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1545-1598) 이순신 장군은 3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관출함으로써 국가에 충성하게 되었다. 그는 47세 때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듬해인 1592년에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는 최초의 해전인 육포해전을 시작으로 최후를 맞는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 정적과 간신들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시련을 감당하고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우리 나라를 왜적으로부터 지켜냄으로써 한민족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사대주의와 분파주의 사상에 찌든 16세기의 전제 조국사회에서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 생각하여 어떤 모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국을 지켜 낸 자랑스런 대장부였다.
이순신 리더십
1. 원활한 소통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처음 한 일은 수병들의 숙소를 방문하여 수병들의 의견을 구하고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나이가 만호, 현감, 첨사들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의사소통을 중요시하여 좋은 의견들을 수렴하고 갈등 요소등을 정리해가는 감성경영을 실천하였다.
2. 원칙 준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 성 박이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객사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지시하였으니 그는 다음과 같이 거절하였다. " 이 오동나무가 비록 한 그루의 나무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해 동안 길러온 국가의 물건이기 때문에 곤란하옵니다." 또 한 번은 자기의 상관이 병부정랑(정5품) 서 익이 자기의 친지 사람을 순서를 바꾸어 참군으로 승진시키기 위해 인사관계 서류를 잘꾸며 달라는 인사 청탁을 해왔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뒷 날 서 익은 군기경 차관이 되어 임금에게 허위보고를 했고 그로 인하여 이순신은 파직된 일이 있었다.
3. 도덕성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한성 전 지역에 알려지게 되자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장관) 김귀영은 자기의 딸을 이순신에게 소실(첩)로 시집보내려고 중매인을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세태로는 당연한 사회현상으로 이 청을 받아들이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 자리에서 중매인을 돌려 보내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과 권력을 따르는 불의에는 일체 쳐다보지도 않았다.
4. 변화에 대한 대응
왜군의 침략을 예견한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을 정예화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순신을 당시 바다에서 승부를 거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물길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였다. 물길을 잘 아는 어부들을 불러서 상세한 정보를 알아내고 그들을 배에 태워 활용한 것도 중요한 승리의 요인이었다.
5.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효도
이순신을 충.효 정신이 가장 투철한 위인으로 알려졌다. 난중일기 곳곳에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에 대한 효성이 전쟁 중에도 나타났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전쟁 중에도 부모님을 걱정하는 글과 일기를 난중일기를 통해 전하고 있다. 4월11일(맑음): 새벽꿈이 산란하다 병드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그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가에서 자랐다. * 머리가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그는 첫 시험에 낙방하고 서른 두 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 좋은 지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그는 14년 동안 변방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 위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는 옳지 않은 상사의 지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그는 여러 한직을 맴돌다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그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교양인을 위한 리더십에서 발췌(김대규, 권경택, 김승묵 공저) | |