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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제 10 법사품 (法師品)
오늘날 보고 듣고 한 것은 그냥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이 생각이 들지만 사실은 심리적으로 인간의 심리 깊은 곳에 있는 저장 창고 아뢰야식, 장식(藏識) 무몰식, 없어지지 않고 한번 읽고 지나간 것도 없어지지 않고 그런데 왜 기억은 잘 안 되느냐? 우리가 경전 공부를 해도 잘 잊어버리는 수가 많지요. 그런데 영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지요. 숱한 정보들이 많이 우리 머리 속을 메우고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뭐 조금 이렇게 읽고 잠깐 동안 감동 받은 것이 그렇게 그 많은 정보 중에 뚜렷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더 뚜렷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복을 해서 읽고 반복해서 감동 받고 반복해서 입으로 외우고 그렇게 자꾸 훈습해 가는 거예요.
이를테면 우리가 어릴 때 공부한 것은 지금도 기억 하는데 다 성장해서 성인이 되어서 보고 듣고 한 것은 뭐 얼마 전에 공부한 것 까지도 사실 잘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만치 정보가 많이 쌓여 있는데 몇 가지의 새로운 지식이 유인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크게 흔적으로 뚜렷이 남아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아닌데 마치 신문에다가 기사가 잔뜩 있는데 거기다가 연필로 또는 볼펜으로 이렇게 전화 번호 같은 것을 얼른 적어 나 봐야, 나중에 신문에 적어 놓았는데 하고 찾아봐야 찾아 지지가 않습니다.
얼른 찾아지도록 하려면은 어떻게 해요? 큼직하게 뚜렷하게 아주 여러 번 새카맣게 눈에 보이게 할 정도로 그렇게 반복해서 거듭 거듭 써 놓으면,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 머리라고 하는 것이 한번 어떻게 듣고 보고 한 것이 영 없어지지는 않는데 다른 정보가 많으니까 그것만 뚜렷하게 들어 나지 않는다는 거죠. 래서 어릴 때 공부한 것은 지금도 그때는 신문지 같은 그런 상태가 아니지요. 정말 백지 상태의 작은 글씨를 써 놓아도 눈에 싹 들어오는 거와 같은 그런 우리의 정신세계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었을 때는 이해의 폭은 넓지만 기억 한다든지 이런 것을 얼른얼른 떠 오르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없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장식(藏識)이라고 하는 아주 위대한 창고에 가서 그 창고에 차곡차곡 다 저장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른 떠 오르지가 않지요. 잘 떠오르는 사람은 그만치 그것을 저장할 때 또렷하게 확실하게 저장 했다는 뜻입니다. 또렷하고 확실하게 저장 안 해 놓고 어름 하게 저장해 놓으니까 얼른 떠 오르지가 않지요. 그래서 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수도 많습니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그 씨앗이 물론 없어진 것은 물론 아니 예요. 그런 원리를 불교 심리학에서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오늘 이야기 전에 오늘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잠깐 좀 할까 합니다. 이것은 뭐 지금 다 알고 있는 일인데 요즈음 우리가 흔히 세계화 이렇게 다 표현을 해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 거의 세계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슨 서양화만 된 것도 아니고 동양화만 된 것도 아니고 동서가 뒤섞이고 이 나라의 문화, 저 나라의 문화, 모두 뒤섞여 가지고 그것이 세계화가 되가는 추세인데, 오늘 무슨 인연으로 부산 근교에 있는 중국 물건을 잔뜩 많이 가지고 있다 하는 어떤 물류창고를 가게 되었는데 정말 중국 물건을 많이 들여 놓았더라 고요. 중국 여행을 한 서너 번 가 가지고 구경을 해도 그만치 볼 수 있을까 말까 정도입니다. 그만치 소비가 많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중국 것을 참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뭐 곡류 무슨 채소류 과일류 등등 그 다음에 우리가 일상 생활에 사용하고 있는 그런 물건들을 자세히 들여 다 보면은 거의가 요즈음 나오는 것들이 중국 제품들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유당 신라 때 당나라에 속국처럼 되어 가지고 비석을 보더라도 유당 당나라 이름을 앞에 쓰고 유당 신라국이라고 그렇게 했고, 중국을 기준으로 해서 중국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 거의 중국화 되어있는 그런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많은 세월이 흘러서 얼마 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미국화가 되어 가는 듯 했었습니다.
물론 한 때 일본화가 36년간 억지로 변해가던 그런 시기가 물론 있긴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화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리고 다시 들어온 것이 미국화 내지 서양화였었는데 그러다가 이제 세계화 추세라고 하는데, 내가 자세히 오늘의 경험과 여러 가지 상황들을 보니까 상당히 중국화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기업만 하더라도 수천 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 정도로 중국에서 사업도 물론 많이 벌리 고요. 불교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불교도 중국을 거쳐서 물론 인도에서 바로 들어온 경로도 있었지 만은 대개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거의 뭐 한국 불교는 중국화 된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오늘 중국 상품을 파는데 이것저것 참 여러 가지 것 정말 모처럼 나들이를 해서 물건을 파는데 가서 이런저런 것을 보고 돌아왔는데, 마침 우리 염화실 법우님 한 분이 차를 부쳐왔는데 역시 중국차가 도착을 했어요. 거기서 사온 조그마한 유리 다기 하나를 사왔는데 중국서 만든 그 유리다기에 어떤 스님이 보내온 중국차를 뭐 크게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중국차를 만들어서 그렇게 마시면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이 돌아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도 저도 감지를 하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글쎄요, 지금은 지식정보화 시대다. 이렇게 해서 이것저것 어느 나라 것이든지 간에 골고루 정확하게 잘 알고 있어야 손해도 덜 보고 이익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국도 어쩔 수 없이 농경사회도 이미 거의 지나갔고 산업사회도 이제 거의 지나가다시피 했고 다 지나간 것은 아니지요. 산업사회와 아울러서 지식정보화 사회가 동시에 이렇게 같이 돌아가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제 최근에 가장 힘을 쓰는 것이 지식 정보지요. 그래서 그런 중국화 되어가는 이런 상황들도 우리가 빨리빨리 제대로 알고 있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도 한편 하게 되었었습니다.
오늘은 법화경 “게송으로 거듭 밝히다.” 하는데 그야말로 앞서 말했듯이 팔식(八識), 아뢰야식에 다가 거듭거듭 반복해서 입력해 두었다가 기억하고자 할 때 또렷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얼른 기억되게 하고, 그것이 내 삶을 좌우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오늘의 중요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7. 게송으로 거듭 밝히다.
(1) 경전을 찬탄하다
경전을 찬탄하다. 라고 했는데 앞서도 두 번 찬탄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있었지요.
17 이 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른 생각을 버리려거든 응당 이 경전을 들어야 하나니 이 경전은 듣기도 어렵고 믿고 받아들이기도 또한 어려우니라.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으려고 높은 언덕에서 우물을 팔 적에 마른 흙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물이 아직 멀리 있는 줄을 아느니라.
점점 파서 진흙이 나오면 물이 결정 코 가까이 있는 줄을 아느니라. 약 왕이여, 마땅히 알아라. 이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법화경(法華經)을 듣지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지혜가 매우 멀지만 만약 이 깊은 경전(經典)을 들으면 법문을 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
“이 깊은 경전을 들으면 법문을 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 그랬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저기 수많은 경전들 어록들 큰스님 네 법문들 뭐 이런 것을 저는 정말 많이 기웃거렸습니다. 경전도 보고 어록도 보고 선방에도 또 다니고 또 당대에 선지식이 계시는 그런 회중이 있다면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가서, 한 철씩 그렇게 지냈기 때문에 선지식들의 영향도 또 많이 받고 그랬습니다. 최종적으로 제가 평생의 공부를 한마디로 요약 정리 한 것이 인불 사상이다. 그렇게 저가 주장을 합니다. “인불 사상(人佛思想),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거기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고 또 같은 불교를 표현하더라도 뭐 “마음이다.” 또는 “중도다.” 이렇게 표현한 이들이 있지요.
평생을 중도(中道) 이론을 가지고 불교를 정리한 분도 있고 일심(一心)의 이치를 가지고 불교를 선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 가는데 사람의 삶이 얼마나 행복해야 되는가 하는 것의 대안으로서 불교라고 한다면은 그렇다면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자. 그랬을 때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하는 그런 마음에서 그래서 저는 인불 사상으로 정리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 모든 어록을 전부 인불사상에 다가 귀결시키고 해석하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뭐 좀 편협 되었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또 저 나름대로 경전이나 어록에서 모두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깊은 경전 법화경을 들으면 법문을 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 이렇게 했고
경중의 왕이라고 하는 표현은 여기에서 찾은 거죠. 그래서 법화경을 예부터 경중의 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꼭 우리가 이 구절을 기억해 두어야겠지요. 그리고 여기 그랬습니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법문을 듣는 일은 이 법화경 공부하고 나면 법문 듣는 일은 마치리라.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만 우리가 이해한다면은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습니다. 선 법문 표현이 손가락을 들고 고함을 치고 “방”을 하고 “할”을 하고 그렇게 하지요. 뭐 우리 선사들이 참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 선사의 영웅이라고 그렇게 일컫는 분을 두 사람 치면은 덕산과 임제 이렇게 칩니다.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 이것이 그렇지요. 덕산은 방을 잘 썼고 말하자면 주장자나 몽둥이를 가지고 있다가 사람을 잘 후려쳤다든지 그렇게 “방”을 가지고 법문을 잘해 보였고, 임제스님은 크게 고함을 치는 “할”로서 사람들을 잘 깨우쳐 주었다 하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선사 중에서 영웅이다. 이렇게 치는 이는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입니다. 마치 뭐라고 할까요? 삼국지에서 상산
법 쓴다고 하는 것은 가르침의 방법입니다. 가르침의 방법은 “방”이 아니면 “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인불 사상 이예요. 사람의 모든 아주 짧고 간단 명료한 그런 동작 행위 하나에 깊은 뜻이 있다고 하는데, 그 깊은 뜻이란 바로 뭡니까? 절대 현재 사람의 생생한 삶이 바로 이순간 사실에 그리고 “할”을 하는 이 사실과 “할”을 듣는 이 순간 이 사실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사실이 그렇고요. 그것을 떠나서 무슨 또 달리 다른 세계와 다른 삶과 다른 종교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주 자세한 이야기는 필요하겠습니다마는 그 동안 우리가 법화경 공부에서 보아온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해 하시리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 대표의 선승을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을 꼽는데 그 분들의 가르침이 바로 “방”과 “할”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인불 사상이고 정말 사람이 부처임을 아주 극령하게 보여준 거죠. 그 “방”을 쓰는 것이나 “할”을 하는 것이나 이것이 정말 사람이 그대로 부처고 조사고 조사인 부처고, 부처인 조사 라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이렇게 보고 듣고 소리지르고 소리 듣는 이 사람, 이 사실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더 이상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지요.
그렇습니다, 그 분들의 선 법문의 최고조에 달하는 그런 이들의 가르침도 역시 인불 사상에서 벗어나 있지가 않다. 그것을 이제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하면 바로 그렇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화경,
이 경을 들은 이는 법문을 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
(1) 경전을 설하는 규칙
법사품에서 설법규칙 세가지, “자비의 집에서 인욕의 옷을 입고 제법이 공한 자리에서 법을 설한다.” 이것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이지요.
18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설하려면 응당히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이 없이 널리 분별하여 설하라. 큰 자비심은 방이 되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 하는 것은 옷이 되고 모든 법이 공한 것은 자리가 되니,
아울러서 생각해야 할 것이 법사품 이니까 오종법사, 경전을 지니고 다니는 겁니다. 이것을 핸드백에 넣고 다니던지 요즘 창이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아주 휴대하기 좋고 품위 있고 고전적인 그런 휴대용 독송경전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제가 조금 이런저런 번역도 제공하고 여러 가지 안도 또 제시하고 그래서 모두 내가 편찬한 것으로 그렇게 나왔습니다. 동기는 했지 만은 내가 다한 것은 물론 아닌데 어쨌건 제 이름으로 그렇게 나왔습니다.
지니고 다니는 것 이것이 오종법사 중에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 읽는 것 그 다음에 외우는 것 그 다음에 설하는 것 쓰는 것 읽고 외우고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사경하고 한자도 좋고 책 제목만 써도 좋고 한 구절만 써도 좋고 이렇게 쓰는 것 그러니까 지니고 다니는 것. 受持(수지) 독(讀) 송(誦) 解說(해설) 書寫(서사)이렇게 해서 오종 법사(五種法師)다. 하는 것도 경을 설하는 세 가지의 규칙과 함께 이 법사 품에서 기억해 두어야 할 내용입니다.
여기에 앉아서 법을 설하라. 만약 이 경전을 설할 때에 어떤 이가 욕설을 하거나 칼로 베고 몽둥이로 치고 기와조각이나 돌을 던질지라도 부처님을 생각하여 응당히 참아야 하느니라.
참으려고 생각을 할 때 잘 참아집니다. 사실은 대개 사람들이 참으려고 마음을 먹으면 잘 참습니다. 그런데 못 참는 것은 자기도 어쩔 수 없을 때 못 참아요. 순식간에 그 뭔가 화가 걷잡을 수 없이 이렇게 일어나는 것은 그것은 누구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아주 극한 상황까지 가게 되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전화 박스에서 전화 오래 건다고 사람을 때려 가지고 죽게 한 그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기다리다가 보니까 순식간에 화가 난 그런 것은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평소에 훈련을 잘해야 되겠지마는 참으려고 마음에 벌써 어느 정도 좀 되면 안간힘을 써서라도 참을 수가 있는데, 순식간에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그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본의 아니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저지르는 수가 많지요. 그런 것들은 의도적인 것이 절대 아니지요. 보통 사람들 기준으로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기도 어쩔 수없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화는 대개 그런 것들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는
‘칼로 베고 몽둥이로 치고 기와 조각이나 돌을 던질지라도 부처님을 생각하여 응당히 참아야 하느니라.’ 그랬습니다.
(2) 공덕을 밝히다
19 나는 천 만 억 국토에서 깨끗하고 견고한 몸을 나타내어 한량없는 억 겁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내가 열반한 뒤에 이 경을 설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조화로 만든 비구 비구니들과 청신사. 청신녀들을 보내어 법사(法師)에게 공양하게 하느니라. 여러 중생들을 인도하여 모아 놓고 법을 듣게 하리라.
이 법화경을 설하는데 대중이 없으면, 자기가 조화로 만든 그런 비구 비구니 내지 대중을 만들어서 그 법사를 외롭게 하지 않겠다.
이렇게 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생각으로 칼. 몽둥이. 기와조각. 돌 따위로 해치려 하면 조화로 만든 사람을 보내어 법사를 호위(護衛)할 것이니라.
여기 보십시오, 여기에도 그랬지요. 조화로 만든 청중을 보내서 법사를 외롭지 않게 만들고 흥이 나게 만들고 신심이 나게 만들고 환희심이 나게 만들고 이렇게 하겠다고 하고, 또 누가 헤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조화로 만든 사람을 보내서 법사를 호위할 것이다. 참으로 경중의 왕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이런 표현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 이 법화경을 들으면 이 법문을 듣는 일은 마치리라.
완전히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경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조화로 만든 사람을 보내며 법사를 호위 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실지로 이루어지는 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뜻하는 부처님의 마음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부처님이 이 경전에 담고 있는 애착과 중요성과 마음의 무게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법을 설하는 사람이 쓸쓸한 곳에 홀로 있어 적막하고 아무도 없는 데서 이 법화경을 읽고 외우면 그 때에 내가 청정(淸淨)하고도 광명(光明)이 있는 몸을 나타내리라. 만약 문장이나 구절을 잊어버리면 그를 위해 설해주어 통달케 하리라.
참 부처님이 어지간히도 이 법화경에 대한 내가 애착이란 표현을 썼습니다마는 애착이야 하겠습니까 만은, 어떤 경전보다 관심이 깊고 중요하고 비중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공덕을 갖추어서 사부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거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 경을 외우면 모두 나의 몸을 보게 하리라.
제가 알기로는 일본 불교는 거의 8~ 90%가 법화경 불교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에 선종도 있고 진언종 밀교계통의 종파도 아주 세력이 세지요. 밀교계통의 종파가 굉장하지마는 그래도 다 바탕에는 법화경 사상을 깔고 있습니다.
선종도 마찬가집니다. 선종 조동종이다. 임제종이다. 하는 것이 있지마는 그들의 정신에도 역시 법화경의 정신이 이미 깔려 있고 그 위에 이것이 밀교다. 임제종이다. 조동종이다. 그런 사상들을 건립한 것으로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치 법화경의 비중이 크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외딴 곳에 있으면 내가 천신과 용왕과 야차와 귀신들을 보내어 법을 듣는 대중이 되게 하리라. 어떤 사람이 설법(說法)을 좋아하여 잘 분별하고 걸림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들이 보호하고 생각하시어 능히 대중들을 환희케 하리라.
저도 지금 밖에 나가서 그렇게 법회를 할 처지가 못 되어서 이렇게 있는 중에 참 여러분들의 좋은 인연 덕택에 또, 그리고 인터넷이라고 하는 아주 21세기의 가장 뛰어난 그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이렇게 훌륭한 법화경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저는 평소에 그렇습니다 신도들이 모르는 구절을 하나씩 들고 와서 물어요. 모르는 구절을 알려고 하지 말고 아는 구절만 이해해라. 저는 경전을 볼 때 부처님 말씀을 한 페이지에 한 구절만 안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디냐? 부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냐? 한 페이지에 한 구절만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어디냐? 아니 한 장에 짧은 한 구절만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냐? 더 나아가서 경전 한 권 중에서 말 한마디만 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냐? 그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일이냐? 저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도 모르는 구절은 그냥 넘어 갑니다. 저도 모르는 것이 참 많지요. “수연무작(隨緣無作)” 인연 따라서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 인연 되는 데로 그렇게 살지, 공부하는 것도 아둥바둥 애써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고 가능하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은, 저는 알고 있는 것이나 들어서 이해되는 것만 해도 너무 좋은데요 뭐. 부처님 말씀이 다 그런데 그렇게 혹 보면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글 새기기도 아주 힘들고 하는 대목이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것은 신경 안 쓰고 그냥 넘겨 버립니다.
깊은 뜻을 크게 이해 하려고 그렇게 머리 썩이지 않아요. 그리고 넘겨버리고 나면은 언제나 다시 돌아와서 읽어 보면은 그냥 쉽게 또 통합니다. 쉽게 이해가 되는 그런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부처님의 경전을 대할 때 이런 인터넷이라고 하는 좋은 기술을 통해서 이런 법화경을 제대로는 설명 못하고 이해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복이지요. 뭐라고 그 다른 어떤 삶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비교해서도 안되고 비교할 수 없는 그런 큰 행운이고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읽으시고 모두들 법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법사를 친근(親近) 하는 사람은 보살의 도를 빨리 얻을 것이며, 이런 법사를 따라 배우면 항하 강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친견(親見 )하리라.
항하 강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는 길이 뭐가 있습니까? 인불사상이지요.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야말로 널리고 널린 것이 부처님 아닙니까? 이리가도 부처님 저리가도 부처님, 그저 나가면 부처님께 부딪히고 집에 들어와도 부처님께 부딪히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지 않습니까? 해답이 다 되어 있지요.
항하 강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친견(親見 )하리라.
인불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눈뜨면 그냥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를 할 때 이치가 딱 맞아 떨어지지요.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고는 법화경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를 않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의 깨달은 바로서 그렇게 이해 합니다. 여기까지 법화경 상권(上卷)이 종(終)이고 내일부터는 법화경 하권(下卷)을 가지고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까지 입니다.
첫댓글 존경합니다. 늘 수고하시는 마음에 합장합니다._()()()_
수고하십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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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진여혜님 수고 하셨습니다.._()_
'조화로 만든 청중을 보내서 법사를 외롭지 않게 만들고, 또 누가 헤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조화로 만든 사람을 보내서 법사를 호위할 것이다.'... 스님! 감사드립니다..._()()()_
'이 깊은 경전을 들으면 법문을 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_()()()_
만약 이 법사를 친근(親近) 하는 사람은 보살의 도를 빨리 얻을 것이며, 이런 법사를 따라 배우면 항하 강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친견(親見 )하리라. _()()()_
이 경은 경중의 왕이다. 자세히 듣고 자세하게 생각한다면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워 졌느니라..._()_
이경은 경중의 왕이다 자세히 듣고 자세하게 생각한다면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워 졌느니라. _()()()_
인불 사상(人佛思想)! 사람이 부처님이다. 감사합니다. _()()()_
‘칼로 베고 몽둥이로 치고 기와 조각이나 돌을 던질지라도 부처님을 생각하여 응당히 참아야 하느니라.’...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_()()()_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설하려면 응당히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이 없이 널리 분별하여 설하라. 큰 자비심은 방이 되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 하는 것은 옷이 되고 모든 법이 공한 것은 자리가 되니, 여기에 앉아서 법을 설하라.... _()()()_
큰 자비심은 방이 되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 하는 것은 옷이 되고 모든 법이 공한 것은 자리가 되니...감사합니다..._()()()_
어떤 사람이 설법을 좋아하여 잘 분별하고 걸림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들이 보호하고 생각하시어 능히 대중들을 환희케 하리라..._()()()_
만약 이 법사를 親近하는 사람은 보살의 도를 빨리 얻을 것이며, 이런 법사를 따라 배우면 항하 강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親見 하리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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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을 들은 이는 법문을 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 이 경은 경중의 왕이다. 자세히 듣고. 자세하게 생각 한다면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워졌느니라...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이 경을 설하려면 응당히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이 널리 분별하여 설하라. 큰 자비심은 방이 되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하는 것은 옷이 되고, 모든 법이 공한 것은 자리가 되니,"
황하강의 모래 처럼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리라. 사람이 부처님
고맙습니다.
법화경을 듣지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지혜가 매우 멀지만 만약 이 깊은 경전을 들으면 법문듣는 일은 완전히 마치리라
법화경은 경중의 왕이니라
감사합니다...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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