활과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 지방의 유명한 요리로 몇 가지를 들어보면,알자스 지방의 슈크루트(choucroute)는 돼 지고기와 소시지에 백포도주와 양배추를 곁들인 요리이며,봬프 부르귀뇽(boeuf bourguignon)은 중부 프랑스의 유명한 요리로 적포도주를 곁들인 쇠고기 요리이다.
-전통축제-
종교적이거나 역사적인 기념일,그리고 국경일이 프랑스의 공휴일을 이룬다.프랑스 에서는 새해가 시작되는 밤(1월 1일)에 가족끼리 모여 음식을 나누고,자정이 되면 서로 키스를 하며 새로운 한 해의 행운을 비는 풍습이 있다.그밖에도 다양한 휴일이 있는데, 5월 1일은 노동절로 근로자들의 퍼레이드가 있다.5월 8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념하는 날이며,프랑스의 국경일이기도 하다.7월 14일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기념 일로 다양한 퍼레이드와 불꽃놀이가 있으며,길거리에서는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11 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이며,12월 25일은 성탄절이다.
-문화유산-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답게 미술 ·음악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명작들을 찾아 볼 수 있다.19세기 프랑스 미술은 여러 가지 명화들을 많이 남겼는데,특히 인상파 화가 인 르누아르(A.Renoir),모네(C.Monet),마네(E.Manet)의 작품들이 유명하다.유명한 조각 가 로댕(A.Rodin)의 작품도 훌륭한 문화유산의 하나이다.20세기에 들어서는 후기 인상 파 화가인 세잔(P.C e zanne),고갱(P.Gaugin),마티스(H.Matisse)등의 작품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프랑스의 음악가로는 베를리오즈(H.Berlioz),드뷔시(C.Debussy)등이 유명하다.프랑스의 문학은 19세기 위고(V.Hugo)와 발자크(H.Balzac),졸라(E.Zola)의 시 대를 거쳐 20세기 프루스트(M.Proust)에 이르기까지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프랑스의 오랜 역사가 남긴 유적들 중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는 베르 사유 궁전(Palace and Park of Versailles:문화,1979년),몽생미셸만(Mont-Saint-Michel and its Bay:문화,1979년),샤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문화,1979년),퐁텡블로 궁 전(Palace and Park of Fontainebleau:문화,1981년),오랑주 지방의 로마시대 극장과 개선 문(Roman and Romanesque Monuments of Orange:문화,1981년),파리시의 센강변(Banks of the Seine in Paris:문화,1991년),랭스의 노트르담 성당과 생레미 사원 및 토우 궁전 (Cathedral of Notre-Dame,former Abbey of Saint -Remi and Palace of Tau in Reims:문화, 1991년)등이 있다.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절대왕조의 영화를 회상케 하는 궁전으로 파리 남서부 18km 지점에 있다.베르사유 궁전,정원,숲 속의 샘 등은 그 아름다움이 세 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는 등 국 제적 무대로서 자주 이용되어 왔다.노트르담 성당은 12-13세기에 걸쳐서 건조된 프랑 스 제1의 고딕 성당으로 탑의 옥상 난간에는 기괴한 조수모양을 한 악마의 조각이 새겨 져 있다.
브라질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 한국에서 땅을 끝까지 파면 나오는 나라, 또 비행기로 거의 하루 이상을 가야하는 나라, 브라질은 우리가 잘 모르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최근에는 국내방송에서 현지 제작 프로그램도 많이 소개하여, 이제는 꽤 많이 알려지고 있다.
한국과 브라질은 유사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다르다는 사실이 거부감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도 있다. 우선 양국가가 위치한 남반구와 북반구의 차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한국은 12월이면 한겨울에 접어든다.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며, 눈으로 뒤덮인 한국의 산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더욱이 눈오는 성탄절은 많은 사람이, 특히 젊은 연인들이 기대하는 일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배꼽티셔츠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성탄절, 35도, 40도하는 폭염의 성탄절을 상상이라도 해보았는지? 이런 곳이 브라질이다. 당연히 빨간 털옷에 빨간 털모자를 쓴 산타할아버지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냉방기술이 좋아지다 보니, 대형 백화점이나 유명할인매장 등에는 판촉용 산타할아버지가 등장하며, 특히 아이들이 이 판촉용 산타할아버지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산타할아버지까지는 현대기술의 발전으로 백화점에서라도 볼 수가 있지만, 눈은 도저히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다. 한반도의 50배에 가까운 브라질에서 일부지역을 제외한 곳은 눈이 오지 않는다. 따라서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눈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 최남단지역에서 눈이 오면(그것도 한국과는 정반대로 7-8월경) 방송뉴스에 나올 정도이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브라질이라는 나라는 국토가 너무나 크다보니, 열대에서 온대까지 있다. 최남단은 남위 30도를 넘어서고 있어 가끔씩 눈이 오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의복은 거의 팬티수준의 한 장만 걸치는 열대지역과 아주 가끔씩 이지만 영하로까지 떨어지는 남부에서는 두꺼운 양털외투를 걸치고 집안에는 벽난로를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지역이 더운 지방에 속해 있어 일상적인 옷은 간단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임산부가 짧은 배꼽티셔츠를 입고 큰배를 내놓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재미있다고 해야될 지, 아니면 너무 자기 통제를 하지 않는 것인지 당혹스럽기도 하였다. 사실 브라질은 상당히 자유로운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자유스러움도 어느 수준의 사회규칙이 지켜지는 속에서 높은 값어치를 가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한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브라질은 무질서해 보이기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전반적으로 교육수준이 아주 낮기 때문에, 사회전체가 하향 평준화되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브라질에서는 한달간의 여름휴가가 있다. 따라서 12월쯤부터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브라질내의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거나 친척을 방문하기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집에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주위사람들과 잡담으로 보내기도 한다.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국내여행도 마음대로 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 언어연수 온 학생들은 그 넓은 브라질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고 다니는데, 정작 브라질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을 멀리 벗어나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이를 통해 벌써 눈치 빠른 사람은 브라질이 불평등이 심한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실 브라질의 불평등은 세계에서도 가장 심한 편이다. 현재 70-80불이 안되는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 조금 낳으면 최저임금 4-5배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 전체인구의 반을 넘는 실정이다. 그런 반면 몇 년 전이지만 미국에서 MBA하고 돌아온 사람이 금융시장에서 일하면서 받는 월급은 수천불을 넘으며, 또 기업의 어느 정도 이상의 자리에 오르면 최저임금의 30-40배 이상을 받는다. 이렇게 불평등이 심하지만, 하층민들은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주위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신나게 춤추며, 삶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브라질사람들은 더운 날씨 때문인지 시원한 맥주를 선호하며, 시원하지 않으면 절대 마시지 않는다.
이렇게 여름 휴가가 끝날 때 즈음이면, 카니발이 시작된다. 카니발은 사실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리우데 자네이루市나 쌍빠울루市의 경우, 행사에 참여하는 인원만도 십만명이 넘는데, 우리가 TV에서 자주보는 카니발에는 수십개의 팀이 참여하여 서로의 창조성, 화려함, 아름다움을 경연한다. 각 팀의 참여자는 4000-5000명을 넘는다. 따라서 20개팀이면 벌써 십만명을 훌쩍 넘어선다. 그리고 각 팀은 행사에 참여하여 행진하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모아 훈련을 하고, 그리고 각종 행사용 도구와 기구들을 만들어 준비해야한다. 따라서 1-2달 전부터 준비는 시작된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축제가 카니발이지만, 사실 백인 상류층은 잘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은 축제기간동안에 해변을 찾아 휴식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못사는 하층 흑인, 혼혈인들이 주로 참여한다. 카니발이 시작되면, 각 주요 도시마다 리우 데 자네이루 같은 행사를 벌이며, 또 내륙의 자그마한 마을에서도 카니발행사는 이루어진다. 특히 밤을 세워 흥겨운 음악에 취해 춤을 추다보면 어느새 밤이 지나간다고 한다. 이런 밤들이 지나고 나면 카니발은 끝이나지만, 9개월 뒷면 카니발베이비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말한다.
주로 흑인들의 문화라면, 음식과 관련하여서도 흑인들의 음식이었던 것이 이제는 전통음식으로 된 것도 있다. 과거 브라질에는 흑인노예들이 많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이들 흑인노예들이 브라질에서 해방된 것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늦은 19세기말이었다. 이들은 설탕농장 내지는 커피농장에서 일하면서 사람이 아닌 거의 동물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농장주인이 돼지를 잡으면, 그들은 맛있고 좋은 부위만 먹고, 나머지 부분은 버리게 되었다. 노예들은 버리는 귀, 다리, 꼬리부위들을 주어다가 검은콩과 함께, 한국의 팥죽 같이, 끓여먹었다. 이렇게 하여 생긴 노예들의 음식이 이제는 전통음식이 되어 쌍빠울루시의 전문점에 가면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콩과 돼지고기는 이들 흑인들의 주요 영양공급원이 되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돼지고기가 없을 경우에는 검은콩만으로도 비슷하게 만들어 먹고 있는 데, 이것은 요즘 브라질인들의 주식이 되고 있다. 밥위에 이렇게 콩으로 만든 죽을 얹혀서 함께 먹는데, 건강에는 상당히 좋은 영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의 음식에서 고기를 빠트릴 수는 없다. 남부 목동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일종의 바비큐요리는 브라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소고기를 부위별로 크게 썰어, 덩어리 채로 쇠꼬챙이에 끼운 다음, 숯불위 30-40cm에 걸쳐놓고 구워서 먹는다. 20-30분 이상을 구우면서, 기름은 아래로 떨어져 불꽃을 더욱 타오르게 만들고, 겉에 발라놓은 굵은 소금이 배어들어 고기는 아주 맛있게 익는다. 이렇게 익은 바깥부분의 고기를 조금씩 쟁반에 잘라놓고, 나머지는 다시 불위에 올려놓아 덜 익은 속부위를 다시 굽어서 먹게 된다. 적당히 익어 뜨거울 때 먹는 고기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데, 브라질에서는 그대로 하고 있어 정말로 맛있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여기에 많은 생야채들이 함께 제공되어 고기와 야채를 함께 먹으면 그 고기 맛은 한층 더해진다. 이렇게 많은 것이 풍부하여서 그런지 브라질인들은 한국인들과 비교하여 여유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이집트>
(1) 문명의 발생
최초의 문명은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문명이 일어난 곳은 서 아시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늦게 서북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도 문명이 일어났고, 동북 아시아에서는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4대강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한 이유는 인간생활에 유리한 아열대성 기후가 분포하며, 큰 강을 끼고 있어 어로 생활이 가능하였고, 교통도 편리하여 사람이 생활하기에 유리였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강의 범람으로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하류로 운반되어 비옥한 옥토가 마련됨으로써, 자연 조건에 지배되는 고대의 농업에 큰 혜택을 주었다. 강의 범람은 인간에게 커다란 시련이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을 길러주고, 그러는 가운데서 공동 생활과 도시 국가가 발생하는 기반을 마련하여 문명을 발생시켰다.
(2) 나일강의 혜택
고대의 대하(大河)는 문명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이집트의 경우는 특별하다. 단적으로 말해 나일 강이 없으면 이집트도 없다. 나일 상의 양안에 눈곱만큼 붙어 있는 '그린 벨트'가 이집트인 셈인데, 그 좁은 녹색지대를 조금만 벗어나면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불모의 사막 지대가 펼쳐진다. 게다가 그 양안은 깎아지는 듯한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서, 다른 대하처럼 크게 범람하지 않는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온건하고 규칙적이다.
다른 문명권의 대하처럼 대홍수를 일으켜 사람과 가축과 논밭을 무참히 쓸어가거나, 관개가 불가능할 정도로 격심한 가뭄으로 대기근을 일으키는 법도 없다. 오히려 정기적이고 온건한 범람은 매년 상류에서 하류로 비옥한 부식토를 날라준다. 그래서 그들은 치수에 관해서 그리 힘을 쓸 필요가 없었고, 오로지 관개 공사를 통해 나일의 혜택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또 나일은 수많은 어족과 조류를 이집트인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고왕국 시대 이후의 그림과 조각은 이 풍성한 물고기와 새의 수렵을 묘사하고 있다.
(3) 자연환경으로 인한 폐쇄성
이집트에 있어 나일 강이 주로 경제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면, 전체적인 자연 조건은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성격을 결정하였다. 동서는 불모의 사막, 북쪽은 바다, 남쪽은 누비아의 정글에 둘러싸여 고립되 이집트는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나일과 태양의 은총은 영원히 보장되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이집트에 필적하는 민족도 문화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흑토의 나라'라 하고 이집트 이외의 토지를 '적토의 나라'라 하여 경멸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이 역사의 시작과 함께 민족적인 우월감을 품게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는 인류 최고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고립된 지역에서 평화롭게 생활하였고, 초기에 이미 최고의 수준에 달한 문명을 가졌던 이집트가 초기의 문화적 전형을 고스란히 후대에 전승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그러기에 고고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이집트적인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이집트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단계까지는 이런 것들이 긍적적으로 작용했지만, 나중에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문명 발전의 조건은 도전에 대한 응전인 것이다. 이집트 문명 3천년의 이러한 독특한 '수구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문명의 발전에 대한 유연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이집트는 가장 빨리 개화하여 고도의 문명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항력은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훨씬 떨어지게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늘 이질적인 문화와 민족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이 그 문화를 수용하여, '틀'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문화로 형성 발전시킬 수 있었다.
2. 피라미드와 사후세계
(1) 피라미드
이집트는 최초의 문명적 달성이 주변의 민족과 문화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했기 때문에, 그들이 응전할 만한 외부의 자극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열과 노력은 오로지 사후의 세계로 향해 나아갔다.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피라미드는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커다란 구조물로써, 죽은 왕을 장사 지내는 거대한 무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에 대해 들었거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거대한 기념비적 구조물에 무슨 특별한 점이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왜 세계 최고의 고고학자, 이집트학자, 건축학자, 구조공학자들이 이 '기념비'를 연구하는 일에 그토록 오랜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피라미드는 높이 146.5미터, 저변은 각각 230미터, 밑면적은 5만 2천9백 평방미터에 달하고, 경사각은 51도 52부, 각 변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이는 42층 높이에 축구장 10개를 합한 면적이며, 사용된 벽돌로는 미국의 고층빌딩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35개 정도 지을수 있고, 3미터 높이 1미터 두께의 벽돌로 만든다면 프랑스 전체를 둘러쌀 만한 양이 들어갔음을 말한다. 2.5-15톤의 화강암 벽돌을 250만개 가량 사용하여 석조 블록으로 짜맞춘 덩어리인 피라미드는 총 140억 파운드인데, 현대 건축에서 공학자들은 100년에 6인치의 침강비율이면 사무빌딩용 부지로 적합하다고 하고, 미국의 국회의사당은 지난 200년 동안 5인치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140억파운드가 나가는 피라미드는 5천년 동안 0.5인치도 침하하지 않았다. 막대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가 발휘되었고, 5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비틀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지어진 피라미드는, 그 동안 사막의 햇빛, 비, 모래 폭풍 그리고 인간이 가한 파괴 행위를 받고서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한편, 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완성하기 위해 10만명의 장정이 20년간 노동을 했는데, 그 노동의 중심 역할을 맡은 것은 '노동부대'라는 상설 집단이었고, 대부분 농한기에 소집된 농민들이었다. 각 촌락마다 동원수를 배정하고 임무를 구분하였는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부대를 위한 식량 조달을 비롯한 행정적인 업무도 5천년 전의 이집트 관리들은 빈틈 없이 해냈다. 그런데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250만 개의 블록이 채석되어 졌는데, 어떻게 옮겨졌을까? 현재로서는 두 개의 이론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통나무 위로 석조 블록들이 '굴려졌다'는 것이다. 블록이 전진하면 뒤쪽의 통나무를 회수해 다시 앞쪽에 놓아 계속 굴러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식이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굴림대론자'라고 부른다. 또 하나의 이론은 수백 아니 수천의 이집트인들이 채석된 바위를 일종의 썰매 위에 올려 놓고 길다란 경사길 위로 끌어당겼다는 의견이다. 이 아이디어에 동의하는 학자들을 '경사론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학계의 일치된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라미드는 경외심과 함께, 더욱더 많을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2) 이집트인들의 사후세계관과 신 인간 그리고 동물
이집트는 '분묘의 나라'이다. 대부분의 역사적 유물은 분묘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나일(범람)과 태양(일출과 일몰)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임을 느끼며 살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만의 영원한 낙원에서 살았다. 이집트인은 '신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이 세상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후의 세계에서도 이 세상의 생활이 계속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막에다 버렸던 선사 시대의 기억을 통하여, 건조한 사막의 기후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이라가 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잘 보존된 육체로 혼이 되올아올 수만 있다면 부활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위적으로 시체를 보존하려 하였고, 또 그 시체를 안치하는 장소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이 미이라와 피라미드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사후의 생활을 두려워하여, 신에게만 허락된 '불사'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하였지만, 이집트인들은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부활'을 믿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즉위와 함께 '영원한 집 -피라미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누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창조의 궁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자연은 설령 학대받을지라도 인간에게 봉사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아주 이상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한 존재일 뿐이며, 짐승보다 더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인들은 각 동물 안에 내재한 신의 원리를 존중하기 위해 개와 고양이 등이 죽어도 미이라로 만들었고, 이집트 회화와 조각에 각 신들을 동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수두인신(獸頭人身)이 이집트 문화중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집트 음식은, 인종의 '도가니'라 할 수 있는 이집트의 역사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 지방 음식은 그리스, 터키,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의 음식들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집트 문화와 취향에 맞도록 변형시켰다.
음식들은 주로 천연 과일과 야채, 계절에 따른 신선한 향료로 만들어, 대부분 심플하면서도 몸에 좋다.
북아프리카 요리의 영향을 받은 남부지역 음식은, 북부지역 음식보다 더욱 향기롭다고 할 수 있는데, 두 지역의 음식 모두 특별히 맵지는 않다.
이집트의 주식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빵이고, 프랑스식 바게트도 많이 먹는다.
그리고, 다른 주식으로는 잠두를 이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Ful'을 들 수 있다.
샐러드는 주로 푸른 야채나 토마토, 감자, 콩, 계란, 요구르트 등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에게 고기는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소량만 쓰이고, 야채와 함께 조리되고 밥과 곁들여서 먹기도 한다.
따라서 고기 요리가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싸다.
또다른 이집트 요리로 'Torly'를 들 수 있는데, 야채를 뒤섞어 찌거나 끓인 요리로서, 양고기나 소고기, 양파, 감자, 콩 등을 같이 넣어 만든 요리이다.
이집트 스타일의 케밥을 만드려면, 양고기 덩어리, 양파, 마저럼(박하류의 요리용 양념), 레몬쥬스를 첨가하여, 꼬챙이에 끼우고 구우면 된다.
석쇠에 구운 닭고기 요리, 'Firaakh Mashwi'도 레스토랑에서 즐길 수 있다.
Hamaam(비둘기)가 이집트에서는 많이 사육되고 있으며, 가미한 밥과 같이 구워지는 요리로 많이 쓰여, 이 나라 진미가 되었다.
또 이집트에서는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 둘 다 풍부한데, 최고의 생선으로는 Lake Nasse, Aswan이나, 해안가 근처에서 잡은 고기들을 들 수 있다.
과일로는 'Burtu'aan Bedummoh'(핑크빛 오렌지)가 유명한데, 달고 빨간 과육이 특징이다.
이집트 요리는 맨 마지막 부분에는 항상 과일이 나온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집트 음식은 돼지교기를 쓰지 않고 야채와 곡물 위주의 요리를 선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맵고 짜서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고기를 다져서 향신료로 양념한 후 튀져 낸 팔라펠과 야채파스타와 비슷한 코셔리리가 추천메뉴. 니코틴이 없는 이집트 물담배를 피우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본>
오쇼가쓰 :우리나라의 설날에 해당하는 명절이구요 아침일찍 일어나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한 다음 떡국과 비슷한 오조니나 오세치 요리같은걸 먹습니다.
고이노보리 : 5월5일 전후에 아이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잉어 모양 의 장식을 대나무에 매달아 세우는 것인데요, 남자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무사인형 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다나바타 : 우리나라의 칠월 칠석에 해당하는 날인데요.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이야기는 우리랑 같습니다. 자기 소원을 적은 오색종이를 대나무에 매달아 두는 관습니 있습니다.
오본 : 양력 8월15일 전후로 우리나라의 추석에 해당하구요. 오본에는 고향에 가 서 조상의 묘에 성묘하고,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는데, 이를 본오도리 라고 해요.
마쓰리 : 일본은 일년 내내 어디에선가 마쓰리가 열리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마쓰리 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쓰리는 본래 신을 기쁘게 하려는 데서 출발했는 데요. 근데 최근에는 이벤트 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쓰리에는 미코시와 다시를 메거나 끌면서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데 그 모양이 아주 화려하고 웅장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마쓰리로는 교토의 기온 마쓰리 오사카의 덴진 마쓰리 도쿄의 산자마쓰리, 간다마쓰리 등이 있습니다.
= 주거 문화 =
일본의 전통 가옥은 지진이나 습기 때문에 나무로 지은 집이 대부분 인데요 보통 다타미로 된 방이 몇개 있으며 방과 방 사이는 후스마,쇼지로 구분됩 니다. 손님을 모시는 방을 자시키 라고 하며 한쪽에 꽃꽂이 등으로 장식을 하는 도코노마 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툇마루에 해당하는 엔가와가 있는 데 여기서 정원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복장 : 일본의 전통 복장에서는 상의를 하오리, 하의를 하카마 라고 하며 상하의 구분이 없는 옷으로는 기모노가 있습니다. 기모노를 입을 때는 오비,게타,조리,다 비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목욕후나 집안 등에서 편리하게 입는 옷으로는 유카타 가 있습니다.
= 음식문화 =
스시 : 식초로 간을 한 밥에 생선,달걀, 채소,김 등을 얹거나 말아서 만든요리입 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밥이라고도 하죠.
샤부샤부 : 얇게 썬 쇠고리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양념장에 찍어 먹는 음식입니다.
스키야키 : 쇠고기와 파 등으로 여러가지 야채를 재료로 하여 끓여서 먹는 음식으 로 우리나라의 전골과 비슷한 음식 입니다.
낫토 : 콩을 삶아 발효시킨 음식으로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합니다. 매운 맛이 많은 우리나라의 음식에 비하여, 일본은 고온 다습한 기후 때문에 음식 이 쉽게 변질되므로 식초나 간장 등을 많이 사용합니다.
= 전통예능 =
가부키 : 서민의 희로애락을 주제로한 연극으로 모든 역할을 남자배우들이 담당 하며 짙은 화장을 하는 것이 특징이죠. 오랜시간 공연을 하므로 중간에 휴식시간 을 갖습니다.
분라쿠 : 인형 조종자들이 직접 손으로 인형을 다루며 대사를 주고 받는 인형극 을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줄거리가 많습니다.
노 : 가부키와는 달이 배우가 가면을 쓰고 하는 전통극으로서 거의 정지된 듯한 동작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며 북,피리 등의 악기로 분위기를 돋굽니다. 그리고 무대가 관객과 아주 가깝게 설치되어 있는것이 특징이죠.
= 대중교통 =
일본 대도시의 대중 교통은 전철과 지하철이 일반적이며, 버스나 택시는 우리 나 라롸 달리 보조적인 기능만 합니다. 그리고 버스는 기본적으로 탑승 거리에 따라 요금을 내며, 택시는 운전기사가 문을 열고 닫는 자동문으로 되어 있죠,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우측 통행이믈 운전을 하거나 보행할때 주의 해야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철도가 전국 곳곳에 다 연결이 되어 있어서 신칸센이 나 JR로 모든 곳을 다 가볼수 있습니다.
= 주요 관광지 =
닛코 : 닛코는 도쇼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고 게곤노타키와 주젠지코,유모토온센 등의 관광지가 있습니다.
교토 : 교토는 역사가 깊고 문화 유적이 많은 곳 중의 하나입니다. 긴카쿠지,기요 미즈데라, 니조조, 헤이안진구 등이 있습니다.
벳푸 : 오이타 현에 속하며,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온천 휴양지 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온천물은 하루 10만㎘가 넘고, 온천 또한 3천개 이상이 있는 엄청난 곳이죠 한번 가볼만 합니다. 야외온천 좋습니다.
러시아
러시아인은 유난스럽게도 보드카를 좋아합니다. 영하 20도를 웃도는 겨울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자다가 객사한 사람에 대한 신문기사는 겨울철 해외 토픽의 단골 메뉴입니다. 러시아인들이 보드카를 좋아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이외에도 수없이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드카가 러시아의 사회에는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속죄양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특히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예상치 못한 일이 러시아에서 발생하면, 그것의 원인을 러시아 사회의 문화 또는 자기들의 러시아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찾기보다는 손쉽게 보드카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의 예를 몇몇 살펴보자. 소련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던 고르바초프는 개혁 초기부터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을 받았으며, 이는 쿠데타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쿠데타는 소련 사회의 개혁이라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서 보수파는 몰락했습니다. 서구에서 높은 지지를 받던 고르바초프도 이 과정에서 몰락했는데, 이는 고르바초프가 개혁 추진 과정에서 민심을 잃었고, 쿠데타 당시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옐친은 모스크바 시장 재직시부터 민심을 잘 읽었고 이에 따라 처신을 잘 했습니다. 또한 쿠데타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하에서 국회의사당을 떠나지 않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불굴의 투지로 '탱크처럼' 버텨서 쿠데타를 무산시켰습니다.
러시아인의 전통음식은 호밀로 만든 흑빵, 각종 곡물로 만든 죽(카샤), 양배추로 만든 국(시치)등이다. 음료수로는 맥아를 발효시켜서 만든 크바스, 맥주, 차(茶)를 좋아하며, 보드카도 많이 마신다. 18세기 이후 러시아의 근대화에 따라서 유럽, 특히 프랑스 요리가 러시아에 도입되었고, 주로 농민 출신의 상인들은 전통적인 미각과 식관습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 동시에, 새로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전해진 요리를 받아들여 오늘날과 같은 러시아 요리가 성립되었다.
전채(前菜), 수프, 주(主) 요리, 후식 순서로 진행되는 정찬 식사의 메뉴와 대체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천천히 오랫동안 식사를 즐기며, 특히 손님을 초대한 경우에는 융숭하게 대접하는 관습 등 음식문화는 오늘날도 상당 부분 러시아적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는 영역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크지만, 러시아 요리의 풀코스는 다음과 같은 메뉴로 이루어진다. ① 자쿠스카: 각종 냉육, 캐비어, 청어절임 등의 어육, 그리고 야채샐러드를 곁들인 전채. ② 수프: 양배추를 건더기로 하는 시치에 토마토와 비트로 붉은 색을 들인 보르시치, 잘게 썬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은 솔랸카, 생선을 우려낸 우하 등의 뜨거운 수프 이외에, 여름에 적당한 크바스를 주 재료로 해서 만드는 차가운 수프인 오크로슈카 등. ③ 육류, 조류 혹은 생선요리: 쇠고기를 사워크림 소스로 끓인 비프 스트로가노프와 같은 러시아에서 고안된 것, 샤슐리크와 같이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것 등. ④ 디저트: 딸기류 아이스크림이나 각종 파이, 케이크와 잼을 곁들인 홍차 등.
러시아인의 일상의 음식 : 빵, 카샤, 시치, 블린, 피로그, 보드카, 차
러시아인들의 주식은 빵이다. 평상시 농촌에서는 주로 호밀을 이용하여 빵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색깔이 검었고, 밀로 만든 흰 빵은 잔치 때와 같은 특별한 날에 특별히 만들었다. 빵은 손님접대에 있어서 ‘융숭한 대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를 나타내는 용어가 바로 ‘빵과 소금’이다. 러시아인들이 귀빈을 맞이할 때 ‘소금이 담긴 둥글고 큰 빵’을 손님에게 정중히 제공한다. 빵은 소금과 함께 모든 길, 흉사에 동반되었다. 가장 귀하고 유명한 손님들, 결혼식 날의 젊은이들을 빵과 소금으로 맞이하였다. 빵의 중요성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도 변하지 않았고, 평상시에는 호밀빵(흑빵), 잔치 시에는 밀빵(흰빵)을 먹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 이후에는 빵의 주도적인 비중이 점차 줄어들게 되어 과거와 같은 독보적인 의미는 약해졌으며, 흑빵보다는 흰빵이 러시아인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각 가정에서 빵을 구워먹던 관습은 빵공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빵이 생산됨에 따라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빵과 함께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던 음식은 물이나 우유에 끓인 곡물로 만든 음식으로서 죽이라 할 수 있는 ‘카샤’다. 결혼식이나, 세례식, 추도식 등에서 죽은 필수음식으로 준비되었는데, 특히 중세기 러시아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을 “카샤(죽)”라고 불렀다. 러시아인이 가지고 있는 죽에 대한 개념은 독특했다. 적대적이던 상대방과 화해의 뜻으로 죽을 끓였는데, 특히 전쟁을 종결짓는 강화조약 체결 시에는 당사자가 모두 식탁에 모여 앉아 죽을 먹었다. 이로써 양국은 상호간의 동맹과 우호를 표방했던 것이다.
“시치와 카샤는 우리들의 음식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죽과 함께 옛날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음식 중의 하나는 바로 국이라 할 수 있는 ‘시치’이다. 시치는 양배추가 들어간 국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인들은 고기국물에 신선한 양배추나 신맛이 나는 양배추를 넣어 끓였는데, 봄에는 양배추 대신 갓 피어난 엉겅퀴를 넣기도 하였다. 순무를 넣은 순무국(순무시치)도 소중한 일상음식이었다. 시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구미를 돋구는 국으로 사랑받고 있는 음식이다.
러시아인의 일상의 음식 가운데 아마도 가장 오래되었으며 대중적인 음식은 ‘블린’일 것이다. 블린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음식이다. 블린은 겨울을 보내는 전통적인 명절인 마슬레니차 기간에 필수적인 접대음식이었다. 오늘날도 러시아인들이 축제나 일요일에 블린을 만들어 먹는다. 블린이 “태양, 행복한 세월, 풍성한 수확, 행복한 결혼, 건강한 자식들” 등을 상징하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할 때나 아이를 낳을 때 등 다른 날에도 블린을 만들어 먹었고, 추도식 후 식사 때에도 블린은 필수음식이었다.
오늘날에도 노점에서 판매될 정도로 일상의 음식이면서도 블린과 함께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시에 빠지지 않는 러시아 전통음식은 바로 ‘피로그’이다. 피로그는 조그만 반달모양에서부터 길죽한 보트모양과 둥근 모양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특히 둥글고 큼직한 피로그는 마치 오늘날의 피자 파이를 연상케 한다. 둥글고 큰 피로그는 그 표면 위에 각종 야채나 고기 및 기타 음식으로 장식되며, 생크림이 가장자리에 뿌려져 아주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경우가 많다. 피로그는 명절 때나 주요 잔치 때에 항상 준비되는 음식이었다. ‘피로그’라는 단어 자체가 ‘연회’(pir)에서 유래되었듯이 피로그는 축제일에 먹는 빵을 의미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술인 보드카(vodka)는 물(voda)이라는 러시아어에서 유래되었다. 알코올 성분이 40% 이상인 무색 투명한 증류주인 보드카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이다. 보드카는 처음부터 그 판매를 정부가 독점하였으며, 18세기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국가의 주류통제는 점차 국가세입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러시아의 민중들은 보드카를 약이나 마취제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듯이 러시아인들은 후추와 함께 보드카를 마신다. 배가 아플 때도 그들은 보드카에 소금을 타서 마신다. 이처럼 보드카는 러시아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보드카가 러시아인들의 술로서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러시아 국가의 역사에 비하면 그리 오래된 사실은 아니다. 보드카가 하나의 독자적 용어로서 그리고 알코올 도수가 40%로서 과학적으로 정립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와서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보드카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보드카는 러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알코올 음료다. 러시아인들은 보통 보드카를 마실 때 100g 정도씩 따라 한꺼번에 마시는 것이 관습이며, 특히 여러 사람과 술자리를 같이할 때 첫잔은 반드시 비우는 것이 관례로 여겨져 있다.
차(茶)는 250여년 전에 아시아로부터 도입되어 러시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현재 러시아에는 차를 마실 때 다소 특이한 관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각설탕이나 사탕을 하나를 먼저 입안에 넣고 설탕이 들어있지 않는 차를 마시는 일이다. 이러한 습성은 바로 설탕 값이 매우 높았던 이전 시대에 생겨난 전통관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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