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밀림 속에 묻혀 버린 문명
미선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먼저 베트남의 다낭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하노이와 호치민은 백발의 베트남 참전 미군과 동남아 패키지 관광에 나선 한국과 일본의 아줌마 아저씨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국제 공항이 되었지만, 중부의 도시는 여전히 발길 닿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중부는 훼와 호이안, 미선처럼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있는 관광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가장 싼 티켓을 알아보니 타이항공으로 방콕을 거쳐 다낭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대기 시간까지 합해 10시간 만에 다낭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온몸을 감싸는 더운 열기와 찐득한 습기가 열대의 추억을 자극했다. 그날 밤 벽을 타고 다니는 도마뱀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음날 미선으로 가려고 호텔 앞에서 오토바이 운전수와 협상을 벌였다. 이곳에서 가장 흔한 교통 수단이 오토바이라 택시를 대절하기 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미선까지는 200Km나 떨어져 있다. 과연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매달려서 세 시간을 갈 수 있을까?
미선으로 가는 도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버스와 택시가 경주를 벌이고, 그 사이로 오토바이가 달린다. 게다가 길 양켠에는 우마차와 수레까지 등장한다. 양보는 없다. 빨리 가려면 눈치껏 운전하는 것이 이곳 법도이다. 몇 차례 길가에서 교통 사고가 난 현장을 본 다음부터는 운전사 톰의 허리를 꽉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두 시간 반 만에 미선에 도착했다. 톰은 “지름길로 와서 빨리 도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허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꼭 깁스를 한 것 같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30분 동안 미선으로 들어가는 길목 매표소 앞에 누워 있어야 했다.
톰은 “이곳은 생각보다 넓다. 돌아가는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부터 취재를 해야 한다”고 재촉해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샀다. 생각 밖으로 비쌌다. 역시 어느 곳이나 세계 문화유산은 입장료로 말한다. 천천히 걸었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졌지만 숲이 울창해 그늘로만 걸을 수 있었다. 멀리 붉은 벽돌로 지은 사원들이 나타났다. 앙코르와트처럼 웅장하지 않지만, 분명 정교하고 화려하면서 인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고대 베트남의 주인, 참파
오래 전, 지금의 다낭 부근은 베트남의 영토가 아니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다낭 지역은 ‘참파’라 하는 참족의 땅이었다. 북쪽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홍강 델타 부근의 월나라까지만 베트남에 속했다. 2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이들 참족의 전성기로 다낭 부근의 차큐에 왕도가 있었고, 미선에는 성지가, 호이안에는 대외 무역항이 있었다. 참족은 일찍이 무역 항로로 들어온 인도인들에게서 힌두교를 받아들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강력한 동아시아 국가였던 중국과 서남아시아 제국인 인도, 이 두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던 참파는 동남아시아의 문명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찍었다.
참족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의 주인이기도 했다. 폴리네시아인의 피가 섞인 이들은 오래 전부터 해양을 무대로 살아가면서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했다. 이들은 종교 생활에 꼭 필요했던 전단(백단향)과 침향 같은 향목과 음식 재료인 향신료들을 사고 팔았다. 그 뒤에 이슬람 상인들이 들어와 중국의 비단을 사 갔다. 또한 14세기까지 해양 실크로드의 주교역품이었던 중국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 배에 실렸다. 이런 증거로 호이안의 항구 바다 밑에는 수많은 도자기 파편들이 묻혀 있다.
하지만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때 원정군에게 참파는 큰 타격을 받는다. 참족들은 북쪽 대신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현재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크메르 제국과 소모적인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참족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홍강 델타에서 살던 경족들이었다. 현재 베트남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족은 15세기 참족들을 메콩 델타 부근까지 밀어붙였고 곧이어 참파는 13세기에 걸친 그들의 역사를 더 이상 이어 가지 못했다. 독자적이면서도 문명의 교류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참족은 이제 깊은 산 속이나 델타의 수렁 근처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참족의 예술품들
군데군데 벽이 허물어져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미선의 유적지를 걸었다. 최근 베트남 정부가 하고 있는 참파 관련 유적 관리는 일본인들의 돈에 의지하고 있다 한다. 여기서 참족들이 해양 교역을 할 때 중요한 파트너가 왜구들이었다는 사실에 주 목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3∼16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연안에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 집단”이라고 정리하지만 일본인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왜구들이 노략질은 하는 것은 충분한 상품을 손에 넣지 못했을 때 하던 해적질이었다. 평소 왜구는 상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쇄국을 하는 동안 참파를 비롯해 태국의 아유타야, 멀리 말라카까지 무역을 했다. 이들은 일본 안에 많은 외래 문화를 전했지만, 1639년 쇄국과 더불어 베트남의 참파도 잊혀졌다. 이런 일본이 최근 베트남 정부에 많은 돈을 쓰며 학자들을 보내면서까지 참파의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인들이 끼지 않는 곳이 없다지만 역사와 고고학 분야까지 활약하는 것을 보면 조금 두렵기까지 하다.
미선의 중앙에 있는 한 사원 안에는 참파의 예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베트남을 침략했던 프랑스인들이 발굴하고 정리한 것들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학술 조사를 크게 벌였던 프랑스인들은 무엇보다 인도의 원시 힌두교가 이곳에서 꽃피게 된 경과를 자세히 연구했다. 시바 신앙과 남성의 성기 모양인 ‘링가’를 추앙하는 것은 참족 문화의 핵심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링가는 정말 엄청나면서도 사실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었다. 또한 사원의 벽을 장식하던 인물상들, 더구나 여성은 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듯했다. 그 시대에 이곳에서 살던 참족 사람들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미선은 2세기부터 8세기까지 건축되고 수리되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들은 열대의 소나기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족들이 중국과 경족들에게 쫓겨 남부로 내려 이동했어도 미선은 여전히 성지였고 제단과 성소는 관리되었다.
하지만 참파가 멸망한 15세기 이후로 미선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20세기, 이곳은 그야말로 전설의 도시일 뿐이다. 미선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빽빽한 밀림 속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잊혀진 전설의 도시’가 주는 슬픔이 몸을 휘감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참족들이 힌두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한 데도 있다.
참족 일부는 해양 실크로드로 들어온 아랍 사람들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다. 또한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중부에 남아 있던 참족들이 대부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비극적인 종말
서양 세력이 베트남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곳은 다낭이었다. 16세기부터 서양 상인들은 선교사를 대동했고, 교황은 곧 베트남에 대한 선교권을 프랑스 파리 선교회에게만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불순한 정보 활동은 베트남 정부를 자극했고, 기독교를 금지하는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에 베트남의 프랑스인 주교는 프랑스 정부에 무력 침공을 요청하고 드디어 1858년 다낭에 프랑스군이 발을 디디게 된다. 이것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식민화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 시기 다낭 부근 산 속에서 살았던 참족이 집단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된다. 2천 년 동안 힌두교를 믿어 왔던 참족은 이 ‘기적’으로 하루 아침에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다. 그리고는 식민지배자들이었던 프랑스인들에게 요청해 교회를 세운다. 말하자면 베트남인들을 배제하고 외세와 결탁한 것이다. 그 ‘기적’의 진위를 떠나 참족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땅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 한 것인지도 모르다.
1954년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군과 벌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함으로써 그 자리를 미국에 물려주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불안을 느낀 참족은 다시 한 번 미국과 손을 잡는다. 베트남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다낭 부근은 미군과 한국군의 최대 주둔지였다. 참족은 몽족과 함께 게릴라 부대로 활동하지만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1975년 전쟁은 막을 내린다. 그 결과 중부의 참족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인들에게 적이 되어 버렸고 오갈 데 없는 사정이 되어 일부는 미군에 이끌려 미국으로 이주하고, 대다수는 근처의 라이스, 캄보디아, 태국으로 탈출했다. 결국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고 만 것이다.
미선을 빠져 나오면서 유난히 붉은 벽돌들로 만든 사원에 다시 눈이 갔다. 거대한 돌들로 건물을 짓기보다는 대지의 숨결이 남아 있는 흙벽돌을 쓴 것은 윤회의 과정을 믿었던 참족의 의도였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 벽돌도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족은 언제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베트남 남부의 메콩 델타 둘레에서 살아가는 10만의 참족과 해외에 흩어져 있는 28만의 참족은 밤마다 성산 마하팔바타 아래 미선을 꿈꿀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원할 것이다. 그들의 영광과 조상의 넋이 살아 있는 미선으로 돌아갈 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